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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화 전부 네 덕분이야 (179/182)


179화 전부 네 덕분이야
2023.08.18.



 
룬은 바닥에 쓰러진 예스텔라를 발끝으로 툭 밀었다. 최대한 닿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돋보였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어요.”

룬의 걱정에 내가 어색하게 웃었다.


“룬 네가 구해줄 거였잖아.”

“그래도요. 지켜보고 있다가 언제 신호를 보내려나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룬이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였다. 내가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이었다.


‘언제 저렇게 컸지?’

내가 알고 있는 룬은 품에 안을 수 있는 갓난아기인데, 어느새 나보다 훌쩍 커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익숙한 와중에도 조금 낯설었다.


“그래서 듣고 싶었다던 말은 들었어요?”

“아, 응. 역시 마지막이라 생각해서 쉽게 입을 털 줄 알았어.”

룬의 존재를 알아챈 건, 방 안에 있던 풀들의 기이한 움직임을 본 순간부터였다.

***

방바닥에 있던 풀이 느릿느릿 글을 썼다.

[스테리.]

흐릿하긴 하지만, 읽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여기에 룬이 있어!’

조력자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매우 컸다.


‘근처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나?’

하지만 주위에는 예스텔라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때 힘겹게 글씨를 지운 풀이 이상한 글을 썼다.

[페레덱사 오르테우스.]

내가 뭘 잘못 봤나 싶었다.


‘저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의미 모를 글자의 나열. 고대어도 아니다.


“흐으응~”

예스텔라가 콧노래를 부르며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었다. 당장 뒤를 돌아봤다가 글씨를 발견하면 큰일이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풀은 재빨리 글씨를 지워버렸다.


‘진짜 모르겠다!’

이대로 있다간 예스텔라가 고개를 돌리면 끝난다. 룬이 보낸 글씨의 의미를 알아내야 했다.

입술을 깨물던 내가 무의식적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도대체 페레덱사 오르테우스가 뭔…….”

뒤늦게 소리로 내뱉었다는 걸 자각하고 급히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예스텔라는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빨리 알아내야 해, 룬이 나한테 무슨 말을 전하고 싶었…….’

-에스텔, 들려요?

그 순간 귀로 룬의 목소리가 들렸다.


-룬?

나무들과는 대화할 수 없었는데, 룬과 대화가 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네, 저예요. 룬. 거기에 에스텔의 존재를 지우는 마법이 걸려 있어서 정령어를 직접 말하게 할 수밖에 없었어요.

아, 그게 정령어였구나.


-존재를 지우는 마법?

-예. 아무래도 예스텔라가 삿된 힘을 빌려 와 그 장소를 자기의 영역으로 삼은 모양이에요.

-……그래서 요정의 힘을 사용할 수 없었구나.

-네, 맞아요. 거기다 에스텔은 예스텔라가 따로 수작을 부려놓아서 뭔가를 하기가 더 어려웠을 거예요.

사정을 더 알게 되자, 머리가 더 아파 왔다.


‘이런 상황에서 탈출해야 한단 말이지.’

나는 조심스럽게 룬에게 물었다.


-룬, 나를 구해주러 온 거 맞지? 어디에 있어?

-에스텔이 위치한 오두막 바깥쪽이요.

-바로 나를 구하러 와줄 수 있어?

-그건 어려워요.

룬이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지금 그 집 바깥에는 예스텔라가 데려온 마수 10마리가 지키고 있거든요. 한두 마리는 상대할 수 있지만, 10마리를 한 번에 다 상대하지는 못해요. 그랬다간 예스텔라가 제 정체를 알아챌지 몰라요.

-그러면 다른 방법은 없어?

-그건…… 마수 10마리를 동시에 재워버리는 거예요. 죽이는 건 어렵지만 재우는 건 쉽거든요. 문제는 중간에 예스텔라가 알아차리면 마수도 바로 깨어난다는 건데…….

-예스텔라를 계속 안에 붙잡아두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 이상이에요.

룬의 목소리에 걱정이 담겼다. 혀 짧은 소리로 옹알이하던 애가 성숙하게 말하고 있는 게 좀 신기했다.


