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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아무래도 이상해 (11/123)


#11. 아무래도 이상해
2022.08.05.


그것은 과거에 배우 하나를 건드려 임신시킨 일이었다.

유리는 자신이 강태서의 약혼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날 밤, 어린 태서의 사진을 손에 꼭 쥔 채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문이 사실이었어?”


“상관없잖아. 당신 만나기 전에 있었던 일이고, 어차피 현양 건설 안주인은 당신이야.”


“애 있는 거 맞지? 애는 어떻게 할 건데!”


“윤세나 성격에 애 앞세워 나타나지는 않을 거니까 걱정할 것 없어. 그보다는 앞으로 유리 교육이나 똑바로 시켜. 강선이랑 사돈 맺는 게 보통 일인 줄 알아? 유리가 괜히 이상한 무리랑 어울리지 않게 관리 잘해.”

 
그때는 어린 나이에, 그리고 사진 속 태서의 잘생긴 모습에 빠져 흘려들었다.

그러다 중학생이 되어 가야금 콩쿠르를 준비하던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윤재인이라는 여자아이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 순간, 유리는 어린 날부터 시작된 부모의 말다툼이 제 앞의 예쁜 여자아이 때문임을 직감했다.


“무슨 생각 하는데 정신을 빼놓고 있어?”

“엄마.”

“응.”

유리가 등 마사지를 받으며 눈을 감고 있는 모친 승희를 향해 몸을 돌려 앉았다.


“아무래도 이상해.”

“뭐가.”

“……윤재인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

“……갑자기 그 이름이 왜 나와?”

승희가 몸을 일으켜 눈치를 주자 곁에 있던 숍 직원들이 모두 문을 닫고 사라졌다. 딸과 단둘만 남은 것을 확인한 승희가 미간을 찡그렸다.


“재수 없게.”

“좀 알아봐.”

“왜, 갑자기.”

“강태서가 윤재인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아.”

“태서 군이 걔에 대해 어떻게 알아? 그냥 옛날에 어디서 떠들던 소문 좀 들었겠지. 그리고 강태서가 뭐니? 곧 남편 될 사람을 그렇게 부르는 게 어디 있어.”

승희가 새로 다듬은 코랄빛 손톱을 또다시 입가로 가져가는 딸의 손목을 잡았다. 미간을 찡그리는 얼굴은 환갑을 코앞에 둔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고왔다.


“그리고 알면 어쩔 거야.”

다시 엎드린 승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눈을 감았다.


“걔는 뭣도 아니야. 그냥 얼굴 좀 반반한 것뿐이지. 미국에서 제 엄마랑 숨죽이고 살아가고 있을 애야. 넌 신경 쓸 거 없어.”

“그래도…….”

“자꾸 그런다. 태서 군도 생각이 있으면 그딴 거랑 어울릴 리가 없어. 널 두고 사생아 따위가 가당키나 하니?”

“그렇지, 엄마?”

“다시 들어와서 하던 거 마저 하라고 해. 얘는, 괜히 기분 잡치게.”

“응.”

유리가 문을 열고 눈짓하자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 두 명이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손톱 손질을 끝낸 유리가 가운을 벗고 승희의 옆 침대에 엎드리려는 참이었다.


“태서 군은 통 안 만나는 것 같더라?”

“……바쁜가 봐.”

“아무래도 한국 생활에 적응하랴, 일하랴 바쁠 거야. 너무 뭐라고 하지 말고. 듣자 하니 태서 군이 오래도록 혼자 외국에서 살아서 그런지 무뚝뚝한 면이 있다더라. 서운해하지 말고.”

“응.”

“남자들 원래 결혼 준비에 무심해. 그러니 네가 먼저 결혼 준비하겠다고 해. 약혼 기간도 길었는데 괜히 미뤄서 좋을 것 없어. 엄마는 가을쯤이 어떨까 싶은데. 얘, 생각난 김에 연락해 봐.”

“……응.”

자존심 높은 유리가 남자에게 먼저 연락하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유리는 자신이 접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음을 인정했다. 어린 나이에 처음 사진으로 본 태서에게 그야말로 푹 빠졌기 때문이다.

조유리의 남자 강태서는 그만큼 빛이 나는 사람이었다. 누구나 반할 만큼 멋지고 능력 있는 남자에게 유리가 제 인생을 걸기로 결심한 것은 당연했다.

그러니 지금의 불안은, 어쩌면 너무 잘난 남자를 곁에 둔 탓이리라.


“유리야, 손톱.”

“아, 응.”

