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꾹꾹 눌러 왔던 욕심 (4/123)


#4. 꾹꾹 눌러 왔던 욕심
2022.07.12.



“뭐, 뭐……?”

시뻘겋게 달아오른 유리의 얼굴이 우스웠다.

태서가 비스듬히 웃으며 다시 상체를 세워 의자 깊숙이 묻어 앉았다.

조유리를 두고 태서의 대학 동창 준경은 누구나가 탐내는 미녀라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마주한 조유리는 말투부터 표정 하나하나까지 그의 취향에 안 맞았다.


“너, 언니 있잖아. 네 언니, 윤재인. 정말 몰라?”

태서는 벌레 씹은 얼굴을 한 채 굳은 유리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현양 건설 회장가 사람들만 눈 감으면 세상 사람들이 다 모를 것 같나?”

분노와 충격으로 입술을 꽉 깨문 채 얼마간 태서를 노려보던 유리가 주변을 슬쩍 살피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물을 마셨다. 하지만 덜덜 떨리는 손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누, 누가 내 언니야. 나는 단 한 번도 언니 같은 거 가져 본 적 없어. 더군다나 윤재인이라니, 걔는 그저 어머니 재단에서 후원했던…….”

“걔라니. 비록 생일이 몇 달 차이 안 나더라도 태어난 해가 다르면 언니 대접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태서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의자 팔걸이에 팔꿈치를 세워 올렸다. 유려한 손을 천천히 접어 턱을 괸 그의 표정이 치명적일 만큼 나른했다.

얼마 전, 대학 동창 녀석이 입국을 환영한다며 끌어들인 술자리에서 다시금 윤재인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이거 아는 사람 거의 없는데, 너 배우 윤세나라고 아냐?”


“……몰라.”


“하긴, 너는 모르겠지. 한국에서 몇 년이나 살았다고.”

 
대학 동창인 준경은 유원 그룹의 막내였다. 세 명의 누나 아래에서 응석받이로 자란 그는 가십을 좋아했고,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대단한 것이라도 되는 양 떠들어 대는 것을 즐겼다.

태서는 그날도 그저 그런 얘기겠거니, 했다.

물론 태서는 윤재인의 친모인 윤세나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윤재인은 어차피 기억 속에 묻어야 할 여자였다.

그래서 준경이 떠들어 대는 가십에 적당히 맞장구만 쳐 주고 넘길 생각이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들어 봐. 그 윤세나가 어느 날 갑자기 은퇴하고 잠적했어. 그게 조성환 회장 사망하기 두 달 전인가 그럴걸? 공항에서 미국행 비행기에 타는 윤세나를 본 사람이 꽤 있다는 거야. 배가 꽤 나와 있더래.


“그런데?”


“재벌가 첩으로 들어갔다, 어느 정치인의 아이를 뱄다. 별별 말이 다 돌았어. 그런데 그 소문이 순식간에 다 정리된 게 언제인 줄 알아?”


“언젠데.”

 
태서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충 장단을 맞춰 주었다. 준경은 그러거나 말거나 엄청난 비밀이라도 되는 양 자꾸만 주변을 살피며 속삭였다.


“조대훈 대표가 현양 건설 3대 회장으로 취임하고부터야. 정말 언론에서 배우 윤세나의 은퇴와 잠적에 대해 떠들어 대던 게 순식간에 사라졌대.”


“그래서, 그 여자가 현양 회장의 세컨드다?”


“아니. 세컨드가 아니라 퍼스트라는 게 문제야. 시카고 한인 타운에는 몇 년 전부터 윤세나가 딸이랑 산다는 소문이 돈대. 그런데 그 딸 나이를 계산해 보면, 조대훈 대표 딸보다도 나이가 한 살 많다나 봐.”


“그래서.”


“그래서는 인마. 너, 그 조대훈 대표 딸이 태어나기도 전에 너랑 약혼했다며. 네 약혼녀 조유리 말이야.”


“약혼은 무슨. 얼굴 한번 본 적 없는데.”

 
태서가 콧방귀를 뀌며 짙은 꿀 빛 위스키가 든 잔을 들었다. 준경이 아는 사실이라면 생각보다 아는 이가 많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태서는 작게 혀를 차고는 씁쓸하게 느껴지는 위스키를 삼켰다.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인데, 그녀가 이런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이 싫었다.


“어쩌면 네 약혼 상대가 바뀌었을 수 있다는 거지. 콧대 높은 조유리가 아니라 시카고에 살고 있다는 그 여자가 네 진짜 약혼녀일 수 있다고.”


