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약혼녀 보러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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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약혼녀 보러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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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약혼녀 보러 왔습니다
2022.08.02.
상화가 자꾸만 울려 대는 업무용 공동 핸드폰을 엎으며 혀를 찼다.
아침부터 계속해서 전화해 대는 상대는 <강남 오석동 치과> 원장이었다.
“그건 저희가 결정할 일이고요.”
“내가 너희 같은 것들 속을 모를 것 같아? 불쌍한 우리 엄마 이용해 합의금 뜯어내서 한탕 하려는 꽃뱀X들 속셈을 모를 줄 아냐고!”
“무슨 헛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두고 봐, 이 사기꾼들. 내가 고개도 못 들고 다니게 만들 거야!”
적반하장도 유분수였다.
사과 전화해도 모자랄 판에 전화해서 듣기 싫은 하이 톤으로 신경질을 부려 대는데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이것 보세요. 피해자는 우리고, 그쪽이 가해자거든요? 그리고 이러는 것도 협박에 해당해요!”
“야, 너 지금 협박이라고 했어?”
“말조심하시죠. 다 녹음되고 있거든요?”
“……나이가 일흔이 넘으신 분입니다. 지금 식사도 못 하시고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고 있어요. 그러니 고소까지는 하지 말아 주시죠.”
“결정되면 연락드린다고 했잖아요. 이제 전화 그만하세요. 안 받을 거니까.”
상화는 병원에 도착하기 전까지 진절머리 나도록 끈질기게 굴었던 석동의 전화를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그러면 제가 오늘이라도 재인 씨 병원에 찾아뵙고 일의 마무리를 지어…….”
“오지 말라니까요? 재인이가 싫다잖아요! 당신 같으면 가해자 얼굴 마주하고 싶겠어요? 당신은 가해자 아들이잖아! 이 사달이 난 게 누구 때문인데! 전화 끊어요!”
가만히 있으면 선처해 주려고 그랬는데 자꾸만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인간이었다.
“지치지도 않나 봐. 찰거머리 같은 인간.”
“상화야, 그냥 내가 전화받을게.”
“아냐. 넌 그만 상대해. 엮여서 좋은 거 없어. 근데 정말 내일 퇴원하게? 이렇게 빨리?”
“내가 진짜 사기꾼도 아니고. 뭐 하러 병원에 있어. 어차피 선처하기로 정했는데.”
“그래도.”
“좀이 쑤셔 죽겠어. 밍밍한 병원 밥도 맛없고. 우리 내일 냉면에 만두 먹자.”
“야, 밖에 엄청 추워.”
“추울 때 먹어야지. 답답해서 안 되겠어. 가는 거다? 응?”
못 이기는 척 고개 끄덕인 상화가 일어섰다.
“내일 퇴원 가능한지 물어보고 올게.”
상화가 나간 뒤에도 업무용 핸드폰은 끈질기게 울려 댔다. 재인이 한숨 쉬며 제 핸드폰을 꺼내어 들었다.
사진첩의 <사랑하는 엄마> 앨범을 선택하자 나타난 것은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밝게 웃는 윤세나였다.
“엄마. 엄마 딸 이러고 산다.”
재인이 푸스스 웃으며 화면 속 세나의 뺨을 매만졌다.
세상 제일 예뻤던 엄마는 늘 한국을 그리워했다. 하지만 그녀가 죽음을 앞두고도 한국에 올 수 없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소중한 딸, 재인을 지키기 위해서.
때마침 상화가 조금 전 켜 놓고 나간 TV에 복수의 대상이 비쳤다.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쳐 놓고 멀쩡하게 잘 사는 꼴을 보고 있자니 짓씹은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한 시사 예능 프로그램에 초대되어 나온 남자는 기업의 사회 공헌의 방도를 오랜 기간 모색한 끝에 10년 전부터 미혼모 가정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사실 그 전에 언론을 통해 회장님을 뵀을 때는 뭔가 냉철한, 그런 이미지가 컸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실제 대화를 나눠 보니 정말 소탈하시네요.>
<아무래도 일할 때는 표정이 딱딱하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하지만 저도 집에서는 아내 잔소리가 두려운, 평범한 중년 남잡니다.>
화면을 노려보던 재인이 서둘러 TV를 껐다.
잘도 뻔뻔한 낯짝으로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알고는 있었지만 저 인간은 정말 인간 같지도 않다. 갑자기 속이 뒤틀렸다.
* * *
“나가라는 말 안 들려요? 당신이나 당신 어머니나 얼굴 보기 싫댔잖아요!”
