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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주제도 모르고 (8/123)


#8. 주제도 모르고
2022.07.26.


급하게 산 코트는 그럭저럭 괜찮은 듯했다. 옷매무새를 확인하던 태서는 매장 가운데 소파에 앉아 거울을 통해 저를 바라보는 남자를 발견했다.

남자는 작은 눈을 홉뜬 채 입을 헤벌리고 있었다. 절로 말라비틀어진 멸치가 떠오르는 인상이었다. 커피 잔 들 힘도 없는지 부들부들 떠는 팔은 앙상한 나뭇가지를 연상케 했다.


“본부장님, 혹시 저 뒤쪽에……. 아시는 분입니까?”

“모릅니다.”

남자의 시선은 곁에 선 장 실장마저 눈치챌 만큼 집요했다. 한번 의식하기 시작하자 자꾸만 거슬렸다. 태서가 짜증을 누르느라 미간을 슬쩍 찡그렸을 때였다.


“고객님. 더러워진 코트는 저희에게 주십시오. 세탁해서 댁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정말 잘 어울리세요. 고객님께서 입으시니 어느 한 곳도 손볼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조금 과하게 느껴지는 직원들의 응대에 태서는 곧 남자의 존재를 지워 냈다.


“본부장님, 조금 더 보시겠습니까? 아무래도 한 매니저를…….”

“부를 필요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코트 한 벌 사는 데 장 실장이 따라온 것도 과합니다. 이걸로 하죠.”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장 실장에게 선을 그은 태서가 어깨를 쭉 펴고 섰다. 직원이 가봉된 주머니와 뒤트임 부분을 정리하기 위해 다가올 때였다.


“여기요! 수선 맡긴 코트 좀 입어 보겠습니다.”

조금은 사나운 외침에 태서의 시선이 다시금 남자를 향했다.


“네, 고객님. 바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그의 곁에 서 있던 직원 중 한 명이 남자의 요청에 매장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앉아 커피를 홀짝이던 남자가 입을 삐쭉이며 일어섰다.

남자는 매장을 휘휘 둘러보는 척하더니 이내 태서의 곁에 와서 섰다. 그러고는 다른 직원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제가 코트 살 때 분명히 마지막 하나 남은 코트라고 하지 않았나요?”

“아……. 고객님, 혼동을 드려 죄송합니다. 다른 라인의 상품으로 고객님께서 구매하신 제품은 캐시미어 50%가 함유된 제품입니다.”

“그럼 저건…….”

“100% 캐시미어 소재로 수제 제작하는 제품으로 프리미엄 라인입니다.”

“……프리미엄 라인이 있다는 걸 진작 알았다면 저걸 샀을 것 아닙니까. L 사이즈로 보여 주시죠. 아니, 그냥 바로 사겠습니다.”

태서는 미간을 찡그린 채 직원이 조심스럽게 실밥 뜯는 것을 바라보았다. 시선 끝에 제가 입은 옷을 가리키는 남자의 창백한 손끝이 덜덜 떨리는 것이 보였다.

난감한 표정을 짓는 직원을 보니 대충 상황이 그려졌다.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매장에 들어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VVIP만 구매할 수 있는 품목이 있다는 걸 모르는 남자가 오기를 부리는 듯했다.


“고객님,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말씀하신 제품은 지금 다른 고객님께서 보고 계신 것이 마지막입니다.”

직원이 둘러댄 안내를 남자가 믿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상황이 상당히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태서가 입은 코트를 한동안 노려보던 남자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성큼, 태서의 곁에 붙어 섰다.

오랜 시간 외국에서 생활한 태서로서는 타인의 퍼스널 스페이스(타인에게 침범당했을 때 불편함을 느끼는 개인적 영역)를 존중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랬기에 지금 과하게 가까이 다가선 남자가 불쾌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장 실장이 나서기도 전에 짜증을 담뿍 담은 눈으로 남자를 내려다본 것은 그래서였다. 다른 거울을 두고도 굳이 제 옆에 서서 한쪽 팔을 뻗어 허우적대는 남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더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졌다. 태서가 팔을 뻗어 코트 소매 아래로 드러난 시계를 확인했을 때였다.


“헉……!”

