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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내 심장이 뛰어 (19/123)


#19. 내 심장이 뛰어
2022.09.02.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매트리스에서 튕겨 나간 S사의 가방이 바닥에 뒹굴었다. 화장대 의자에 앉아 애꿎은 가방을 노려보는 유리의 눈이 매서웠다.

며칠째 강태서와 연락이 안 된다.

도무지 전화를 받지 않아 조금 전에는 그의 회사로 전화했지만, 연결해 드릴 수 없다는 안내만 받았다. 자기가 누구인지 알고 이러느냐고 따졌지만, 돌아오는 것은 한결같은 비서의 답변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정말…….”

비서는 태서가 회의에 참석 중이라거나, 외부 일정 중이어서 통화가 어렵다는 핑계도 대지 않았다.

개인적인 전화는 연결하지 말라는 지시에 따를 뿐이라며, 메모를 남겨 드리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죄송하다는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 비서, 일 제대로 하는 거 맞아?”

자기가 전화했었다는 메모가 전달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주제 모르는 비서가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이다. 전달이 잘되었다면 강태서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을 리 없다.

아니, 그 전에 먼저 연락해 줄 수도 있는 일일 텐데 한 번도 연락이 없다. 이렇게나 무심한 남자만 평생 바라보고 살아야 하나. 속상하고 자존심 상하는 상황에 유리는 화를 풀 대상을 찾아냈다.


“윤재인. 걔를 해결해야 해.”

태서를 만난 이후로 스멀스멀 번지는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다. 한참 동안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 대던 유리가 사납게 계단을 내려갔다.


“엄마, 아무래도 안 되겠어.”

“뭐가, 또.”

거실에서 수반에 꽃을 꽂던 승희가 눈살을 찌푸렸다.


“윤재인 말이야. 거슬려.”

“걔가 왜. 왜 자꾸 걔 얘기를 해.”

“싫어, 싫단 말이야! 걔 이제 우리 앞에 나타날 일 없는 거 맞아? 걔 어쩌고 사는지 알아야겠어. 엄마가 아빠한테 말해 봐. 응?”

“아빠 중국 출장 중인 거 뻔히 알면서 그래. 나중에 태서 군도 출장 잦을 텐데, 일하는 사람 그렇게 닦달하는 거 아니야.”

“이번만. 응?”

귀한 딸의 짜증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승희가 혀를 찼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핸드폰을 들었다.


“당신, 모레 한국 들어오는 거죠? 귀국하고 회사에 바쁜 일 없으면 바로 집으로 와요. 태서 군 일로 할 말 있으니까.”

싹둑, 승희의 가위질에 탐스러운 장미 꽃봉오리가 잘려 나갔다.


 

* * *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까!”

광순이 소리치며 L사의 가방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런 뒤에 재빠르게 안내 데스크를 탕, 하고 내리치며 내놓은 것은 구깃구깃한 봉투였다.


“……읽어 보구.”

광순이 툭 튀어나온 턱으로 봉투를 가리키며 눈을 찡그렸다. 사과하러 왔다면서 또다시 진상 부리는 광순을 재인 곁에 서 있던 상화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훑었다.

재인은 봉투를 집어 들었다. 봉투 안의 종이를 꺼내어 펼쳐 읽어 내려가는 재인의 표정은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독한 X 같으니.”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광순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은 욕설에 상화가 덤벼들려 하자 재인이 손을 들었다. 그 상태로 종이에 적힌 내용을 모두 읽은 재인이 종이를 안내 데스크에 내려놓았다.


“사과하러 오셨으면 사과하셔야죠.”

광순은 저를 또렷이 응시하는 재인의 커다란 눈과 요요하게 올라붙은 눈꼬리마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주 앙큼한 것이 남자 홀리려고 태어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거기, 다 썼잖아.”

“여사님의 아들 오석동 원장과 만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저번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고 쓰인, 이 각서 안에요?”

“그거면 됐지.”

광순이 얇은 입술을 삐죽이며 눈에 차지 않는 요가원 안을 둘러보았다.

없는 것들이 돈 긁어모아 깔끔하게 꾸며 놨으니 계약 기간만 채워서 빨리 내보내고 싶었다. 애초에 이런 것들에게 세를 주는 게 아니었다.


“사과의 말은 전혀 없을뿐더러, 이 각서도 제가 원한 각서는 아니에요. 저는 가해자가 조건을 다는 재발 방지 각서는 들어 본 적 없습니다.”

