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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다렸던 순간 (1/123)


#1. 기다렸던 순간
2022.07.01.


짜악, 소리에 술렁거리던 아트 센터 안이 조용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쏠린 곳에 재인이 서 있었다.


“네가,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모멸감에 부들부들 떠는 유리가 재인을 쏘아보았다.

고개가 돌아가도록 힘껏 뺨을 맞은 재인은 오히려 초연했다. 새빨개진 뺨을 그대로 둔 채 천천히 유리를 향해 고개를 바로 했다.

가만히 맞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 돌려줄까 고민하며 유리를 노려볼 때였다.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 네가 뭔데, 네까짓 게 뭐라고! 고작 너 따위가 나한테…….”

혐오 섞인 분노를 쏟아 내던 유리의 입이 꽉 다물렸다. 그녀의 정수리 위로 떨어져 새하얀 오프숄더 원피스를 붉게 물들이고 발끝까지 흘러내리는 것은 피처럼 검붉은 와인이었다.

재인은 그제야 유리의 뒤에 선 남자를 보았다. 우아한 자세로 병을 기울이는 태서는 마치 와인을 디캔팅하는 듯 능숙했다.

가느다란 벨벳 줄기가 유리의 머리 위로 미끄러지듯 소리 없이 쏟아졌다.


“당신한테는 김빠진 맥주도 아깝지만. 마침 들고 있던 게 이거라.”

국내에 단 두 병 남아 있다던 최상급 빈티지의 로마네 콩티였다. 순식간에 그 깊고도 풍부한 향이 아트 센터 구석구석 퍼졌다.


“주제 파악 못 하고 소란 떠는 게 누군데. 고작 조유리 주제에 누구를 때려. 감히.”

태서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느긋하게 쏟아부으며 유리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고는 얼빠진 채 근처에 서 있던 직원에게 빈 병을 건넸다.

조금 전까지 살기등등하던 눈빛에 순식간에 부드러움이 섞인다. 태서가 손을 내민 곳은 호흡 곤란을 일으킬 듯 창백해진 유리의 팔꿈치 너머였다.


“이리 와요.”

제 옆으로 뻗어 나온 남자의 손을, 유리가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리고 재인 역시 저를 향해 내민 그 커다랗고도 유려한 손을 바라보았다.

까딱, 재촉하듯 손이 움직였다.

재인의 시선이 그의 기름한 손가락 끝에서 길고도 다부진 팔로, 다시 팔을 지나 강인해 보이는 어깨를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더할 나위 없이 근사한 남자의 따스한 눈빛을 마주했다.


“와요. 나한테.”

태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재인은 홀린 듯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그에게 이끌려 커다란 홀을 가로질렀다.


“아…….”

뺨에 차가운 것이 닿았을 때서야 정신이 들었다.

갤러리 안쪽의 사무실로 여겨지는 공간이었다. 태서는 재인을 널따란 책상 위에 앉혀 두고 그녀의 뺨에 젖은 손수건을 가만히 댔다.


“왜 맞고만 있습니까. 그럴 성격 아니잖아요.”

“때리려고 했는데 강태서 씨가 선수 쳤잖아요.”

“미안합니다. 사실, 때리지 않았으면 했어요.”

“왜요. 약혼녀에게 와인은 쏟아부었어도, 맞는 건 못 보겠어요?”

재인이 새초롬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느라 태서의 입꼬리가 씰룩인 것은 보지 못했다.


“그럴 리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웃은 남자가 재인의 뺨에 붙은 머리칼을 떼어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조심스러운 손길과 꼼꼼히 살피는 눈빛에 속상함이 묻어났다.


“겨우 그딴 거 때리느라 윤재인 씨 손바닥도 아플 거거든.”

“…….”

“기다려요. 조유리가 재인 씨 찾아와 스스로 자기 뺨 때리며 빌게 만들어 줄 테니.”

“왜 그렇게.”

재인의 입술 새로 쏟아진 말이 탄식하듯 흩어졌다. 태서는 그저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녀의 뺨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에게 다정해요……?”

“마음에 안 듭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태서로서는 다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카페에서 마주쳤던 날 이후, 줄곧 재인이 다가와 주기만을 기다리던 그였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그녀가 나타날 수 있도록 판을 깔아 주었다.

어쩌면 거절할 거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위험 부담을 무릅쓰고 제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다 그가 내민 손을 직접 잡아 주기까지 했으니.

태서는 그 사실이 못 견디게 기꺼웠다.

마침내 빨갛게 부어오른 뺨을 눈치챈 그가 눈썹을 찡그렸다.


