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개나 소나 (7/123)


#7. 개나 소나
2022.07.22.


더군다나 그는 업무상으로 흠잡을 곳이 없었다.

본부장으로 부임한 첫날 ‘일할 때는 일하고 놀 땐 놉시다. 난 놀려고 일합니다.’라고 말했던 사람답게 맡은 일은 확실하게 끝냈다.

수완도 좋고 말재주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일 머리가 보통 좋은 게 아니었다. 그래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쓸데없이 고생시키지 않았다.


“재미있네요. 좀 더 꼼꼼하게 봐야겠습니다. 나가 보세요.”

“네. 그러면 30분 뒤에 본가 방문 일정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게 오늘이었습니까?”

“네.”

가기 싫은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잠시 눈썹을 매만지던 태서가 얼음주머니를 내려놓았다.


“30분 뒤에 나가겠습니다. 그때까지는 방해받고 싶지 않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보고서, 수고하셨습니다. 계속 부탁드립니다.”

능력을 인정받고 노고를 치하받은 장 실장이 본부장실을 나섰다. 빈 접시와 컵을 올린 쟁반을 들고 탕비실로 향하며 비서실을 지키고 있는 한 비서에게 지시했다.


“30분. 방해 없기를 원하셔. 나도 잠깐 쉴게.”

“네, 쉬세요. 장 실장님.”

고개 끄덕이며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는 한 비서의 옆머리에 반짝이는 머리핀을 발견한 장 실장이 피식 웃었다.

처음에는 티도 나지 않을 실핀만 고집하더니 태서의 지시 이후 조금씩 드러난 그녀의 액세서리 취향이 귀여웠다. 손바닥만 한 왕관 모양 머리핀을 꽂은 한 비서는 확실히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탕비실의 3인용 소파에 두 다리를 쭉 뻗어 누운 장 실장이 얼굴 위로 팔을 얹었다.


“내 자식 놈 중에 가장 기대가 커. 그런데 그만큼 위험한 놈이기도 하지.”


“그 말씀은…….”


“알아서 잘하리라 믿네.”

 
그녀를 태서의 곁에 붙여 놓은 것은 강신재 회장이었다. 태서의 비서실장을 맡기 전까지 강선 그룹 회장 실장실의 부실장으로서 그의 수족 역할을 해 온 그녀였다.

하지만 장 실장은 조금씩 제 마음이 태서에게 기우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강태서는 그만큼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강신재는 지금까지도 회장으로서 굳건했다. 회장이 자신에게 태서를 살피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녀를 백 퍼센트 신뢰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분명히, 주변에 또 다른 사람을 심어 놨을 것이다.

고민하던 장 실장이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어, 장 실장님. 들어가신 지 아직 10분밖에 지나지 않았어요. 15분 후에 알려 드릴 테니 조금 더 쉬셔도 되는데요.”

“응, 알아. 할 거 있어서 그래. 신경 쓰지 말고 일 봐. 문서수발실 좀 다녀올래? 내가 아침에 들른다는 걸 깜빡했어. 미안해.”

결심한 그녀가 손에 든 것은 삼중으로 보안이 걸린 USB였다. 장 실장은 한 비서가 문서수발실에 가기 위해 비서실을 나서자마자 재빠르게 움직였다.

지금 태서가 읽고 있을 보고서의 원본과 관련 자료가 들어 있던 USB를 포맷시켜 버리는 그녀의 손길은 거침없었다.

장 실장의 행동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빨랐다.

아침에 먹다 남긴 베이글 속에 USB를 찔러 넣은 뒤 탕비실의 미니 오븐에 넣고 설정 온도를 최고로 높였다. 그러고는 다시 사무실로 나와 책상 아래쪽에서 두꺼운 서류 뭉치 한 부를 꺼내어 들었다.

한 장 한 장 문서 세단기에 밀어 넣는 움직임에는 일말의 주저도 없었다.


“파쇄하실 거 있으면 저한테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한 비서가 건넨 우편물을 받아 든 장 실장이 나머지 서류 뭉치를 허벅지 위에 엎어 두었다.


“몰랐어? 나 파쇄하는 거 좋아해. 종이 갈려 들어가는 거 보다 보면 스트레스가 풀리더라.”

