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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예쁜 게 죄다 (9/123)


#9. 예쁜 게 죄다
2022.07.29.


재인은 타이밍 좋게 고개 숙여 위로 올려 묶은 머리채를 들이밀었다.

미국에서 카페 아르바이트할 때 웬 임산부가 찾아와서 재인의 머리채를 잡은 적이 있었다. 여자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남자의 이름을 대며, 재인이 자기 남편을 꾀었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재인은 그때 그녀에게 머리칼을 뜯기며 깨달았다. 몇 가닥 어설프게 잡히느니 머리카락 전체를 내주는 것이 훨씬 덜 아프다는 것을. 뽑히기도 덜 뽑힌다는 것을.

마른 나무뿌리처럼 질겨 보이는 손이 한 덩어리로 묶어 올린 재인의 머리채를 잡는 순간이었다.


“꺄아아아악!”

재인이 부러 데시벨을 높여 소리 지르며 상화가 선 방향을 확인했다.

재인과 친하게 지내며 여러 번 이런 상황을 겪은 상화답게,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어 침착하게 증거가 될 영상을 남기는 중이었다.

됐다.

재인은 광순이 휘두르는 대로 흔들렸다.

아니, 사실은 더 열심히 이리저리 몸을 휘청거렸다. 광순의 힘에 이끌려 몸을 못 가누는 척하며 소리를 질러 댔다.


“왜 이러세요!”

“왜 이래? 왜 이래애? 이래서 못 배워 먹은 것들은 티가 나! 애미 애비 없이 자랐다더니, 대학도 다니다 말았다더니!”

“이러지 마세, 악! 그만, 그만하세요!”

재인이 광순을 말리는 척하며 팔을 내저었다.

자신을 방어하는 척하며 자신의 머리채를 쥔 광순의 손을 움켜쥐었다.


“생긴 건 불여시 같은 게, 감히 누구를 상대로 꽃뱀 짓을 하려고 그랬어, 어?”

“아파요, 너무 아파요! 여사님, 제발 그만…….”

망할 것의 기를 눌렀다는 생각에 흥분한 광순은 재인의 저항에 제 옷 소매가 뜯겨 나가는 것도 몰랐다. 그토록 아끼던 진주 목걸이가 끊어져 바닥에 흩어진 것도 알지 못했다.

거기다 운동이라고는 통 안 하던 광순이었다. 과한 동작과 악다구니로 인해 머리카락은 죄다 흐트러졌고, 카랑카랑하던 목소리도 꺽꺽, 쉰 소리가 났다.

오로지 아들 하나 위하는 마음에 처음으로 교양을 내려놓고 덤벼든 그녀였다. 제 성질을 못 이겨 패악을 부려 대느라 당장 오늘 밤부터 근육통에 시달릴 것은 예상할 수도 없었다.


“어떡해, 어떡해.”

“경찰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불렀어요! 금방 온다고 했어요!”

광순의 악다구니 사이에 요가원 회원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재인이 이를 악물어 아픔을 참아 내며 눈을 감았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경찰관이 올 때까지 조금만 더.

그런데 광순은 싸움에 소질이 없는 모양이었다. 힘에 부치는지, 힘겹게 잡고 흔들던 재인의 머리채를 놓쳤다. 그 순간 재인은 쿠당탕,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저 멀리 나동그라지듯이 쓰러졌다.

광순이 패대기친 것이 아니었다. 재인이 중심을 잃고 쓰러지며 티 나지 않게 제 발로 멀어진 탓이었다.


“꺄악!”

“재인아! 괜찮아?”

타이밍 좋게 상화가 재인에게 뛰어왔다.

재인은 잘못이 없다는 것, 끝까지 공손하게 대했다는 것, 일방적인 폭행에 방어하려 했을 뿐이라는 증거가 될 만한 영상은 이미 충분했다.

상화가 광순을 쏘아보며 쓰러진 재인을 일으켜 세우려는데 재인이 얼굴을 찡그렸다.


“왜 그래? 재인아, 어디 아파?”

상화가 흐느끼는 재인의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는 척하며 더 엉망으로 만들었다. 할리우드 액션을 선보이며 쓰러진 재인이지만, 우악스러운 광순을 보며 혹시 다쳤을까 봐 걱정된 것은 사실이었다.

재인은 멀쩡했다. 무용과 요가를 통해 십수 년간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었다. 요령 좋게 쓰러진 탓에 몸 어느 한 곳도 다치지 않았다. 하지만 재인은 멀쩡한 팔꿈치를 감싸 잡았다.


“앗, 팔, 팔꿈치 인대가 늘어났나 봐…….”

“아파? 어디 봐.”

“흐, 흐으…….”

“그렇게 아파? 팔 부러진 거 아니야?”

