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보면 볼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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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보면 볼수록
2022.07.19.
똑똑, 노크 소리 이후 장 실장이 호밀빵 샌드위치와 자몽 주스가 담긴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간단하게 샌드위치 준비했습니다.”
태서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손짓으로 책상 위를 가리켰다. 그러자 장 실장이 태서가 가리킨 곳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태서는 커다란 손으로 샌드위치를 들어 깔끔하게 한입 베어 물었다.
“흠…….”
아삭아삭 와삭와삭, 샌드위치 안 겹친 채소를 씹는 소리만이 사무실에 가득했다.
장 실장은 말없이 서류를 응시하는 태서를 흘끔 바라보았다.
고작 샌드위치 하나 먹는데도 화보를 찍는 남자였다. 빵 부스러기 하나 흘리는 것 없이 먹는 모습이 고급스러웠다. 게다가 음식을 씹을 때마다 도드라지는 턱선이 기가 막혔다.
삼각형으로 잘린 샌드위치를 네 입 만에 해치운 태서가 엄지손가락을 들었다. 그러고는 입가에 묻은 소스를 밀 듯이 닦아 입술 사이로 쪽, 하고 빨아먹었다.
그 모습은 정말이지 예술의 정점이었다. 반백 살을 앞둔 장 실장이 얼굴 붉히며 헛기침을 내뱉을 정도였다.
“……하나 드실래요?”
“아닙니다.”
“와, 이렇게나 세세하게 알아봐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정보 몇 가지 던졌을 뿐인데 겨우 일주일 만에. 장 실장, 되게 무서운 사람이네요?”
“……시키신 대로 했을 뿐입니다.”
“칭찬입니다. 최근 행적뿐만이 아니라, 내가 몰랐던 것까지 알아내셨네요. 수고하셨습니다.”
태서가 샌드위치 하나를 더 들어 입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그가 보고 있는 보고서는 조유리를 만났던 다음 날, 장 실장에게 개인적인 일이라며 급히 확인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윤재인에 대해 알아봐 주세요.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 무얼 하는지, 최근 행적 위주로 부탁드립니다.”
“……조금만 더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한국 나이로는 아마도 서른 살, 여자입니다. 친모 이름은 윤세나. 캐다 보면 현양 건설 조대훈 대표도 나올 거고, 여러 가지로 머리 좀 아프실 거예요. 관련된 단서 몇 가지는 적어 드리겠습니다.”
“언제까지 정리해 드리면 될까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이 기회에 능력 좀 발휘해 보시죠.”
“네, 알겠습니다.”
“개인적인 부탁입니다. 미리 양해 구합니다.”
“…….”
“조용히 알아보려면 더 힘드실 겁니다. 대신 고생하신 만큼 보상해 드리겠습니다.”
태서가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에 장 실장은 이 일에 대해 함구령을 내리는 상사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강선 그룹의 회장인 강신재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하라는 것이었다.
비서에게 개인적인 부탁은 하지 않는 태서였다. 더군다나 주말 업무 요청이라니, 어지간해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장 실장은 인맥과 능력을 총동원해서 윤재인에 대해 캐고 캤다.
조사하는 과정에서 몇 번이나 난관에 가로막혀야 했다. 있어야 할 서류는 없었고, 만나야 할 담당자는 사라졌다. 그래도 장 실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강선 그룹에 몸담고 총수 일가를 보좌해 온 것이 어언 25년이다. 절대로 녹록지 않은 세월이었다. 그녀는 제 모든 능력을 총동원했다.
그 결과 짧은 기간 안에 윤재인의 발 사이즈까지 털어 내서 상사를 흡족하게 만든 것이다. 재계에서 유명한 전설의 비서다웠다.
“최근에 한국에 들어왔군요. 더군다나 화미 아파트 근처라니, 바로 코앞에 있었네요?”
윤재인은 얼마 전 강남 화미 아파트 바로 앞 건물 3층에 요가원을 차린 모양이다. 요가원의 원장은 친구인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으로 되어 있지만, 자금 출처는 모두 윤재인이었다.
“겁도 없네. 사업하는데 다른 사람을 대신 앞세우다니. 이러다 뒤통수 맞으면 어쩌려고.”
