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주인 만나 반가운 짐승처럼 (14/123)


#14. 주인 만나 반가운 짐승처럼
2022.08.16.


드디어 여자에게 관심이 생기기 시작한 건가.

잠깐 생각한 태서는 스스로 떠올린 생각을 부정했다. 이미 여자에게 관심은 있었다. 오래전, 발리 리조트에서 윤재인을 만났을 때부터. 그러니 명제는 바뀌어야 했다.

이제 더는 윤재인을 향하는 관심을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인가.

가장 큰 가능성을 띤 명제 앞에서 태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정말 그렇다면 빨리 이 자리를 떠야 했다.

함부로 추근댄다는 인상을 줄 수는 없었다. 제 시선과 마음을 이끄는 여자는 윤재인이 유일했다. 그런 사람에게 뺨을 맞고 싶지는 않았다.


“저기, 괜찮으세요?”

“네, 괜찮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만난 적 있는 분 같아서요. 방해했다면 죄송합니다.”

굽이치는 긴 머리칼을 귀 뒤쪽에 꽂으며 여자가 미소 지었다. 그러자 도톰한 입술이 보기 좋게 휘었다. 그 모습이 예쁘게만 보여 눈에 콕 박히듯 새겨졌다.


“아.”

그제야 태서는 제가 여자를 두고 예쁘다는 표현을 서슴없이 떠올렸음을 알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회사에서 장 실장에게 꽃을 살려 내라고 했을 때도 꽃 준 사람이 예쁘다고 말했다.


“미쳤네, 진짜.”

혼잣말을 입 안에서 웅얼거린 태서가 두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왜 이 여자 앞에서는 자꾸만 안 하던 짓을 하나.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일까.

하지만 그는 곧 생각을 바꿨다.

예쁜 걸 예쁘다고 하지 뭐라고 하겠는가. 사랑스럽다거나, 간이라도 빼 주고 싶다고 생각한 건 아니니 이상할 건 없었다.


“네……?”

태서는 손가락 틈새로 재인의 고양이 같은 눈매의 커다란 눈이 토끼처럼 커지는 것을 보았다. 그건 또 귀엽게 느껴져서 입술 새로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웃음이 번진 것이다.


“아니, 아닙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고운 눈썹을 일그러뜨리는 여자를 보며 태서가 반가움이 드러나려는 입가에 힘을 주었다. 이제 현실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저, 기억 못 하세요?”

“흠…….”

생각지도 못한 상황을 맞닥뜨린 태서는 그 어느 때보다 집중력을 발휘했다. 신중해야 할 때였다.

재인이 자신에게 먼저 아는 척을 해 왔다. 반가운 와중에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발리에서 들이대는 여러 남자에게 완벽하게 철벽을 치는 걸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왜 나한테는 먼저 아는 척을 하지?

태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제 반응을 살피는 여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여자의 의중이 궁금했다.


 


“우리가, 만난 적이 있다고요.”

“네.”

태서는 고민했다. 여자의 장단에 맞춰 반가워하며 인연을 시작해 볼 것인가. 아니면 여자를 향하는 제 관심을 숨기고 여자를 모르는 척할 것인가. 이것은 기회일까. 아니면 함정일까.

미리 알아본바, 재인은 남자를 싫어했다. 수도 없이 당했으니 진절머리를 칠 만하다. 그러니 제가 관심이 있음을 알게 되면 오히려 부담을 느끼거나 질겁할 확률이 높았다.

치열하게 고민하던 태서는 한쪽 눈썹에 힘을 주어 올렸다. 자신에게 접근하던 다른 여자 대하듯 재인을 상대하기로 한 것이다.


“너무 흔한 수법 아닙니까?”

“아뇨. 정말요. 며칠 전에 병원에서 병실 잘못 찾아오지 않으셨어요?”

“아……. 아, 그 꽃다발?”

“네! 맞아요!”

재인은 태서가 드디어 자신을 알아봤다는 반가움에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자 모르는 척하려던 태서의 결심이 무색하게 참았던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재인이 웃는 것만으로 카페 안이 화사하게 빛났다. 태서는 그 빛이 모두 제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온 것 같았다. 그게 무척이나 간지럽게 느껴졌다.

