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거짓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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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거짓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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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거짓말처럼
2022.08.12.
하지만 태서는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는지 외투를 챙겨 들었다.
“이만 퇴근합시다. 꽃이 오래가도록 물에 섞는 영양제가 있다던데, 그걸 사러 가 봐야겠습니다.”
사무실을 나서기 전 꽃다발에 한 번 더 시선을 던진 태서가 닫히는 문틈으로 사라졌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장 실장이 뭐에 홀린 듯 시들어 가는 꽃다발로 시선을 옮겼다.
“예쁜 윤재인 씨인가요.”
태서가 현양 건설의 조유리와 구두 약혼했다는 사실은 정·재계에서 유명했다. 그런데도 태서에게 눈독 들이는 집안은 많았다.
정식으로 약혼식을 올린 것도 아니고, 그저 친우인 조부끼리 농담하듯 주고받은 말이었다. 그러니 충분히 뒤집힐 수 있는 혼사라 여긴 것이다.
만약 태서가 그 잘나가는 집안을 다 마다하고 곁에 윤재인을 두게 된다면. 그래도 강선 그룹이 태서의 손에 떨어지게 될까.
“어려울 텐데…….”
어려울 거라 말하면서도 장 실장은 조금 기대해 보기로 했다. 시들어 가는 꽃을 들고 진지하게 살려 내라던 모습이 밉지 않았기 때문이다.
* * *
“매일 어딜 가겠다고?”
“강선 호텔 라운지 바.”
재인은 검색 끝에 새 단장을 끝낸 강선 호텔의 라운지 바가 요즘 가장 주목받는 장소라는 것을 알아냈다.
물론, 재벌들은 그런 곳에서 제 모습을 다 드러내지 않는다. 고급 주택가의 빌라 한 채를 정해 두고 모여 자기들만의 세상에서 노는 행태는 재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외적 사교의 장소로 강선 호텔이 적격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잘하면 강태서와 마주칠 수 있으리라.
“거기는 왜?”
“야경 보게.”
“그러니까, 매일 야경 보러 간다는 이유로 저녁 수업에서 빼 달라는 거야? 와, 이 배짱 좋은 강사 보소?”
“미안. 대신 오전 수업 내가 더 할게.”
저녁 여덟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지금 집에 가서 화장과 옷차림을 고치고 가면 얼추 시간도 맞을 것 같았다.
괜히 그런 곳에 갔다가 누군가 재인을 알아볼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한국에 왔다는 사실이 조대훈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금방일 것이다. 그래서 재인은 길게 고민했다.
하지만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남자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머플러로 얼굴을 가리고 최대한 조심하며 강태서에게 접근하는 것이 그녀의 1차 목표였다.
“혼자?”
“응.”
“……그러면 같이 가.”
“됐어. 너까지 가면 요가원은 어떡해. 새로 구한 강사 하나로는 안 돼.”
“야, 너 그런 곳이야말로 여자 어떻게 해 보려는 남자들이 득시글대는 곳인 거 몰라? 괜히 갔다가 또 어떤 진상을 만나려고!”
“내가 뭐 맨날 진상만 만나? 꽤 괜찮은 남자도 많았어. 나도 슬슬 연애해야지.”
“……뭐?”
상화는 별 헛소리를 다 듣는다는 얼굴로 재인을 향해 미간을 찡그렸다.
연애 한번 해 본 적 없지만 남자라면 지긋지긋하다던 재인이었다. 재인이 철벽 여왕이 된 것은 다 그놈의 남자들 때문이다.
어찌나 가만히 두지를 않는지, 지난 8년간 재인을 지켜본 상화가 한국에 가서 굿이라도 한 판 하자며 몇 번이나 난리를 친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여권 갱신하러 한국에 다녀온 상화가 용한 곳에서 받아 왔다며 재인의 지갑 속에 부적을 넣어 준 적도 있었다. 그만큼 재인의 삶은 고달팠다.
동양인인 재인을 쉽게 보고 함부로 덤비는 남자들도 많았고, 그 탓에 그녀를 적으로 생각하고 못되게 구는 여자들도 많았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손가락질을 받은 적은 셀 수도 없었다.
“너 남자 때문에 전공도 그만뒀다며.”
“원래 내가 원해서 했던 건 아니었어.”
