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 이렇게나 푹 빠져 버리다니 (18/123)


#18. 이렇게나 푹 빠져 버리다니
2022.08.30.



‘왜 그렇게나 나한테 호의적이었던 거지? 병원에서 잠깐 본 거야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먼저 인사를 건네? 그것도 굳이 카페 안으로 들어와서?’

의미 없이 동그라미만 수두룩하게 그려 대던 태서의 손이 이제는 수없이 많은 물음표를 그려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나 철벽에 익숙한 사람인데. 남자라면 끔찍하다던 여자인데 왜 나한테는 먼저 다가온 거지? 무슨 생각으로?’

이제 태서는 입술을 잘근거리며 물음표 위에 동그라미를 쳐 대고 있었다.


‘혹시 나한테 반했나. 하긴, 나도 어디 가서 빠지지는……. 아니지, 종소리는 나만 들었다잖아. 냉면 먹는 내내 나는 한 번도 안 쳐다보던데. 내가 냉면만도 못하다는 거잖아.’

태서의 짙은 눈썹이 조금 일그러졌다. 그래도 여전히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참나. 내 앞에서 면 치기를 그렇게나 잘하는 여자는 처음 봤네. 근데 왜 그 모습마저 예쁘지?’

거기까지 생각하던 태서의 손이 멈췄다. 잠시 굳은 표정으로 물음표를 노려보던 그가 이내 기가 찬다는 듯 미소를 흘렸다. 난감함과 어이없음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표정이었다.


“하, 정신 못 차리지.”

뻗어 나간 생각 끝에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었다. 회의장은 일순간 조용해졌다. 태서를 잠시 잊고 큰 소리를 내며 대립하던 황 부장과 김 부장이 눈치를 살피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본부장님.”

옆에 서 있던 장 실장이 슬쩍, 태서의 곁으로 한 발짝 더 다가와 그를 불렀다. 그제야 태서는 제가 결과 없이 진만 빼는 회의 중이었음을 깨달았다.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끝냅시다. 오늘 얘기해 주신 것들, 올려 주신 보고서를 통해 다 읽은 내용입니다. 이럴 거면 시간 아깝게 회의를 왜 합니까. 별도 지시 있을 때까지 화미 아파트 관련 회의는 없습니다. 추가 사항은 보고서로만 받겠습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태서가 회의실 문을 열었다. 화미 아파트 문제가 아니어도 할 일은 태산이었다. 이러고 있을 틈이 없었다.


“아.”

성큼성큼 커다란 보폭으로 복도를 가로지르던 태서가 멈추어 섰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주머니 안의 개인 핸드폰을 들어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고는 미간을 찡그렸다.


“제 개인 핸드폰이 하나 더 필요합니다. 이건 장 실장이 보관해 줘요. 전화 오면 알아서 대충 둘러대고 제가 꼭 확인해야 할 사항만 보고 부탁드립니다.”

보관하라는 말은 더는 쓰지 않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 핸드폰을 통해 연락해 오는 내용을 장 실장에게 일임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실까요?”

“자꾸 귀찮은 전화가 옵니다.”

태서가 또다시 울리기 시작한 핸드폰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어제부터 계속해서 그를 귀찮게 하는 상대는 조유리였다. 딱히 할 말도 없어서 무시했는데 끈질기게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오는 것이 짜증스러웠다.


“그러면 연류동 회장님께는…….”

“아뇨. 말 그대로 제 개인 핸드폰입니다. 연류동 쪽으로는 그 번호가 안 넘어가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또 지금처럼 쓸데없는 전화가 올 테니까요.”

본가인 연류동을 통해 유리가 전화번호를 알아낼 수도 있었다. 주제도 모르고 뻔뻔하기 그지없는 조유리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강선에 몸담은 사람 중에 그 번호를 알고 있는 건 장 실장뿐이기를 바랍니다. 그 번호를 알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 내가 직접 알려 줄 겁니다.”

“네.”

또다시 내려진 함구령에 장 실장이 그의 의중을 헤아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일 중으로 현양 건설, 아…….”

