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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화 지켜야 해 (176/182)


177화 지켜야 해
2023.08.11.



 
요한을 떠나보내고, 마을에 남은 여자들이 정신없이 짐을 챙겨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는 게 보였다.

에나가 나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에스텔, 우리 모두 돌아올 때까지 마을 회관에 모여 있기로 했어.”

“지금 바로 가야 하는 거야?”

“아니. 지금은 각자 집에서 마을 회관에 머무는 동안 사용할 물건을 챙기고 있어. 얼마나 오래 있을지 모르니까.”

에나는 나를 집에 데려다주고 자기 집으로 달려갔다. 의원인 아버지를 도와 준비할 게 많은 탓이었다.


‘그런 와중에 나를 챙겨주다니.’

에나 같은 사람을 만난 게 얼마나 행운인지 모른다. 나는 옷 서랍 사이에 감춰두었던 손거울을 꺼냈다.

반질반질하게 닦은 손거울이 예사롭지 않게 빛났다.


“나무님들, 요한 잘 부탁할게요.”

-너는 기억을 되찾으려고?

“제가 힘을 되찾아야 나무님들이 요한을 도와주기 더 수월하다면서요. 무리해서 움직이면 요정의 힘이 드니까.”

-그건 그렇지. 그런데 저번에 아팠는데 정말 괜찮겠느냐?

이전에 도전했을 때는 이상하게 요정의 힘을 쓰자마자 배에서 통증을 느껴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이번엔 조금 참고 해보려고요.”

나중에 요한을 도와줄 수 없어서 후회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면 저는 요정의 힘에 집중할게요. 요한에게 문제가 생기면 제 어깨를 두드려 깨워주세요.”

몸 구석구석에 퍼진 요정의 힘에 집중했다. 요새 요정의 힘을 많이 사용해서인지 전보다 힘이 많이 줄어든 게 느껴졌다.

두근-

내 심장 소리가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요정의 힘이 손끝을 타고 올라가 손거울 주위를 배회했다.

두 눈을 꼭 감았다 뜬 내가 거울 속을 들여다보았다. 어쩐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나 같지가 않았다.


“기억을 되찾고 싶어.”

거울 속 나는 사라질 것처럼 이목구비가 흐릿했다. 유난히 선명한 남색 눈동자가 고요히 나를 지켜보기만 했다.

요정의 힘이 거울 속에 비친 내 주변을 맴돈다.


“내가 기억을 되찾을 수 있게 해줘.”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바라보자, 손거울을 붙잡은 손가락에 찌릿 통증이 올라왔다.

거울 속 내 모습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희고 긴 속눈썹을 팔랑이던 그녀가 슬픈 눈빛으로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후회하지 않겠어?]

몸 전체를 관통하는 것처럼 청명한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해 후회하기로 했어.”

[…….]

“요정의 힘과 상관없이 요한 혼자 기억을 끌어안고 있게 두는 건 너무 비겁한 선택 같거든.”

어쩌면 나는 힘든 기억으로부터 계속 도망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힘든 순간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 힘든 순간이 사람을 성장시킨다.


‘난 이제 엄마가 될 거잖아.’

엄마가 되어서 힘든 기억을 외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특히 진심으로 속죄하는 요한을 보며 더더욱 그런 다짐이 들었다.


[네 선택을 존중해.]

우우웅-


[부디 많이 슬퍼하지 않기를 바라.]

거울 속 내가 슬픈 미소를 지었다. 마주친 남색 눈동자와 눈빛을 교환한 순간, 다시 한번 찌릿한 기분을 느꼈다.

지지하고 있던 바닥이 울렁거렸다.

빛마저도 굴절되는 것처럼 뭉개지고, 어지러움에 눈을 깜빡였다. 거울 속 내가 입술을 움직이며 무어라 하는 게 보였다.

곧이어 나직한 노랫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맴돌았다.

다시 한번 거울 속 나와 서늘한 눈빛이 마주쳤다고 느낀 찰나, 빛나는 거울에 점 같은 검은 얼룩이 툭 떨어졌다.


‘이거 더러워져도 되는 건가?’

손으로 검은 얼룩을 닦았지만, 검은 얼룩은 곰팡이처럼 번져 거울 전체를 덮을 듯이 커져만 갔다.

거울이 모두 검게 물들어지려던 찰나, 아직 물들지 않은 틈으로 환하고 구불구불한 금발이 언뜻 비쳤다.


‘저 금발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

쿠웨에에엑-

마수 떼가 죽어가면서 괴성을 질렀다.

마을 사람 몇은 마수의 괴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픈지 휘청거렸다. 그럼에도 전황은 희망적이었다.