마주 보며 웃던 태서는 순간 카페 안에 크리스마스 캐럴을 틀어 놨나 생각했다. 분명히 귓가에 댕댕댕, 종소리가 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페 안에 흐르는 음악은 잔잔한 클래식이었다.

이 종소리를 언제 또 들었더라. 분명히 들은 적이 있는데.


“하……?”

갑작스러운 깨달음의 탄식을 흘린 태서를, 재인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태서는 귓가에 이명처럼 울려 퍼지던 종소리를 떠올렸다. 눈앞이 새하얘지고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어 식은땀을 흘렸던 때였다. 그때도 지금처럼 눈앞에는 윤재인이 있었다.

그날따라 발리의 바람이 잠잠했다. 잔잔한 파도를 확인한 태서가 낙담한 채 서프보드를 들고 돌아섰다. 할 일이 없어진 탓에 천천히 리조트 곳곳을 거닐던 그는 왁자하게 떠드는 아이들의 소란에 시선을 돌렸다.


{Jane, 나는 집중해서 하려고 하는데 Ethan이 자꾸 방해해요!}


{Ollie가 먼저 약 올렸어요!}

 
아이들이 몰려든 곳에 재인이 있었다. 그때가 세 번째 만남이었다. 아니, 사실은 만남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지난 두 번 모두 태서 혼자 기억하고 있는 짧은 마주침이었기 때문이다.

또 만났네. 자주 보네.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돌아서려 했다. 그런데 그날, 태서는 자꾸만 제 시선을 잡아끄는 재인에게서 오래도록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장난치며 목청 높이는 아이들에게 재인은 화를 내거나 표정을 굳히지 않았다. 지난 두 번 만났을 때마다 보여 주었던 모습과는 달랐다. 눈썹을 찡그린 채 남자들에게 철벽 치던 것이 무색했다.

그녀는 한껏 느슨해진 표정으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마음 놓고 웃고 괴상한 얼굴도 지어 보이며 아이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뒹굴었다.

경계심 없이 풀어져 너그럽게 아이들을 돌보는 그녀는 무척이나 편안해 보였다.


{그만, 그만. 너희 둘 다 내일도 이렇게 요가 수업 시간 내내 장난칠 거니? 그렇다면 후회하게 될 거야.}


{왜요?}


{지금부터 내가 직접 구운 레몬 마들렌을 나눠 줄 건데, 너희가 먹어 본 마들렌 중에 가장 맛있을 거라는 걸 장담할 수 있어.}


{우리한테는 안 줄 거예요?}


{아니. 마들렌은 모두가 받을 수 있어. 그렇지만 나를 곤란하게 한 사람에게 포옹과 미소는 없어.}


{포옹과 미소요……?}


{레몬 마들렌을 더 맛있게 만들어 주는 비법이야. 어떡할래? 내일도 장난칠래?}


{아니요!}

 
Jane은 모든 아이에게 작게 포장된 마들렌을 나눠 주었다. 그리고 한 명도 빼놓지 않고 꼭 안아 주고 환히 미소 지어 보였다.

태서는 그때 귓가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던 종소리를 깨닫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던 것을 기억해 냈다.

아무리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해도 인종 차별적 시선과 발언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부모가 고용한 사람들이 태서의 의식주를 살폈지만, 그들은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지 않았다.

어린 태서는 어리광을 부릴 곳도, 울며 속상함을 토로할 곳도 없었다. 모든 것을 홀로 감내해야 했다. 영국과 미국에서 공부하고 자라 성인이 되는 동안, 태서를 품에 보듬고 다독여 주는 어른이 없었다.

잘못했을 때 부모에게 뺨을 맞은 적은 있지만, 레몬 마들렌을 받은 적은 없다.

그를 향해 손을 내밀던 유일한 사람은 할머니뿐이었다. 하지만 홀로 외국에서 공부하면서 할머니는 일 년에 겨우 한 번 볼까 말까 했다.

그래서 태서는 그때 아이들을 꼭 안고 웃던 재인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그리고 그 모습은 지금까지도 종종 떠올리는 모습이었다.

다음 날, 그녀가 제 진짜 약혼녀라는 것을 보고서를 통해 알게 되었을 때는 어찌나 놀랐던지. 놀라운 와중에 자꾸만 웃음을 머금은 채 심장 부근을 눌러야 했다. 태어나 처음 느껴 보는 이상한 설렘이었다.


