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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기다리는 게 재미있다는 건 (20/123)


#20. 기다리는 게 재미있다는 건
2022.09.06.


지금이야 결혼 생각 없다고 난리지만, 아범이 여기저기서 탐낼 만큼 멀끔한 아들을 혼자 살게 둘 리가 없다.

아범은 따지고 재서 여러모로 강선에 이득 되는 여자를 택할 것이고, 상대가 누구든 상관하지 않을 태서는 결국 그 여자와 결혼하게 될 것이다.


“내가 널 알아 그래. 이 녀석아.”

홍진은 태서가 아범처럼 정략결혼을 하고 가정에 안주하지 못한 채 이 여자 저 여자와 인연 맺는 것은 원치 않았다.

하지만 저렇게나 여자에게 관심 없고 정 없는 녀석이라면. 그런 거라면 차라리 남편의 유언대로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현양 건설이 많이 기울었다지만, 홍진이 보는 태서는 누군가의 힘을 빌려야 할 만큼 못난 녀석이 아니었다. 현양 건설 조 대표가 제 딸을 그렇게나 곱게 키웠다고 하니, 그 아이가 태서만 잘 품어 준다면 바랄 게 없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있거든 당장이라도 데리고 오너라. 두말 안 하고 허락해 줄 테니. 내가 팔 걷고 나서서 현양이랑 약혼, 뒤엎어 주마.”

“…….”

사랑이라니. 그와 정말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단어에 태서는 잠깐 윤재인을 떠올렸다.

관심이 가고 눈길이 간다. 그리고 마음도 간다. 그 정도일 뿐이다. 그런 대상이 살면서 윤재인 하나여서 그렇지, 아직 사랑이라는 단어를 가져다 대는 것은 우스웠다.

윤재인만 생각하면 심장이 쿵쾅거리는 게 이상하기는 하지만, 그게 사람들이 죽고 못 산다고 떠드는 사랑은 아닐 것이다. 그저 호감, 그 정도일 뿐.

더군다나 그가 아는 남녀 간의 사랑은 하나뿐이었다. 친부를 향하는 친모의 사랑이 어떻게 끝났는지를 생각하면 사랑이라는 단어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 할미가 죽는 순간까지도 네 걱정만 하는 걸 보고 싶은 게야?”

“할머니.”

“다른 건 바라지 않으마. 내가 무슨 염치로 너에게 뭘 바라겠어. 그저, 할미가 되어 너 마음 붙이고 살 곳은 만들어 줘야지.”

태서는 입을 다물고 물러섰다. 아무래도 현양 건설과의 파혼은 조금 더 미뤄야 할 듯했다. 일단 할머니가 먼저였다.

본가에서 나와 차에 타자마자 장 실장에게 걸려 온 전화에 태서가 핸드폰을 들었다. 급히 오느라 잠시 자리를 비운 장 실장 없이 홀로 나온 길이었다.


“네.”

―본부장님, 말씀하신 것 모두 십 분 내로 도착할 거라고 합니다.

이미 임홍진 여사의 곁에는 몸에 좋다는 것들이 쌓이고 쌓였을 테다. 본가로 향하던 태서가 한 비서를 통해 급히 준비한 것은 지난번 재인과 함께 갔던 냉면집의 냉면과 만두였다.

입맛이 없다고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신다고 하니, 평소에 유일하게 좋아하시던 외식 메뉴라도 챙겨 드리고픈 마음에서였다.


“알겠습니다. 지금 회사로 다시 들어가겠습니다. 치과 치료는 잘 받고 왔습니까?”

―네, 본부장님. 아, 그런데…….

잠시 머뭇거리던 장 실장이 꺼낸 얘기는 뜻밖의 내용이었다.


―윤재인 씨가 일하고 있는 요가원 아래층에 있는 그, 치과 원장 말입니다.

치과 진료로 자리를 비운다더니 거기에 다녀온 모양이다. 태서는 장 실장이 윤재인을 염려하며 치과 원장을 떼어 내야 할 것 같다고 말하는 걸 듣고만 있었다.


 

* * *



“……듣고 계십니까, 본부장님?”

장 실장은 태서가 석동의 존재를 알고도 태연한 이유가 그 심각성을 몰라서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늘 직접 본 상황을 전달하면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런 게 아니었나. 그만큼의 관심은 아니었나. 장 실장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수화기 너머로 태서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경 안 씁니다. 윤재인은 그 정도도 혼자 해결 못 할 바보가 아닙니다. 나는 똑똑한 윤재인이 겁도 없이 나에게 다가오기를 얌전히 기다리는 중이고요. 그러니 장 실장도 지시한 사항만 살피고 보고하도록 하세요.