“요가원 원장이랑은 친자매보다도 친한 사이 같습니다.”
“친자매 간에도 뒤통수는 칩니다. 돈이 그래요.”
태서가 샌드위치 두 쪽을 깔끔하게 해치우고는 물수건에 손을 닦았다. 그러고는 얼음주머니를 들어 이마에 얹었다. 시선은 여전히 서류를 향한 채였다.
“하, 고아로 만든 게 지승희 이사장이 아니라 조대훈 회장이었어? 조 대표님, 대단한 분이시네.”
무슨 이유에서인지 시카고에서 친모인 윤세나와 조용히 살아가던 윤재인이 홀로 한국으로 온 것이 재인의 나이 열다섯 살 때였다.
조대훈은 한국으로 온 친딸을 서류상 고아로 만들었다. 그리고 아내인 지승희가 운영하는 재단에서 후원받는, 오갈 곳 없는 학생으로 둔갑시켜 버렸다.
어찌나 잘도 위장해 놨는지, 하마터면 장 실장마저 깜빡 속을 뻔했다.
“생판 남인데 7년이나 집에 데리고 살면서 공부시켜 줬다. 이것만 봐도 냄새가 나는데 언론에서 가만히 있었습니까?”
“확인해 보니 비슷한 시기에 윤재인 씨 말고도 두 명 더 집에 들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은 모두 재단에서 후원하는 학생들이 맞았습니다.”
“와, 용의주도하네.”
재인은 열다섯 살부터 스물두 살까지 7년 조금 넘게 조대훈 대표의 집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스물두 살 겨울에 있었던 교통사고 이후 치료와 재활을 목적으로 다니던 대학을 중퇴하고 한국을 떠났다.
이 부분은 태서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인지, 그녀는 거의 10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것도 조대훈 몰래.
“사고 운전자가 주안 그룹 셋째 정재훈이라는 거, 확실합니까?”
보고서에서 재인의 교통사고에 대한 부분을 읽는지 태서가 짙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경찰 조사 결과는 동승자가 한 명 더 있는 것으로, 그 사람이 운전하다가 사고 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사고 당시 탑승자는 둘이었습니다. 운전대를 잡았던 것은 현재 주안 엔터의 정재훈 대표가 맞습니다.”
“……둘이 사귀었답니까?”
어째서인지 조금 날카롭게 느껴지는 어투에 장 실장이 자세를 바르게 고쳐 섰다.
보고서를 노려보던 태서는 갑자기 목이 탄 듯 자몽 주스를 단숨에 들이켜 잔을 깨끗이 비워 냈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정재훈 대표 혼자 일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음침한 새끼.”
태서의 중얼거림을 들은 장 실장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안 엔터의 정재훈 대표는 생긴 건 그럭저럭 괜찮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찜찜한 구석이 있는 남자였다.
장 실장은 비서 일을 하면서 몇 번인가 그를 보았다. 매너 좋은 사람처럼 웃음 짓는 그였지만, 가끔 보이는 무표정한 얼굴에서 광기가 읽혔다. 심리적으로 안정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자세히 알아보지 않더라도, 주안 엔터 대표 비서실 인력이 자주 바뀌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같이 일하기에 편한 사람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비서로서 그간 모셔 왔던 상사들에 대해 생각하던 장 실장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태서를 향했다. 지난 한 달 하고도 보름간 살핀 강태서는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쁜 뜻은 아니었다. 매력이 넘치는 그는 제법 친근하게 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속을 다 드러내지는 않았다. 함부로 곁을 내어 주지 않는 사람. 장 실장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태서가 부임하기도 전에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강태서 씨가 주문했다며 본부장실을 찾은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은 본부장 사무실 뒤편의 작은 휴게 공간을 각종 운동 기구로 꽉 채웠다.
그만큼 태서는 운동에 미친 사람이었다. 따로 시간을 내어 운동하는 것이 아닌, 틈만 나면 자연스럽게 운동 기구에 몸을 실었다.
그 후로 운동 기구에 매달려 몸을 단련하는 그에게 일정을 브리핑하는 것은 일상이 되었다.
“그렇게 운동하시는 거, 안 힘드십니까?”
“재미있는데요?”
“……운동하는 게 재미있으세요?”
