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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아주 제대로 막장 (12/123)


#12. 아주 제대로 막장
2022.08.09.


조대훈이 제 딸을 아무 곳에나 시집보낼 리 없다. 분명히 날고 긴다는 재벌가에 혼담을 넣었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저 남자도 보통 남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도 현양 건설보다 규모가 큰 재벌가의 핏줄임이 틀림없다.

재벌가에 허울뿐인 약혼이나 결혼은 흔했다. 그래서 결혼을 앞두고도 서로 데면데면한 경우는 많았다. 때로는 이해관계를 따지며 서로를 무시하고 헐뜯고 싸우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남자는 유리를 무시했다. 그런데 유리는 화를 퍼붓지 못하고 참았다.

저보다 약한 사람에겐 한없이 강한 모습을 보이는 유리가 입을 꾹 다물었다는 것은, 그녀가 저 남자에게 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말이 되네.”

“뭐가. 뭐가 말이 되는데.”

궁금해서 눈을 동그랗게 뜬 상화를 보며 재인이 웃었다.


“그냥. 머릿속으로 드라마 한 편 찍고 있었어.”

“그 드라마, 막장이지.”

“응. 아주 제대로 막장.”

공감을 표현하는 상화의 뒤에서 다시금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밥 먹을 것도 아니면서 식당 한가운데 그러고 서서 소리 지르면 여러 사람에게 민폐입니다. 그렇게나 매너를 따지더니, 그쪽이야말로 매너를 모르시네. 공중도덕, 안 배웠습니까?”

재인은 조심스럽게 자신이 있는 방향 쪽으로 선 유리를 살폈다.

다행히 유리는 재인을 발견할 틈이 없어 보였다. 앉아 있음에도 어마어마한 위압감을 주는 커다란 남자를 노려보며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자존심을 죽이고 남자와 남자의 실장과 함께 앉아 밥을 먹자니, 남자는 대놓고 2인분의 음식만 주문했다.

그렇다고 그냥 가자니 뭔가 내키지 않는 모양이다. 하긴, 지금 나가면 식당 안 사람들의 시선으로 뒤통수가 따가울 테다.


“장 실장, 뭐 합니까. 식사합시다. 빨리 먹고 들어가서 할 일 많다고 닦달한 사람 누굽니까.”

비서를 채근하는 남자는 상당히 뻔뻔한 타입이었다. 재인은 한때 제게 들이대던 재벌가 2세나 3세들을 떠올려 보았다.

후원의 밤이나 자선 행사에서 재인에게 추근거리던 온갖 꼴사나운 남자 중에 저런 캐릭터는 없었다. 더군다나 저렇게 딱딱한 태도로 현양 건설의 외동딸로 알려진 유리를 대하는 남자라니.


“……후회하실 거예요.”

“그럴 리가. 후회할 짓은 애초에 하지 말자는 게 제 좌우명입니다. 그럼 이만. 식사가 나와서.”

한참이나 그 자리에서 남자를 노려보던 유리가 입술을 깨문 채 뒤돌았다. 그녀가 식당 밖으로 나가자마자 조용하던 식당 안이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다들 목소리를 낮춘 채 비슷한 얘기를 주고받기 때문이었다.


“여자 불쌍하다.”

“하나도 안 불쌍해.”

“아는 사이라며?”

“응 알지. 너무 잘 알아.”

“……싫어하는구나?”

“싫어하다 뿐이겠어?”

재인이 남자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고등어를 씹었다. 조유리가 당하는 것을 보고 나니 입맛이 되살아난 모양이다. 짭조름한 살코기가 비린내 없이 고소하게 부서졌다.


 

* * *



“맞지? 어제 꽃다발 그 남자.”

“맞는 거 같아.”

“뭘 ‘맞는 거 같아’야. 내가 볼 땐 확실해. 저런 비주얼 흔치 않아. 어제 병원에서 보고도 감탄했는데 아까 또 보니 더 잘생긴 듯. 야, 얼굴 보고 나니 싸가지 없이 말하는 것도 매력 있게 느껴지더라. 어제 볼 땐 그렇게나 근사하게 웃더니.”

재인은 식당을 나오기 전, 일부러 밥을 천천히 먹었다. 조유리에게 그런 엄청난 모멸감을 준 남자가 누구인지 궁금해서였다.

강태서라는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하자 나온 것은 그가 강선 그룹 총수 일가의 일원이라는 것뿐이었다. 이상하게도 사진 한 장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할 일 많다던 게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남자는 식사를 빠르게 끝냈다. 그리고 비서라는 사람과 함께 일어선 남자가 뒤도는 순간, 재인의 눈이 커졌다.

