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내 사람에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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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내 사람에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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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내 사람에게만
2022.08.23.
“덕분에 맛집 알게 됐어요. 잘 먹었습니다.”
“입에 맞았다니 다행입니다. 덕분에 나도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각자 계산을 마친 뒤였다. 태서가 빙긋 웃으며 식당 문을 열었다. 재인은 태서를 따라 거리로 나섰다.
불편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다르게 태서와의 식사는 편안했다. 쓸데없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고 부담스러운 눈빛을 느낀 적도 없었다.
태서는 재인이 냉면과 만두를 충분히 음미할 수 있도록 식사 속도를 조절하며 기다려 주었다. 재인은 태서가 정갈한 태도로 음식 먹는 데 집중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강태서라는 남자는 재인의 외모에 흔들릴 타입은 아닌 모양이다.
그를 꾀어서 파혼으로 이끌어야 할 그녀로서 그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재인은 고민스러웠다.
“주변에 평양냉면 좋아하는 사람 별로 못 봤는데, 의외네요.”
“할머님이 좋아하셔서 몇 번 같이 먹은 기억이 있습니다. 어릴 땐 그 맛을 몰랐는데, 크면서 종종 생각이 나더군요.”
“맞아요. 정말 가끔 생각난다니까요. 시카고에는 평양냉면을 파는 식당이 아예 없거든요. 오랜만이라 정말 반가웠어요.”
“시카고에서 살았습니까?”
“네. 고향이 거기예요.”
“시카고는 지금 엄청 추울 텐데요.”
“가 본 적 있으세요?”
재인의 질문에 태서가 무엇을 떠올렸는지, 미간을 찡그리며 웃었다.
“대학생 때 한겨울에 시카고에 갔다가 호되게 고생했습니다. 특히 거위 털 패딩 하나 믿고 갔던 미시간 호수에서는 정말 얼어 죽을 뻔했고요. 영하 30도의 추위에 무슨 배짱으로 그랬는지.”
“시카고 겨울이 혹독하긴 하죠.”
“뉴저지 겨울만 추운 줄 알던 촌놈이었거든요.”
“뉴저지에 사셨어요?”
“거기서 대학을 나왔습니다.”
재인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검색을 통해 알아본바, 태서는 엘리트 중에서도 최고 엘리트 코스를 밟아 왔다.
그는 영국에서 중고등 과정을 또래보다 조금 더 일찍 이수했다. 그리고 17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아이비리그 중에서도 명문이라고 불리는 프린스턴 대학의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졸업 후 다시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와튼스쿨(경영전문대학원)에 입학하여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대학과 대학원 모두 좋은 성적으로 입학해 놓고서 졸업은 남들보다 한참 늦었다. 그래 놓고 또 졸업 성적은 우수했다.
도대체 당신은 어떤 사람일까. 호기심이 든 재인이 태서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태서는 저를 향하는 재인의 시선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앞만 보고 걸었다.
“시카고가 고향인데 한국에는 왜……. 가족이 한국에 있습니까?”
“아뇨. 한국에는 가족 없어요.”
단호한 대답에 태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녀의 말에 거짓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재인이 친부인 조대훈을 가족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리라.
태서는 지금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재인의 고향이 시카고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한국에 그녀의 친부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 묻는 것은 일부러였다.
재인의 입을 통해 그녀에 관해 알아간다는 것이 즐거웠다. 그리고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보고서에는 나와 있지 않은 것들에 대해 더 궁금해졌다.
예를 들면 그녀가 좋아하는 날씨라거나, 계절이 궁금했다. 쉴 때는 뭘 하며 쉬는지, 요즘은 어떤 노래를 즐겨 듣는지, 요가 외에 즐겨 하는 다른 운동은 있는지 알고 싶었다.
평양냉면과 만두 외에 또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좋아하는 작가가 있는지, 감명 깊게 본 영화는 무엇인지,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은 무엇인지. 윤재인이라는 사람의 시시콜콜한 것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태서는 묻지 않았다. 한두 번 보고 말 그런 사람이 아니라 여겼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두고 보려면 천천히 다가가야 했다. 서두르다가 재인에게 뺨 맞을 일은 절대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까 그 카페에는 왜 혼자 계셨던 거예요? 누구 만날 사람이라도 있었던 거 아니에요?”