“네. 재미있으니까 틈만 나면 매달려 있겠죠. 장 실장은 운동 뭐 합니까.”
“저는 딱히…….”
“해야죠. 당장 근처 피트니스 센터 PT 알아보고 등록하세요. 제 카드 긁으세요. 능력 있는 분이랑 오래오래 일하고 싶습니다.”
그 덕에 장 실장이 퇴근 후 지친 몸을 끌고 억지로 개인 트레이닝을 받은 게 벌써 한 달째였다.
처음엔 죽을 것 같았는데 요즘은 조금씩 운동의 효과를 보는 듯했다. 집에 가서 늘어지는 일이 덜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회사에서 일적으로 사람을 대할 때는 영화에 나오는 신사처럼 정중했다. 하지만 또 어떨 때는 한없이 개구쟁이 같았다.
말이 좋아 개구쟁이지, 조카 놈이었다면 등짝을 때렸을 것이다.
연설하는 강신재 회장의 바로 앞에서 업무용 태블릿으로 태연하게 모바일 게임을 하는 것을 봤을 때는 기함했다.
남들이 볼 때는 회의 자료를 살피는 줄 알았을 것이다. 태서는 그만큼 심각한 표정으로 서른 번에 걸쳐 캐릭터를 뽑았다.
“새 캐릭터 진짜 안 나오네. 현질은 안 하려고 했는데.”
“본부장님, 아직 회의 중입니다.”
“회의라고 사람 불러다 놓고는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는데, 차라리 게임하는 게 낫겠습니다. 장 실장도 할래요?”
“……아뇨, 저는 괜찮습니다.”
“같이합시다. 친구 초대하면 크리스털 준다는군요.”
투덜거리는 그는 마치 비서의 귓가에 중요한 지시를 속삭이는 사람 같았다.
사무실에서 업무를 처리하다가, 혹은 회의 중에 작게 비속어를 내뱉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러다가 곁에 있던 비서의 놀란 표정을 눈치채고는 윙크를 날리는 일은 흔했다.
그런 부분만 빼면 좋았다. 조금 까다롭기는 해도 미운 캐릭터는 아니었다.
꽉 끼는 치마 정장 스타일의 유니폼만 입도록, 액세서리는 단정한 것으로만 하도록 규정되어있는 비서실의 규칙을 깨뜨린 것도 그였다.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출근해서 늦게 퇴근하는 것도 억울한데, 옷도 마음대로 못 입는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때가 어느 때라고 복장 규정을 둡니까. 그것도 여자한테만.”
“하지만 최 전무님께서…….”
“제 일도 똑바로 못 하면서 시대 감각 못 읽는 꼰대는 신경 쓸 것 없습니다. 바지든 치마든 입고픈 대로 입으세요. 집에 자랑하고 싶은 왕관이 있으면 쓰고 출근해도 됩니다.”
“하지만 강선 그룹 전체 비서실이 모두 같은 규칙을 따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만 그 규칙을 깨는 건…….”
“TPO만 맞추면 그만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면 나 팔아요. 장 실장도 그 옷, 불편하지 않아요? 본부장이 내리는 첫 지시 사항입니다. 무시하면 나 화낼 겁니다.”
결국 강선 건설의 본부장실 비서진들은 강선 그룹에서 유일하게 바지도, 롱스커트도 마음껏 입을 수 있게 되었다.
7cm 하이힐에서 내려오니 날아갈 것만 같았다. 몸을 꽉 죄지 않는 옷을 입은 후로는 입에 달고 살던 소화제도 끊었다. 그야말로 세상 살 것 같았다.
회장실의 비서에게 듣기로는, 강신재 회장 역시 얘기를 전해 듣고는 옷차림이 뭐 대수라고 그런 것까지 보고해 오느냐며 손사래 쳤다고 했다.
비서는 비서다워야 한다며 무릎길이의 치마 정장 옷차림을 강조하던 최 전무가 입을 꾹 다물게 된 것은 당연했다. 회장이 괜찮다는데 누가 딴지를 건단 말인가.
그것만으로도 그룹 내 강태서의 위치는 확인되었다. 조만간 본부장 자리를 내려놓고 더 높은 곳으로 훨훨 날아갈 그의 능력과 배경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보면 볼수록, 장 실장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정의 상사가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