바로 곁에서 들려온 외마디 비명은 숨이 넘어갈 듯 긴박했다. 태서가 짙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제야 계속해서 허공을 휘젓던 남자의 팔이 태서의 눈에 들어왔다.

가느다란 손목에 채워진 것은 R사의 시계였다. 아무래도 남자는 번쩍이는 금색 메탈 밴드와 상앗빛의 시계판을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것도 좋은 시계였다. 다만 지금 태서가 차고 있는 P사 시계 가격의 십분의 일 정도는 될까.

태서의 시계는 소형 아파트 한 채 가격과 맞먹는 한정판 모델이었다. 시계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제품이었다. 남자는 태서의 시계를 바로 알아본 듯했다.

태서의 시계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동안 넋을 놓고 있던 남자가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입고 있던 니트 티셔츠 소매 끝을 잡아당겨 시계를 숨기는 남자의 어깨는 축 처진 채였다.


“문제, 있습니까?”

“아, 아뇨……. 없습니다…….”

본의 아니게 남자의 기를 죽인 꼴이 되었지만, 어쩐지 웃음이 났다. 태서는 입술을 꾹 깨물어 웃음을 참고 다시 반듯하게 서서 거울을 응시했다.


“고객님, 착용 도와드리겠습니다.”

풀 죽은 얼굴을 한 남자가 소파를 향해 몸을 돌리려던 때였다. 매장 안쪽으로 들어갔던 직원이 수선된 코트를 들고나와 그에게 내밀었다.


“아, 네……. 아, 아…….”

얼떨결에 소매에 팔을 꿰어 넣어 코트를 입은 남자는 이내 제 행동을 후회하는 모양새였다. 그러고 보니 체격이 전혀 다른 두 남자가 비슷한 옷을 입고 거울 앞에 나란히 선 상황이었다.

잘난 상사와 그 옆에 선 못난 남자가 자연스럽게 비교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장 실장이 고개를 돌린 채 과하게 헛기침해댔다. 웃음을 숨기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남자는 차마 거울을 바로 보지 못하고 곁에 선 태서만 흘끔거렸다. 그러다가 입술을 비죽 내밀었는데, 그때마다 못남이 두드러졌다.


“요청하신 대로 소매 기장과 어깨너비를 줄였습니다. 불편하신 점은 없으십니까?”

“……네.”

“담아 드리겠습니다.”

“……아뇨. 그냥 입고 갈게요.”

남자는 외투를 차에 두고 왔는지, 가벼운 차림새였다. 표정을 봐선 당장이라도 코트를 벗어 바닥에 패대기치고 싶은 것을 꾹 참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외투 없이 12월의 찬 바람을 견디기엔 돌아서는 어깨가 한없이 가냘팠다.


“고객님, 아까 어머님께 선물하신다던 스카프 보여 드릴까요?”

“……됐어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아무도 떠민 적이 없는데 남자는 떠밀리듯 매장을 휘적휘적 나섰다.

그리고 잠시 뒤, 백화점을 나서는 차 안에서 태서는 그 남자를 다시 보았다.

발레파킹된 차를 기다리는 남자의 종이 인형 같은 몸이 차가운 겨울바람에 자꾸만 오그라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깃을 여미며 바람을 등지고 웅크리는 남자의 코트 자락이 펄럭였다. 저러다 곧 마른 낙엽처럼 하늘로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 * *

평화로웠다.

이렇게나 순조로워도 되나 싶을 만큼 요가원의 교실 두 곳이 회원들로 꽉 찬 월요일 저녁이었다.

퇴근한 직장인들이 몰려드는 저녁 타임 수업을 막 끝낸 재인이 홀로 교실에 남아 건조 레몬을 띄운 물을 마시려던 때였다.


“아니, 도대체 건물주분이 우리 요가원 강사를 만날 일이 뭐가 있다고 이러세요! 원장인 저랑 얘기하시자구요!”

“너는 일 없으니까 비켜. 아니지? 강사랍시고 천박한 것 데려다 일 시킨 너도 문제야!”

교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재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마마보이는 이래서 문제다. 혼자 끝낼 일을 엄마까지 끌고 온다.


“아, 오늘 받은 네일 아트 마음에 들었는데.”

