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우스운 과욕
(182/182)
182화 우스운 과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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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화 우스운 과욕
2023.08.29.
검은 장막에 뒤덮인 숲은 온통 어두웠다.
바스락, 바스락-
마수들이 풀숲을 헤치며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있었지만, 이제는 동시에 들려 대강의 위치조차 알 수 없었다.
‘숨을 곳이 필요해.’
아우우우-
쿠워어어어-
징그러운 마수들의 울음소리에 나도 모르게 어깨가 자꾸 움츠러들었다. 의식적으로 시간을 보지 않으며 소리 없이 움직였다.
‘아직은 날 못 찾은 거야.’
원래 마수는 맹수만큼이나 후각이 예민하다. 솔직히 저 많은 수의 마수가 지금까지 날 찾지 못한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니 우연이 아니다.
‘룬이 뭔가를 해주고 간 걸까?’
하지만 그랬다기엔 룬은 아무 말도 해주지 않고 갔다. 말해주고 갔다면 훨씬 마음이 편했을 텐데.
‘아, 예스텔라가 나한테 걸었다던 저주.’
존재를 지워버리는 마법.
예스텔라가 걸어두었던 저주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마수들이 당장 나를 찾지 못하는 거였어.’
크르륵, 크릅!
마수가 침을 흘리며 쩝쩝거리는 소리가 코앞에서 들렸다. 나는 기괴하게 구부러진 나무 틈 사이에 몸을 웅크렸다.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숨을 멈추었다.
‘그냥 지나가라.’
크륵, 크르르…….
마수들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옆을 지나갔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마수가 자꾸 이 주변을 맴돌고 있어.’
무섭다고 움직이지 않았다간 바로 들켜버릴 거다.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른 장소를 찾아 움직였다.
[11:42]
생각보다 시간이 빨리 가지 않았다.
마수에게 들켜 먹힐 뻔한 위기가 여러 차례 닥쳤다. 마수들의 움직임은 갈수록 조직적으로 변해 포위망이 좁혀졌다.
‘지금 중요한 건 최대한 버티는 거야.’
혹시 모를 위기를 대비해 정령의 기운이 담긴 칼을 꼭 쥐었지만, 들키지 않은 이상 쉬이 휘두르지 않았다.
나는 혼자고, 상대는 너무 많았으니까.
‘저기에 숨으면 되겠다.’
기괴하게 뒤틀린 나무 사이로 사람 하나가 겨우 숨을 만한 장소가 보였다.
나무가 부러지면서 우연히 만들어진 장소라서일까. 입구가 워낙 좁아서 마수가 발견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았고, 발견하더라도 완전히 나무를 부수지 않는 이상 공격하기도 어려울 듯싶었다.
뒤로 마수의 발소리가 들렸다. 신경이 잔뜩 곤두섰다.
‘침착하자, 침착해.’
나는 옆을 지나가는 마수에게 보이지 않게 고개를 숙이고 땅을 기며 이동했다.
바스락-
무심코 뻗은 손이 아래에 깔려 있던 나뭇가지를 누르고 말았다.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당장 내 옆을 지나가고 있던 마수가 눈을 번뜩이며 다가왔다. 숨돌릴 틈도 없이 손에 쥐고 있던 검을 휘둘렀다.
콰앙!
[8:07]
***
검과 검과 부딪치며 자아내는 파열음. 불꽃이 일 정도로 치열한 접전이 이어졌다.
채앵- 캉!
말없이 서로의 목숨만을 노리는 살기 어린 결투. 요한과 리안드로의 검이 서로 강하게 부딪쳤다.
“큭!”
힘겨루기에서 밀린 요한이 빠르게 검을 흘려내 쳐낸 뒤 리안드로와 거리를 벌렸다. 리안드로는 멀찍이 떨어진 요한을 보며 다시 검을 고쳐 쥐었다.
푸른 눈이 오연한 시선으로 요한을 바라봤다.
