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크리스마스이브 (15/123)


#15. 크리스마스이브
2022.08.19.



“아들, 꼭 가야 하는 거지?”

“응, 엄마. 왜? 무슨 일 있어?”

M자 탈모를 가리려 거울 앞에서 한참이나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던 석동이 옷장을 향해 뒤돌았다. 새로 산 코트를 두고 한참이나 고민하던 석동은 결국 그 코트를 꺼내어 입었다.

P사의 시계를 차고 프리미엄 라인의 코트를 기가 막히게 소화해 낸 남자 때문에 흥이 좀 식기는 했어도 여전히 명품 중의 명품이었다. 그러니 대학 동문회에 입고 가기엔 가장 알맞았다.

사실 참석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예쁜 여자를 데리고 가면 또 모를까. 늘 혼자 가서 동기 녀석들의 자랑을 들을 때마다 배가 아팠고, 저보다 못났다고 생각했던 녀석이 청첩장을 내밀 때는 속이 뒤틀렸다.

하지만 매년 연말마다 자랑 대회처럼 이어지는 그 행사에 빠진다는 건 ‘나는 자랑할 게 아무것도 없다. 내 인생은 비참하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작년의 안주는 이혼 후 아내에게 위자료 털리고 집에 틀어박혀 있느라 불참한 녀석이었다. 동기들은 남의 불행을 신랄하게 씹어 대며 각자의 행복을 만끽했다.


“그래도 걔, 병원은 좀 잘된다고 하지 않았나?”


“위자료 주느라 병원 자리 넘겼다더라. 하, 그 자리 전부터 탐났는데 놓쳤어.”


“위자료를 뭘 얼마나 줬기에 병원을 넘겨?”


“애초에 병원도 처가에서 돈 대 준 거였대. 처가가 좀 산다고 거들먹거리던 거, 기억 안 나? 그런 처가를 두고 바람피우다 걸렸으니 다 반납해야지, 뭐.”


“바람도 아무나 피우는 거 아니라던데. 능력 좋네.”


“능력이 좋았으면 안 걸렸겠지.”

 
석동은 늘 낄낄거리는 무리에 슬쩍 끼어들어 비웃음을 보탰다. 그렇게라도 그들의 일원이 되고 싶었다. 절대로 그들의 안줏거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사회에서 어느 정도 인정받고 살아가는 이들의 모임답게 투자에 관한 고급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여러모로 놓치고 싶지 않은 자리였다.


“아니, 엄마는 그냥……. 그 염병할 것들한테 아직 연락도 없고, 그것들 상대하느라 몸도 여기저기 아프고……. 심란해서 그러지.”

머리에 흰 끈을 싸맨 광순이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크리스마스이브라고 별건 없지만 아들과 함께 있고 싶었다. 이런 날 혼자 있으면 괜히 우울해져서 혼자 술이라도 홀짝거리기에 십상이다.


“엄마, 걱정하지 마.”

석동이 비탄에 빠져 코를 훌쩍이는 광순의 손을 굳건히 잡았다.


“내가 그것들 가만히 안 둬. 어딜 감히 우리 엄마를 건드려?”

“흑…….”

광순이 손수건을 들어 눈물을 찍어 댔다. 살다 보니 별 거지 같은 것들을 다 만나 이런 고생을 한다. 생각할수록 제 처지가 가련하고도 처량했다.


“지금이야 주제 모르고 고소 어쩌고 떠들어 대는데, 어떻게든 합의 쪽으로 이끌 거야. 엄마는 마음 편히 먹고 조금만 기다려.”

“합의라니? 내가 그것들한테 돈을 왜 줘! 돈이 썩어 나도 그 망할 것들한테는 십 원 한 장 안 줘!”

“없는 것들이니 돈 바라고 그러는 거 뻔하잖아. 돈 좀 준 다음에 그만큼 싹싹 빌게 만들 거야. 엄마, 갑은 우리야. 그것들은 엄마 건물에 세 들어 사는 것들이라구.”

“아들, 이제 그 불여우 같은 것한테 미련이라고는 없는 거지?”

“그럼. 내가 불여우한테 홀렸었나 봐.”

엄마의 손을 쓰다듬으며 속삭이는 석동의 바른말에 광순이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그래도 우리 아들이 정신 차려서 다행이다. 이렇게라도 천한 것을 떼어 냈으니 합의금쯤이야 굿한 셈으로 치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한 광순이 미소를 지으며 아들의 손등을 두드렸다.


“엄만 우리 아들 없으면 어떻게 살지.”