-지금 예스텔라는 마수와 뒤섞여 있어요. 바깥에 있는 마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눈치챌 거예요.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려운 일이지만, 예스텔라가 마수에게 일어난 이상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에스텔이 이목을 계속 끌어줘야 해요. 가능하겠어요?

-어려워도 해야지.

안타깝게도 지금 예스텔라는 전보다 더 쉽지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난리 치고도 남았을 말을 들어도 웃고 넘겼으니까.


‘너무 심하게 자극할 경우 미쳐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고.’

그러니 적정선을 지키면서 주변 소리를 아예 듣지 못할 상태로 만들어줘야 했다.


-기회가 오자마자 바로 저한테 신호를 주세요. 저는 예스텔라한테 들킬지도 모르니 에스텔의 신호가 올 때까지 지켜보고 있을게요.

“이거 풀어!”

그렇게 나는 공포에 질리고 절망한 모습을 보여주며, 예스텔라를 흡족하게 해주었다. 예스텔라는 내가 고통스러운 줄 알고 도취되었다.


‘슬슬 될 것 같은데…….’

그 순간 마음에 걸리는 한마디가 들렸다.


“주인공인 내가 아닌 너는 원래 아기를 가질 수 없었어. 생겨났어도 곧 죽을 애였지.”

“진짜로…… 네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요한에게 그 얘기를 했어? 우리 사이에 아기가 생길 수 없다는 것도?”

“그래, 그렇다니까.”

그 말에 내 요정의 힘이 미약하게 반응했다. 눈앞에 요한과 예스텔라가 대화했던 순간이 보였다.


‘……요한은 너무 늦게 알았던 거였어.’

나와 같이 아기를 기대했던 순간이 있었기에, 차마 거짓말을 할 수 없었던 거였다.


‘바보.’

그렇지만 요한은 그런 억울한 사정은 나한테 말하지 않았다. 그건 변명일 뿐이라 생각했을 테니까.


‘마음이 개운해졌어.’

기억을 되찾으면서 다시 생겼던 내 마음속 응어리가 완전히 풀려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이걸 예스텔라 덕분이라 해야 할까.’

요한이 너무 보고 싶었다.

여전히 죄책감에 젖어 있을 그에게 달려가, 따듯하게 감싸 안아주고 싶었다. 더 이상 사죄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라고. 요한은 이미 충분히 반성했으니까, 이제 행복해질 생각만 하자고.


“그래도 다행이에요.”

룬이 내 팔다리를 묶은 밧줄을 낑낑 풀며 말했다.


“마지막에 봤던 에스텔이 너무 슬퍼 보여서, 많이 걱정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좋아 보여요.”

“많은 일이 있었거든. 그런데 룬은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던 거야? 나도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나는 룬이 팔을 풀어주자마자 뻐근한 팔을 주무르고서 바로 두 볼을 꼬집어 늘렸다.


“으아아- 스테리, 이로묜 다리 푸기가…….”

“응? 사라지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작별인사는 하고 사라져야 할 거 아니야. 솔직히 룬 네가 생각해도 너무했지?”

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모해쏘요…….”

“그래도 이렇게 잘 커서 돌아와서 좋다. 정령이랑 관련된 일 때문에 사라졌던 거 맞지?”

다리까지 마저 다 풀어준 룬이 휴 하고 귀엽게 숨을 돌리며 식은땀을 훔쳤다. 밧줄에도 이상한 마법이 걸려 있어 푸는 게 꽤나 어려웠던 모양이다.


“네, 맞아요. 저도 에스텔과 요한이랑 작별인사하고 떠나고 싶었는데, 갑자기 이상한 곳으로 소환되어 버렸지 뭐예요?”

“거기가 어디였는데?”

“바로 여기요. 이 구름나무 숲.”

엑?


“정확히는 이 숲의 ‘무덤’인데, 거기에 정령의 유산이 남겨져 있었어요. 그렇게 정령의 유산을 흡수하고 나니까…….”

“지금이었다?”

“네, 그런 거죠.”