저녁 시간이 막 지났을 무렵, 병실이 어디인지는 어떻게 알아냈는지 석동이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찾아왔다.
쫓아냈는데도 자꾸만 귀찮게 하는 게 30분 사이 벌써 세 번째였다. 마침 요가원으로 가려던 상화가 그와 맞닥뜨리고는 목에 핏대 세워 막아 내는 중이었다.
“좀 만납시다! 내가 꽃까지 사서 들고 왔는데!”
“꽃 사 온 게 뭐라고! 안 나가요?”
상화는 환자복을 입고 있어도 초췌하기는커녕 청순하기만 한 재인에게 향하는 석동의 시선을 꼼꼼히 차단했다.
“재인 씨! 우리 이러지 말고 직접 얼굴 보고 얘기합시다. 예?”
“우리 재인이가 그쪽 얼굴을 왜 봐요? 나가요, 빨리!”
한참의 실랑이 끝에 상화의 손아귀에서 휘청이던 남자가 쫓겨났다. 들고 온 꽃다발은 바닥에 떨어뜨린 채였다.
“어휴, 한국 오자마자 저런 거머리가 들러붙을 줄 누가 알았니? 재인아, 너 진짜 굿 한번 하자. 우리 배 여사가 매년 찾는 무당이 있는데…….”
“네 팔자에 쓸 만한 남자는 한 놈도 없다고 했다던 그 무당?”
“야.”
웃음을 터뜨리는 재인의 앞에서 상화가 눈을 흘기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이번엔 그래도 노크는 한다. 아, 저 진상 진짜.”
“상화 넌 가만히 있어. 내가 얘기할게. 저 꽃도 꼴 보기 싫은데 이참에 저것도 들고 가라고 해야겠어.”
재인이 문 앞에 내팽개쳐져 있던 꽃다발을 들어 드르륵, 미닫이문을 열었다. 그리고 눈앞에 선 남자를 때리듯 꽃다발을 내밀었다.
“이거 가지고 가세요. 어차피 버릴 거니까. 그리고…….”
“고맙습니다.”
오석동 원장의 듣기 싫게 신경질적인 하이 톤이 아니었다. 울림 있는 목소리는 낮고도 깊었다.
앞에 보이는 건 옹졸하고 좀스럽게 생긴 석동의 얼굴이 아니었다.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의 드넓은 가슴팍에 꽃다발이 안겨 있었다.
폐에 가득 스며 퍼지는 것은 석동의 곁에만 가면 맡아지던 진한 향수 냄새가 아닌, 답답함을 잊게 하는 숲 향기였다.
재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잘생긴 외모 때문에 저만큼이나 고생깨나 했을 것 같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누구세요?”
커다란 눈을 깜빡이는 재인을 향해 슬쩍 고개를 기울인 남자가 근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게. 누구세요?”
재인의 뒤로 호기심 어린 눈빛의 상화가 붙어 섰다.
상화는 감탄 중이었다. 최근에 마른 한치 같은 석동만 상대하다가 봐서 그런지 남자의 잘생김이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꽃다발을 든 남자는 꽃보다 눈부셨다. 어찌나 훤칠한지 키 175cm의 상화가 한참이나 목을 꺾어 올려다봐야 했다. 아래에서 바로 보이는 목울대나 턱선이 기가 막혔다.
“아.”
재인과 한참이나 눈을 맞추고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상화는 저도 모르게 재인의 양쪽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여기가.”
“네?”
재인의 되물음에 남자가 몸을 뒤로 슬쩍 뺐다. 그러고는 문 옆에 적힌, 가운데 글자가 별 표로 가려진 환자 이름 <윤*인>을 확인했다.
“잘못 찾아오셨나 봐요.”
“약혼녀 보러 왔습니다.”
“여기는 507호인데…….”
“그렇네요.”
남자는 미소를 거두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더니 고개를 슬쩍 기울여 재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었다.
마치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세세하게 살피는 것만 같았다.
당황스러운 상황에 재인과 상화가 말도 못 하고 남자를 바라보는 사이, 스캔을 마친 남자가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튼, 꽃 선물 고맙습니다.”
“어, 그건…….”
“어차피 버릴 거 아니었습니까?”
“그건 맞는데요.”
“그럼.”
꽃다발을 들어 보이며 만족한 듯 미소 지은 남자가 고개를 까닥였다. 미닫이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남자는 꽃을 든 채 서 있었다.
“뭐지?”
“그러게. 뭐야? 병실 잘못 찾아온 건가?”
