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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욕심들은 많아서 (5/123)


#5. 욕심들은 많아서
2022.07.15.



“밥 안 먹을 거야?”

“……엄마나 먹어.”

“아들, 왜 안 하던 짓을 해. 너 아침도 안 먹었어. 점심까지 거르면 어쩌려고 그래.”

“밥 먹을 기분이 아니라서 그래.”

“도대체 그X이 뭘 어떻게 홀려 놨기에 이래. 너 정말 엄마 속 썩일래? 아들이 밥을 안 먹는데 엄마가 어떻게 혼자 먹어.”

“먹기 싫어.”

“얘가 진짜!”

하나뿐인 아들이 한 끼라도 굶으면 세상 무너지는 줄 아는 광순이 가슴을 쳤다.

어젯밤 술에 떡이 되어 들어온 석동이 밤새 재인인지 죄인인지를 외치며 우는 것을 본 광순의 속이 뒤집혔다.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오늘 석동은 아침부터 식음을 전폐하고 끙끙 앓기만 했다.

광순의 억장이 무너졌다.


“직업도 그렇고, 집안도 변변치 않은 것 같고. 여러모로 마음에 안 찼는데 차라리 잘됐어. 아들, 우리 집에 시집올 여자가 줄을 섰어. 그러니 엄마 말 듣고 그X이랑 헤어진 건 백번 잘한 거야.”

“……엄마 말 듣고 헤어진 거 아니야.”

“그러면?”

“……나랑 사귈 생각 없대. 나 같은 남자는 널렸대. 돈을 얹어 줘도 안 사귄대. 엄마, 나 차였어허어어엉.”

차였다며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석동을 보는 광순의 눈이 커졌다.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귀한 아들의 좁고 부실한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차였다고? 오석동, 말 똑바로 해 봐. 울음 그치고! 너 지금 차였다고 했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끅끅거리며 돌아눕는 아들의 반응을 확인한 광순의 눈에 불이 붙었다.


“근본도 없는 꽃뱀 같은 게, 감히 내 아들을 차?”

어제 직접 만나 본 결과, 아들의 마음에 든 여자는 영 마뜩잖았다. 그래도 주제는 알고 몸을 사리기에 잘 차단하고 왔다고 생각했다.

그랬으면 공손하게 과분한 분이라 죄송하다고 에둘러 거절할 것이지, 돈을 얹어 줘도 안 갖는다며 찼다는 소리에 광순은 기가 막혔다.

일단 귀하디귀한 아들부터 달래 주는 게 먼저였다. 조만간 그 계집애를 드잡이하러 가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치솟는 분노를 겨우 눌렀다.


“아들, 그러게 엄마가 뭐랬어. 여자 나이 서른 넘어가면 기만 세진다고, 그런 여자는 만나는 거 아니랬지?”

“…….”

“울 거 없어. 계집X들이 순진한 남자 꼬셔서 연애랍시고 돈 뜯어먹다가 버리고! 그렇게 인생 망쳐 놓는다니까? 들러붙기 전에 잘 털어 냈어. 엄마가 우리 아들 내조할 참한 여자 찾아 줄 테니 걱정하지 마.”

광순은 실제로 강남에서 중매로 유명한 황 여사에게 연락해 놓았다.

광순이 며느리의 조건으로 내건 것은 명료했다.

20대일 것. 양친이 다 살아 계실 것. 집이 강남일 것. 사치하지 않을 것. 게으르지 않을 것. 결혼 후 아이를 둘 이상은 낳을 것. 아침마다 새로 한 반찬 세 가지 이상을 곁들여 5첩 밥상을 차릴 것.

이 일곱 가지 조건에 한 가지를 덧붙였다.


“……조건이 더 있으세요?”


“황 여사, 왜 그런 눈으로 봐? 누가 들으면 내가 며느릿감 본다고 까다롭게 구는 줄 알겠네.”


“……말씀하세요.”


“난 여자가 집에만 있어야 한다고는 생각 안 해. 시대가 변했으니 여자도 자기 계발하며 직업을 가져야지.”


“옳으신 말씀이에요.”


“그러니 직업은 있었으면 해. 어디 내놓기 부끄럽지 않은 직업으로. 그렇다고 살림 내팽개치고 밖으로만 나돌면 안 되고. 적당한 직업 있잖아? 황 여사가 알아서 걸러 주면 좋겠네.”


“……예.”