“나도 엄마 없으면 못 살아. 그러니까 엄마, 그런 것들 때문에 속 끓이지 마. 오래오래 사셔야지.”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 우리 아들이 아들딸 낳아 알콩달콩 재미나게 사는 거 보지.”

“응, 엄마. 내가 꼭 좋은 여자 만나서 효도할게. 엄마도 이제는 집안일이든 뭐든 손에서 놓고 손주 재롱이나 보면서 쉬셔야지.”

제가 직접 효도할 생각은 안 하고 남의 집 귀한 딸 데려다 대리 효도 시킬 생각뿐인 석동이었다. 그리고 그 말에 크게 고개 끄덕이는 광순 역시 제 수발 들어 줄 ‘딸 같은’ 며느리를 기대했다.

말이 딸 같은 며느리지, 실제로는 종처럼 부릴 며느리였다. 귀한 아들 낳아 잘 키워 내어 주는 것이니, 며느리에게 극진하게 대접받는 것은 마땅했다.


“엄마는 우리 아들만 믿어. 친구들 잘 만나고 와. 엄마 걱정은 하지 말고 재미나게 놀다가 오구.”

마주 잡은 손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둘만 있으면 세상 애틋하고도 행복한 모자였다.


 

* * *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있냐는 태서의 질문에 재인은 까다롭게 굴고 싶지 않아 아무거나 좋다고 했다. 정말이지 아무거나 다 좋았다. 특별히 가리는 음식도 없고, 메뉴 선정에 까다롭지 않은 그녀였다.

하지만 호기롭게 그녀와 거리로 나선 태서는 심각했다. 언젠가 친구 준경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하는 말 중에 ‘아무거나’가 제일 어려워. 그건 내 머릿속에 있는 딱 하나를 맞춰 보라는 거야.”


“못 맞추면?”


“맞출 때까지 답해야지. 계속 못 맞추면 짜증 섞인 눈으로 바라보거든? 눈빛으로 험한 말 한다는 게 뭔지 알겠더라. 그러면 일단 그날 좋은 소리 듣기는 틀린 거야.”

 
어쩌지. 태서는 지난 두 달 가까이 들렀던 회사 근처의 식당을 되짚어 보았다.

두부찌개, 설렁탕, 고등어구이, 불고기백반, 오징어볶음.

빨리 일하고 다시 회사로 들어가서 일하기 위해 선택한 메뉴가 대부분이었다.

조유리가 밥 먹자고 했을 때는 이런 고민은 하지도 않았다. 할 말이 있다며 회사 근처로 오겠다기에 그러라고 했을 뿐이다. 밥 사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조부끼리의 약속을 내세워 가짜인 주제에 자신을 약혼자라 부르는 여자였다. 헛물켜는 여자에게 꿈 깨라고 말할 생각이었는데 식당에서 소란을 피우는 꼴을 보며 생각을 바꿨다.

웃기지도 않은 약혼 관계를 깨는 것은 조유리에게, 혹은 조대훈에게 전화로 해도 될 문제였다. 굳이 얼굴 보고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괜찮은 식당을 미리 좀 알아 둘 걸 그랬습니다.”

“저는 정말 다 좋아요.”

태서의 고민이 길어지는 것을 알아차린 재인이 차라리 제가 메뉴를 제안할까,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처음 함께 식사하는 사람의 입맛을 맞출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어지간한 식당은 이미 예약 손님으로 꽉 차 있을 시간이다. 거기다 상대는 입맛 까다로울 것이 뻔한 재벌 3세가 아닌가.

재인이 추위에 더해지는 배고픔을 조금 더 참아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없다면, 싫어하는 음식은 있습니까.”

“아뇨. 이상한 것만 아니면 다 잘 먹어요.”

태서는 잠시 멈추어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윤재인은 저에게 힌트를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더는 시간 끌고 싶지 않았다.

크리스마스이브답게 거리는 사람들로 넘쳐 났다. 잔뜩 구름 낀 하늘은 당장 눈이라도 쏟아 낼 듯 흐렸다. 저마다 바삐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재인을 응시했다.


“그러면 내가 좋아하는 거 먹으러 갑시다. 근처에 있습니다.”

“네.”

재인은 태서가 저를 이끌고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강선 호텔의 레스토랑으로 데려가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무리 크리스마스이브라지만 강선 그룹 총수 일가라면 강선 호텔 식당에 한 자리 정도 만들어 내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줄 설 필요 없고, 한 달 전에 예약할 필요가 없는 삶. 필요하다면 당장 원하는 것을 취할 수 있는 삶. 재인이 알기로는 그게 재벌들이 사는 방식이었다.