그 남자였다. 어제 병실을 잘못 찾아와 석동이 남기고 간 꽃다발을 받아 간 남자가 바로 조유리의 약혼자였다.


“잘못 찾아오셨나 봐요.”


“약혼녀 보러 왔습니다.”


“여기는 507호인데…….”


“그렇네요. 아무튼, 꽃 선물 고맙습니다.”

 
재인은 어제 병실 문 앞에서 남자를 맞닥뜨렸을 때를 떠올렸다. 그는 분명히 약혼녀를 보러 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유리가 같은 병원에 있었던 걸까.

그런데 약혼녀 병문안까지 챙기는 사람치고 조금 전의 태도는 너무나 차가웠다.

이해관계가 얽혀 있을 것이 분명한 약혼녀에게도 그렇게 차가운 남자에게 다가가는 게 쉬울까.


“어렵겠다.”

“너 자꾸 못 알아들을 혼잣말 할래? 너, 혹시 내가 저 남자 꼬시는 거 어렵겠다고 한 거야?”

“왜, 서상화. 네가 꼬시게?”

“아니. 난 못 올라갈 나무는 안 쳐다본다.”

“그 남자가 못 올라갈 나무로 보여?”

“하늘에서 동아줄이라도 내려오지 않는 이상은 올라갈 방법이 없어 보이더라.”

재인이 웃으며 상화의 팔짱을 낀 채 인파 속으로 스며들었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강남 거리는 수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재인은 사람들 사이를 걸으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단 접근부터 해야 했다. 그것부터 쉽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조유리처럼 예쁘고 배경 좋은 여자에게도 저렇게나 차갑게 구는 남자였다.

마음만 먹으면 잘나가는 연예인을 몇이나 끼고 놀 수 있는 재력을 가진 남자다. 그런 남자가 봐줄 건 외모뿐인 저에게 빠져 쉽게 파혼할 리 없다.

재인도 저가 예쁜 것은 알았다. 모를 리 없다. 거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평생을 숱하게 들어 온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재인은 예뻐서 좋은 점보다는 나쁜 점이 더 많았다. 너무나 사랑하는 엄마가 물려준 외모임에도 때로는 끔찍할 만큼 싫었다. 그래서 살면서 아름다운 외모로 덕을 볼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처음으로 제 외모를 이용해 무언가를 해 볼 생각이 든 것이 이복동생의 약혼자를 유혹하는 것이라니. 재인은 씁쓸하게 번지는 웃음을 머플러 속에 숨겼다.

* * *



“급히 찾으셨다고요. 죄송합니다. 잠시 개인적인 통화를 하느라 자리를 비웠습니다.”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와 통화를 하던 장 실장은 본부장님이 급히 찾으신다는 한 비서의 말에 부랴부랴 태서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무슨 일일까.

그는 회장의 불호령에 뒤늦게 본가로 향하던 날, 새똥이 떨어져 얼룩진 코트 대신 입을 코트를 고르겠다고 백화점에 들렀을 때도 한없이 느긋했던 사람이었다.

긴장한 장 실장이 두 손을 모으고 사무실 뒤쪽에서 나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마도 세면대에 물을 틀어 둔 모양이다.


“아, 오셨습니까. 일단 급한 대로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따라 해 보기는 했는데.”

“무엇을 따라서 했다는 말씀이신지……. 아, 주십시오.”

장 실장은 파티션 너머로 나타난 태서가 커다란 꽃다발이 담긴 꽃병을 들고 있음을 발견하고 손을 뻗었다.

태서는 본부장으로 부임하면서 받은 화초들이 죽든 살든 관심이 전혀 없었다. 물을 주는 한 비서에게 화초 따위 중요하지 않으니 다른 일을 하라고 지시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 죽은 화초들을 모두 버린 것이 얼마 전이었다. 그 후로 삭막한 사무실 공간에는 화초 대신 그림 몇 점이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이 꽃다발만큼은 다른 모양이다. 장 실장은 태서가 매일 화병의 물을 갈아 주고 있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시들어 가는 꽃다발은 며칠 전, 약혼녀를 만나러 간다며 퇴근했던 태서가 야근 중인 장 실장 앞에 다시 나타났을 때 들고 있던 것이었다.


“혹시 화병이 있습니까? 이 꽃다발을 꽂을 만한 크기의 화병이 필요합니다.”


“찾아보겠습니다.”


“없으면 꽃을 담을 만한 거 아무거나 가져와 봐요.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꽃잎이 조금 상한 것 같습니다.”


“네.”


“살려야 합니다.”