“아닙니다. 퇴근하고 생각할 게 있어서 걷다가 좀 추워져서, 커피 한잔하러 들어갔던 겁니다.”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태서의 답에 재인이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근처에서 일하세요?”
“그리 멀지는 않습니다.”
“저는 아까 그 카페 3층에 있는 요가원에서 강사로 일해요. 요가 배우러 오세요.”
“지인 할인이라도 해 줍니까?”
“그런 건 없어요. 대신 저희 오픈 기념으로 한 달 출석 체크하면 요가 매트 드리거든요. 비싼 건데, 그건 노려볼 만할 거예요.”
“흠, 그건 탐나네요. 그렇지 않아도 괜찮은 매트를 하나 살까 생각하던 참인데.”
자연스러운 영업에 태서가 엷게 웃었다. 재인이 그런 태서를 슬쩍 바라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솔직히 좀 놀랐어요.”
“뭐가요?”
“입으신 옷 브랜드로 보나, 차고 계신 시계로 보나 돈이 아쉬운 분 같지는 같은데.”
재인의 솔직한 말에 태서가 웃음을 터뜨렸다. 추위에 웅크리고 길을 지나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바라볼 만큼 크고 호탕한 웃음이었다. 그 모습에 재인은 덩달아 웃으며 말을 이었다.
“더치페이하자고 하셔서요.”
“기분 나빴습니까?”
“여태껏 뭘 사 주지 못해 안달 난 남자들만 봐서요. 나쁜 뜻은 아니에요. 더치페이가 기분 나빴다는 것도 절대 아니고요. 오히려 좋았어요. 신선하던데요?”
“신선하다, 라……. 그건 생선한테나 쓰는 말 아닙니까.”
물고기 취급이 그리 기분 나쁘지 않았다. 태서는 저도 모르게 숨겨져 있던 마음을 들여다보고야 말았다. 스스로 재인의 어장에 기꺼이 들어갈 용의가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셨다니, 우리말 잘 모르시나 봐요. 새롭다는 뜻이었어요.”
“그러는 재인 씨야말로 고향이 시카고라고 하셨으면서 우리말 잘 아시네요. 한국에서 오래 살았습니까?”
“7년 살았어요. 하지만 제 한국어 실력은 한국에서 산 기간과는 상관이 없어요. 작년에 돌아가신 엄마가 영어에 서투르셨거든요. 그래서 집에선 늘 한국어를 썼죠.”
태서는 잠시 침묵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재인의 모친인 배우 윤세나는 지난가을에 지병으로 사망했다.
한 시절을 풍미하던 여배우의 죽음인데 국내 언론은 잠잠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막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누군가가 조대훈이라는 것은 확인하지 않아도 뻔했다.
“영어에 서툰 어머니와 함께 미국 생활 하느라 고생 좀 했겠습니다.”
그는 모친의 죽음을 언급한 재인을 굳이 위로하지 않았다. 제 슬픔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에게 과한 반응은 억지스럽게만 느껴질 뿐이라는 것을, 그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혀요. 정말 행복했어요. 엄마랑 둘이 살면서 부족한 건 전혀 못 느끼고 살았거든요.”
“그런데 굳이 행복한 미국 생활 접고 한국에는 왜 왔습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혹시 쓸쓸했습니까?”
잠깐 말을 고르던 재인이 생긋 웃어 보였다. 태서는 어쩐지 그 웃음이 애쓰는 것처럼 느껴졌다.
“친한 친구가 꼬셔서요. 그때 혹시 보셨나요? 병실에 저랑 같이 있었는데. 그 친구랑 같이 요가 학원 하거든요.”
“친구분은 기억이 안 납니다. 그런데 우리, 지금 어디 갑니까?”
“우리요? 아…….”
식당에서 나와 목적지도 없이 벌써 한참을 걸었다. 뒤늦게 여기서 제가 사는 오피스텔이 그리 멀지 않음을 깨달은 재인이 저를 바라보는 남자를 응시했다.
집이 근처라고 말을 하면 꼭 남자에게 데려다 달라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헤어지기 아쉬우니 차라도 한잔하자고 할까. 그동안 겪었던 남자들의 행태를 생각하면, 충분히 유혹의 신호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었다.
오늘은 어떤 사람인지 알아만 보려고 했지만, 계획대로라면 어차피 꼬셔야 하는 남자였다. 그러니 비록 처음 만난 날이었지만, 그렇게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맞는 걸까. 그렇게 하는 게 정답일까.