“갑자기 그렇게 자라났는데 이상하지는 않아?”

갓난아기였던 룬은 또래보다 똑똑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기 티가 나고는 했다.


“자연스럽게 적응한 거 같아요. 정령의 유산으로 꿈에서 정령에게 필요한 걸 다 배웠거든요.”

“정령은 그런 게 있구나.”

요정도 좀 그런 게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시도르 씨가 가르쳐 주긴 했지만.’

그래도 정령에 비하면 너무 알려주는 게 없었다.


“네. 그래서 덕분에 제가 어쩌다 에스텔의 기운을 받고 태어날 수 있었는지도 알 수 있게 되었어요.”

“어떻게?”

“음, 블란쳇 공작저에서 마지막 정령을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에스텔이 넣어준 운디네 티어와 요정의 기운이 맞물려 기적처럼 태어날 수 있었던 거죠!”

“블란쳇 공작가에서?”

“예. 블란쳇 공작가가 혼돈의 핏줄이잖아요. 그래서 정령을 마지막까지 데리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혼돈의 핏줄. 그건 처음 듣는 얘기였다.


“혼돈의 핏줄이라니. 그 부분, 자세히…… 아니다.”

나는 급히 쓰러져 있는 예스텔라를 바라봤다.


‘일단 예스텔라부터 처리하고 얘기하는 게 좋겠어.’

이 공간이 예스텔라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찝찝했다.


“우리 일단 나가자. 예스텔라도…… 깔끔하게 처리하고.”

주위를 돌아보니 무기로 쓸 만한 칼이 보였다.


‘내 손을 처리해야 해.’

사람을 죽이는 건 처음이라 마음에 걸리지만, 아직 나한테 너무 어리게 느껴지는 룬한테 살인을 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이걸로 모두 끝내는 거야.’

괜히 애매한 양심의 가책으로 예스텔라를 살려뒀다 후회할 수는 없었다. 나는 칼을 집어 든 순간부터 이상하게 손이 떨렸다.

그때 룬이 내 손을 잡았다.


“에스텔, 그러지 않아도 돼요.”

“적은 후환이 남지 않게 확실히 처리해야…….”

“그게 아니라, 이미 저 여자는 끝났어요. 지켜보세요.”

룬의 손끝을 따라 다시 예스텔라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예스텔라가 꿈틀거리며 의식을 되찾았다.


“……으윽.”

 

***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예스텔라는 욱신거리는 머리를 붙잡았다.


‘분명 주위의 경계는 완벽했는데.’

혹여 에스텔의 위치가 걸렸다 해도 근처의 마수들이 신호를 보냈어야 했다.


‘도대체 무슨 수를 썼길래!’

표독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예스텔라가 주위를 휙 돌아봤다.


‘버러지 같은 게 아직 남아 있어!’

밧줄에도 지독한 흑마법을 걸어두었기에 바로 풀진 못한 듯했다. 예스텔라의 시선이 낯선 남자를 향했다.


‘정령?’

잘생긴 남자의 모습을 한 정령은 밧줄에 묶여 지끈거리는 듯한 에스텔을 보호하려는 듯 앞에 서 있었다.


‘짜증 나.’

이제 더 이상 에스텔을 구해줄 수 있는 건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또 방해받았다.

에스텔은 아무 희생도, 심지어는 노력한 것도 없이 언제나 당연하다는 듯이 남자들의 보호와 사랑을 받고 있다.


‘왜 저 버러지 같은 것에게 매번 운이 따라주는 거지?’

지옥 같은 고통을 견뎌 겨우 복수할 기회를 만들어낸 예스텔라는 치솟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했다.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야.”

예스텔라의 푸른 눈이 증오로 타올랐다.


“갈가리 찢어서 죽여버릴 거야……!”

오두막이 예스텔라의 분노에 동화되어 천장과 바닥까지 전부 요동쳤다. 그렇게 증오로 뒤덮인 흑마력이 에스텔을 집어삼키려던 순간이었다.


-예스텔라여.

제 몸에 뒤섞여 있던 마수가 기괴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대가를 치를 때다.