“그런 거로 스트레스가 풀려요? 어휴, 저는 쇼핑해야 풀리던데. 돈 모을 팔자는 못 되나 봐요. 어, 그런데 이거 무슨 냄새지?”

장 실장은 한 비서가 코를 킁킁거리며 탕비실로 향하는 것을 보면서 서류 뭉치의 마지막 장을 갈았다.


“세상에! 장 실장님, 오븐에 뭘 넣고 잊으신 거예요? 완전히 숯덩이가 됐어요!”

“아, 내 정신 좀 봐. 출출해서 먹다 만 베이글 좀 살짝 데운다는 게.”

“살짝이 아닌데요? 어휴, 환기해야겠다.”

급히 환기 시스템을 켜는 한 비서의 곁에서 장 실장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게 타 버린 베이글은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제 다 갈린 종이만 들고 나가서 다른 문서 세단기 두 대의 종이 뭉치들과 잘 섞어 쓰레기봉투에 담아 놓으면 된다.


“문서 세단기 비우러 가는 김에 베이글도 바로 가져다 버려야겠다. 탄내 계속 나네.”

“제가 갈게요.”

“아냐. 정신도 차릴 겸 금방 다녀올게.”

원래대로였다면 강신재 회장에게 올려야 했을 서류였다. 태서가 지금 읽고 있는 것과 똑같은 보고서에 태서가 최근에 개인적으로 만난 사람들까지 덧붙여 정리한 것이었다.

이로써 장 실장은 태서의 곁에서 일한 지 겨우 한 달 반 만에 17년을 모신 강 회장의 당부를 무시하게 되었다. 온전히 태서의 편에 서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강신재 회장에게 가야 할 보고서를 빠뜨릴 순 없으니 적당히 생략하고 걸러 낼 생각이었다.

장 실장은 촉이 좋았다. 추후에 강선 그룹이 누구의 손에 떨어질지를 내다본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 *

월요일, 잠깐 시간을 내어 백화점으로 향한 석동은 모처럼 기분이 좋았다.

일주일 전 금요일, 재인에게 차이고 끔찍한 주말을 맞이했지만 늘 그렇듯 그에게는 모친이 약이었다.

그는 그 주말 내내 모친과 함께 마사지를 받고 쇼핑했다. 그의 입맛에 딱 맞는 광순의 특제 전복 갈비찜을 먹으며 분노를 흘려보냈다.

모친의 말처럼 그런 천한 것들 때문에 자신이 화를 낼 필요는 없었다. 물론 천하다고 하기엔 재인이 너무나 예뻤지만, 모친은 분명 훨씬 더 예쁜 여자를 곁에 앉혀 주겠다고 했다.

모친은 석동에게 약속을 지키지 않은 적이 없다. 그 생각만으로 일주일을 버텼다.

바로 위층에 있을 재인이 보고 싶었지만, 다시 찾아가 왜 나를 거절한 거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꾹 참은 것은 그래서였다.


“세상에, 우리 아드님한테 딱 맞네. 완전 우리 아드님 옷이야.”


“나도 마음에 들어, 엄마.”


“이거로 줘요. 사이즈 L 맞죠?”


“고객님, 한 치수 작게 입어 보시겠습니까? 그러면 어깨와 소매 길이가 다…….”

 
토요일, 마사지 후에 갔던 백화점 명품관에서 마음에 드는 새 코트를 발견했다.

그런데 M 사이즈가 딱 맞을 몸에 굳이 L 사이즈를 고집하는 모자에게 직원이 프로 정신을 발휘하여 사이즈 변경을 제안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 아들을 비쩍 곯은 멸치로 보는 거야, 뭐야. 아가씨, 신입이야?”


“……죄송합니다.”


“기가 막혀서. 사이즈 다시 한번 확인해서 똑바로 줘요. 아, 참. 소매 길이랑 어깨너비 줄여 주는 거 잊지 말고.”

 
괜히 바른말 했다가 호되게 당한 직원이 입술을 말아 문 채 코트를 들고 매장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끝까지 노려보던 석동이 다시금 제 모친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가격이 어마어마했지만, 모친은 항상 그래 왔듯이 하나뿐인 아들을 위해 돈 쓰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수선에 오래 걸릴까? 우리 아들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


“네, 고객님. 일주일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댁으로 보내 드리는 건 어떠십니까?”