“……잠깐 여기 있어요.”

재인은 남자가 혀를 차듯 내뱉은 욕설을 겨우 알아들었다. 조금 전까지 나긋하기만 하던 남자의 목소리에 또다시 분노가 실려 있었다.


“어디 가는데요.”

“아까는 이렇게까지 부은 줄 몰랐는데, 안 되겠습니다. 가서…….”

“할 말이 있어요.”

당장이라도 조유리를 찾아가 두 동강을 낼 듯 몸을 돌리는 남자를 재인이 가까스로 붙잡아 세웠다.

제 셔츠 소매 끝을 그러쥔 작고 하얀 손을 바라보던 태서가 다시 그녀를 향해 섰다.


“얘기해요.”

“……강태서 씨, 능력 있는 남자죠?”

“어떻게 보입니까.”

자신감 넘치는 얼굴에 조금은 거만한 미소가 번졌다. 어마어마한 재력이나 뛰어난 업무 능력을 차치하고서라도, 강태서는 넘치도록 매력적인 남자였다.


“내가 어떤 사람이든, 지금 나를 향하는 그 관심이 줄어들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요?”

“나는 지금 당신이 살인을 저질렀대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거니 여길 것 같은데.”

“장난하는 게 아니에요.”

“뭐가 문젭니까. 빚이 많습니까? 쫓기고 있어요? 협박당하고 있습니까? 다 내가 해결 가능한데.”

“현양 건설 조대훈 회장, 그 사람이 내 친부예요.”

갑작스러운 고백에 태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신 약혼자인 조유리의 이복 언니라구요. 내가.”

이미 재인에 관해서라면 발 사이즈까지 알고 있는 그였다.

태서의 입꼬리가 야릇하게 휘었다. 그녀를 다시 만났던 12월부터 지금까지, 그토록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 * *


“이러시는 거 불편합니다.”

“불편하다는 게 무슨 뜻이죠?”

재인의 말투는 조심스러웠지만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카페 창문을 흔들어 대는 12월 초입의 바람처럼 차갑고 매서운 거절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퇴짜에 그렇지 않아도 옹졸하게 생긴 석동의 미간이 한껏 좁아졌다.

오늘 이후로 눈앞의 여자가 제 여자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나 깨나 기다렸던 순간이었는데, 그 기대가 와장창 깨진 것이다.

석동은 2주 전, 건물 3층에 새로 들어온 요가 학원 강사를 보았다. 그리고 말 그대로 눈이 튀어나오게 예쁘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저희 요가원 리모델링 공사가 너무 길어져서 불편하셨죠? 죄송합니다. 오늘로 공사 다 끝나서 이제 시끄러울 일은 없을 거예요.]

원장 대신 사과의 말을 전하며 마카롱 세트를 건네던 재인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화장기가 거의 없는 여자는 전체적으로 단아하고도 고고했다. 티 없이 매끈한 피부는 뽀얗게 빛났고 큼직한 눈망울은 사슴 같았다. 요요한 몸매는 청초한 코스모스를 떠올리게 했다.

어떻게 보면 무척 화려한 인상이라고 여겨지기도 했다. 또렷하고도 큼직한 이목구비를 가진 탓에 무표정일 때는 앙큼하고도 도도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재인이 환하게 웃는 순간, 석동은 그녀의 주변에 흩날리는 장미 꽃잎을 분명히 보았다. 웃는 그녀는 만개한 장미 그 자체였다.

재인이 고개를 슬쩍 숙이며 인사하자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흐르듯 굽이쳤다. 결 좋은 머리칼은 유난히 새까만 탓에 마치 검은 비단 같았다.

정말이지, 누구나가 반할 만큼 아름다운 여자였다.


[공사가 끝났나요? 괜히 급하게 서두르신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저는 괜찮았는데.]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원장님이 직접 오셔야 하는데 지금 병원에 있어서 강사인 제가 대신 왔습니다. 양해 부탁드려요.]

요가 학원 입점을 앞두고 리모델링 공사가 예정보다 길어졌다. 그 바로 아래층에서 치과를 운영하던 석동은 짜증이 났다.

그래서 공사 중인 현장에 몇 번이나 올라가서 소리를 높였다. 그때마다 요가 학원 원장이 죄송하다며 고개 숙였다.

석동은 자신보다도 키가 한참 큰 여자가 기분 나빠 신경질 가득한 눈빛으로 째려보았다.

그러더니 공사가 끝남과 동시에 강사를 보내 사과의 선물을 보낸 모양이다.


[원장님은 어쩌다가 병원에…….]


