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남의 자리 꿰차고 앉은 주제에 (3/123)


#3. 남의 자리 꿰차고 앉은 주제에
2022.07.08.


70대 중후반은 되어 보이는, 바싹 마른 여자는 온몸에 명품을 두르고 나타났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재인에게 부모님이 뭘 하는지 물었다.


“안 계십니다.”


“두 분이 다 안 계셔? 아니, 어쩌다?”


“왜 물으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그런 것까지 말씀드려야 하나요?”


“어른이 묻는데 공손히 대답은 못 할망정 어디 눈을 똑바로 뜨고…….”

 
못 배워 먹은 거지 보듯 하는 눈초리로 그다음에 물어 온 것은 출신 대학이었다.


“한국여대 중퇴했습니다.”


“왜 중퇴했대? 한국여대면 꽤 괜찮은데.”


“다니기 싫어서요.”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남광순이라 밝힌 건물주가 탐탁지 않은 눈길로 재인을 훑었다.

재인은 건물주의 머릿속에서 자신의 점수가 점점 낮아지고 있음을 선명히 느꼈다.


“하도 칭찬해서 와 봤는데. 우리 원장님이 순진해서 잘못 판단한 모양이네.”


“우리 요가원 원장님이요……?”


“아니. 강남 오석동 치과 원장님. 우리 아드님 말이야. 대학을 다니다 말아 그런가? 말귀를 못 알아먹어.”

 
자기가 낳은 아들을 가리켜 원장님이라 부르는 것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재인은 괜한 오해를 사지 않으려 빠르게 선을 그었다.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 건데, 아드님과는 수업만 했습니다. 연락처를 드린 건 제가 담당 강사여서였구요. 그마저도 개인 연락처가 아닌, 다른 수강생에게도 모두 오픈하는 업무용 핸드폰 번호였습니다.”


“뭐, 그건 됐고. 아가씨, 이건 확실하게 대답해 줘야겠어. 우리 아들한테 안 들러붙을 거지?”


“네. 그럴 마음 전혀 없습니다.”


“말은 통해서 다행이야. 그래도 주제는 아니 다행이네. 그러면 그렇게 알고 갈게요.”

 
재인은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며 요가원을 떠나는 광순을 미소로 배웅했다.

무시와 멸시를 상대하는 것에는 도가 텄다. 친부의 집에서 6개월 차이 나는 이복동생과 함께 산 7년의 세월 덕이었다.

늘 바늘 돋친 시선을 쏘아 대던 모녀가 저에게 했던 것을 떠올리면 이 정도는 귀여운 축에 속했다.


“뭐랬냐니까.”

“그냥. 귀엽게 헛소리 잠깐 하고 가셨어.”

“하여간. 너도 보면 참 세다니까. 생긴 건 온실 속 화초 같은데, 그 안에 독을 숨기고 있달까? 그래서 내가 널 좋아하는 거지만.”

“가자. 내일 토요일인데 집에 가는 길에 맥주나 사서 마시자.”

“오, 좋아. 강사님은 여기 뒷정리나 마저 하셔요. 이건 바지 원장이 가져다 놓을게.”

상화가 자루걸레를 치우는 사이, 재인이 눅눅한 겨울 밤공기를 한껏 들이마시고는 창문을 닫았다.

12월의 설렘이 가득한 도시 분위기가 재인에게는 남의 일 같았다.


 

* * *



“돌아가신 조부님께서는 제 약혼녀랑 저랑 두 살 차이라고 하셨다던데. 유리 씨는 저랑 세 살 차이가 나네요.”

“제가 2월에 태어나 학교를 일찍 들어가서요. 두 살 차이라고 볼 수도 있어요. 그래서 그런 것 아닐까요?”

“혹시, 한 살 터울의 언니 없습니까?”

“모르셔서 물으시는 건가요? 저, 현양의 외동딸이에요.”

남자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찻잔을 들었다.

현양의 외동딸이라니. 중세 서양 어느 공작가의 누구 영애도 아니고.

지나치게 자긍심 높은 여자의 도도한 대답이 우스웠다.

현양 건설이 뭐라도 되는 줄 아는 순진함을 귀엽게 여겨 줘야 할까.

남자는 커다란 손을 들어 진하고 반듯한 눈썹을 문질렀다. 그러자 앞의 여자를 한심하게 여기는 그의 표정이 가려졌다.

한때는 건설 업계 규모로 열 손가락 안에 들던 현양 건설이었다. 하지만 30년쯤 전, 2대 회장인 조성환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그 위세가 천천히 기울기 시작했다.

뒤를 이어 회장직에 오른 이는 조성환의 장남 조대훈이었다.