‘함정이 잘 통했어.’

지능이 높지 않은 마수들은 함정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죽음을 맞이했다. 기사가 휘파람을 불며 요한에게 보고했다.


“함정이 금세 바닥날 것 같습니다. 곧 이쪽을 발견하고 몰려올 것 같습니다.”

“걱정 마라. 구덩이로 빠진 몇을 제외하면 멀쩡한 숫자가 그리 많지 않으니.”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너희가 충분히 상대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마을 쪽으로 몰려가지 못하게 시간을 끌기만 해도 된다. 처리하는 건 내가 할 테니.”

요한의 비장한 말에 모두가 무기를 쥔 손에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은 좌중을 둘러보다 뒤로 이어진 숲에 무심코 시선을 두었다.


‘에스텔이 계속 소식을 듣고 있겠지?’

그렇다면 희망적인 전황 소식까지 듣고 있을 테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크륵, 크르르륵! 쿠와아악!

구덩이에 떨어져 목이 부러졌던 마수 몇이 뼈를 우드득거리며 위로 기어올라 왔다. 멀쩡한 마수들도 마침 제 먹잇감이 될 인간들을 발견한 것 같았다.


“우리의 목표는 저놈들을 모두 처리하는 게 아니다. 그것을 잊지 말고, 전투에 임한다. 알았나?”

“예!”

비장한 목소리와 함께 요한이 마수 떼 중 가장 약한 부분을 향해 돌진했다.

서걱! 영주성에서 빌려온 검이 제법 잘 들어 마수가 쉬이 갈라졌다. 마수 몇을 베어내던 요한이 눈썹을 찌푸렸다.


‘이상하군.’

마을 몇을 몰살시키고 몰려온 놈들치고 너무 약했다. 하지만 오래 고민에 잠길 순 없었다. 전장에서 잡생각은 사치다.

마수가 예상보다 약했지만, 여전히 전황은 어지러웠다.


“다른 마수가 마을 쪽으로 가려 한다!”

“마을로 가려는 마수들부터 잡아!”

그 순간 멀리서 익숙한 깃발이 보였다.

푸른색 장미에 둘러싸인 푸른 매. 블란쳇 공작가의 문장이다.

마수 하나를 겨우 상대하던 기사가 감격에 차 외쳤다.


“원군이 왔다! 블란쳇 기사단이 벌써 왔어!”

“세상에, 살았어! 서둘러 마수 놈들을 몰아넣어 한 방에 끝내버리자!”

블란쳇 기사단은 마수를 손쉽게 처리해 가며 요한에게 다가왔다.


“주군! 저희가 돕겠습니다!”

운이 좋다. 기이할 정도로.

***

머리가 어지러웠다.


‘방금 전 내가 본 게, 예스텔라가 맞나?’

내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갑자기 거기에 예스텔라가 왜 나타난 거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한 존재가 불쑥 나타나 무섭기도 했지만 동시에 질리기도 했다.


‘이번엔 또 어떻게 살아난 거지?’

찌릿-

머리가 지끈거리더니 통증이 일었다. 그러자 애매했던 기억 사이로 또렷한 기억들이 싹텄다.


‘……기억이 돌아오는구나.’

중간에 예스텔라에게 방해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억을 되찾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던 모양이다.


‘요한.’

기억의 시작은 갑작스러운 상상 임신 소식부터였다. 당시 내가 느꼈던 당혹스러움과 충격이 절절히 느껴졌다.


‘결국 내가 맞았지.’

기억을 되찾은 후유증일까. 점점 강해지는 두통과 함께 가슴이 눌리는 것처럼 답답해졌다.

하지만 나는 고통을 꾹 참고 내가 잃어버렸던 기억을 계속 마주했다. 그때 내가 느꼈던 절망과 슬픔이 아릿할 정도로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때와 달리 지금 내가 그 고통을 견딜 수 있는 건, 내 배 속에 아기가 여전히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요한은 달라졌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했어.’

요한이 기억 없는 나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내게 절절히 사죄하던 요한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만났던 기억이 겹쳐지며 기억이 모두 들어왔다.


“흐아-”

목이 졸렸다가 트인 것처럼 숨을 내쉬었다. 과거의 기억으로 뒤덮였던 눈이 천천히 현실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의자?’

현재 나는 의자에 팔다리가 묶인 상태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최소한 펜테 마을에서 내가 아는 장소도 아니었다.

막 주위를 돌아본 순간이었다. 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예스텔라.”

“일어났니?”

처음에는 역광이 비쳐 바로 예스텔라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얼굴이 어떤 상태인지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올수록 기괴하게 뒤틀린 얼굴이 더욱 선명해졌다.