“아니, 아가씨! 내가 이렇게까지 했으면 됐지, 뭘 더 하라는 거야? 경우가 없어도 너무 없네?”

“지금 경우 없는 건 여사님이죠. 저는 정말 많이 봐드렸어요. 그런데도 이러실 거면 경찰서로 가서 얘기하세요.”

“……뭐?”

“사과고 각서고, 경찰관 앞에서 받아야겠어요. 어차피 마무리 지으려면 경찰서에 다시 가야 하니까요. 싫으시면 변호사 선임할게요.”

광순이 입술을 짓씹으며 재인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변호사 선임할까요? 저희 회원님 중에 유명한 로펌 소속 변호사가…….”

“……해.”

“변호사 선임하라구요?”

“……안해.”

“무슨 말인지 잘 안 들리거든요. 똑바로 말씀해 주세요.”

“미안해! 우리 아들 말만 듣고 아가씨 일하는 곳 찾아가서 그랬던 거!”

“그랬던 거가 아니라 저에게 욕하고 폭력을 행사하신 것이요. 그리고 근거 없는 비난으로 제 명예를 훼손하신 것이요.”

“……그래, 그거. 그거 미안하다구.”

억울함에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광순이 작게 속삭였다. 재인이 한숨 쉬며 이마를 짚는데 요가원 문이 열렸다.


“그쯤 하시죠.”

진료 중에 쫓아왔는지, 의사 가운을 입은 석동이 제 모친의 어깨를 감쌌다.


“아들, 뭐 하러 올라왔어!”

“엄마 걱정되니까 올라왔지. 엄마는 할 만큼 하셨으니까, 이젠 내가 얘기할게. 엄마, 걱정하지 말고 집에 가 있어.”

아들의 품에 안겨 한바탕 눈물을 쏟아 낼 것처럼 굴던 광순이 재인을 흘겨본 뒤 요가원을 나섰다. 재인이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 꼴도 보기 싫은 석동과 마주 섰다.


“말씀하세요.”

“각서 부분은 제가 다시 작성해서 드리겠습니다. 다시는 저번과 같은 일 없을 겁니다. 너무나 커다란 손해를 끼쳐 미안합니다.”

의외였다. 조금 기계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반듯하게 허리를 굽힌 석동의 사과에 재인은 내심 놀랐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각서 받고 마무리 지을게요.”

그래서 정말 각서만 받고 끝내려 마음을 먹었을 때였다.


“대신에, 나도 윤재인 씨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겠습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대신에, 라는 말과 기회를 한 번 더 준다는 헛소리에 재인의 고운 미간에 실금이 갔다.


“잘못 끼운 첫 단추는 다시 끼우면 됩니다. 인사하죠. 오석동입니다.”

“지금 뭐 하시는…….”

“한눈에 반했습니다. 내가 당신, 좋아하나 봐.”

“아, 진짜!”

말문이 막힌 재인 대신 뒤에 있던 상화가 쌍시옷이 섞인 욕설을 뱉으며 나섰다. 하지만 석동은 끄떡도 하지 않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 우수에 찬 표정이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낙엽을 떠올리게 했다.

바스락, 바스락, 한껏 밟아 주고 싶게.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기억하는데도. 우리 엄마한테 어떻게 했는지 봤는데도. 당신과 마주하니 내 심장이 뛰어.”

지하실에서 자란 버섯같이 생겨서는 로맨스 소설 보는 취미라도 있는 것일까. 남자 주인공이나 읊을 대사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지껄이는 석동을 보는 재인의 얼굴이 태어나 처음 못생겨졌다.


“이거 진짜 미친 인간이잖아?”

당장이라도 눈앞의 희멀건 남자를 잡아 죄 구겨 놓을 표정인 상화를 재인이 막아섰다.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은 염원을 담아 크게 심호흡했다.


“……심장은 누구나 뛰어요. 안 뛰면 죽은 거예요. 오석동 씨,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저는 오석동 씨에게 관심 전혀 없어요. 심지어 그쪽이 나한테 관심 갖는 것도 싫어요.”

“지금이야 뭘 모르고 그럴 테죠. 하지만 곧 알게 될 겁니다.”