상화의 호들갑에 바닥에 흩어진 진주알을 모으던 광순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 이게 어디서 쌩쑈를 하고 지랄이야! 내가 언제 팔을 부러뜨렸다고!”

“여사님! 정말 왜 이러세요! 수업 중에 이렇게 오셔서 근거 없이 이러시면 제가 영업 방해로 고소할 수도 있어요!”

반쯤 누운 재인을 막아서고 나선 상화의 대거리에 광순의 눈이 또다시 뒤집혔다.


“하! 영업 방해? 고소해! 누가 고소하지 말래? 못 배워서 법도 모르는 것들이! 변호사 선임할 돈도 없는 그지들 주제에!”

“정말 말씀이 너무 지나치……. 재인아, 재인아!”

막말을 내뱉는 광순의 뒤로 다가오는 경찰관 세 명을 발견한 재인은 아예 바닥에 쓰러졌다.

잡혔던 머리채가 화끈거렸지만, 잔뜩 흐트러졌을 뿐이다. 야무지게 묶어 틀어 올린 탓에 뽑혀 나간 머리카락은 다행히도 거의 없었다.

상화가 급하게 119를 부르고 수많은 회원이 경찰에 목격자를 자청하는 동안, 재인은 평온하게 눈을 감고 몸에 힘을 뺐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광순은 제가 아껴 마지않는 모피 코트의 소매 두 쪽이 다 분리되어 너덜너덜해진 것을 알아챘다. 혀를 차며 떨어진 소매 한쪽 끝을 추어올리려던 때였다.

문득 제 앞을 막아선 무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엄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두 명의 경찰관을 발견했다.


“아니, 그러니까…….”

자신을 향하는 사람들의 시선에 섞인 혐오를 느낀 그녀의 입이 절로 다물렸다.

문득 무서워졌다. 덜컥 겁이 났다.

그녀의 뿌연 동공이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 * *



“혼자 수업 다 해서 어떡해.”

“구인 광고 냈어.”

“미안해.”

“어차피 우리 둘로는 안 되겠다고, 한 명 더 뽑을까 고민했던 건데 뭐.”

“그건 그렇네.”

“예쁜 게 죄다, 정말. 내가 8년째 널 보며 느낀다. 나를 이렇게나 평범하게 낳아 주신 배 여사에게 정말이지 매일 감사함을 느끼거든. 야, 너도 먹어. 엄청나게 달아.”

상화가 재인의 곁에서 귤을 까먹다가 귤 몇 개를 내밀었다. 병원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재인이 킥킥 웃으며 귤을 받아 들었다.


“나, 이쪽으로 소질이 있나 봐. 네 생각에도 나 좀 자연스럽게 쓰러지지 않았어?”

“이쪽으로 소질 있어서 뭐 하게. 보험 사기라도 치게? 아예 미모 살려서 범죄의 길로 들어서려고?”

“아, 정말이지 얌전하게 살고 싶다.”

“그런데 세상이 안 도와줘? 너 그것도 범죄자들 단골 멘트인 거 알지?”

재인이 고개를 끄덕이니 상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고소까지는 안 하려고.”

“왜? 이참에 고소를 빌미로 합의금 왕창 받아 내지. 그 할머니 돈 무서워서라도 다시는 못 쫓아오게.”

“그러면 진짜 범죄자 같잖아.”

“그것도 그러네.”

“내가 진짜 엄청나게 다친 것도 아니잖아. 그 할머니 나이도 있고. 그만큼 내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싶지도 않아. 그냥, 몇 번 겪어 보니 그런 인간들한테는 무대응이 제일 낫더라.”

선처를 결정한 재인을 바라보던 상화가 으이그, 소리를 내고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의 앞에 귤 하나를 더 내밀었다.


“그래. 네 마음 편한 대로 해. 경찰이 그러더라. 증인도, 증거도 확실해서 너는 뭐 대답할 것도 없겠대. 내일 방문해서 이것저것 묻는다는 것도 그냥 다 형식적일 거라더라.”

“응.”

“그 할머니가 자기도 피해자라고, 경찰서에 가서 쓰러지는 시늉 했다더라.”

“진짜 쓰러진 거 아니고?”

“응. 그건 아닌가 봐. 귀하신 아드님 오니까 벌떡 일어나 울더래. 세상 억울하다고, 사기꾼 년들한테 걸려서 자기처럼 교양 있고 착한 사람이 경찰서에 다 와 본다고. 교양 두 번만 있었다가는 진짜 우리 재인이 잡겠다. 그치?”

재인이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정말이지 굿이라도 해야 할까.

상화의 앞에서 웃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재인은 이런 상황이 끔찍하리만큼 지긋지긋했다.

* * *

장 실장이 파안대소하는 태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렇게나 재미있을까.

얼마나 재미있는지 페이지를 뒤로 넘겨 같은 부분을 다시 보고 또 웃기를 벌써 세 번째 반복하고 있었다.