 
광순은 황 여사가 불편한 얼굴로 꼼꼼하게 메모하는 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며느리가 집에서 놀면서 아들이 벌어다 준 돈 쓰며 편히 사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변변한 직업은 있는 게 좋을 것이다.

하지만 돈은 벌되 돈 번다고 유세 떨 만큼 벌지는 않아야 한다. 괜히 돈으로 내 아들 기죽이는 일은 없어야 했다.


“연락 줘요.”


“……예. 조건에 맞는 아가씨 찾으면 연락드릴게요.”


“내년 안에는 우리 원장님이랑 잘 어울리는 며느리 보면 좋겠네. 그러려면 늦어도 봄에는 연락을 줘야지.”


“…….”


“황 여사만 믿어요.”

 
그렇게 말하며 웃돈을 찔러줬으니 조만간 황 여사가 강남 일대의 참한 아가씨들 명단을 들고 연락해 올 것이다.

그러면 그중에 하나 골라 살림 좀 가르쳐서 가을쯤 결혼식을 올리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여사님, 이것만 여쭐게요. 결혼하면 원장님 신혼집은 어디에 얻어 줄 생각이세요……?”


“당연한 걸 물어. 여기지.”


“어머나, 정말요? 강남에 신혼집을 얻어 주시려고요? 역시, 남 여사님이세요.”


“응. 지금 우리 원장님 쓰는 방이 넓어. 업자 불러서 싹 뜯어고치면 세상 최고로 예쁜 신방이 될 거야.”


“……분가 안 시키실 생각이세요?”


“어휴, 시켜야지. 다 큰 아들 끼고 살면 나는 뭐 안 힘들어? 다만 며느리 살림 좀 가르쳐야 하니까 그동안은 내가 힘들어도 데리고 살겠다는 거지.”


“……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 결혼했다고 따로 나가 사는 꼴은 못 볼 광순이었다.

며느리가 제대로 살림을 하는지, 아들 내조에 게으름 부리지는 않는지 감시도 해야 하니 적어도 10년쯤은 함께 살며 며느리를 길들여 놓을 생각이었다.

광순은 이 아파트에서 홀로 아들을 키워 내며 재산을 불려 나갔다.

30년 넘게 살아온 집 곳곳에 그녀의 한과 기쁨이 서려 있었다. 강남 노른자 땅에 3층짜리 건물을 올린 남광순의 역사 그 자체였다.

그래서 아무리 집이 낡았다고 해도, 아침마다 온수 대신 녹물이 나온다고 해도, 그녀는 이 신성한 화미 아파트를 뜰 생각이 없다. 65평이라는 평수는 아들 내외와 함께 도란도란 사는 데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재건축될 거라고 사인받으러 다니는 것들의 설득 따위, 흘려들으면 그만이었다.

광순은 굳이 재건축해서 아파트 규모를 키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격 떨어지는 것들이 이웃이랍시고 이사 오는 것에 적극 반대였다.


“요즘 아가씨들은 시어머니 모시고 산다고 하면 좋다고 안 할 텐데…….”


“황 여사, 여기가 어디 보통 동네야? 강남이야. 세상천지에 강남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어?”


“그래도…….”


“날 봐. 나처럼 교양 많은 시어머니가 어디 있다고? 되먹지 못하게 시어머니랑 살기 싫다 소리 할 며느리라면 나도 안 들이지. 어디, 어어디 그런 몹쓸 것을 우리 원장님한테 갖다 붙여?”

 
광순이 조심스럽게 입을 떼는 황 여사를 향해 매섭게 일갈했다.

광순은 마음에 쏙 드는 며느리를 들일 자신이 있었다. 며느리도 분명히 현명하고 교양 있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것을 반기리라.

그러니 금쪽같은 아드님께서 늙은 여우 같은 X 때문에 이리 앓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겼다.


“다른 여자 만날 생각, 없어…….”

“우리 아드님이 정말 모르는 소리만 하네. 그런 X 쌔고 쌨어! 엄마만 믿어. 네가 언제 엄마 말 들어서 잘못된 적 있었니?”

천천히 고개 젓는 아들의 희멀건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며, 광순은 천불이 난 속을 삭이고 또 삭였다.


“그러니까 그만 일어나서 마사지 받으러 가자. 응?”

“엄마 혼자 가.”

“마사지 받은 후에 엄마가 아들 좋아하는 한우 갈비찜 해 줄게. 응?”