“……여기예요?”

“네. 안 좋아합니까?”

그런데 태서가 그녀를 이끌고 간 곳은 의외의 장소였다.


“좋아해요!”

눈을 반짝이며 고개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태서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재인의 머릿속에 있는 딱 하나를 운 좋게 맞힌 모양이다.

추운 크리스마스이브, 초로의 신사들이 자리를 차지한 평양냉면과 만두 전문점에 들어서는 두 사람의 표정이 더없이 밝았다.

* * *

유리는 벌써 30분째 핸드폰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오후에 미리 숍에 들러 완벽하게 세팅한 헤어와 메이크업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정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얼마 전에 새로 다듬은 코랄빛 손톱이 보기 흉하게 망가지는 것도 모르고 까득까득, 손톱을 짓씹었다. 초조했다. 분하고 불안했다.

강태서가 냉정한 사람이라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저를 만나고 난 뒤에도 이렇게나 냉랭하게 굴 줄은 몰랐다.

연애 쪽으로는 도통 눈치가 없는 것 같기에 미리 언질을 줬다. 그래서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오늘만큼은 연락해 오겠지, 생각했다.

물론 유리는 며칠 전 그의 회사 근처 허름한 식당에서 당했던 수모를 아직도 잊지 못했다. 태어나 그런 취급은 처음 당해 봤다.

식당 안 사람들이 자신을 동정 어린 시선으로 보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유리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그 시선 속에 섞인 비웃음을 알아챘을 때, 태연히 밥숟가락을 드는 남자의 앞에서 상을 엎고 싶었다.


“그렇게 화를 내고 나왔으면 바로 쫓아 나와야 하는 거잖아. 그런데 그 후로 연락도 없다는 게 말이 돼? 내가 도대체 어디까지 참아 줘야 해?”

그때의 일로 아직 화가 나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오늘 연락해 오면 못 이기는 척 만나러 나갈 생각이었다. 다른 날도 아니고, 연인들의 날이라는 크리스마스이브니까.


“전화해. 강태서, 전화하란 말이야.”

유리가 한 치의 오차 없이 입술을 오물거리며 주문을 걸었다. 화는 났지만, 약혼을 엎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남자였다. 모두가 탐내는 남자였다. 하지만 아무나 가질 수 없기에 꼭 제 곁에 둬야만 했다.

레이저라도 쏠 것같이 핸드폰을 쏘아보던 유리의 눈이 순간적으로 번뜩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재빨리 손을 뻗었다. 핸드폰 벨 소리가 제대로 소리를 키우기도 전이었다.


“조유리예요.”

―정말 안 나올 거야? 유리야! 지금 여기 분위기 장난 아니야! 오늘 정재훈이 데리고 있는 애들 다 풀었어!

기다리는 전화는 오지 않고 종일토록 온갖 모임에 참석하라는 전화만 온다. 유리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핸드폰 화면을 향해 눈을 흘겼다.

주안 엔터테인먼트 대표 정재훈은 요즘 승승장구 중이었다. 그가 키우는 아이돌 그룹과 배우들의 인기가 한류를 타고 치솟았다더니 크리스마스이브 파티에 다 데리고 나온 모양이다.

물론 유리는 그딴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더욱이 정재훈이라니, 한때는 그 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아팠다.

8년 전, 음침한 눈으로 윤재인만 따라다니던 등신 같은 게 결국에는 일을 저질렀다. 지금은 저렇게 멀쩡하게 사업하는 걸 보면 그사이 정신을 차리기는 했나 보다.


“하긴, 그 난리를 치는 바람에 눈 밖에 나서 마냥 놀 수만은 없게 됐으니까. 살아남으려면 뭐라도 해야겠지.”

―뭐라고? 잘 안 들려! 지금 바로 올 거지?

“내가 거길 왜 가! 나 내년이면 강선 그룹 며느리 되는데 괜히 뒷말 나올 일 있어?”

―유리 너 진짜 내년에 결혼해? 그러면 지금 강태서랑 같이 있는 거야?

“전화 그만해. 나 지금 바빠.”

―뭐래? 유리 왜 안 온대?

―지금 강태서랑 같이 있나 봐!

저들끼리 뭐라고 떠들어 대든 말든, 상상하기 좋은 여지를 남긴 유리가 전화를 끊었다.

조유리 인생 처음으로 집에서 핸드폰만 노려보는 크리스마스이브가 깊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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