“본부장님, 그게 그렇게 웃을 일만은 아닙니다.”

“안 웃깁니까? 아, 난 미치겠는데. 특히 이 부분이 감명 깊습니다. 피해자보다 더 엉망인 꼴의 가해자가 아들을 만나 눈물을 흘렸다는 부분요.”

태서는 장 실장이 두 번째로 건넨 보고서를 읽는 중이었다. 보고서에는 요가원에서 있었던 촌극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윤재인이 현재 병원에 입원 중이며 가해자는 머리에 끈을 싸맨 채 경찰 조사 중임이 쓰여 있었다.


“아, 내 약혼녀 성격 보통 아니네. 그래서 또 마음에 들고.”

“……약혼녀라고 하셨습니까?”

“이 바닥에 내 약혼녀가 현양 건설 조대훈 대표의 딸인 거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고. 장 실장님도 조사하셨으면 아실 텐데요. 내 진짜 약혼녀가 누구인지.”

장 실장은 말을 아꼈다.

알아본 결과, 윤재인은 조대훈의 딸이 맞았다. 그것도 장녀였다. 조대훈은 캐면 캘수록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었다.


“정말 약혼녀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본부장님의 결혼 상대로 보기엔 지금 현양 건설은…….”

“알죠. 개차반인 거.”

윤재인을 가리켜 약혼녀라고 칭하기는 했지만 장난스러운 호칭일 뿐이었다.

무엇보다도 태서는 아직 결혼 생각이 없었다. 더군다나 윤재인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루어진 선대 회장끼리의 약속이라니. 지킬 생각도 없었다.

손익 계산을 철저하게 할 줄 아는 그였다. 그런 그가 현양이라는, 기우는 배에 탈 생각이 있을 리 만무하다. 더욱이 그 배를 고쳐 짊어질 생각도 전혀 없었다.

그런데 윤재인에 관해 알게 되는 것은 즐거웠다. 그녀가 주제 파악 못 하고 껄떡대는 남자들에게 철벽을 세우는 것이, 같잖게 구는 대상에게 사이다를 날리는 것이 무척이나 기분 좋았다.


“그런데 왜…….”

“글쎄요. 그냥, 그러고 싶네요. 고소는 어떻게 진행될 것 같습니까.”

“선처할 듯합니다.”

“흠, 그건 마음에 안 드는데. 내 약혼녀는 지나치게 관대하시네.”

“아무래도 가해자 나이가 있다 보니…….”

“가해자 나이 봐주다 보면 우리나라 교도소 텅텅 빌 겁니다.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죠.”

그렇게 말한 태서가 몸을 일으켰다. 며칠 전 백화점에서 급하게 구매한 새까만 롱 코트를 맵시 있게 걸치고는 가죽 장갑을 꼈다. P사의 은빛 시계가 그의 손목에서 빛났다.


“강선 커머스 차선웅 대표와 저녁 식사는 한 시간 후로 예정되어 있습니다만. 벌써 출발하십니까?”

강선 화학 대표 차선웅은 태서 바로 아래 이복동생인 차무영의 양부였다. 말이 양부지, 실제로는 외삼촌과 조카 사이인 그들의 집안도 들여다보면 드라마 같은 막장이 따로 없었다.


“왜 자꾸 나한테 밥 먹자는 거야. 장 실장도 알듯이 내가 그 인간이랑 밥 먹을 사이는 아니잖아요. 거기 안 갑니다.”

“그럼 어딜…….”

평소와 다름없이 완벽한 옷매무새를 확인한 태서가 싱긋이 웃었다.


“나, 좀 괜찮아 보입니까?”

그가 한쪽 눈을 슬쩍 찡그리듯 감고 웃을 때마다 윙크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장 실장은 잠시 멍해진 시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입니다. 처음으로 약혼녀를 만나러 가려니 조금 긴장이 되네요.”

“네……?”

“병원에 있다는데 괜찮은지는 봐야죠. 거기다 승리도 축하해야 하고.”

“본부장님!”

“장 실장, 퇴근 후 운동하러 가는 것 잊지 말아요. 몸만 축나는 야근, 적당히 합시다. 먼저 퇴근합니다.”

쿨내를 풍기며 멀어지는 태서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던 장 실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 줄 제대로 선 거 맞지……?”

혼잣말과 함께 터져 나온 것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아니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맹수를 초식 동물 우리에 풀어놓은 기분이었다.

장 실장의 생각에 윤재인이 육식 동물이 아닌 것은 명백했다. 재인은 아주 영리하고 아름다운 초식 동물이었다. 굳이 고르자면 꽃사슴이랄까.

다만 육식 동물이 방심했을 때 회심의 킥을 날리고 도망갈 수도 있을 만큼 성깔 있는 사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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