[공사가 너무 길어져서 죄송한 마음에, 청소라도 돕겠다고 나섰다가 발을 다쳐서요.]


[저런……. 개업 앞두고 원장님께서 상심이 크시겠어요.]

석동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재인이 건넨 마카롱을 받아 들었다.

평소라면 쳐다보지도 않을 마카롱이었다. 뭐 이딴 걸 사 오느냐고, 선물 고르는 센스도 하찮다고 코웃음 칠 그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제가 마카롱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아시고.]


[다행이에요. 고민하다가 근처에 유명한 맛집이 있다기에 사 온 건데 입에 맞으셨으면 좋겠어요.]


[잘 먹겠습니다. 와, 마카롱이 강사님만큼이나 예쁘네요.]


[아……, 감사합니다.]

슬쩍 미소 짓는 재인을 보는 순간, 석동은 그녀와 저를 똑 닮은 세 명의 아들딸과 다섯 명의 손주 손녀까지 보았다.


[그러면 요가 학원은 당분간 문을 안 여나요? 기대했는데…….]


[네?]


[제가 몸이 좀 찌뿌둥해서 퇴근하고 배워 볼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마침 바로 위에 요가 학원이 생긴다기에 등록하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석동은 요가는커녕, 몸 움직이는 거에는 관심도 없었다. 근육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비루한 몸이 증명하듯, 서른여섯 살이 되도록 운동과는 담쌓은 생활을 해 왔다.

이따금 몸이 찌뿌둥하면 모친과 함께 태국 마사지를 받으며 푸는 게 다였다. 하지만 석동은 계산이 빨랐다.

그는 모친인 남광순 여사가 건물주인 남광빌라 2층 전체를 치과로 쓰고 있었다. 그래서 3층의 공실에 들어온 요가 학원의 규모를 대충 알 수 있었다.

치과 면적 절반 크기의, 이제 막 문 연 학원에 강사가 여럿일 리 없다. 그렇다는 건 요가 학원에 등록하면 재인과 마주칠 기회가 많아진다는 의미였다.


[당분간은 저 혼자 운영할 거예요. 믿고 와 주신다면 저야말로 감사하죠.]

재인의 말에 석동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느라 그녀가 수업의 전반적인 것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한 귀로 흘렸다.

이미 석동은 예쁘고 탄탄한 몸매를 가진 여자친구를 옆에 끼고 동창회에 나가 청첩장을 돌리는 망상에 빠진 후였다.

그다음 날부터 석동은 요가 학원에 다녔다. 등록한 첫날에 핸드폰 번호를 주고받은 것은 자연스러웠다.


[우리 강사님 성함을 제가 뭐라고 저장할까요?]


[윤재인입니다.]


[저는 오석동입니다. 아시죠? 치과 간판 보셔서. 아, 원장님이라고 불러 주세요.]

석동은 건물 한가운데 <강남 오석동 치과>라고 크게 내건 간판을 떠올리며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신선했다.


[원장님 성함을 딴 거였구나. 저는 강남 오석동 치과라고 그래서 오석동 치과라는 곳의 강남점인 줄 알았어요.]


[제 이름을 걸고 하는 전국 유일한 치과입니다. 강남이라고 쓴 건, 여기 강남이 제 고향이거든요.]


[아…….]

고향을 말할 때 서울이라고는 해도, 강남이라고 하는 경우는 없지 않나. 재인이 그런 생각을 하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석동은 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강남을 찬양했다. 그러면서 제 얘기를 경청하는 재인을 향해 손목에 찬 시계를 은근슬쩍 내보였다.

국산 중형차 가격과 맞먹는 금액을 주고 산 R사의 시계는 그의 자랑이었다. 강남에서 병원 운영하는 원장이면 이 정도 시계는 차 줘야 한다며 모친이 개원 선물로 사 준 것이었다.

명품이 괜히 명품이겠는가.

석동은 조만간 커플 시계를 알아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무리하더라도 같은 브랜드에서 고를 생각이었다. 예쁘고 어린 여자 친구에게 쓰는 돈이 아까울 리 없다.

옆에 끼고 다닐 여자의 격을 올려 주는 것 역시 잘나가는 남자의 특권이자 매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인 씨 정말 대단하시네요. 아직 20대이신 것 같은데 벌써 국제 요가 자격증도 따시다니…….]


[저보다 더 어린 분들도 따시는걸요. 그리고 저 30대예요.]


[……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누가 봐도 이십 대의 상큼한 에너지를 뽐내는 그녀의 나이가 서른 살이라니.

석동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무 놀란 나머지 당황해서 더욱더 못생겨지는 얼굴을 숨기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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