“대가?”

예스텔라가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대가가 뭐든 상관없으니 당장 저년을 죽이게 해줘! 내가 겪었던 고통 그 이상으로 끔찍하게! 최대한 잔인하게 죽여버리란 말이야!”

-불가능하다. 너는 네가 거래한 몫을 다 사용했으니까.

“그게 무슨…… 말도 안 돼. 내 소원은 저년을 끔찍하게 죽이는 거였어.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네 꼴을 봐라.

마수가 가래가 끓는 듯한 더러운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어디 대가로 거래할 만한 게 있어 보이는지?

예스텔라의 팔에 달린 눈이 동시에 깜빡거리며 기괴한 웃음소리를 냈다. 예스텔라가 멍하니 제 두 손을 바라봤다.

검은 곰팡이가 핀 손.

칼로 마구 그어진 것처럼 더러운 자국이 새겨지고 있다. 그것과 동시에 머리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뒤따라왔다.


“아아아악-!”

그제야 예스텔라는 상황을 깨달았다.

에스텔의 아기에게 걸려던 저주가 중간에 실패하는 바람에 그 후폭풍이 예스텔라에게 날아온 거다.


-예스텔라.

-예스텔라.

-예스텔라.

예스텔라는 어깨에 강렬한 통증을 느꼈다. 그러자 어깨가 제 몸이 아닌 것처럼 꿈틀거리며 무언가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이, 이게 뭐야악!”

-예스텔라, 날 죽이고도 멀쩡할 줄 알았어? 버러지라며 남을 걷어찰 때는 이렇게 될 줄 몰랐겠지?

-예스텔라 님. 왜 저를 괴롭히셨어요? 저는 성녀님을 진심으로 모셨는데…….

-스텔라, 이 어미가 도대체 너한테 못 해준 게 뭐니? 어떻게 이 어미를 버리고 너 혼자 멀쩡히 살려 할 수 있어?

몇몇은 아는 얼굴이었고, 몇몇은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예스텔라에게 큰 증오를 품고 있었다.


-스텔라 이 배은망덕한 것. 내가 어떻게 널 키웠는데……!

“시끄러워. 닥쳐! 왜 다들 나한테……!”

기괴하게 돋아난 얼굴들은 예스텔라의 목을 조르고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예스텔라는 속수무책으로 당해 고통에 몸을 떨었다.


“으으.”

에스텔은 그런 예스텔라를 보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게 저주의 역효과야?”

“네. 아마 본인이 걸려고 했던 저주가 실패해 돌아가는 걸 거예요.”

예스텔라가 피눈물을 흘리며 벌레처럼 바닥을 뒹굴었다. 그러다 에스텔의 발치에 가까워졌다.

예스텔라가 자기도 모르게 눈동자를 굴려 에스텔을 올려다봤다.

에스텔은 무척 예뻤다.

괴물처럼 일그러진 제 모습과 너무 달랐다. 처절한 박탈감이 예스텔라를 더 추악한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다.


“말도 안 돼, 싫어, 왜 너만……!”

에스텔은 제게 다가오는 예스텔라의 손을 쓱 피했다. 그리고 고통에 잠긴 예스텔라에게 인사했다.


“고마워.”

“뭐……?”

“네가 해준 말 덕분에 요한과 오해를 풀고, 진심으로 화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우리 사랑을 네가 이루어줬어. 전부 네 덕분이야. 정말 진심으로 고마워.”

예스텔라가 추잡하게 사지를 떨었다.


“너 같은 게, 너 따위가!”

“이제 난 아주 행복하게 살 거야. 네가 이렇게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면 얻지 못했을 행복이겠지?”

 

 
에스텔이 예쁘게 생긋 웃었다.


“진짜 안녕.”

“닥쳐! 기다려! 넌 절대-”

“앞으로 다시 보지 말자. 대가 열심히 치르고. 힘내.”

에스텔은 룬과 함께 오두막을 벗어났다.

그렇게 홀로 남은 예스텔라는 발버둥 쳐도 끝나지 않는 최악의 고통 속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비참한 말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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