“뭘 알게 된다는 건지는 몰라도, 알 생각 없습니다. 저도 곱게 말씀드리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윤재인 씨, 시간이 흘러 당신은 내 곁에서 우리의 첫 만남을 회상하며 웃게 될 겁니다. 몇 년 후 우리는 아름다운 가정을, 아, 뭐야!”

헛소리를 늘어놓는 석동을 두고 돌아서서 멀어지던 재인이 갑작스러운 외침에 뒤돌았다. 짜증 부리며 눈을 치켜뜬 석동의 뒤에는 재인이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여자가 서 있었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반듯한 이미지의 여자는 비즈니스 정장 차림이었다. 그 여자가 석동의 어깨를 쿡쿡 찌른 것이다.


“치과 예약 시간 지났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죠? 정말 잠깐 시간 내서 온 거라구요.”

갑자기 부은 잇몸 때문에 치과를 찾아온 장 실장이었다.

피곤해서 그렇겠거니 했는데, 부어오른 잇몸이 가라앉지 않았다. 급하게 근처에 당일 예약되는 치과를 찾다가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진료 접수 중이던 장 실장은 치과 원장이 치과 안내 데스크의 직원에게 잠시 자리를 비우겠노라 말하고 계단을 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기다리다가 못 참고 의사를 찾으러 왔다.

그런데 이상한 소리나 해 대는 걸 보고 있자니 더는 기다릴 생각이 들지 않아서 끼어들고 말았다.


“……곧 내려가겠습니다. 재인 씨, 다시 얘기하시죠.”

“다시 얘기할 것 없어요. 또 올라오시면 저 선처 안 합니다. 그렇게 알고 올라오지 마세요. 전화도 하지 마시구요.”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옹졸한 입술을 달싹이던 석동이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몸을 돌렸다. 석동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려던 장 실장이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치를 떠는 재인을 돌아보았다.


‘어쩐지, 주소가 낯이 익더라.’

사진으로 봤을 때 진짜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사진에 실물의 아름다움을 반도 담아내지 못한 듯했다. 윤재인은 외모뿐만이 아니라 풍기는 분위기 또한 아주 매력적인 여자였다.

우연히 재인에게 질척거리는 치과 원장의 존재를 직접 확인하게 되었다.

장 실장은 치과로 들어서며 해야 할 업무 리스트에 하나를 추가했다. 신경질적으로 생긴 치과 원장을 주시해야 할 것만 같았다.


 

* * *



“되도록 봄으로 잡아. 현양 쪽에서는 조심스럽게 가을을 얘기하던데 가을까지 갈 것도 없다. 약혼 기간이 너무 길었어.”

“그 약혼 말입니다.”

“태서야.”

태서는 저를 부르는 할머님의 곁에서 몸을 숙였다. 조모의 비서에게 전화를 받은 것은 태서가 약혼 파기를 통보하기 위해 현양 건설의 조대훈 대표에게 전화를 걸려던 참이었다.

파혼을 통보했을 때, 친부인 강신재 회장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태서 역시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여태껏 친부는 태서에게 별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약혼이라고 다를까. 어쩌면 현양 건설 따위, 성에 차지 않아 하던 차에 반길 수도 있다. 어떻든 자신의 자리를 계속 이어 나가는 것에 도움이 된다면 반가워할 사람이었다.

태서는 연류동에 오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사실 연류동이 본가라고 하지만, 아주 어릴 때 이곳을 떠난 이후로 들른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태서가 연류동에 오는 이유는 단 하나, 할머니 임홍진 여사 때문이었다.


“의사에게 얘기 들었지.”

“네.”

그리고 오늘 갑작스럽게 본가에 온 것 역시 임홍진 여사 때문이었다. 82세의 나이에도 강선 아트 센터 관장으로 활동 중이던 그녀가 갑자기 쓰러진 탓이다.


“나 큰 충격 받으면 안 된단다. 할미 말 듣자.”

“…….”

“안다. 내키지 않는다는 거.”

“아시면서 왜 강요하세요.”

홍진의 생각에 태서는 누구에게도 정 주지 않을 녀석이었다. 어린 나이에 친모를 잃은 그는 냉정한 친부에게 떠밀려 이제껏 집도 가족도 없는 사람처럼 해외로만 돌았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에 들어오고 나서도 이곳에 영 정 붙이지 못하는 게 눈에 보였다.

타고나기를 냉정하게 타고났기도 했지만, 그래도 태서를 아끼는 홍진의 마음으로는 마음 붙일 가정을 빨리 만들어 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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