 
의학 드라마에서 중요한 수술을 앞둔 의사 뺨치게 비장한 표정을 짓는 태서에게, 장 실장은 제 어머니가 오래도록 꽃집을 운영했음을 알렸다. 그리고 자신도 그 일을 꽤 오래 도왔으니 맡겨 달라 말했다.

장 실장은 실로 오랜만에 솜씨를 발휘했다. 지나치게 화려한 꽃다발의 포장을 풀어 잎사귀들을 정리하고 아랫단을 잘라 낸 뒤 비서실 안쪽에 준비되어 있던 커다란 화병에 꽃을 꽂았다.

태서는 지금 그 꽃다발이 꽂힌 화병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장 실장이 손댔던 처음과는 다르게 꽃들이 삐죽빼죽 엉망으로 꽂혀 있었다.


“살려 내요.”

“……예?”

너무 당황한 나머지 되묻는 장 실장의 목소리가 꺾였다.


“받은 지 사흘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벌써 시들시들해서요. 찾아보니 수돗물 바로 받아 사용하지 말고 하루 두었다가 쓰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첫날, 그냥 수돗물 받아 꽂지 않았습니까? 그거 괜찮은 겁니까?”

이 유난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화초 따위 중요하지 않다던 건 다 거짓말처럼 호들갑을 떠는 태서는 진지하기만 했다.

장 실장이 황당해하는 사이에도 태서의 마음 급한 하소연은 계속되었다.


“이러다 다 시들겠습니다. 인터넷 찾아보니 락스나 십 원짜리 동전 몇 개를 넣으면 오래 간다는데 나한테 그런 게 있을 리 없습니다. 한 비서에게 물으니 한 비서도 없다고 하고, 혹시나 해서 화장실을 살폈는데 거기도 락스는 없더군요.”

“그래서…….”

“그래서 얼음 몇 조각을 넣었습니다. 얼음도 효과가 있다고 해서요. 살릴 수 있겠습니까? 장 실장, 대답해요.”

저 꽃이 뭐라고 직접 물을 갈아 주고, 시들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렇게나 안타까워하는 것일까. 답을 내릴 겨를도 없이 장 실장이 팔을 걷었다.


“해 보겠습니다.”

“살려야 합니다. 꼭 살려요. 몇 송이를 희생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쳐도, 대부분은 남아 있으면 좋겠습니다.”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꽃병을 들고 사무실을 나선 장 실장이 곧장 탕비실의 싱크대로 향했다. 그러자 눈치를 보고 있던 한 비서가 그녀의 뒤를 쫓았다.


“아까 회의 다녀오신 본부장님께서 갑자기 꽃병을 들고 뛰쳐나오셔서…….”

“가위 가져와요. 날이 가장 예리한 것으로.”

“아, 넵!”

장 실장은 쏟아지는 의문을 뒤로하고 화병을 꼼꼼하게 씻었다.


“사이다.”

“네?”

“사이다를, 아, 없지. 그러면 차가운 탄산수 세 병 가져와요.”

한 비서가 급하게 냉장고에서 태서가 즐겨 마시는 탄산수를 꺼내어 달려왔다.

장 실장이 깨끗하게 닦인 화병에 탄산수를 들이붓고 각설탕을 넣어 녹였다. 그러고는 초조하게 바라보는 한 비서의 곁에서 꽃의 줄기를 사선으로 잘라 내기 시작했다.


“장 실장님, 이렇게 한다고 꽃이 살아날까요?”

“해 볼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봐야죠.”

그리고 잠시 후, 꽃 되살리기 작업에 심혈을 기울인 장 실장이 한층 짧아진 꽃다발을 들고 본부장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가망이 있습니까?”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래도 얼어 있던 꽃이어서요. 그런데 본부장님. 개인적인 궁금함인데 원래 꽃을 좋아하셨습니까?”

“글쎄요.”

생각에 잠긴 태서를 보던 장 실장이 어깨를 으쓱하며 꽃다발을 내밀었다.


“지난번에 다 치우라고 하신 화분 중에 꽃 화분도 있었는데, 다시 들일까요?”

“왜요.”

“꽃을 예뻐하시는 것 같아서요.”

“필요 없습니다. 그 많은 화분을 다 누가 돌볼 겁니까. 꽃은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냉정하게 잘라내는 말에 장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서 꽃을 받아 든 태서가 제 책상 위 한쪽에 꽃병을 내려놓았다. 일하다가 언제든 고개 들면 시선이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나는 꽃을 예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이 꽃을 준 사람이 예쁩니다.”

“아…….”

장 실장이 아득해지는 기분에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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