“……기다리신다고요?”

―네. 기다리는 거, 꽤 재미있네요. 매일 아침 기대하며 눈뜨는 요즘입니다.

기다리는 게 재미있다는 건, 올 거라는 확신이 있을 때다.

장 실장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바라보던 재인을 떠올렸다. 지금 가장 걱정해야 할 사람은 어쩌면 윤재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연한 것이 아니었다. 강태서는 목표 대상이 가까이 다가서면 바로 덮쳐들 준비를 하며 인내심을 발휘하는 중인 모양이다. 장 실장은 태서가 사냥감을 노리고 웅크린 맹수 같다고 생각했다.


―곧 도착합니다. 잠시 후 뵙죠.

기대와 흥분으로 위험하게 빛나고 있을 태서의 눈빛을 떠올린 장 실장이 갑자기 한기를 느끼고는 부르르 떨었다.

* * *



“그 애 미국에 있는 거 맞죠?”

“……갑자기 그 얘기는 왜.”

조대훈이 입맛 떨어진다는 듯 찻잔을 내려놓았다. 남편의 언짢은 기색을 확인한 승희가 피식 웃으며 차를 입에 머금었다.

처음엔 제 핏줄이라고 감싸기라도 할 줄 알았다. 그랬으면 정말 뒤집어엎을 생각이었는데, 남편은 그 아이에게 저보다도 더 냉정했다.

그 아이, 윤세나의 딸. 승희는 윤재인이 싫었다.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서 낳은 딸이라는 것도 싫었지만,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무용 실력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은 것이 무엇보다도 싫었다.


“태서 군 얘기로 할 말이 있다더니, 쓸데없이.”

혀를 차며 몸을 일으키는 남편을 보던 승희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앉아요. 유리 들어오기 전에 말 끝내야 하니.”

승희는 한국 무용을 전공했다. 제 일에 애정을 갖고 활동하던 그녀가 무용을 그만둔 것은 연애를 시작하자마자 갑작스럽게 임신하면서였다.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몸이 망가졌다. 더는 무용을 할 수 없음을 깨달은 승희는 교수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그 꿈마저 남편의 반대로 접어야 했다.

그래서 딸이 그녀 대신 무용가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딸 유리는 무용에 재능이 없었다. 공부에도 별 관심이 없는 딸을 억지로 가야금으로 이끈 것은 그녀였다.

승희는 한국 무용 콩쿠르를 휩쓸며 상이란 상은 다 받던 재인이 자신의 자리를, 그리고 제 딸의 자리를 빼앗은 것 같았다. 존경하던 교수가 재인을 극찬할 때, 그녀는 재인의 발목을 꺾고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싶었다.


“말해.”

“윤세나, 어쩌고 살아요?”

“……알 것 없어.”

“당신이 알아서 한다고 해서 믿고는 있는데, 그래도 가끔 내가 확인은 해 봐야…….”

“죽었어.”

찻잔을 들던 승희의 손이 멈칫했다.


“얼마 전에 죽었어. 그러니 신경 쓸 것 없어.”

“……확인해 봤어요?”

대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엄마와 단둘이 조용히 살겠다던 재인이 처음으로 전화해 온 것이 지난가을이었다.


“……오늘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대훈은 잠시 눈을 감았다. 윤세나는 아름다운 여자였다. 손에 얻기까지 쉽지 않았고, 그래서 더 야멸차게 버렸다. 콧대 높은 여자에게 그렇게라도 저를 각인시키고 싶었다.

임신했음을 알려 왔을 때, 아이를 지우라고 한 것은 당연했다. 그런 그녀가 대훈의 친부인 조성환 회장을 만나고,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가서 숨을 줄은 몰랐다.

거기서 아이를 낳아 홀로 키운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찾아갔었다. 하지만 그때 윤세나는 전과 다름없이 도도했다.


“당신에게 손 벌릴 일 없어요. 찾아갈 일도 없고. 내 아이예요. 이 아이는 평생 당신이라는 사람을 모르게 키울 거니까 걱정할 것 없어요. 당신 가정이나 잘 지켜요. 보는 일 없었으면 해요.”

 
그때 매달렸다면, 조금은 응해 줄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아이까지 낳아 키우는 여자는 대훈을 남 보듯이 보았다.

그래서 그 후로 찾지 않았다. 시간이 한참 흘러, 열다섯 살의 재인이 자신에게 전화해 왔을 때는 그도 무척이나 놀랐다.