“혹시, 그쪽한테도 들립니까?”

“뭘요?”

“종소리요.”

“……네? 주변에 교회가 있나? 하긴,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라서 교회 종소리가 들릴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안 들리는데, 청력이 무척 좋으신가 봐요.”

교회 종소리는 개뿔, 제 귀에만 들릴 종소리가 분명했다. 태서가 미간을 문지르며 쿡쿡 웃었다.

아무래도 저는 예전에도 지금도 이 여자에게 된통 반한 모양이다. 윤재인이라는 여자에게 푹 빠진 것을 이렇게나 촌스러운 방법으로 깨닫다니.

그리고 자존심 상하게도 여자는 자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존심은 상할지언정 그게 기분 나쁘지는 않아 또 웃음이 났다.


“하, 나도 어디 가서 안 빠지는데…….”

실소를 흘리던 태서는 가만히 저를 바라보던 재인이 슬쩍 미간을 좁힌 채 슬금슬금 뒤로 몸을 물리는 것을 알아챘다.

하긴, 자꾸만 혼자 떠들고 혼자 웃는 남자가 이상해 보이기는 할 테다. 제가 생각할 때도 미친놈 같은데, 그녀가 볼 때는 오죽할까.

하지만 이렇게 헤어질 수는 없지.

태서가 걸터앉아 있던 스툴을 밀며 일어섰다.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고 어깨를 쭉 펴자 잘난 남자의 커다란 몸이 드리운 그늘에 재인이 가려졌다.

태서는 재인이 제 그림자에 다 들어오는 것이 이상하게 흡족했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한 그가 주저 없이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강태섭니다.”

쭉 뻗어 내민 커다란 손을 바라보던 재인이 결심한 듯 손을 들었다.


“윤재인이에요. 반갑습니다. 아…….”

 

 
손끝이 닿는 순간, 태서는 저도 모르게 손 전체에 힘을 주어 그녀의 손을 꽉 잡아 쥐었다. 그러자 가뜩이나 동그란 눈이 더 커졌다.

손을 뺄 생각은 하지 않고 그를 빤히 올려다보는 까만 눈에 담긴 것은 혐오나 공포 따위가 아니었다. 놀람, 그리고 의문.


“…….”

잠시 시선을 내려 맞잡은 손을 바라보는 재인에게 태서가 실례했다고 말하려던 때였다.


“…….”

태서는 제 손을 힘주어 맞잡는 재인의 손을 느끼고는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발끝에서 시작된 짜릿함이 순식간에 척추를 타고 올라와 폐부를 간질였다. 그러더니 이내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댄다.

하마터면 목을 긁어 앓는 소리를 낼 뻔했다. 주인 만나 반가운 짐승처럼.

이성의 끈을 가까스로 붙잡은 태서가 큰 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병원에서 환자복을 입고 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괜찮습니까?”

“네, 멀쩡해요.”

재인이 멀쩡하다는 것은 이미 보고서를 통해 확인한 후였다. 그래도 그녀를 직접 보고, 또 그녀의 목소리로 확인받는 것은 달랐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진부한 접근에는 진부하게 답해 주는 게 인지상정이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희고 고운 손을 응시하던 태서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이윽고 다시 눈이 마주쳤다.

빨려 들어갈 듯 깊고 짙은 검은 눈동자 속에는 오직 저만이 담겨 있다. 태서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저녁이나 먹죠. 아직 식사 전이면.”

“음, 저는…….”

“오늘, 크리스마스이브잖아요.”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약혼녀랑 밥 먹어야 한다던 조유리의 말이 떠올랐다. 그 여자가 떠들어 대던 쓸데없는 말 중에 유일하게 쓸모 있는 말이었다.

태서는 여태껏 잡고 있던 재인의 손을 놔주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혼자 밥 먹기는 속상한 날이니까. 괜찮다면 그렇게 합시다.”

“그럴……까요.”

“가죠.”

태서가 성큼성큼 걸어 카페 문을 열고 그녀를 향해 고갯짓했다. 홀린 듯 엉겁결에 긍정의 답을 뱉은 재인이 성급한 결정을 후회하기도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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