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6화 같이 돌아가자 (177/182)


176화 같이 돌아가자
2023.08.08.



 
마을 전체에 전운이 감돌았다.

어느새 요한은 자신의 신분까지 밝히며 영주의 기사들까지 규합해 자신의 세력으로 일구었다.


“4일. 4일이면 내 기사들이 이 마을에 도착할 거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돼.”

요한의 등장은 절망에 빠져 있던 사람들에게 거대한 희망이 되었다. 막막하던 순간에 길을 지시해 주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정체가 밝혀졌을 때 아주 난리가 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큰 문제가 벌어지지 않았다.

마수라는 희대의 위협을 앞둔 데다, 제국에서 멀리 떨어진 이 마을에선 공작이 영주보다 더 실감 나지 않는 존재였던 탓이다.

물론 요한의 대처가 매우 좋았기도 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마을 사람들 입장에선 어제까지만 해도 격의 없이 지내던 사람을 윗사람으로 모셔야 할 판이다.

자기도 모르게 요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가볍게 대하거나, 배신감을 느낄 법도 한데 그런 사람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 같지 않긴 했어.”

“한 번씩 느끼던 위화감이 그거였구먼. 어떻게 그렇게 귀하신 분이 저희와 스스럼없이 지내실 수 있는지. 우리 영지 영주님도 그렇게는 못 하실 텐데.”

“그리 대단한 분이시니 제국의 높은 공작님이신 거 아니겠어? 이제 저분만 믿으면 마수도 다 처리해 주실 걸세.”

내 주변에도 큰 변화는 없었다.


“에스텔, 제국에서 공작은 어느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야? 기사들이 마수를 바로 해결해 준다는 걸 보면 영주보다 더 대단한 것 같기는 한데…….”

“이곳 영주보다는 휠씬 더 높은 사람이지.”

“세상에. 너 진짜 대단히 높은 사람이었구나. 어쩐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귀하게 자란 느낌이 나더라니.”

“에나, 전에는 너무 뭐든지 빠르게 적응해서 높은 사람일 것 같지 않다면서.”

“그건 여전히 의문스럽기는 해. 어느 대단한 귀부인이 자기 집 청소와 요리를 기분 좋게 하겠어?”

놀랍게도 세상엔 방랑하거나 수련하면서 즐거워하는 공주님도 있다.


‘별종 중의 별종이라 불리는 다이아나 공주긴 하지만.’

에나는 정체가 밝혀진 뒤 나와 요한의 사연을 더 궁금해하는 것 같았지만, 밝혀진 신분 때문에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걸 물었다.


“그러면 에스텔은 기사단이 오면 같이 따라가는 거야?”

“응?”

“아쉽다. 위험한 곳에 귀한 분이 계속 머무는 게 좋지 않은 건 알지만, 그래도 떠날 거라 생각하니 벌써 슬프네.”

“역시 떠나는 거겠지?”

“그럼 안 떠날 생각이었어? 기사들까지 다 왔을 때 같이 가는 게 편하잖아. 거기다 너는…… 아니다. 네가 누구보다 잘 알 텐데.”

에나의 뒷말이 생략되었지만 나는 그 뒷말을 눈치챘다.


‘공작 부인이라는 거겠지.’

실감은 나지 않아도, 이름만으로 충분히 그 고귀함을 느낄 수 있는 자리.


‘이 상황에서 내가 돌아가지 않는 게 더 웃기긴 해.’

요한과는 화해했고, 그와의 아이도 무사하다. 배 속에 있는 아기를 위해서라도 그를 따라 돌아가는 게 맞다.


“난 방책 수리하는 거 도우러 갈게. 에스텔은 방에서 쉬고 있어.”

“다들 많이 고생하네.”

“그래도 네 남편이 있어서 고생이라도 할 수 있는 거지. 아니었으면 방책 수리하는 것도 이렇게 빨리하지 못했어.”

집에 혼자 남겨지자, 공허함이 훅 느껴졌다. 가슴이 먹먹하고 아렸다.


‘요즘 왜 이렇게 감정적인지 모르겠어.’

전보다 요한의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해서인지, 임신이라는 게 원래 이런 것인지.


“요한은 무사할까?”

침대에 누워 요한을 생각하자, 모른 척했던 걱정이 밀려왔다.


‘요한의 전략은 완벽해.’

마수에게 습격받은 마을에서 얻은 정보를 통해 마수의 습성을 파악하고 그에 어울리는 방책을 거의 완공 중이다.

기사들과 힘 있는 장정을 이용해 위험한 마수들을 제거하여 방책에서 최대한 떨어지게 유인하며 시간을 끌고, 후방에 올 블란쳇 기사단으로 절멸시킨다.

요한답게 안정적이고 완벽한 작전이다.