사실 그녀는 한국 무용이 좋았다. 어려서부터 음악만 틀어 두면 발레 동작을 흉내 내곤 하던 그녀였다. 하지만 지승희 때문에 시작하게 된 한국 무용에 큰 미련을 두고 싶지는 않았다.
“연애고 결혼이고 다 싫다며. 나중에 같이 스머프 마을에서 고양이나 키우자며.”
“응.”
순순히 대답하는 재인을 보던 상화가 눈을 가늘게 떴다. 허리에 손을 짚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뭔데. 윤재인, 말해. 무슨 꿍꿍이야. 그렇지 않아도 너 요즘 자꾸 생각에 잠겨 있던 거 수상했어.”
재인은 며칠을 고민했다. 강태서에게 접근하는 방법도 문제였지만, 그 전에 이 계획을 진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더 컸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생각하니 마음이 복잡했다.
재인은 엄마 세나에게 자신을 사랑하며 단단해지는 법을 배웠다. 그래서 혼외 자식의 존재를 부정하는 친부 따위, 평생 안 보고 엄마와 둘만 잘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엄마가 죽었다. 고민 끝에 친부에게 엄마의 죽음을 알렸지만, 그는 끝까지 재인과 재인의 엄마를 무시했다.
가여운 엄마를 생각하며 분노에 떨던 재인은 엄마의 일생을 망친 사람에게 생채기라도 내고 싶었다.
그래서 복수를 결심하고 한국으로 왔지만,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제 식당에서 조유리를 발견하고는 막장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방법을 떠올렸지만, 그렇다고 복수를 위해 애먼 사람을 끌어들여 피해 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이것뿐이다. 그래서 재인은 일단 강태서를 만나 보기라도 하자고 결론을 내렸다. 조유리의 약혼자인 그에 대해 알아 둬서 나쁠 건 없었기 때문이다.
“상화야, 나 정말 너한테까지 피해 주고 싶지 않아.”
“야.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나 섭섭하거든?”
“알아. 아는데……. 나중에 내가 일 저지르고 오더라도 너는 나 받아 줄 거잖아. 그거면 돼. 상화야. 나 너 하나 믿고 뭐 좀 해 보려는 거야.”
“재인아.”
“정말 도움이 필요하면 그때 말할게. 부끄러워서 그래. 정말이지 너무나 부끄러워서 그래.”
상화에게 무슨 일을 하려는지 말하는 것은 부끄럽지 않았다. 그 이유를 설명하려면 제 친부라는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를 밝혀야 했다.
제 몸에 그 남자의 피가 흐른다는 것이, 제 유전자에 그 남자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끔찍하게 싫었다.
더욱이 단 한 번도 친부라 여겨 본 적 없는 존재를 입 밖에 내어 공식화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누군가에게 그 남자와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받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진짜 나중에 다 말해 줄게.”
복수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밝혀질 것을 각오했다. 상화뿐만이 아닌, 어쩌면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 앞에 자신이 누구의 딸인지를 스스로 밝혀야 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 인간과 엮이는 것은 충분한 준비를 마친 이후로 미루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재인에게는 아직 힘이 없었다.
“너 한국 오겠다고 한 거, 한국이 그리워서 온 거 아니지.”
“……응.”
재인을 한참 노려보던 상화가 몸에 힘을 풀었다. 그러더니 걱정이 담뿍 담긴 눈으로 재인을 바라보았다.
“……알겠어. 핸드폰 손에 쥐고 있어.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알겠지?”
“상화야, 나 애 아니야. 위험한 곳 가는 거 아니야. 걱정하지 마. 그냥 찾을 사람이 있어서 앉아 있다가 오는 것뿐이야.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몰라.”
그렇게 말한 것이 무색하게 재인은 몇 분 지나지 않아 찾으려던 사람을 바로 찾았다. 강선 호텔 칵테일 바에서 찾은 것이 아니었다.
요가원이 있는 남광 빌딩 1층 카페에 그 남자가 거짓말처럼 앉아 있었다.
* * *
“우리, 만난 적 있지 않나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을 걸어오는 재인을 바라보며 태서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제 앞에 나타난 여자를 마주하니 피식 웃음이 났다.
이렇게나 반가울 일인가.
태서가 이 카페에 와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여기 커피 맛이 좋아서도 아니었고, 이곳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윤재인이라는 여자가 궁금해서였다.