재인이 느슨하게 묶인 머리칼을 한 올도 남김없이 싸잡아 틀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오전에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맞춰 새로 꾸민 손톱을 내려다보았다.

금빛 펄을 얹은 붉은 손톱이 야무지게 빛났다.


“어디 있어! 이, 개한테 줘도 안 먹을 게! 어딜 감히 주제도 모르고 내 아들한테 퇴짜를 놔?”

수업이 끝난 후 자리를 뜨려던 회원들 몇몇이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일부는 데스크 근처에서 발을 동동 두르며 웅성거렸다.

가까워지는 악다구니에 재인이 일어섰다. 고개를 이리저리 꺾고 팔을 쭉 뻗으며 몸을 풀었다.

가장 최근에 질척거리는 마마보이를 상대한 건 2년 전이었다. 그때도 남자에게 선을 그은 후 며칠이 지나 남자의 엄마라는 사람이 찾아왔었다.


“내 아들은 널 찰 수 있지만 넌 아니야! 어디 감히, 가암히! 귀한 내 아들 눈에서 눈물을 뽑아? 망할 X, 이 썩을 X!”

미국 마마보이의 엄마는 f로 시작하는 욕만 줄곧 늘어놔 지루했다. 오랜만에 듣는 한국의 다채로운 욕은 귀에 착착 감겼다.


“후우…….”

재인은 심호흡하며 숫자를 셌다. 링 위에 오르기 전 선수처럼 마음을 다잡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문이 벌컥 열리고 며칠 전과 같은 명품 차림을 한 광순이 들어섰다.

재인은 속으로 혀를 찼다.

싸움의 기본을 모르시네.

모피 코트와 진주 목걸이라니. 싸우기 편한 복장은 절대 아니었다.

알이 굵은 목걸이는 상대방에게 멱살을 내주기 딱 좋았고, 모피 코트는 생각보다 잘 찢어지는 아이템이었다. 거기다 덥기도 더워 빨리 지치니 여러모로 불리한 옷차림이었다.

아, 가방.

방수가 잘되기로 유명한 L사의 가죽 가방을 휘두르면 충격이 클 수 있다. 하지만 다행히도 광순은 씩씩대며 들어서자마자 아끼는 가방부터 바닥에 내려놓았다.


“너 이 X!”

“안녕하세요, 여사님.”

공손하게 인사하는 재인을 본 광순이 기가 막힌 표정으로 모피 코트의 소매를 걷었다.


“안녕하세요오? 내가 지금 안녕해 보여?”

“왜 그렇게 화가 나셨는지는 모르겠는데 무슨 일 있으세요? 저, 그런데 여기에서 다음 수업이 있어서요.”

“수어업? 수어어업?”

광순은 이 기회에 학원 수강생 씨를 말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요가 학원 강사가 남자 홀리는 헤픈 년이라고 소문을 내서 강남 바닥에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할 생각이었다.


“감히 내 아들 홀려 놓고 수업 소리가 나와?”

“뭘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아드님께서 요가 수업 수강을 핑계로 자꾸 한 번만 만나자고 하셔서 저는 이러시는 거 불편하다고, 사귈 마음이 없다고 말씀드렸을 뿐이에요.”

“이, 이…….”

“2주 수업을 진행했지만 선지급으로 결제한 한 달 치 수강료도 다 돌려드렸고요. 아드님께는 사탕 하나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연락한 적도 없거니와 거절의 말씀을 드릴 때 마신 커피도 제 몫의 커피값은 드렸어요. 제가 무슨 잘못을 했나요?”

재인은 하도 당한 적이 많아서 질척거리는 남자들을 대하는 데 익숙했다. 그래서 추후에 트집 잡힐 일은 아예 하지 않았다.

그녀의 30년 가까운 철벽 인생은 괜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겁에 질려 새하얘지기는커녕 말가니 뽀얀 얼굴로 침착하게 바른말 하는 재인을 마주한 광순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네 X이 먼저 꼬리를 쳤으니 선비 같은 내 아들이 넘어간 게지!”

“여사님. 근거도 없이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더군다나 여기는 제가 일하는 곳이어서…….”

“근거가 없어? 내 아들이 흘린 눈물이 근거야! 그런데 아까부터 으른이 말씀하시는데 따박따박 잘도!”

광순이 달려드는 순간 재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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