‘저건…… 뭐지?’

예스텔라의 얼굴 반쪽이 괴물이 되어 있었다. 희고 고왔던 피부 절반이 핏줄이 터져 괴사한 것처럼 검고 푸르딩딩하게 변해서가 아니었다.


‘끔찍해.’

정말, 문자 그대로 그녀의 반은 인간이 아닌 상태가 되어 있었다. 심지어 팔짱을 낀 팔 끝에 녹색 눈동자가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본 나는, 그게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수다.’

마수를 뭉쳐놓은 것처럼 예스텔라의 반쪽도 비슷한 상태였다.

예스텔라의 한쪽 눈은 죽은 눈동자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팔에 난 눈동자들까지 동시에 움직여 나를 똑바로 노려봤다.


“내 얼굴이 어때?”

예스텔라가 고운 목소리로 물었다.


 


“많이 신기하지?”

“어쩌다…….”

“다 네 덕분이야.”

예스텔라는 깔깔 웃었다. 마냥 유쾌한 웃음은 아니었다.


‘어지러워.’

괴상한 몰골의 예스텔라를 마주한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봐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하지만 나는 토할 것처럼 매스꺼운 속을 꾹 참으며 예스텔라를 바라봤다. 아무리 기괴한 꼴이라도 저건 예스텔라였다.


‘두려움에 먹히지 말자.’

지금 내가 지켜야 하는 건 나만이 아니다.


‘아기를 지켜야 해.’

어머니가 마지막 기회라면서 지켜준 아기다. 두 번 다시 기적 같은 기회는 오지 않을 거다.

나는 최대한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아직도 내가 네 힘을 훔쳐갔다는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건 아니지?”

예스텔라라면 결코 넘어갈 수 없는 소리. 하지만 예스텔라는 히죽 웃었다.


“그래. 네 힘이었어.”

“…….”

“내가 살아 있을 수 있던 것도, 성녀로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도 다 네가 준 힘 덕분이었지.”

고요한 목소리에 소름이 쫙 끼쳤다.


“웃기지 마. 나는 네게 힘 같은 거 준 적 없어. 네가 ‘훔쳐간’ 거지.”

“그래, 그런 거로 하자. 이제 나도 알아. 내가 네 힘을 빼앗아 모든 것을 누리고 있었다는 거.”

“원래도 알고 있었던 거 아니었어? 그전까지는 당연히 네 힘인 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하네.”

살살 예스텔라를 긁었지만, 예스텔라는 내가 기대했던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풉!”

예스텔라가 입꼬리를 징그러울 정도로 높게 올리며 웃었다.


“아, 반가워라.”

예스텔라는 배를 잡고 깔깔 웃었다. 나는 평온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조바심이 났다.


‘내가 알던 예스텔라의 반응이 아니야.’

괴상한 몰골만큼이나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도망치기 더 어렵겠어.’

한참이나 웃고 있던 예스텔라가 눈가에 고인 눈물을 검지로 훔쳤다.


“뭐, 그래. 이제 와서 그런 게 중요하지는 않잖아?”

“웃기시네.”

나는 그런 예스텔라에게 냉소했다.


“그건 네가 가해자라 그런 거겠지.”

“…….”

“만날 때마다 헛소리하던 것에서 좀 바뀌었나 싶더니 넌 여전하구나?”

“…….”

“일방적으로 남을 괴롭히고 학대해놓고서 사연 있는 척 너나 나나 똑같은 것처럼 말하지 마. 내가 무슨 짓을 했든 네가 했던 끔찍한 행동이-”

짝!

예스텔라가 내 뺨을 강하게 내려쳤다.


“야.”

고개가 돌아가며, 입에 피맛이 돌았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예스텔라를 노려봤다.


“…….”

예스텔라는 그런 내가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좀 웃어줬다고 지가 유리한 줄 아네?”

예스텔라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했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웃었다.


‘다행이다.’

달라진 척해도 여전히 내가 알던 콤플렉스 덩어리 그대로였다. 예스텔라가 내 얼굴을 꽉 쥐며 말했다.


“나는 너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어.”

“…….”

“내 부모님부터 집안, 명예, 남자, 모든 것을 잃었다고. 역시 너는 못된 애답게 그 정도 잃은 나를 조금도 동정하지 않는구나.”

예스텔라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내 모든 것을 망가뜨려 놓고서, 너는 멀쩡히 행복할 수 있을 줄 알았니?”

나는 겁먹은 표정을 지어주며 내 안의 요정의 힘을 끌어올렸다.


‘이제 기억이 돌아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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