“어차피 결혼 안 할 건데 바뀌면 어떻고 안 바뀌면 어때서.”


“……조유리랑 결혼 안 한다고? 약혼 깬다고? 할아버님 유언 아니야?”


“미쳤냐? 아무리 유언이라지만 시대가 어느 땐데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여자랑 결혼을 해.”

 
준경이 경악에 찬 표정으로 태서를 바라볼 때도 그는 태연하기만 했다. 조만간 조모를 설득해서 그 망할 약혼이니 뭐니 하는 것도 엎을 생각이었다.

그때만 해도 유학도 끝냈고 나이도 찼으니 약혼녀인 현양 건설 회장 딸을 만나 결혼을 진행하라던 조모의 말에 응할 생각도 없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약혼녀 따위, 조선 시대도 아니고 알 게 뭔가.


“야, 조유리가 자기는 강선 그룹 예비 며느리라고 철벽 치고 다닌 게 언제부터인데!”


“그러게. 그 여자도 참 생각 없지.”


“허……. 진짜 안 한다고? 그러면 그거 조유리 혼자 떠들고 다닌 거라고?”


“나랑 잤다고 떠들고 다니는 여자도 많아.”


“진짜 그 여자들이랑 다 안 잤어? 그러면 배우 이해나의 스폰서 상대라고 도는 건설사 임원 A, 진짜 너 아니야?”


“무슨 소리야. 내가 왜 여자를 돈 주고 만나.”


“……하긴.”


“쓸데없는 거 듣고 떠들고 다닐 시간에 일이나 똑바로 해라. 그러다 너희 회사 내가 먹어.”


“……미친, 무슨 농담을 그렇게 살벌하게 해.”

 
그날 이후 태서는 다시 재인을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음을 인정했다.

그 여자의 웃는 얼굴이, 요가 동작을 하며 눈을 내리깐 채 호흡하던 모습이 꽤 자주 떠오르곤 했다. 그래서 이 자리에 나온 것이다.

넌 얼마나 잘나서.

가짜 주제에 진짜인 척을 해.


“뭐, 뭘 잘못 알고 있는 모양인데…….”

턱까지 달달 떠는 유리는 자그마한 핸드백을 손에 꽉 쥔 채였다. 금방이라도 엄마에게 달려가고픈 눈치였다.

태서는 꼬았던 다리를 풀며 다시 바르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한 번 쓸어 올리고는 유리를 향해 그린 듯 섬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 유리 씨가 아니라면 아닌 거죠. 예전에 유리 씨가 언니랑 살았다고, 어디서 들은 게 있어서.”

“……언니 아니에요. 엄마 재단에서 후원하는 고아였어요.”

“그렇군요. 제가 사과하죠.”

“아니에요. 정말……, 약혼자를 상대로 짓궂으시네요. 누가 들으면 정말인 줄 알겠어요.”

“약혼자라…….”

태서는 아직도 꿈에서 벗어나지 못한 유리에게서 시선을 돌려 창밖의 겨울 풍경을 응시했다.

12월, 한낮의 하늘이 티 없이 맑고 푸르렀다. 내리쬐는 햇살에 눈을 지그시 감으니 처음 윤재인과 눈을 마주쳤을 때가 떠올랐다.


{진짜 예뻐. 신비로움을 간직한 동양의 진주 같아. 보자마자 홀렸다니까.}


{동양의 진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네가 동양의 진주라고 떠든 여자가 한둘이어야지.}


{이번엔 진짜야. 하, 근데 엄청나게 튕겨. 내가 오늘은 기필코 꼬신다. 태서, 같이 가자. 나의 윙맨이 되어 줘라.}


{난 서핑하러 갈 거야. 이게 얼마만의 휴식인데 시간을 낭비해.}


{그러지 말고 도와줘. 같은 동양인이잖아. 친해질 명분이 필요해서 그래. 분위기만 맞춰 줘.}

 
이상하게 투지를 불태우는 백인 친구 놈의 집요한 부탁에 처음으로 리조트의 요가 수업에 참여한 날이었다.

미국 동부 특유의 악센트가 섞인 영어로 자신을 강사라고 소개하던 동양 여자는 흔한 이름이었다.


“Jane.”

친구 녀석이 그토록 목을 매는 여자는 태서가 리조트에 머무는 동안 이미 몇 차례 마주친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처음 봤을 때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그뿐이었다.