“이제 공작이 나를 볼 때 무슨 기분이었는지 알겠습니다. 이런 기분이었군요.”
“…….”
“이런 기분을 혼자만 느끼고 있었다니. 당신은 참으로 비겁합니다.”
요한은 그런 리안드로를 비웃었다.
“아아, 그래서 여태까지 했던 싸움이 전부 불공정했다고 우기고 싶은 건가?”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악마의 힘을 빌린 자와 아닌 자 사이에는 엄연히 큰 차이가 있는 것을. 지금도 보십시오. 당신이 내게 아무것도 못 하는 걸 보고도 모르겠습니까?”
“악마와 계약하더니 쓸데없는 잡소리만 늘었군. 계약해서 얻은 게 입으로 결투하는 능력인가?”
리안드로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저딴 소리를 하다니.’
하지만 리안드로는 이내 쉬이 공격하지 못하는 요한을 보고 여유를 되찾았다.
오만방자한 말과 달리 요한은 검으로 그를 이기지 못하고 있었고, 그래서인지 빈틈만 노리고 있었다.
포식자보다는 피식자에 가까운 태도다.
‘하지만 그렇게 기회나 노리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당장 자신을 압도할 힘이 없기 때문이지만, 안타깝게도 최악의 선택이었다.
시간을 끌수록 유리한 건 악마에게 소원을 빌어 부활한 그였기 때문이다.
악마의 힘이 사라져 갈수록 지치는 평범한 요한과 달리 리안드로는 결코 지치지 않은 몸이니까.
무엇보다 요한은 아내인 에스텔까지 구해내야 하는 입장이지 않은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이해합니다. 오만하게 사람들을 무시하다 자신이 똑같은 신세가 되었으니 얼마나 자존심 상하겠습니까?”
요한은 고요히 검을 쥔 채 리안드로를 바라봤다. 그런 요한이 우스웠던 리안드로가 씩 웃었다.
“먼저 올 생각이 없다면, 이쪽에서 가겠습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쉽지 않을 겁니다.”
콰앙! 리안드로가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질주해 요한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리안드로의 검로를 예상했다는 듯 검을 튕겨내는 요한. 요한의 검이 곧장 리안드로의 손목을 향해 쇄도했다.
“푸하-!”
리안드로는 경박한 웃음소리를 내며 기괴하게 손목을 틀어 요한의 공격을 막았다.
키이잉- 탕!
검날끼리 맞부딪치며 쇠 긁는 소리가 났다. 힘으로 붙어 승산이 없다는 걸 안 요한은 리안드로와 정면에서 싸우지 않았다.
리안드로가 검을 휘두르는 타이밍에 맞춰 고개를 뒤로 뺀 뒤 발로 리안드로의 복부를 세게 걷어찼다.
“……윽!”
기사였던 리안드로는 이런 변칙적인 공격에 약했다. 순간적으로 검이 제 방향을 잃고 흔들렸다.
그리고 요한은 애써 만든 기회를 놓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빈틈.’
리안드로는 뒤늦게 두 다리로 중심을 잡으려 애쓰며 검을 휘두르려 했다. 하지만 안정적인 궤도를 그리는 요한의 검보다 더 빨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서걱!
“크윽!”
어깨가 정통으로 잘린 리안드로가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이다.’
요한이 균형을 잃은 리안드로의 몸을 여러 차례 공격했다. 그렇게 리안드로는 팔 한쪽이 날아가고, 심장에 칼이 한 번 찍힌 채 바닥에 쓰러졌다.
‘이제 끝인가?’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상처가 아니라 쇼크로 죽었을 타격이었다.
‘하지만…….’
요한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리안드로를 노려봤다.
시체처럼 피를 질질 흘리고 있던 리안드로의 몸이 기괴하게 꾸물거렸다. 잘려나간 팔이 금세 자라났다.
“후우- 방심했어.”