사무실로 돌아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 태서는 눈이 펄펄 날리는 도시 풍경을 담은 통창을 마주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입을 작게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또다시 기억이 그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 간 곳은 이틀 전, 크리스마스이브 밤이었다.

내리는 눈송이 사이로 자신을 바라보던 윤재인, 하늘을 올려다보던 윤재인, 그리고 고개 푹 숙인 채 웃음을 참던 윤재인.


 


“본부장님……?”

태서는 저를 부르는 장 실장에게 그 어떤 대답도 해 주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정도면 중증이었다. 카페에서 만나 함께 저녁을 먹었던 크리스마스이브를 기점으로 태서의 머릿속은 재인이 점령했다.

그날 태서는 주머니에서 좀처럼 손을 빼지 못했다. 탐스러워 보이는 그녀의 뺨을 만지거나 팔을 잡아 제 품으로 당겨 안을 것만 같은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서였다.

아니, 사실은 그 말간 입술이 궁금했다. 그 입술만 떠올려도 더위를 느꼈다. 윤재인 입술의 감촉과 온도가 궁금했다.

잇새에 물었을 때 어떤 느낌일지, 입술 새로 터져 나올 숨은 어떨지, 혀를 내밀어 핥아 본다면 어떻게 반응할지.

태서는 그 입술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싶었다. 그 안쪽을 남김없이 맛보고 제 것으로 하고 싶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꿈을 매일 꾸었다.


“본부장님, 혹시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네. 불편하네요.”

빠르게 두근거리는 심장이 낯설고 불편했다. 태서는 제가 윤재인에게 반한 것을 이렇게나 빠르게 인정하게 될 줄 몰랐다.

반했다는 것을 인식하자마자, 그리고 재인에게 반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급속도로 빠져들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일도 못 할 정도라니. 이렇게나 푹 빠져 버리다니. 게다가 누가 들으면 질색할 변태 같은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그것도 온종일.

그는 태어나 처음 강하게 느낀 충동에 시달리며 내내 당황하는 중이었다.

* * *



“이건 누가 봐도 할머님께서 잘못하셨어요. 남의 영업장에 가셔서 왜 그러셨어요. 들어 보니 그 아가씨는 아드님한테 관심이 전혀 없던데.”

“아니, 경찰 양반. 내가 몇 번을 말해. 그것들이 다 한통속이라니까? 그것들을 사기죄로 잡아 처넣어야지, 왜 피해자인 나를 붙잡고 있는 거야.”

“아이고, 할머님. 할머님이 일방적인 가해자라는 증인이며 증거가 수두룩합니다. 여기, 진술서에도 그렇게 쓰여 있네.”

광순이 요가원에 쳐들어가 드잡이를 한 날, 신고받아 출동했던 경찰관 세 명은 현장에서 광순을 끌어내 차에 태운 뒤 지구대로 향했다.

지구대로 향하는 경찰차 안에서 겁에 질려 벌벌 떨던 광순은 지구대에 도착하자마자 울분을 터뜨려 댔다.


“그러니까, 왜 때리셨어요.”


“맞을 짓을 했으니까 때렸지! 내가 아니라 그 망할 것을 잡아 와야 했다니까?”


“할머님, 잘 대답하셔야 해. 지금 말씀하시는 게 다 진술서에 적힌다니까? 나중에 담당 형사가 이거 보고 처리할 거예요. 그러니까 그만 진정하시고…….”


“담당 형사고 나발이고!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암캐 같은 게 감히 우리 귀한 아들 눈에서 눈물을 뽑았다는데!”


“에헤이, 말조심하시고. 피해자 아가씨는 그런 적이 없다잖아요. 여기 동영상 보니까 아가씨가 다 설명했네. 할머님이 오해하셨어.”


“오해가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 요망한 것이 순진한 우리 아들을, 아이고, 아이고 석동아!”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석동은 제게 기대듯 쓰러져 신세를 한탄하는 광순을 다독였다. 그러다 결국 지쳐 잠든 광순의 곁에서 경찰관의 질문에 답을 해야 했다.


“피해자 윤재인 씨가 가해자 남광순 씨의 아드님이랑 아무 관계가 아니라고 했다는데. 맞아요?”


“……예.”


