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말라비틀어진 팽이버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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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말라비틀어진 팽이버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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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말라비틀어진 팽이버섯
2022.07.05.
단언컨대 오석동은 서른여섯 해의 인생을 통틀어 서른 살이 넘은 여자는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여자 나이 서른이 넘어가면 순진한 맛 없이 기만 세진다는 모친의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살면서 몇 번인가, 어린 마음에 제 고집대로 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매번 끝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언제부터인지 모친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랐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친의 말을 들어서 잘되지 않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석동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억지웃음을 지었다.
“에이, 삼십 대라뇨. 재인 씨는 누가 봐도 이십 대인걸요. 그러면, 올해 서른인가 보다. 그렇죠? 아직 만으로는 이십 대가 맞죠?”
“음, 한국 나이로는 서른 살이 맞아요.”
“그것 봐. 그러면 아직 이십 대가 맞으시네.”
나이를 왜 자꾸 캐묻는지, 의아해하는 재인의 표정을 읽지 못한 석동이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눈 딱 감고 서른 살까지는 봐주려고 했는데, 다행이었다.
한 달 뒤면 해가 바뀌어 서른한 살이 될 여자에게 반했다는 게 자존심 상했지만, 고개를 갸웃거리는 예쁜 얼굴을 보니 못마땅함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래. 관리 잘하면 돼. 나중에 데리고 다닐 맛 떨어지게 살찌기만 해 봐라. 애 낳고 퍼지기만 해. 그러면 생활비 조금만 주고 각방 써야지.
그렇게 생각한 석동은 새삼 자신의 넓은 이해심에 감탄하며 이번 한 번만 더 모친의 말을 어겨 보기로 했다.
다만 몸이 문제였다. 습자지처럼 볼품없이 하느작거리는 몸뚱이는 기초적인 동작마저 따라 하지 못했다. 시든 깻잎 같은 몸이 소화해 내기에는 턱없이 과한 운동이었다.
그 덕에 종잇장같이 얇은 근막이 찢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석동은 미래의 아들딸을 위해 극한의 참을성을 발휘했다.
“어렵네요.”
“잘하고 계세요. 호흡 느끼는 거 잊지 마시고요. 어깨가 뒤로 넘어가지 않게, 네, 그렇게 자세 유지할게요. 하나, 둘, 셋…….”
인내 끝에 얻게 된 열매는 달았다. 학원 문을 새로 연 탓에 수강생이 많지 않아 재인과 단둘이 수업하는 날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제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그를, 재인은 매번 상냥하게 지도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신체 접촉이 뒤따랐다. 깡마르기만 한 석동의 몸 곳곳에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이 닿을 때마다 온몸이 짜릿했다.
그렇게 2주를 공들였다. 매일 요가 수업을 들으며 재인의 환심을 사려 노력했다.
며칠 전에는 저녁을 먹으며 모친에게 신경 쓰이는 여자가 있노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간단히 재인에 관해 설명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석동은 끝나고 칵테일 한잔하는 게 어떠냐고 물으려 각을 쟀다. 그런데 그때 재인이 먼저 드릴 말씀이 있다며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원장님, 사실…….”
고백의 순간인가.
얌전한 줄만 알았더니 이런 깜찍한 면이 있을 줄이야. 낮에는 단정하고 밤에는 요부 같은 여자야말로 세상 모든 남자의 꿈 아니겠는가.
석동은 그 꿈을 이루는 남자가 바로 자신이 될 거라는 것을 직감했다. 격한 환희에 차올라 꼴 보기 싫게 부풀어 오르는 광대 근처에 겨우 힘을 주었다.
“잠깐만요, 재인 씨. 우리 여기서 이러지 말고 1층에 있는 카페라도 가요. 커피라도 마시면서 얘기합시다.”
석동이 학원 데스크에서 말을 꺼내려는 재인을 억지로 이끌고 1층의 카페로 향했다.
그는 낭만을 아는 남자였다. 커플이 되는 기념비적인 장소로 학원 데스크 앞보다는 카페가 나을 것이다.
“저는 원장님과 사귈 생각이 없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한다는 말이 불편하다니. 사귈 마음이 없다니.
청천벽력 같은 재인의 말에 석동이 터져 나오려는 분노를 꾹 눌러 참았다. 그러느라 그의 비좁은 어깨와 앙상한 갈비뼈가 크게 오르내렸다.