두 번째 봤을 때는 환하게 웃는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그뿐이었다.

세 번째 봤을 때 여자는 아이들과 함께 요가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보고 있다가 컨디션이 좋지 않음을 느끼고 돌아섰다.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야에는 오직 그 여자만 보였다. 모친에게 있었다는 빈맥 증상이 자신에게도 있는지, 갑자기 심장이 크게 뛰어 대서 밤새 잠을 못 잤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태서는 윤재인이 제 진짜 약혼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며칠간 조금 멍한 상태로 지냈다. 자꾸만 그녀의 이름이 입 안에 맴돌았다. 잠자는 시간이 아니면 계속 그녀를 생각했다. 저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는 때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껄떡대는 친구 놈을 진절머리 난다는 표정으로 무시하는 윤재인을 마주한 날이 네 번째 만남이었다.


{Jane, 당신은 그렇게 노려봐도 예쁘네.}


{뺨을 한 대 더 맞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 볼까?}


{아니, 난 칭찬한 건데…….}


{당신 칭찬 들을 생각 없으니 그만 비키죠. 곧 있을 수업에 방해되니까.}


{그, 그러면 수업 끝나고!}


{F*** off.}

 
마지막 욕설은 한 자 한 자 씹어 내뱉듯 천천히 읊어 준 덕에 입 모양만으로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대차게 차인 친구 놈을 보고 있던 태서는 어쩐지 유쾌해져서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당신은 지금 이게 재미있어요?}


{평소 좀 얄밉던 녀석이라. 당하는 걸 보니 유쾌한 게 사실입니다.}


{그쪽도 요가에 관심 있어서 수업 신청한 거, 아니죠?}


{관심 있다면?}

 
그 여자는 태서마저 경멸한다는 눈빛으로 쏘아보았더랬다. 가당치도 않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더니 태서를 응시하며 고갯짓했다.

친구 따라 꺼지라고.

태어나 그런 취급은 처음 받아 봤다. 그게 이상하게 짜릿해서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짜증이 가득 묻어나던 여자의 표정을 떠올리는 태서의 입꼬리가 보기 좋게 휘었다.


“장난 그만하시죠.”

여자를 떠올린 태서가 내뱉은 이름을 듣고 유리가 불쾌함을 드러냈다.


“아는 외국 여자 이름인데, 왜요.”

“……이제 정말 결혼 얘기해요. 원래 결혼식 날짜는 여자 쪽에서 잡는 거라고 들었어요. 저는 늦어도 내년 가을 안으로는…….”

유리가 헛꿈을 꾸건 말건, 태서는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 올리며 웃었다. 계속해서 재인이 눈을 찡그리며 제 친구에게 무안을주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Jane은 흔하고 조금은 올드한 이름과는 다르게 만인의 시선을 사로잡는 외모의 소유자였다. 옐로 피버(yellow fever)인 친구 놈은 그때 몇 번이나 끈질기게 들이댔다가 뺨만 몇 대를 맞았다.

재인을 생각하던 태서가 마주 앉은 유리를 지그시 응시했다.

태도로 보나 말하는 것으로 보나, 윤재인과 한집에 사는 동안 그녀를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았으리라.

그런 생각이 드니 어쩐지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 첫 만남에 너랑 결혼할 생각 없다고 말해 주려던 계획을 접기로 했다. 조금은 괴롭혀 주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이다.


“성격 급하시네. 만난 첫날부터. 오늘은 느긋하게 차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얘기나 하죠. 제가 아직 한국에 적응 중이라.”

“그래요, 그럼. 우리 결혼이야 어차피 내년 안으로 할 거니 서두를 필요 없죠. 제가 급한 게 아니니까요.”

“급한 게 아니시니까.”

쓸데없이 자존심 높은 유리의 뒷말을 따라 하며 태서가 찻잔을 들었다.

Jane. 윤재인.

어쩌면 자신의 웃기지도 않은 약혼자라고 이 자리에 나왔어야 했을 여자.

문득 그 여자가 다시 보고 싶었다. 꾹꾹 눌러 왔던 욕심이 고개 드는 것이 선연했다.

다시 볼까.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직도 그렇게 남자들에게 벽을 세울까.

여전히 그렇게 눈부시게 빛이 날까.

태서가 모처럼 느낀 간지러움을 만끽하며 양쪽 입꼬리를 올려 싱긋이 웃었다.

그 눈부신 미소에 도도한 표정을 겨우 회복한 유리의 두 뺨이 붉게 물든들 말든, 태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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