“본인이 피해자에게 금전적으로 뭐 건네준 것도 없고?”


“……예.”


“개인적 친분이 전혀 없다는 것도 맞고요?”


“그게, 그 여자가 먼저 유혹하기는 했습니다.”


“……뭘 어떻게 유혹했습니까.”


“자꾸 야하게 쳐다보고……. 눈웃음치고, 딱 달라붙는 옷 입고 가슴을 이렇게 내밀고. 나한테 분명히 관심이 있었어요.”


“허어……. 이 아드님, 큰일 낼 사람이네.”

 
험악해진 경찰관의 눈치를 보던 석동이 결국 재인과는 아무런 사이가 아니며, 모친의 오해로 인해 벌어진 일임을 시인했다.

그렇게 진술서를 마저 작성한 석동은 울다 잠든 광순을 데리고 집으로 갔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오늘, 광순이 담당 형사에게 출석하라는 연락을 받고 경찰서로 온 것이다.


“할머님 나이도 있으신데, 경찰서 들락거리는 거 힘드시잖아요. 다행히 피해자 아가씨가 선처할 마음이 있으시더라고요. 그러니까…….”

“선처는 무슨! 제까짓 게 뭔데 선처를 해!”

“할머님, 이거 민사 소송으로 가면 영업 방해부터 시작해서 폭언, 폭행, 협박까지 걸려요.”

“내가 언제……!”

“욕을 많이도 하셨더라구요? 피해자 측에서 명예 훼손까지 걸어 버릴 수가 있어요. 보니까 할머님이 그 난리 치는 동안 피해자 아가씨는 방어만 하셨던데. 피해자가 그래도 할머님 나이 있으시다고 선처하겠답니다. 합의금도 필요 없대요.”

합의금이 필요 없다는 말에 악을 쓰던 광순이 입을 딱 다물었다.

나이 일흔둘이 되도록 경찰서와는 연이 없던 광순이었다.

그래서 출석 요구 전화를 받은 날부터 겁먹어 걱정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잤다. 그런데 그것들한테 돈 뜯기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조금 마음이 놓였다.

없는 것들이 합의금을 포기했다는 건 의외였지만,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마음 바뀔까 봐 그런 것까지 따져 물을 생각은 없었다.


“대신 조건을 달았는데요.”

경찰관이 이어 한 말에 광순의 눈이 번뜩였다.


“진심 어린 사과를 듣고 싶다네요.”

“뭐, 뭐? 사과아?”

“재발 방지도 약속하시고. 그거면 더는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하네요. 피해자 아가씨가 예쁘기도 예쁘던데, 마음도 참 착하더라고요.”

“착하기는 개뿔! 그 불여시 같은 게 쑈한 거라니까?”

“에헤이, 이 할머님 또 그러시네. 제 말 듣고 가서 사과만 하세요. 일 복잡하게 만들면 경찰서 또 오셔야 해요.”

“사과라니! 내가 그것들한테 뭘 잘못했다고 사과를 해? 사과는 그 썩을 것들이 나한테 해야지! 손이 발이 되게 빌어도 모자랄 판에! 차라리 고소하라고 해!”

“아이고,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아드님이 다 시인하셨어요. 오석동 씨가 아드님 맞잖아요. 할머님이 오해한 거래요. 아드님이 말 안 해요? 이거 고소로 가면 할머님이 백 퍼센트 져요.”

이 치욕을 어떻게 갚아야 할까. 어금니를 짓씹는 광순의 앙상한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오늘은 일단 가시고, 집에 가셔서 재발 방지 약속하는 각서 쓰시고 피해자분께 사과도 하세요. 아셨죠? 할머님, 좋게 좋게 갑시다. 이렇게 선처해 주는 사람 잘 없어요. 운 좋으신 거예요. 지금 할머님이 큰소리치실 때가 아니라구요. 이러다 피해자분 마음 바뀌면 할머님만 복잡해져요.”

갑이 아닌 을의 위치에 있음을 정확하게 짚어 주는 경찰관의 말투에 조금의 짜증이 묻어났다. 광순은 겪어 보지 못했던 을 대접에 탄식하듯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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