돌아선 재인과 눈을 마주친 상화가 다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하지만 화보를 찢고 나타난 것 같던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 * *
“요즘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세요? 스톤 올리기에는 손톱이 너무 많이 망가졌어요. 다 물어뜯으셔서 짧게 깎아 내야 할 것 같아요.”
“그냥 깔끔하게만 다듬어요. 튀지 않는 색으로.”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직원에게 손을 맡긴 유리가 생각에 잠겼다.
강태서를 만난 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자신을 만난 뒤 그가 바로 결혼을 추진할 거라던 예상은 빗나갔다.
그는 연락 한번 없었다.
‘……많이 바쁘니까 그렇지.’
부친인 조대훈을 보며 유리는 회사를 꾸려 나가는 일이 보통 바쁜 게 아님을 알고 있었다. 강태서가 자신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할 거라는 생각 또한 전혀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현양 건설의 외동딸로 공주님처럼 떠받들어지며 자랐다.
제법 아름다운 얼굴 덕에 인기도 많았다. 거기다 특유의 새침한 성격 탓에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분위기까지 더해졌다.
유리는 일곱 살 때 처음으로 자신에게 약혼자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부모님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당연했다.
“너로구나. 우리 태서 약혼녀가.”
“……네?”
“이름이 뭐지?”
“조유리입니다.”
“예쁜 이름이구나. 바르게 커야 한다.”
부친을 따라 참석했던 강선 그룹의 자선 바자회 자리였다. 강선 그룹의 고(故) 강선일 회장의 아내이자 강선 아트 센터의 관장인 임홍진 여사가 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약혼녀요?”
“그래. 결혼을 약속했다는 뜻이란다. 우리 태서 할아버지랑, 돌아가신 네 할아버지가 약속했다는구나.”
“저는 처음 들어요.”
“그럴 거야. 그때는 너 태어나기도 전이었으니. 태어나지도 않은 손녀딸을 그렇게나 기다리셨는데, 이렇게나 잘 자란 걸 보면 유리네 할아버지가 참 좋아하시겠어.”
그때 유리의 곁에서 처음 듣는다는 표정을 겨우 감추며 허허 웃던 조대훈은 상황을 파악하고는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께서 살아 계셨다면 분명히 유리를 많이 예뻐했을 겁니다. 그런데 여사님, 태서 군은 언제쯤 한국에 들어오는지요?”
“우리 태서야 방학 때 잠깐 들어오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제 어미 아비는 애 공부를 다 외국에서 시킬 생각인 모양이야.”
“아…….”
“걱정하지 말게. 태서 할아버지의 약속은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 서두를 것 없지 않나. 나중에 애들 다 크고 나면 그때 다시 얘기함세.”
“네.”
영국에서 유학 중이라는 약혼자는 강선 그룹 강신재 회장의 외동아들이었다.
자신이 그 유명한 강선 그룹의 예비 며느리가 될 거라는 것을 알게 된 유리는 그때부터 엄한 아버지의 지시를 철저히 따랐다.
태서가 미국의 대학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유리 역시 그 대학에 가고 싶어 앓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던 것은 비단 모자란 성적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야금을 전공하는 그녀가 미국의 대학에서 배울 것이라고는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제 약혼자의 곁으로 갈 명분이 없던 유리는 그저 가만히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야, 넌 뭔데 그렇게 콧대가 높아?”
“까부네. 같지도 않은 게.”
“조유리. 너도 나랑 사귈 마음 있는 거 아니었어? 그래서 나랑 다닌 거 아니었냐고!”
“자처해서 내 비서 역할 다 해 주니 편해서 같이 다녔지. 너 따위가 그런 착각 하고 있는 줄 알았으면 진작 말해 줄걸.”
“……뭐라고?”
“너, 내 가방 셔틀이었어.”
유리가 열받게 한 남자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녀는 필요할 때마다 남자들과 어울리기는 했지만, 자신이 강선의 예비 며느리임을 잊어 본 적이 없다.
우아하고 고고한 태도로 얼굴 한번 마주한 적 없는 태서를 만날 날을 기다렸다. 오직 강태서만 바라며 급이 떨어지는 것들을 적절히 이용하고 무시하며 살아온 지난날이었다.
그런데 불안했다. 며칠 전, 태어나 처음으로 만난 약혼자가 뜬금없이 윤재인에 대해 언급했기 때문이다.
“뭔가 알고 있는 게 분명한데.”
세상에 딱 세 사람만 아는 비밀이라고 생각했다. 완벽한 것 같은 아빠 조대훈의 약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