그렇다고 해서 재인을 만나 뭘 어떻게 해 볼 생각은 없었다.
태서는 아까 회사에서 나와 절화에 좋다는 영양제를 사서 다시 회사로 갔었다.
그사이 별로 나아진 것이 없어 보이는 꽃 상태를 살피고는 전문가인 장 실장에게 영양제를 맡기고 나온 것이 저녁 일곱 시가 훌쩍 넘어서였다.
“본부장님, 아직 식사 안 하셨으면…….”
“내 눈치 볼 것 없이 먹던 거 먹어요. 떡볶이 안 좋아합니다. 그리고 난 그만 다시 가 볼 겁니다.”
“네. 살펴 가십시오.”
“어지간하면 나 빼고 야근하지 말아요. 비서들만 남아서 일하면 먼저 퇴근한 나는 뭐가 됩니까.”
저녁을 먹지 않아 배가 고팠다. 하지만 이상하게 밥보다도 먼저 떠오른 것이 며칠 전 병원에서 봤던 윤재인의 얼굴이었다.
보고서에서는 멀쩡하다고 했지만, 혹시 다치지는 않았을지, 생채기라도 난 건 아닐지 염려가 됐다. 왜 염려가 드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멀리서 얼굴이나 볼까 하는 생각만으로 병원에 찾아갔던 것이다.
그런데 웬 마른 미역귀처럼 생긴 남자가 꽃다발을 든 채 몇 번이나 소란을 일으키다 병실 밖으로 쫓겨나는 것을 보았다.
혹시라도 병실 안에 무슨 문제라도 있을까, 혹은 제 도움이 필요할까 싶어서 다가갔다가 재인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말았다.
“이거 가지고 가세요. 어차피 버릴 거니까. 그리고…….”
“……고맙습니다.”
태어나 처음 받아 본 꽃다발이었다. 마른 미역귀 새끼가 환심을 사기 위해 들고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재인이 직접 그 꽃을 제 품에 안겨 주었다는 것이다.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환자복을 입은 채 말가니 저를 올려다보던 그 눈을 마주하자 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누구세요?”
병실 문 앞에서 그렇게 묻던 재인에게 태서는 하마터면 내가 그쪽 약혼자라고 대답할 뻔했다. 그랬으면 아마도 뺨 몇 대 맞고 별 미친놈을 다 본다며 마른미역과 같은 취급을 당했으리라.
사실 태서는 며칠째 그 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꽃다발을 볼 때마다 자신을 담고 있던 그 눈동자를 떠올렸다. 아니, 어제는 자기 전에도 그 눈을 떠올리며 뒤척였다.
예뻐서 그러나.
그러기엔 태서 주변을 맴도는 예쁜 여자들이 너무나 많았다. 예쁘다는 게 다분히 주관적인 기준이 있는 부분이기는 해도, 저마다 빼어난 매력과 미모를 자랑하는 여자들이었다.
그러니 단순히 윤재인의 뛰어난 미모만이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그러면 뭐지. 어쩌면 이어졌을지도 모를, 어긋난 인연에 대한 호기심일까.
그럴 수도 있다. 만약 지금의 윤재인이 태서의 약혼녀라고 자리에 나왔다면, 태서는 자신이 조유리를 대하듯 윤재인을 대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도대체 왜. 도대체 왜 그런 건데.
왜 윤재인은 특별한 건데.
왜 자꾸 윤재인 생각이 나는 건데.
태서는 생각에 잠겨 차도 없이 홀로 겨울 거리를 걸었다. 그렇게 그는 조금씩 빌딩 숲을 벗어났다. 하염없이 걷는 그의 걸음은 저도 모르게 남광 빌딩 1층으로 이어졌다.
“미친 새끼…….”
이래서는 윤재인이 치를 떠는 스토커랑 다를 게 뭐란 말인가.
이마를 짚은 채 헛웃음을 터뜨리던 태서가 정신을 차릴 겸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간 것은 충동적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 만큼 뜨거운 에스프레소 한 잔 주십시오.”
진한 에스프레소를 입에 머금으며 태서는 다시 생각을 이어 갔다. 농도 짙은 카페인이 혈관에 스며드는 것을 느끼고 있을 때, 윤재인을 향하는 제 관심의 이유가 될 수 있는 세 번째 명제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