“엄마는 제가 친부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것을 몰라요. 저는 앞으로도 모르는 척 살아갈 겁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예요. 엄마가 치료받을 수 있게 해 주세요.”

 
엄마를 닮아 도도한 목소리를 내는 어린 여자아이를 한국으로 데려온 것은 충동적이었다. 후원자라는 명목으로 곁에 두고 감시할 생각도 있었지만, 윤세나를 쏙 빼닮은 아이를 직접 보고 싶었다.


 
아이는 예뻤고 똑똑했다. 하지만 아이에게서 친부인 저의 모습을 찾기는 어려웠다.

크고 화려한 이목구비부터 풍기는 분위기와 말투까지. 아이가 윤세나만을 닮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윤세나가 작정하고 자신의 흔적을 지워 버리려 한 것만 같았다.

아이는 엄마의 치료비를 대신 내준다는 조건으로 한국에 와서 고아가 되었다.

아이는 같은 집에 사는 7년 동안, 단 한 번도 먼저 눈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 따로 찾아온 적은커녕, 웃어 보인 적도 없었다. 그것도 못마땅했다.

재인은 큰 사고 이후, 재활 치료를 하던 중 미국으로 돌아갔다. 엄마의 치료도 끝났고, 완치 판정받았으니 다시 엄마가 있는 곳으로 가겠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 후로 만나지 않았다. 먼저 연락해 오는 일은 없었기에 신경 쓰지도 않았다. 간혹 매체에서 갑자기 사라진 배우 윤세나를 궁금해할 기미가 보일 때만 비서를 시켜 언론의 호기심을 잠재웠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하라는 거냐.”


―……어떻게 하라는 게 아니라.


“생활비가 필요한 거라면.”


―……돈 때문에 연락드린 거 아닙니다.


“원한다면 다시 집에 들어와도 된다.”


―아뇨. 저는 다만, 엄마가 돌아가신 건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근데 제가 잘못 생각했나 봅니다. 다시 연락드릴 일 없을 거예요.

 
그렇게 끊어진 전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대훈은 시카고로 비서를 보냈다. 하지만 비서는 그리 좋지 않은 얼굴로 돌아왔다. 홀로.


“그러면, 그 아이는 어떻게 지내고 있대요?”

“알아서 살겠지.”

“알아봐요. 태서 군이 유리에게 그 애 얘기를 한 모양이에요.”

“태서 군이 그 애를 어떻게 알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강선 그룹의 선대 회장과 손주 손녀의 결혼을 약속한 줄은 몰랐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승희와의 교제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얼마 전, 배가 불러 미국으로 도망가기 전의 윤세나를 만났으니 그때 아이들의 결혼을 약속하면서 얘기했던 것은 유리가 아니라 윤재인일 것이다.

그 사실은 대훈과 그의 아내 승희만이 알고 있었다. 약혼 당사자인 유리는 모르는 일이었다.

현양 건설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래서 대훈에게는 강선 그룹이 꼭 필요했다. 화미 아파트 재건축 입찰을 따내기 위해 무리하는 것은 현양 건설의 마지막 도전이었다. 그야말로 사활을 건 것이다.

그러니 유리와 태서의 결혼은 원만하게 진행되어야 했다. 그 어떤 문제도 있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강선 측에 꼬투리 잡힐 일은 없어야 했다.


“어디서 한물간 소문이라도 들은 모양이죠. 주제에 맞게 살고 있는지 확인해야겠어요.”

“제 엄마 쏙 닮은 애야. 경거망동할 애 아니니까 신경 쓸 것 없어.”

윤재인은 제 엄마처럼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라고는 없는 애였다. 그러니 그 아이가 문제를 일으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불안해하는 아내를 이해 못 할 건 아니지만, 대훈은 굳이 그 아이에게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


“유리, 내년에는 결혼시켜야죠. 괜한 잡음 나는 거 싫으니 그 여자가 싸지른 애, 조용히 엎드려 살고 있는지 살피란 말이에요! 당신이 안 하면 내가 해요.”

“나서지 말랬지. 유리나 잘 봐. 놀러 다니게 두지 말고 뭐라도 배우게 하고. 강선 아트 센터라도 자주 가서 눈도장이라도 찍게 해.”

“여보.”

“말 들어. 나가 봐. 당신, 허튼짓하지 마. 어설프게 나섰다가 강선에서 눈치채면 큰일이야.”

“……알겠어요.”

승희가 입술을 짓씹으며 서재를 나섰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대훈이 핸드폰을 들었다.


“미국에 그 아이 어쩌고 있는지, 한번 알아봐.”

비서에게 지시를 내린 대훈이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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