“엄마, 내가 찾으러 올게. 나 뭐 사야 할 것도 있고.”


“지금 사지, 왜.”


“아냐. 지금 말고 나중에 살 게 있어. 그때 찾으러 올게요.”

 
석동은 제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 준 광순에게 코트와 같은 브랜드의 스카프를 사 줄 생각이었다. 그만큼 센스 있고 효심 깊은 아들이 바로 그였다.


“고객님, 수선 끝난 코트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급하지 않습니다. 커피 한잔하면 좋겠는데. 내 취향 알죠? 아메리카노, 연하게.”

석동은 직원이 건넨 커피를 마시며 느긋하게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가 매장 밖 다른 명품관에 줄 선 사람들을 보며 혀를 찼다.


“하여간, 개나 소나 명품이지. 없는 것들이 더하다니까.”

석동이 코트를 산 명품관 앞에는 대기 줄이 하나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명품관 소비 실적이 기준점 이상 쌓인 회원만 입장이 가능한, 명품관 위의 명품관이 바로 이곳이었다.

석동은 이곳의 회원이 되기 위해 지난 1년간 이 백화점 명품관에 열심히 드나들었다.

무리해서 카드 할부를 긁은 적도 수두룩했다. 그 덕에 아직도 매달 월급 대부분을 할부 값으로 내고 있었다.


“저런 것도 명품이라고 좋다고 줄 서지. 황새 따라가느라 다리 찢어지는 것도 모르는 뱁새들 같으니……. 하여간, 주제를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아.”

이곳에서 주는 커피는 특별히 더 향긋한 것 같다. 분명히 최고급 원두를 쓰는 것이리라.

석동이 눈 감은 채 커피의 풍미를 음미할 때였다.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를 느낀 석동이 직원들이 분주하게 향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훤칠한 남자가 매장 안에 들어서자 직원들이 각을 맞춰 기립한 채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였다.


“뭐야. 누군데 저래.”

석동이 옹졸하게 얇은 입술을 삐죽이며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가까워진 남자는 멀리서 볼 때보다 더 대단했다. 우월한 수컷임을 드러내는 가슴팍과 어깨는 그야말로 드넓었다. 한눈에 봐도 다부진 몸매는 같은 남자가 봐도 숨이 막혔다.

키는 어지간한 모델을 넘어섰고 얼굴 생김새는 최상급 배우들을 찍어 누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거기다 풍기는 아우라가 남달랐다.

키가 커서 그런지 높은 위치에서 날카로운 시선으로 매장을 스윽 훑는 그의 고고한 자태에 석동은 저도 모르게 가뜩이나 좁은 어깨를 휴지 접듯 접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준비했었어야 했는데.”

“장 실장이 왜 죄송합니까. 날아가던 새가 예고하고 똥 쌉니까.”

“그건 그렇지만 번거로우실 텐데, 지금이라도 한 매니저를 통해 준비를…….”

“어차피 할머님 드릴 선물 사려고 백화점에 오려던 겁니다. 직접 고르려고 한 거라 퍼스널 쇼퍼 부를 생각도 없었고요. 아, 이 코트가 괜찮아 보이는군요.”

직원이 건넨 팸플릿을 보던 남자가 손을 들어 가리킨 것은 석동이 산 것과 같은 코트였다.

석동이 비열하게 웃으며 남자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좋은 물건을 선점했다는 승리감에 커피 향이 더 향긋하게 느껴졌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석동이 놀란 눈으로 매장 안쪽으로 사라지는 직원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제게는 마지막 하나 남은 코트라고 그랬던 직원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그 직원은 커다란 사이즈의 코트를 들고나와 남자가 입는 것을 도왔다.

석동은 최상급 명품 매장에서 거짓말을 하느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장 실장 눈에는 어때요. 괜찮아 보입니까?”

“네. 급하게 사는 것치고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흠.”

남자가 뒤쪽에 선 키 작은 여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고는 거울에 자신을 비춰 보며 이리저리 고개를 기울였다.

석동은 거울에 비친 남자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하마터면 커피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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