리안드로가 아무렇지 않게 일어서며 뒤로 꺾인 제 목을 정상적으로 되돌렸다.
“공작, 당신이 단순히 악마의 힘만으로 강한 게 아니었다는 건 인정해 주겠습니다. 평생 검만 수련해 온 나만큼이나 뛰어난 실력입니다.”
죽음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던 리안드로는 오히려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하지만 이제 저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당신의 실력을 파악했으니, 제 실력을 보여줄 때지 않겠습니까?”
리안드로가 손을 뻗자, 요한이 일부러 멀리 날려버린 리안드로의 검이 그의 손으로 곧장 날아왔다.
“당신도 제가 느꼈을 박탈감과 패배감을 느껴보십시오.”
캉! 카앙! 콰앙! 요한은 잔상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리안드로의 공격에 이를 꽉 깨물었다.
‘방금 전보다 움직임이 더 빨라졌다.’
월등히 속도가 빠르고 힘도 강한 상대.
이제 리안드로는 막 자신의 장점을 깨달은 것처럼 비정상적인 신체를 마구 활용하기까지 했다. 검을 휘두르다 손목이 부러지거나 뒤틀리면 뒤틀리는 대로 계속 전투를 이어 나갔던 것이다.
‘이런 식으론 끝이 없어.’
아니, 리안드로에게 밀린다.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은 요한만이 아니었다. 기사단장 레이몬드가 악을 쓰며 소리치는 게 들렸다.
“마수가 약자부터 노려 잡아먹고 있다! 여태까지 봤던 지능 낮은 마수들을 상대하던 방법은 잊어라!”
“배가 약점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이 마수, 약점이나 습성이 다른 것 같습니다!”
“다들 공격하면서 마수의 약점을 찾아라! 약점이 없는 마수는 없다!”
기사들 쪽에서 요한을 도와줄 여유는 없어 보였다. 전황을 힐끗 훑어본 요한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라면 패배뿐이다.’
블란쳇 기사들과 달리 마수들은 인간을 상대하는 데 몹시 익숙한지, 검이나 다리를 공격해 기사들을 무력화시켰다.
“-딴 생각할 여유가 있습니까!”
숨 돌릴 틈 없이 리안드로의 공격이 돌아왔다.
콰앙!
“기왕이면 더 오래 버텨보십시오. 공작이 그렇게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지 않습니까!”
리안드로의 검을 받아치는 요한의 팔이 떨렸다. 까딱 잘못하면 근육에 경련이 오게 생겼다.
심장이 찔려도 멀쩡히 살아나는 리안드로.
‘방법은 마법뿐이다.’
요한이 과부화된 근육에 마력을 사용하며 리안드로의 공격을 막아냈다. 리안드로는 갑자기 변해버린 요한의 모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겁니다! 이 정도는 해야 공작이지요. 얼른 더 좋은 승부를 펼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시끄럽다.”
역시나 마력을 사용하자마자 내부가 뒤틀리는 고통이 뒤따랐다. 문제는 자꾸만 집중이 끊겨 마법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무리하지 않기로 에스텔과 약속했는데.’
본의 아니게 또 거짓말을 하게 되어버렸다.
‘지금만큼은 에스텔도 이해해 주지 않을까?’
마법을 사용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강제로 끌어올린 마력이 기울었던 승부를 겨우 비등하게 맞추었다.
하지만 마력을 쓸수록 요한의 몸 상태는 점점 망가지고 있었다. 균형을 맞춘 듯 보이는 이 승부는 요한이 집중을 잃는 순간, 한 번에 끝날 것이다.
물론 리안드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더 노력해 보십시오. 그 잘난 블란쳇 공작의 실력이 이 정도밖에 안 됩니까? 다 악마 덕분은 아니었을 거 아닙니까?”
그 순간 리안드로의 뒤쪽에서 익숙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힘이 필요하지 않나?
은발에 붉은 눈동자.