“……전복도 넣고?”

“아휴, 그럼. 누가 드실 건데 전복을 안 넣어. 마사지 받고 백화점 가서 제일 큰 놈으로 다섯 마리 사다가 넣자. 간 김에 우리 아드님 겨울 코트도 한 벌 장만하고.”

서른일곱 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석동을 낳았다. 이듬해 남편을 보내고 일흔두 살이 되도록 35년 가까이 아들 하나만을 보고 살아왔다.

그런 어미의 눈에는 입술을 비죽이며 일어서는 서른여섯 살의 아들이 유치원생처럼 귀엽게만 보였다.

광순은 이렇게나 귀여운 아들의 눈에서 눈물을 뽑아낸 그 나쁜 X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감히 내 아들 눈에서 눈물을 뽑았으니, 그X 눈에서는 피눈물이 나야 마땅했다.


 

* * *



“욕심들은 많아서.”

태서가 답답한 듯 넥타이를 잡아 끌어 내리며 의자 깊숙하게 몸을 묻었다.

곧 있을 강남 화미 아파트 재건축 업체 선정을 앞두고 입찰에 참여한 업체의 대표끼리 회의를 끝낸 것이 바로 조금 전이었다. 태서는 강선 건설의 본부장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대표 자격으로 그 자리를 지켰다.

아침 조찬과 함께 시작한 회의는 점심시간을 넘기고 나서야 끝났다. 나이 지긋한 타 건설사 대표들이 언성을 높이는 동안 하품을 참아 내느라 혼났다.

태서가 절로 굳어진 미간을 꾹꾹 누르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건설판에 깡패 새X들 많은 거,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개판이네요.”

“오늘 선성 건설이 유독 날을 세우기는 했습니다. 아무래도 조합원장 하나가 현양 건설 측으로 돌아섰다는 소문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 선성. 거기는 귀엽기라도 하죠. 그것보다도 꼰대들이 말만 많아서요. 이러다 미간에 주름 생기겠네.”

“식사 들일까요?”

태서의 고모뻘인 장 실장이 재빠르게 머릿속으로 준비된 메뉴를 떠올렸다. 회의가 길어진다는 판단에 이미 한식 도시락과 일식 도시락, 그리고 샌드위치를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입맛도 없네요. 간단하게 부탁드립니다. 아, 얼음 팩 좀 부탁해요. 두통이 있어서요.”

“약을 드릴까요?”

“약은 됐습니다.”

“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장 실장이 사무실에서 나가자 태서가 사무실 뒤를 돌아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그러고는 관자놀이를 짚은 채 차가운 생수를 들이켰다.

사실, 서울시의 요구는 무리가 없었다. 문제는 온갖 이익이 상충하여 몸집만 불린 아파트 재건축 조합이었다.

어떻게 된 게, 화미 아파트의 재건축 조합은 세 개였다. 오랜 시간 재건축을 바라 온 낡은 아파트답게 각자의 이익에 따라 조합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조합은 셋으로 나뉘게 된 것이다.

그러고는 서로 자기들이 진짜 화미 아파트의 대표 재건축 조합이네 아니네, 하며 싸우게 되었다. 거기다 상가 조합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개판 5분 전이었다.

핏대 높여 가며 늘어놓던 네 명의 조합원장들의 요구 사항을, 각 건설사 대표들은 일부 가능한 것들만 수용하기로 했다.

공정한 경쟁을 위해 수용할 요구 사항을 정하고자 열린 회의였지만, 그마저도 개판이나 다름없었다.


“영 안 내키는데…….”

고개 저어 마뜩잖은 기분을 흩뜨리던 태서가 장 실장이 미리 책상 위에 올려 둔 보고서를 발견했다.

태블릿으로 업무를 하다 보니 태서는 늘 전자 문서를 사용했다.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서류 뭉치를 손에 든 그가 첫 장을 넘기고는 피식 웃었다. 기다렸던 보고서가 생각보다 빨리 손에 들어온 것이 퍽 반가웠다.


“하긴. 주고받은 흔적 남는 전자 문서보다야 갈아 치우고 끝낼 종이가 낫긴 하지.”

게다가 보안까지 생각한 장 실장의 일 처리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태서는 의자를 뒤로 젖혀 몸을 편하게 늘어뜨렸다. 보고서를 쭉쭉 읽어 나가기 시작하는 눈빛만큼은 매섭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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