또다시 저도 모르게 손톱을 짓씹고 있었나 보다. 길어지는 통화 연결음에 초조함을 느끼던 유리가 지그시 입술을 물 때였다.


―강태서입니다.

“조유리예요.”

―아……?

듣기 좋은 저음에 입꼬리를 올렸던 것도 잠깐이었다. 남자는 의외라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유리는 혹시 강태서가 제 번호를 몰랐던 것인가 의심했지만 곧 그 생각을 지웠다. 일하다가 바쁘면 화면을 확인하지 않고 전화를 받을 수도 있는 일이다.


“오늘 저녁에 시간 어떠세요? 같이 저녁 먹어요. 할 말도 있구요.”

―바쁩니다. 야근할 겁니다.

“좋아요. 오늘은 제가 갑자기 연락드렸으니까 봐드릴게요. 대신에 크리스마스이브는 비워 두세요. 그날도 바쁘시면 저 화낼 거예요.”

―내가 크리스마스이브에 바쁜 거랑 유리 씨가 무슨 상관입니까?

“저 태서 씨 약혼녀잖아요. 크리스마스이브에 기대해도 되는 거죠? 근사한 곳에서 밥 먹어요, 우리.”

―아,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약혼녀랑 밥 먹어야 하는 겁니까?

“태서 씨는 공부만 해서 연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나 봐요. 재미없다. 저 기분 좀 상하려고 하는데.”

한참 말이 없던 남자가 피식, 웃음을 흘리는 게 들렸다. 그것만으로도 유리는 쿵쾅거리는 제 심장 부근을 꾸욱 눌러야 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약혼녀랑 밥이라……. 좋은 거 가르쳐 줘서 고맙습니다.

“그러면 그날 만나는 거예요. 어디서 볼까요?”

―그냥 오늘 저녁에 잠깐 보죠. 그렇지 않아도 이달 안으로 유리 씨에게 연락하려고 했는데, 미룰 필요 없겠습니다.

역시. 이럴 줄 알았다. 태서 역시 저에게 관심이 있었다. 다만 일이 너무 바빠서 좀처럼 시간을 내지 못했던 거다. 이런 남자에게 괜히 자존심을 세울 필요는 없다.

그렇게 생각한 유리는 도도함을 내려놓고 그의 기분을 맞춰 주기로 했다. 어차피 제 남자가 될 강태서였다.


“좋아요. 제가 태서 씨 회사 근처로 갈게요. 일곱 시쯤 괜찮아요?”

―비서를 통해 시간과 장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따가 뵙죠.

매너 없이 먼저 전화를 끊은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부분은 나중에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유리는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뭐라니? 만나기로 했어?”

“응. 이따가 저녁 먹기로 했어. 연락한대.”

“그것 봐. 남자가 무뚝뚝하면 네가 밀어붙이면 되는 거야. 태서 군이 공부만 하고 일만 하느라 연애 머리라고는 없나 보다. 살살거리는 남자보다는 그런 남자가 오히려 같이 살기 편해.”

“응.”

유리가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엎드려 눈을 감았다. 그녀의 매끄러운 등 위로 아로마 오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 * *



“냉면에 만두 먹고 싶다니까.”

“그건 내일 먹어. 그래도 병원 다녀왔는데 두부는 먹어야지.”

“그건 교도소고.”

“……그렇네. 그래도 오늘은 따끈하게 두부찌개 먹자. 냉면 먹기에는 날이 너무 춥다. 회원님이 소개해 준 곳이야. 극찬하더라.”

퇴원한 날 저녁이었다. 재인은 상화의 팔짱을 끼고 빌딩 숲 사이의 골목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걷자 거짓말처럼 단독 주택가가 나타났다. 아주 작은 간판을 단 식당은 그 안쪽에 있었다.


“사장님, 여기 두부찌개 소 자 하나랑……. 야, 고등어 시킬까, 아니면 제육 시킬까?”

“고등어.”

“고등어구이 하나 주세요. 여자라고 밥 조금 주시면 안 돼요. 많이 많이 주세요.”

“그냥 백반집 같은데?”

“여기가 진짜 맛집이래. 강남 회사원들 사이에 입소문 난 곳이라더라. 점심시간에 여기 줄이 저 앞에 버스 정류장까지 이어진다나 봐.”

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저를 챙겼다. 큼직하게 썬 두부가 잔뜩 들어간 뻘건 찌개가 보글보글 끓으며 나왔다. 곧이어 큼직한 고등어가 노릇노릇하게 구워져 나왔다.


