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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화 모든 것이 함정 (181/182)


181화 모든 것이 함정
2023.08.25.



마물의 모습으로 폭소하던 악마는 다시 요한에게 익숙한 청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악마가 목덜미를 문지르며 씩 웃었다.


“충격이 많이 컸지?”

“…….”

“크하하하! 그래! 이 반응이야! 이걸 위해서 아주 꼭꼭 숨겨두고 있었다고! 어차피 밝히지 않는다 해도 달라질 거 하나 없지만, 그래도 이편이 더 깜짝 선물 같잖아.”

악마는 무표정하게 굳은 요한의 얼굴을 보고 즐거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간 거래하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이다.


‘아니, 저번을 이길 순 없겠다.’

계약의 대가로 에스텔과의 미래를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에스텔과의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던 요한의 표정이 더 짜릿했다.


“처음부터였나?”

“무엇이?”

“나와 계약했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 모든 게 네놈의 계략이었느냔 말이다.”

요한은 침착했다. 하지만 목소리에 서린 살벌한 분노가 그의 분노를 짐작케 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아직 장난이 치고 싶나?”

“크흡, 알았어, 알았다고. 네 말이 맞아. 너와 계약한 순간, 아니지. 너를 만난 그 순간부터 모든 게 내 계획이었어.”

요한이 주먹을 꽉 쥐었다.


“…….”

“어쩐지 나 같은 존재와 너무 쉽게 계약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 너무 쉽게 좋은 조건으로, 흑마법을 대가 없이 쓸 수 있게도 해주고?”

“그건 블란쳇 공작가의 유산으로-”

“그것도 맞지. 하지만 그것도 다 내가 너와 계약하려는 의지가 있기에 가능한 거거든.”

요한은 악마의 붉은 눈동자를 노려보았다.

악마.

신을 죽여버린 혼돈은 그 대가로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리고 그 혼돈의 조각들은 악마나 마물이 되었다.

그것이, 요한이 알고 있던 정보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치솟는 분노와 박탈감, 무기력감이 온몸을 파고들어 그를 난자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요한은 이를 악물고 상대에게 집중했다.


“그렇다면 내가 발견했던 블란쳇 공작가의 유산이라는 것도 다 네 함정이었겠군.”

“어라? 지금 그것까지 알아차린 거야?”

악마가 삐죽삐죽한 이빨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역시 요한 넌 참 대단한 인간이야. 혼돈의 핏줄이라서 좀 불안하긴 했지만, 너 정도로 특별한 인간이 되어야 내 계획을 성공시켜 줄 것 같았거든.”

“……하, 정말 난 네 체스말이었군.”

왜 예상하지 못했을까.

사실 요한은 그 이유를 알았다.


‘너무 절박했기 때문에.’

지금이라면 바로 악마와 계약하지 않았을 것이다 몇 번이고 더 의심했을 것이다. 행운에는 이유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땐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당시 제 부족함을 뼈저리게 자각하고 있던 요한 앞에 나타난 ‘흑마법’이라는 힘은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성황의 배후와 내 배후로 움직여가면서 완벽하게 에스텔을 손에 넣으려 한 건가.”

단 한 가지를 알게 되자, 모든 것이 다 명확해졌다.


“그래서 굳이 명확하지도 않은 내 미래라는 대가를 가져가려 한 거고.”

“그렇지. 원래 내가 그리 친절한 사람은 아니거든.”

“어떻게든 에스텔의 주위를 장악해서 빠져나갈 틈 없이 옭아매기 위해서.”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짐작할 수도 없는 치밀한 설계. 요한은 제 얼굴을 가리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아주 재밌었겠어.”

“그래도 넌 쉽지 않은 인간이었어. 너처럼 나를 애먹인 인간도 네가 처음이야.”

악마는 실실 웃으며 흥겹게 박수 쳤다.


“충분히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웃기지 마.”

“진심인데. 인간은 다들 대단한 존재의 인정을 갈구하지 않나? 네가 인간 중에서 가장 훌륭한 인간이라니까?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

경박한 박수 소리가 장내에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요한은 큰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린 채 악마에게 물었다.


“신이 되고 싶나?”

유쾌하게 씰룩거리던 악마의 입가가 미미하게 굳었다.


“오. 거기까지 알아냈어?”

“묻겠다. 신이 되는 게 네 목적인가?”

“그걸 네가 알 필요는 없지. 이제 와서 뭘 하겠다고.”

“그건 모르는 일이지.”

요한은 두 눈을 가렸던 제 손으로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 드러난 붉은 눈동자가 강고하게 빛났다.


“아직 네놈이 신이 된 건 아니니까.”

악마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아직 의지가 꺾이지 않았어? 진심으로 나를 상대하려고?”