혼돈의 힘을 존재가 유령처럼 나타나 무심한 시선을 보냈다. 요한과 똑같은 얼굴로.
-선택은 네 몫이다.
-하나 결정이 늦으면 힘을 빌릴 수도 없는 상황이 올 것이라는 걸 알아두도록.
압박되는 검에 호흡이 가팔라졌다. 애써 버티던 요한의 손목이 꺾였다.
쩌저적-
리안드로의 괴력을 버티던 검이 부러져 공중을 날았다.
찰나의 순간.
시간의 흐름이 느리게 느껴졌다.
희열에 가득 찬 리안드로의 푸른 눈동자. 휘두른 검의 방향을 바꿔 곧장 목을 노리는 리안드로의 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그를 부르는 기사단장 레이몬드.
“주군-!”
이번엔 정말 피할 수 없다.
죽는다.
모든 게 끝이다.
죽음이 코앞까지 닥친 그 순간, 요한은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
‘본래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가?’
어쩌면 에스텔과 함께 행복하게 산다는 선택지는 그에게 주어지지 않는 미래였을지도 모른다.
‘하긴. 복수한 뒤에도 잘 살기를 바란 게 우습지.’
본래 복수가 그렇다. 모든 것을 포기하며 상대의 파멸을 바라는 것이기에, 본인 역시 파멸 속으로 과감히 뛰어들어 모든 것을 버려야 했다.
‘……아기 이름 지어주고 싶었는데.’
하나 그것은 과욕이었다. 요한이 제 과욕을 조소했다.
-거래하겠다.
붉은 눈동자가 섬뜩한 광기로 번뜩였다.
-네놈의 힘을 내놔.
요한이 쇄도하는 칼날을 보며 입꼬리를 미미하게 끌어 올렸다. 은발의 요한이 그런 요한을 보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거래는 성립했다.
그 순간 끝없이 뒤틀려 무너졌던 마력이 일시에 멀쩡해지면서 폭발적으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턱, 트륵, 콰득!
정령의 힘이 깃든 검은 마수를 한 번에 죽여버렸다. 하지만 다른 마수에게 들키고 말았다.
‘조금만 버텨줘.’
최선을 다해 달려도 마수의 속도를 이길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처음 발견했던 나무 틈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나무뿌리 틈이 생각보다 버틸 만한 공간이었다는 거다.
검은 장막의 부작용으로 여러 나무가 뒤얽혀 무너져 만들어진 틈새.
뿌리가 들어 올려지면서 땅이 파인 덕분에 안이 제법 넓었다. 나는 맨손으로 흙을 긁어 내가 들어온 틈을 메웠다.
그사이 도착한 마수들은 곧바로 나를 발견하고 나무를 부수기 위해 노력했다.
‘다행히 나무들이 버티고 있어.’
일반적인 나무였다면 금방 부러졌겠지만, 뒤틀리면서 강도가 더 강해진 모양인지 마수들의 발톱에도 흠집만 날 뿐, 망가지지는 않았다.
키이이엑-
마수가 긴 주둥이를 흙으로 막아놓은 입구 쪽으로 밀어 넣었다.
콱!
나는 주둥이를 칼로 찍어 방어했다.
[7:35]
아우우우우-
크와아아아-
크륵, 크라아악-
마수들이 거대한 울음소리를 냈다.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징조였다. 흙으로 틈을 막느라 바깥을 잘 볼 수 없었던 나는 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으득, 으드득.
끼에엥! 끼약, 퀴에엑!
‘무언가가 마수를 먹고 있어.’
뼈 채로 씹히는 소리, 마수들의 비명, 인근의 나무들이 우지끈 박살 나는 게 들렸다.
나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
[7:02]
30초도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정령의 힘을 한 번 사용해 크게 도움이 안 될지 모르지만, 단검을 꼭 쥐고 최대한 호흡을 골랐다.
쿠웅-
땅마저 울리는 거대한 발자국. 지금 바로 내 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