“야, 국물 예술.”

“어, 진짜네?”

“하, 고무줄 바지 입길 잘했다.”

상화의 호들갑에 재인이 킥킥 웃으며 보들보들한 두부를 호오호오 불 때였다.


“너무하시는 거 아니에요?”

화가 역력한 목소리에는 묘하게 애교가 섞여 있었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재인이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명품 투피스를 입고 그 위로 크림색 캐시미어 코트를 걸친 여자는 재인이 잘 아는 여자였다.

거의 10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지만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유리의 멸시와 혐오 가득한 눈총을 7년이나 받으며 살았으니 모를 수가 없다.

재인은 순간적으로 식당의 칸막이 안쪽으로 몸을 조금 물렸다. 유리를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직은 현양 건설 일가에 제가 한국에 와 있다는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됐다.


“왜? 아는 사람이야?”

“……응.”

“누군데?”

“돌아보지 마. 그냥 밥이나 먹자.”

입맛이 싹 달아났다. 재인은 자꾸만 떠오르는 옛일을 무시하려 애꿎은 고등어 살을 헤집었다. 그저 얼굴을 본 것뿐인데도 벌써 피가 서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뭐가 너무합니까?”

하지만 다시금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게다가 남자의 근사한 목소리는 분명히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우리 처음 같이 밥 먹는 자리라구요! 어떻게 저를 이런 곳으로 데려오실 수가 있어요? 그것도 비서 동행하에!”

“데려오다니? 나는 야근하다가 비서랑 저녁 먹으러 온 겁니다. 유리 씨가 할 말 있다면서 고집부려 여기까지 온 거 아닙니까?”

화가 잔뜩 난 유리의 목소리가 날카로운 데 반해 남자의 굵은 저음은 태연하기만 했다.


“그게 무슨…….”

“할 말 있으면 하시죠. 나는 밥 먹으면서 들을 테니.”

“태서 씨!”

“식당에서 시끄럽게 굴지 맙시다. 밥 먹으려면 시켜 먹고, 먹을 생각 없으면 가요.”

“뭐라구요?”

조유리의 말문을 막는 남자가 있다는 게 놀라웠다. 재인은 낮고 깊은 목소리로 유리를 차갑게 대하는 남자의 얼굴이 궁금했지만, 굳이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할 말 있다던 건 오래 걸리는 이야기입니까? 생각해 보니 내가 할 말은 전화로 해도 되는 일이라서.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전화로 할 걸 그랬습니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상화가 찌개 냄비 위로 상체를 숙이고 속삭였다.


“야, 뭔지는 몰라도 재미있다. 지금 이 식당 안 사람들 다 저 커플 싸우는 거에 귀 기울이고 있을걸? 아는 쪽이 여자야, 남자야?”

“여자.”

“그래? 아, 근데 나 저 남자 목소리 어디서 들어 본 거 같은데 기억이 안 나. 고3 때 밤마다 듣던 라디오 디제이랑 닮았단 말이지.”

재인은 조용히 상화가 덜어 준 찌개의 국물을 떠먹었다.


“하나만 물을게요. 강태서 씨, 약혼녀에 대한 배려는 없나요?”

“약혼녀에 대한 배려라…….”

두 남녀의 대화를 듣는 순간, 재인은 오래도록 고민하던 복수의 방향을 가리키는 실마리를 발견했다.

조대훈의 하나뿐인 딸로 알려진 조유리의 파혼. 그 이유가 조유리의 숨겨진 이복 언니 때문이라면.

막장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얘기였다. 재인으로서는 내키는 방법이 아니었다. 하지만 저와 제 어머니를 더럽다고 욕하던 조유리와 그녀의 친모인 지승희를 생각하면 기꺼이 해 볼 만했다.

더군다나 화목한 가정을 꾸리며 사는 척, 대외적 이미지를 중시하는 조대훈에게 큰 엿을 먹일 방법이기도 했다.


“바쁜 사람 겨우 시간 내서 밥 먹는데 찾아와 방해하는 건, 배려 있는 행동입니까?”

“…….”

“사장님.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장 실장, 두부찌개 괜찮죠? 여기 두부찌개 2인분 주십시오. 고등어구이도 같이 부탁드립니다. 물컵은 두 개면 될 것 같습니다.”

물컵 두 개만 달라는 말은 축객령이었다. 세상에 제 약혼녀를 저렇게 대하는 남자가 어디 있을까.


“아니지.”

“뭐가 아니야?”

“아, 아무것도 아니야.”

재인이 고개 저으며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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