“아직 에스텔은 무사하다.”

“어떻게 확신해? 내가 기껏 데려간 요정을 잡아먹지 않고 멀쩡히 뒀을 것 같아?”

“그랬다면 네놈이 시끄럽게 입을 털고 있진 않겠지.”

순식간에 악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계속 칭찬해 주니까 주제도 모르고 자꾸 기어오르는데.”

“내가 정곡을 찌른 모양이군.”

요한은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혼란스러웠던 머리가 맑아졌다.


‘다른 건 나중에 생각한다.’

당장은 에스텔을 구하는 것, 단 한 가지에만 집중하는 거다.

악마가 차가운 얼굴로 이죽거렸다.


“너무 자신만만한 거 아냐? 너도 알다시피 요정의 힘을 흡수할 때 꼭 사지가 멀쩡할 필요는 없어. 적당히 살아 있기만 하면 된다는-”

콰앙! 요한의 검이 곧장 악마에게 쇄도했다. 겨우 검은 기운으로 막아낸 악마가 미간을 찌푸렸다.


“거참 지긋지긋한 인간이네.”

한 걸음 물러선 요한이 주위의 기사들에게 외쳤다.


“검기로 저 장막을 내려쳐라. 충격이 쌓이면 무너질 테니까.”

“예!”

기사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악마는 고르게 숨을 내쉬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런. 일이 더 귀찮게 됐네.’

대부분의 인간은 악마의 존재를 직접 본 것만으로도 압도되어 무너진다. 악마는 인간보다 격이 높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은 달랐다.

요한에 대한 믿음 때문인지, 포기하거나 낙담하는 자가 없었다.


‘장막이 부서지면 큰일이겠어.’

하필 예스텔라가 제대로 요정에게 저주를 내리지도 못했고, 그 옆에 귀찮은 정령까지 붙어 있다.


“그렇게나 죽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

악마의 주위에서 검은 마력이 일렁였다. 땅 아래에 늘어졌던 그림자가 치솟아 기괴한 마수들로 변했다.


“마수에 당황하지 마라!”

“마수를 상대하지 않는 자는 저 장막을 공격해라!”

기사들이 마수의 습격에 침착하게 대응하는 순간, 요한의 검이 다시 날아왔다. 악마는 날카로운 요한의 검을 피하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곧장 악마의 심장부로 파고드는 검은 마법 없이도 제법 위험했다.

요한이 검을 고쳐 쥐며 악마를 조롱했다.


“그렇게 고상하던 악마가 한다는 게 도망인가?”

“도망이라니. 수준이 안 맞아서 피해준 것뿐이야.”

요한은 이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위대한 악마의 신경을 잘 긁었다. 악마가 열 오른 목소리로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널 상대할 사람은 따로 있다. 이놈을 무찌르고 나면 내가 나서주지.”

요한의 앞에 검은 연기가 일렁였다. 흐릿했던 연기가 눈 깜빡할 사이 단단해지더니 요한을 향해 쇄도했다.

챙캉! 챙, 채앵-

요한은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꽂히는 공격을 쳐내며 상대에게서 물러섰다.


“너는…….”

“두 사람은 구면이지?”

리안드로 펠시스.

리안드로가 검은색 검을 쥔 채 요한에게 말했다.


“요한 블란쳇 공작. 오랜만입니다.”

“악마와 계약해서 부활한 건가?”

“완전한 부활은 아닙니다.”

리안드로는 여전히 썩어 있는 제 팔뚝을 보여주었다.


“하나, 당신 하나 정도는 상대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진정한 승자를 가리는 겁니다.”

 

 

***

검은 장막에서 이상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룬의 표정이 너무 안 좋아.’

나는 하얗게 질린 룬의 뺨을 세게 꼬집었다. 룬이 깜짝 놀라 억울한 목소리로 삐죽 물었다.


“에스텔, 아파요……!”

“이제 좀 정신이 들어?”

“네?”

“너무 심각한 표정으로 굳어 있길래 정신 차리게 해줬어. 아무리 심각한 상황이어도 살길은 있어.”

룬의 두 뺨을 쥐고 눈을 마주 봤다.


“일단 나는 저게 뭔지 모르니까 설명해 줄래? 거기서부터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파악하고 행동하자.”

“……그렇네요.”

룬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텔은 참 대단해요.”

“응?”

“무서운 상황이 닥쳐도 언제나 꿋꿋하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잖아요.”

다 컸다더니 여전히 어린애는 어린애였다.


“별거 아니야. 나도 아무것도 못 할 때도 많았고.”

내 인생은 대부분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리베르탄 공작가에 입양된 것, 학대당한 것, 악녀로 소문나 억울하게 비난받았던 것, 요한에게 빚 대신 팔려가는 것까지 전부.