“계속 걷고 싶은 거라면 나도 좋습니다. 다만, 재인 씨가 추울까 봐요.”
의외로 세심하고 다정한 남자였다. 조유리를 대하는 것을 보고 겁먹었던 게 무색할 정도였다.
정말 뜻밖에도 생각보다 편안했다. 적당히 선을 그어 대하는 태도에는 배려심이 느껴졌고, 함께 나누는 대화는 유쾌했다.
조금 거만하게 느껴지는 시선이나 태도는 전혀 고깝지 않았다. 당당한 자신감에서 비롯된 거만함은 오히려 매력적이었다.
지겹도록 보아 온 재벌가 2세 혹은 3세에게서 느껴지는 거들먹거림이나 특권 의식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강선 그룹의 유일한 후계자로 알려진 강태서는 의외로 소탈한 사람이었다.
재인이 저 멀리 보이는 오피스텔 건물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긴 사이, 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눈이 오네요.”
“아.”
재인이 고개 들어 연보랏빛 하늘을 마주했다. 소담한 눈송이가 재인의 보드라워 보이는 뺨에 떨어졌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녹아 이슬처럼 맺혔다.
“정말, 눈이네……. 시카고에서는 지긋지긋했는데 한국에서 보니 반갑다. 오랜만이라 그런가. 한국 눈은 조금 다르게 느껴져요. 기분 이상하다.”
혼잣말처럼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재인의 시선은 하늘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다각도에서 하늘을 보려는지, 조심스럽게 발을 옮기던 재인이 어느새 태서의 앞에 마주 섰다.
고개를 꺾어 하늘을 우러르는 재인만을 바라보던 태서가 문득 손을 들었다. 아까부터 재인의 뺨을 보듬어 주고 싶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와, 꽤 많이 내릴 것 같은데요. 내일 길 엉망 되겠어요.”
“……그렇겠네요.”
“이런 생각이 먼저 드는 걸 보면 저도 늙었나 싶어요. 아, 그러면 화이트 크리스마스인 거죠?”
추위에 발갛게 물든 뺨에서 재잘재잘 떠들어 대는 입술로, 태서의 시선이 천천히 옮겨갔다.
입술에 발랐던 붉은 립스틱은 냉면과 만두를 먹는 사이 지워지고 없었다. 맑게 드러난 제 입술 색깔이 못 견디게 귀엽고 청초했다.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고 저만 보고 싶을 만큼.
몇 번이나 장갑 낀 손을 쥐었다가 펴던 그가 피식 웃으며 주머니에 손을 내리누르듯 넣었다. 그러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우연히 만났으니, 여기서 헤어지죠.”
“……네?”
그제야 재인의 시선이 태서를 향했다. 갑작스럽게 이별을 통보하는 남자는 뭔가 불편한 듯 눈썹을 살짝 찡그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입꼬리를 올려 시원스럽게 웃는 모습이 이상하게 매력적이었다.
“오늘은 이 정도가 딱 좋을 것 같습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남자의 말에 재인의 고개가 천천히 기울었다.
“또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제가 밥을 사죠. 오늘처럼 더치페이하자고 안 할 겁니다.”
남자의 표정은 어딘지 개구쟁이 같은 구석이 있었다. 재인은 저도 모르게 마주 웃고 말았다.
“저는 더치페이해도 괜찮은데요. 오히려 그게 편해요.”
“음. 아뇨. 다음엔 내가 삽니다. 그리고 아까 더치페이하자고 한 건 일부러였습니다.”
“왜죠?”
“나는 내 사람에게만 돈 씁니다.”
재인이 들이켜던 숨을 멈추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태서가 건넨 일련의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에 만나면 사 드리겠다는 겁니다. 밥이든, 뭐든. 그게 뭐라도.”
혹시라도 눈치채지 못했을까 봐 정확하게 짚어 주는 태서의 말에 재인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갑자기 훅, 들어온 남자의 유혹이 아찔할 만큼 뜨겁게 느껴졌다.
“그러니 내 사람 될 생각 있으면, 또 내 시야에 들어오면 됩니다. 그게 아니라면 나랑 눈 마주치지 않게 잘 숨어 다녀요.”
“…….”
“나, 한번 손에 들어온 건 안 놓칩니다. 엄청 집요하게 굴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