“죄송합니다. 바쁘실 텐데 괜한 시간 쓰시게 하는 건 옳지 않은 것 같아서 말씀드려요.”
차일 줄은 몰랐다. 정말이지 석동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서른 살의 여자였다. 평소였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거다.
그런데 나긋나긋하면서도 탄탄해 보이는 몸매에 자꾸만 눈이 갔다. 시도 때도 없이 여자의 티 없이 맑은 피부, 가지런한 치열, 세상 고운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서 자궁이 깨끗하고 기형아 낳을 걱정 없는 이십 대 여자를 만나라는 모친의 당부를 저버렸다. 처음으로 이십 대 여자만 찾던 고집을 꺾은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될 줄이야.
“이유가 뭐죠?”
석동은 이해할 수 없었다.
직업? 빠지지 않는다. 이 정도면 외모도 나쁘지 않다. 171.4cm라는 키가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그런 것쯤은 돈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그를 세상 가장 귀하게 여기는 모친이 늘 해 준 말이기도 했다.
그런데 감히, 가암히. 서른 넘은 여자가 자신을 차다니. 만나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여겨야 할 판에.
석동은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저도 모르게 눈앞의 뜨거운 커피로 손을 뻗었다. 그러다 좀생이처럼 보이는 얇은 입술을 데고 나서야 욕설을 뱉었다.
악몽이 아니라 현실임을 깨달은 것이다.
“제가 연애할 생각이 없어서요.”
“……한 번 더 기회를 주죠. 다시 생각해 봐요. 지금 그 말, 후회할 텐데?”
어느새 짧아진 말에는 남자의 졸렬함과 우월감이 가득했다.
재인은 김칫국 마시다 사레 걸린 듯한 표정을 짓는 남자와 더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생각보다 질긴 면모를 보이는 남자가 한심했다. 좋게 말하고 끝내려고 했는데, 이번에도 안 될 모양이다.
“재인 씨가 순진해서 뭘 잘 모르는 모양인데, 나 같은 남자 만나는 거 쉽지 않…….”
“원장님 같은 남자 널렸어요.”
재인을 설득하려 말을 늘어놓던 석동이 입 벌린 채 눈만 끔뻑였다. 잘못 들었나, 생각하는 그의 못난 얼굴이 천천히 기울었다.
“한여름날 성가시게 구는 모기처럼 널렸더라고요. 돈 얹어 줘도 안 만나요.”
“……뭐?”
충격으로 초점을 잃은 석동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남광빌딩 건물주 되시는 남 광 자, 순 자 여사님의 하나뿐인 아드님이시라고요.”
“우, 우리 엄마를 어떻게…….”
“어제 원에 찾아오셔서는 이것저것 물으셨어요. 마음에 안 차셨는지 혀 차며 가셨구요.”
석동이 입술을 짓씹었다.
너무나 사랑하는 모친이 설마 제 연애에 재를 뿌릴 줄이야.
“혹시 어머님 때문에 제가 원장님 거절하는 거라고 생각지는 말아 주세요. 그 엄마에 그 아들이구나, 생각했을 뿐이에요.”
놀라 벌어진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석동은 뭐라 대꾸하지도 못하고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여기, 제 커피값입니다. 잔돈은 가지셔도 돼요. 한 달 수업료 카드 결제하신 건 남은 2주만큼 환불해 드릴게요.”
재인이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어 손도 대지 않은 커피 잔 근처에 내려놓았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살펴 가세요.”
재인이 자리를 떨치고 일어섰다.
석동은 도도한 자태로 멀어지는 재인의 뒷모습 대신 테이블 위의 만 원짜리 지폐만 노려보았다.
지금 흐르는 눈물은 슬퍼서 흘리는 게 아닌, 분해서 흘리는 거라고 몇 번이나 되뇌는 그의 좀스럽게 생긴 턱이 잘게 떨렸다.
* * *
“헛물켜지 말라고 말했어?”
“응.”
“어휴, 그 가식적인 인간. 나한테는 공사 때문에 일도 못 한다고 손해 배상 청구할 판이라고 지랄하더니. 말라비틀어진 팽이버섯처럼 생겨서는.”