원작을 알고 있어도 상황 자체를 바꿀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포기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원작대로 비참하게 죽었을지도?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더라. 그래야 조금이라도 무언가가 바뀌니까.”

그렇게 자포자기했던 순간 기적처럼 잃었다고 생각한 아이가 돌아오기도 했다.


“그러니 일단 지금 상황부터 설명해 줘.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건, ‘그놈’이 친 결계예요. 자신보다 강한 자가 아닌 이상 절대 나가지 못해요.”

“요한이 구해주러 올 수도 없겠네.”

“네. 하지만 이대로 여기에 계속 있으면 위험해요. 여기가 ‘그놈’이 지배하는 영역이 된 이상 저희는 계속 힘을 빼앗기게 되어 있거든요.”

나를 내려준 룬은 제 두 손을 활짝 펴서 보여주었다. 손끝에 있던 푸른 기운이 흐릿하게 번졌다.


“여기서 무조건 나가야 한다는 거네.”

나는 검은 장막을 올려다보았다. 우주처럼 새카만 검은 장막은 어떤 빈틈도 허용하지 않을 것처럼 견고해 보였다.


“저 장막을 부수지는 못해도, 작은 틈으로 나갈 수 있거나 이동할 방법은 없어?”

“있어요. 딱 하나.”

“그게 뭔데?”

“제가 요정의 기운을 흡수해서 빠르게 뚫고 가는 거예요. 요정의 기운을 흡수하면 저 장막을 상대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룬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문제가 있는 방법인가 보네.”

“제가 에스텔의 힘을 가져가면 에스텔이 무방비해져요. 무엇보다 이 영역 안은 ‘그놈’이 지배하는 곳이라 에스텔을 해치려는 마수가 돌아다닐 거예요.”

“네가 지켜줄 수는 없는 거야?”

“요정의 기운을 흡수하는 데 집중해야 해서…… 에스텔 혼자서 버텨야 할 거예요.”

아마 그 지점 때문에 룬이 고민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얼마나 버티면 되는데.”

“15분이요.”

우드득, 검은 장막 아래에 있는 나무들이 기괴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고민할 여유가 없다.


“요정의 힘을 흡수해.”

“괜찮겠어요?”

“괜찮아. 원래도 요정의 힘 없이 지내왔는데, 뭐.”

룬이 내 어깨에 손을 얹자, 무형의 기운이 그 손으로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이런 기분인가?’

어쩐지 전보다 더 무기력해진 것 같다.


“혹시 모르니까 이 칼에 제 기운을 담아줄게요. 한 번 정도 상대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거예요.”

룬은 아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가 예스텔라의 오두막에서 챙겨온 칼에 정령의 기운을 담아줬다.


‘챙겨오길 잘했네.’

“무리하게 상대할 생각하지 말고 잘 도망치고 있어요. 알았죠?”

룬이 마지막까지 나를 걱정해 주고는 요정의 기운을 흡수하기 위해 두 눈을 꼭 감았다.


‘이래서 나를 도와줄 수 없다고 했구나.’

두 기운을 융합하는 룬의 모습이 흐릿하게 지워졌다. 방금 룬이 있던 자리를 손으로 만져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진짜 혼자네.’

손에 든 칼을 꼭 쥐었다. 그때 손등에 푸른색으로 된 시간이 떠올랐다.

[15:00]

룬이 나를 위해 남겨준 모양이다.

[14:59]

시간이 조금씩 지나가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아가. 엄마 알지?”

나는 심호흡하며 배 속의 아기에게 말을 걸었다.


“엄마가 헤쳐온 위기가 얼마나 많은데. 이 정도는 별것도 아니야. 딱 15분만 참으면 되잖아. 이제는 14분이네.”

그건 스스로에게 거는 최면이기도 했다. 아무리 몸이 무거워도, 힘들어도 악착같이 버티겠다는 다짐.

크르르…….

근처에서 맹수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온 신경을 기울이며 칼을 꽉 쥐고 반대쪽으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몸을 숨길 곳을 찾아야 해.’

쿠우웅! 거대한 충격에 검은 장막이 뒤틀렸다.


‘요한이다!’

요한이 나를 구해주러 이곳으로 온 거다! 그리고 저 장막을 부수고 있다!

불안했던 마음이 안정되었다.

키이이이잉-

검은 장막은 빠르게 원래 모습으로 복구되었다. 하지만 아까의 큰 충격 이후 기이한 소음이 나기 시작했다.


‘이 소리는 뭐지?’

그 소리와 동시에 곳곳에서 맹수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우우우우-

우우우우-

맹수들이 곳곳에서 고개를 들고 서로를 확인하는 게 느껴졌다. 내 위치를 찾는 것 같았다.

[13:27]

바싹 마른침을 억지로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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