조대훈은 냉철한 성격으로 회장직에 오르자마자 쓸모없다고 판단되는 계열사와 하도급 업체를 정리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노사 문제가 크게 불거졌다.

갑인 현양 건설의 일방적 계약 파기로 인해 거리로 나앉은 노동자들의 시위가 오랜 시간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면서 드러난 조대훈의 피도 눈물도 없는 모습에 국민 대다수는 공감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온 국민에게 현양은 서민의 편에 서지 않는, 귀족주의에 젖은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심어 주었다. 그 결과 신뢰도와 매출이 하락한 것은 당연했다.


“진짜 외동딸이라고……?”

“조금 불쾌하네요. 와튼 스쿨에서 약혼녀를 대하는 매너를 못 배우셨나요?”

“하, 약혼녀.”

참지 못하고 내뱉은 조소에 여자가 새치름한 눈을 크게 떴다. 언짢은 기색 가득한 표정으로 미간에 힘을 주면서도 주변을 의식하는 듯 눈동자를 굴렸다.


“왜 웃으시는 거죠?”

“아닙니다. 와튼 스쿨은 경영학을 가르치지, 약혼녀를 대하는 매너 같은 건 안 가르치죠.”

남자가 현재는 재계 서열 상위에서 한참 밀려난 현양 건설 조대훈 대표의 외동딸이라는 조유리와 마주하고 있는 이유는 단순했다.

궁금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이인데 이십 년째 제 약혼녀를 자처하고 다닌다는 여자가. 그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뻔뻔함을 비웃어 주고 싶었다.

강선 건설 본부장, 강태서.

대외적으로 그는 강선 그룹 강신재 회장의 유일한 자식이었다.

그의 조부 강선일은 태서가 세 살 무렵 갑작스럽게 세상을 떴다. 그는 눈감기 전, 어린 태서에게 한 달 먼저 세상을 뜬 현양 건설 조성환 회장의 손녀딸이 네 짝이라는 유언을 남겼다.


“제 엄마 닮아 아주 똑똑하고 예쁜 아이일 거라고, 조성환 그놈이 태어나지도 않은 손녀딸을 어찌나 자랑하던지. 그러니 태서 너는 딴눈 팔지 말고 잘 자라서 그 아이 데려오거라.”

 
조부는 친우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어 했다. 그 뜻을 이어 가고자 한 조모는 태서가 크는 동안 그에게 두 살 어린 약혼녀가 있음을 계속 강조하였다.

물론, 그 말을 들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시대가 어느 때라고 어른들 약속만 믿고 만난 적도 없는 상대와 결혼한단 말인가.


“이 바닥에서 흔하잖아요. 유리 씨한테 숨겨진 이복 언니가 있을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게 무슨……!”

“혹시 압니까. 그 언니가 내 진짜 약혼녀일 수도 있는 거고.”

분노로 얼굴을 붉히고 있던 유리에게서, 태서는 잠깐 스쳐 지나간 당황의 기색을 놓치지 않았다.

우습고도 같잖았다. 진짜 약혼자도 아니면서 흉내를 내는 이 여자가.

남의 자리 꿰차고 앉은 주제에.

태서는 이미 제 약혼녀에 대해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조부가 저를 두고 혼맥을 맺었다는 현양 건설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미국에서 대학에 다니는 동안 기업 인수 합병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몇몇 기업을 물색하던 중에 이미 적지 않은 데이터를 가지고 있던 현양 건설에 대해서 조금 더 파고들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온갖 게 다 걸려들었다.


“와……. 이러고도 기업 운영이 된다고?”

 
현양 건설을 분해하거나 잡아먹을 생각은 없었다. 집안끼리 안면이 있는 사이라고 하니 복잡하게 얽히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그 집안의 사위가 될 생각도 없었고,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한 기업의 몰락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러다 3년 전, 대학원 생활 중에 잠깐 머리를 식히러 발리에 갔을 때였다. 거기서 우연히 한 여자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태서는 그 여자가 제 진짜 약혼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의 기분이란.

기가 막힌 우연에 헛웃음을 뱉다가도 이상하게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여기에 있다고? 지금 내가 머무는 리조트에?”


―네. 리조트 프로그램 중에 평일 오전 열 시, 오후 세 시, 다섯 시에 요가 강습이 있습니다. 요가 강사로 일하고 있어요. 이름은 Jane Yoon, 한국 이름은 윤재인입니다. 관련하여 바로 메일로 보내겠습니다.

 
조대훈 회장의 외동딸로 알려진 조유리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여자.

자신과 딱 두 살 차이의 여자. 윤재인.