상화가 두 팔을 문지르며 몸서리쳤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올라와서 소리 질러 대는 치과 원장이 신경 쓰였다. 급한 마음에 현장 청소를 돕다가 폐각목에 박힌 못이 발뒤꿈치를 찔렀다.
부어오른 자리에 염증이 생겨 병원에 입원하고 일주일 넘게 고생해야 했다. 상화의 발뒤꿈치에는 아직도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그래도 건물주 아들인데. 괜히 요가원에 피해라도 있을까 봐 걱정이다.”
“건물주 아들이면 뭐 어쩔 거야. 꼴뚜기같이 생겨서 요가 수업 핑계 대고 내내 징그럽게 들이댄 게 누군데. 그걸 그냥 둬? 당연히 차야지.”
“정확히 말하자. 나 세입자 아니다. 너지. 네가 원장이고, 나는 강사고.”
“그래. 내가 바로 그 바지 사장, 아니지. 바지 원장 서상화다.”
상화가 낄낄 웃으며 바닥에 놓인 요가 매트를 들어 정리했다.
서류상 <요가 만다라>의 사업자는 서상화였다. 하지만 요가원을 차리는 데 들어간 돈은 대부분 재인의 통장에서 나왔다. 재인의 부탁으로 상화가 대신 사업자로서 이름을 올린 것이다.
“괜히 강남으로 왔나 봐. R사 시계 보여 주면서 강남 찬양하는데 뭐 저런 인간이 다 있나 싶더라.”
“가진 게 돈뿐이라서 자랑할 게 그거밖에 없다, 이거지.”
“요가원 문 열자마자 이게 무슨 일이야. 아무래도 여기 터가 안 좋은 듯.”
“야, 터가 안 좋기는? 이번 주에 등록한 회원만 몇 명인데. 우리 금방 빚 갚고 부자 되겠어. 좀 이상한 건물주 모자만 조심하면 될 것 같아.”
재인이 피식 웃으며 청소 도구함에서 걸레 밀대를 꺼내 들었다. 오후 수업 이후 내려앉은 먼지와 머리카락이 제법 많았다.
“대충 해. 어차피 내일 아침에 또 청소기 돌릴 건데. 하여간 깔끔쟁이 아니랄까 봐.”
“서상화 원장님, 바지 원장이라 그런가. 요가원 아끼는 모습이 덜해.”
“그러는 윤재인 강사님은 찐원장이라 요가원을 그렇게나 아끼시구요.”
상화가 맞받아치며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겨울 공기에 훈훈하던 교실 안에는 금세 쨍한 냉기가 돌았다.
“재인아, 너 오늘 우리 집에 가서 자야겠다.”
“갑자기?”
“응. 당분간 나랑 같이 다녀. 저거 보통 미친 인간이 아니네. 카페 앞에 서서 우리 학원 노려보고 있는데?”
“……치과 원장?”
“응. 그 꼴뚜기.”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쉰 재인이 바닥의 먼지와 머리카락을 모아 쓰레기통에 버렸다.
타고나기를 예쁘게 태어났다. 시대를 풍미하던 배우 윤세나는 외동딸에게 제가 가진 미모를 모두 물려주었다. 거기다 친부 쪽의 유전자가 적절하게 섞여 미모는 한층 업그레이드되었다.
재인은 까무잡잡한 피부 탓에 이국적인 외모로 유명했던 윤세나와는 다르게 눈처럼 뽀얬다. 거기다 윤세나보다도 훨씬 길쭉길쭉한 팔다리를 자랑했다.
하지만 재인은 제 아름다움을 불편하게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원치 않는 관심과 주목으로 힘들었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특히나 10년 전에 있었던 끔찍한 사고 이후, 재인은 좀 덜 예뻐 보이게 성형 수술을 받아야 할지 고민까지 했더랬다.
“하, 멸치 대가리 같은 게 째려봐서 뭐 어쩔 건데? 내가 같이 째려보니까 꼬리 내리고 가는 게 웃기지도 않는다. 야, 아무래도 안심이 안 돼. 오늘 우리 집에서 잘 거지?”
“응.”
“어제 그 아줌마 왔을 때 내가 있었어야 했는데. 자세히 좀 말해 봐. 건물주 아줌마가 뭐랬는데?”
상화의 채근에 재인이 어제 요가원을 찾아왔던 여자를 떠올렸다. 다시 생각해도 헛웃음만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