그녀가 태어난 달과 조성환 회장이 사망한 달을 생각해 보면 답이 나왔다. 아무리 조성환 회장이라고 한들 생기지도 않은 손녀딸을 친우에게 자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배 속 아이의 성별을 알려면 적어도 태아의 주수가 12주는 지나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 조성환 회장 사망 8개월 이후 태어난 조유리는 제 약혼녀가 될 수 없었다.

그녀가 친모의 태내에 열두 달 가까이 있다가 태어나지는 않았을 테니.


“무슨, 고래나 말도 아니고.”

“……네?”

“아닙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바라보는 유리를 향해 태서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 저었다. 그리고 또다시 제 머릿속을 채워 나가는 여자를 눈에 그렸다.

윤재인.

발리의 강렬한 햇살 아래 구릿빛 건강한 피부를 뽐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눈부시게 하얀 살결로 이목을 사로잡던 여자였다.

새뽀얀 피부와 대조되는 새카만 머리칼이 아름다웠다.

머리카락처럼 까만 눈동자는 사람을 빨아들일 것처럼 깊었다.

그녀는 좀처럼 웃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며 웃는 모습을 보았을 때, 태서는 태어나 처음으로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녀가 제 진짜 약혼녀라는 보고를 받기 바로 전날 있었던 일이었다.

태서가 태어나 처음으로 관심을 가진 이성이었다. 그래서인지, 제 진짜 약혼녀의 존재를 몇 번이나 확인하고 얼마간은 꽤 들뜬 기분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보고받은 이후 발리에 머무는 동안, 그는 재인에게 단 한 번도 말을 걸지 않았다. 대학 동창 녀석이 그녀에게 반해 요가 수업을 신청하고 기웃거릴 때도 지켜만 보았다.


“진짜 예쁘지 않냐?”


“예쁘면 어쩌게. 그 여자한테 뺨 한 대 더 맞아야 정신 차릴래?”


“너는 말을 해도……. 근데 넌 도대체 왜 그렇게 여자한테 관심이 없어? 태서, 나한테만 말해 봐. 너 혹시 남자 좋…….”


“쓸데없는 말 하려거든 입 다물어.”

 
그때의 태서는 조모에게 인정받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자꾸만 재인을 향하는 제 시선을 애써 거두었다.

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미 한국 재계에는 강선 그룹과 현양 건설이 혼맥을 맺을 거란 소문이 사실로 굳어진 모양이었다. 그러니 현양 건설 회장의 사생아인 그녀와 엮이는 건 피곤하기만 할 것이었다.

더군다나 윤재인은 스스로 현양 건설과의 연결 고리를 끊고 살고 있었다. 친부와 상관없이 행복하게 사는 사람을 굳이 들쑤실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태서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재인을 종종 떠올리곤 했다. 가끔은 꿈에서 제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던 미소를 다시 마주하기도 했다.

그래도 굳이 찾아보지 않았다.

현양 건설과 상관없이 사는 것, 그게 그 여자가 원하는 것일 테니까.

그러니 진짜 약혼녀인 윤재인이 아닌, 조유리가 이 자리에 나온 것만으로도 파혼 조건은 성립되었다.

감히 누구를 기만해.


“당장 나만 하더라도 이복형제가 여럿이라 묻는 겁니다. 아시죠? 강선 그룹이 몇 년 안에 조각조각 날 거라는 거. 서로 더 갖겠다고 피 터질 겁니다.”

그가 스스로를 조소하며 시계의 은빛 밴드를 만지작거렸다.

재계 서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강선 그룹 곳곳에는 그의 이복동생이 몇 명 더 있었다.


“태서 씨가 외국에만 있다가 오셔서 잘 모르시나 본데, 우리나라는 아직 그렇게 오픈 마인드가 아니에요. 어차피 태서 씨만이 유일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누구한테 인정받습니까? 아, 참고로 내 아버지는 다섯 자식 모두에게 골고루 차가운 분입니다. 본인 자리 자식에게 물려줄 생각도 별로 없으시고.”

“아무리 그래도……. 혼인 관계에서 태어나지 않은 자식들은 세상 앞에 떳떳하지 않으니까요.”

“돈만 많으면 떳떳해요. 뭘 모르시네.”

“그런 얘기는 됐어요. 그보다는 결혼 일정이나…….”

의자에 기대어 앉은 채 빙글거리며 웃던 태서가 불시에 유리 가까이 몸을 숙였다. 깜짝 놀라 말을 멈춘 유리가 심호흡하며 남자의 잘생김을 감상할 때였다.


“야, 가짜.”

태서가 낮게 지껄이듯 뱉은 말에 인형처럼 다듬어져 있던 유리의 얼굴에 쩍, 하고 금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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