‘작전대로만 되어도 내가 마법을 쓸 일은 없어. 이변이 발생하더라도 마법을 쓰지 않고 도망칠 수는 방법을 마련해 뒀으니 걱정하지 마.’


‘요한 믿는다?’


‘에스텔이 봐도 내 작전이 괜찮잖아. 안 그래?’

 
요한은 불안해하는 나를 달래기 위해 몇 번이고 작전에 대해 설명하고, 자기가 도망칠 길도 알려주었다.

그리고 내 도움을 받기 위해 최대한 숲이 있는 곳 근방에서 싸우기로 했다.

생각난 김에 나는 나무들을 보채서 부탁했던 걸 한 번 더 언급했다. 항상 내 편이던 나무들도 하도 들어서 질린 모양이다.


-그래, 알았다. 그놈을 주시하고 있다가 위험한 일이 생기면 우리가 나서마.

-우리가 인간 얼굴을 잘 몰라도, 그 인간 놈 얼굴은 절대 헷갈릴 일 없으니 걱정 말래도. 우리가 보통 나무인 줄 아느냐?

-그래! 요새 친해졌다고 네가 잊은 모양인데,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희귀하다고 알려진 구름나무다. 에헴!

“저도 믿죠. 역시 나무님들밖에 없어요.”

그렇게 하루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마수가 벌써 헤임 마을을 들쑤시고 있다고? 방책이 겨우 수리된 참인데.”

“마수 속도가 예상보다 너무 빠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이곳으로 올수록 더 빨라지는 것 같은데…….”

“걱정하지 마라. 어차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동일하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 신뢰받고 있는 요한을 힐끔 훔쳐보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해.’

아무리 요한이라도 마수를 상대하는 건 힘든 일인지, 티를 내지 않아도 신경이 곤두선 게 보였다.

특히 전처럼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제약 때문에 더 무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요한을 치료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나는 영지 출신 기사에게 뇌물로 받은 귀중품 손거울을 꺼내 들었다.

거울 속 내가 무표정하게 나를 보고 있다. 남색 눈동자는 내 눈인데도, 내가 아닌 듯한 이질감이 들었다.


-진짜 할 거냐?

구름나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일단 해보려고요.”

예스텔라는 성녀 행세할 정도로 완벽한 치유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힘은 사실 나의 힘이었다.


‘그게 내 힘이라면, 나도 요한을 치료할 수 있지 않을까?’

신의 핏줄이라는 요정의 힘이 그렇게 약할 것 같지 않았다.

***

블란쳇 공작저는 온통 정신없었다.

갑자기 사라졌던 주인이 뜬금없는 영지에서 자신의 신변을 알리고, 기사단을 끌고 찾아오라는 명령을 했다.

그것도 최대한 빨리.


‘그것만이었으면 덜 혼란스러웠을 텐데…….’

이어지는 요한의 명령은 더욱 수상했다.


‘에스텔이 함께 돌아갈 수 있으니 안주인을 맞이할 준비를 해놔.’


‘예? 저희가 아는 그분 맞습니까?’


‘그렇다. 내가 처리하고 갔던 유서 다시 확인해 주겠나?’

 
유서에는 유사시 블란쳇 공작 요한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경우 에스텔에게 그 모든 것을 물려준다는 내용이 있었다.

에스텔이 위험에 처할까 염려했는지, 무슨 일이든 에스텔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경우 다음 상속자에게 더 큰 재앙이 닥치도록 하기까지.

요한의 최측근들끼리만 알려진 일인데도, 혼란의 파장은 무척 컸다.


‘일단 저는 주군의 명에 따라 움직이겠습니다. 그런데 하녀장님, 주군께선 언제 유서를 바꾸신 겁니까?’


‘그건 저희도 모르겠네요. 에리히 경이 처리한 걸까요? 그나저나 에리히 경은 어디로 갔는지…….’

 
그 자리에 있던 베티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주인님이 아무 이유 없는 일을 시키실 리 없는데.’

최근 요한이 미쳤다는 소식이 들리지만, 베티는 왠지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이유가 숨겨져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베티는 최근 제국에 들리는 모든 소식을 수집했다.


“성벽에 걸어둔 펠시스 일가의 시신이 갑자기 사라졌다면서요?”

“황제 폐하께서 무도한 죄인을 거두기 위해 난리잖아요.”

“그런데 그 시체가 새벽에 자기 혼자 걸어가는 걸 봤다는 사람도 있던데. 그거 사실일까요?”

“악마와 손을 잡은 타락한 가문이니 또 어떤 일을 벌이고 갔는지 짐작할 수가 없구먼.”

하지만 모두 공작가와는 큰 상관 없어 보이는 이야기뿐이었다.


‘그나저나 에리히는 어디로 간 거야?’

요한은 그렇다 쳐도, 에리히까지 아무 말 없이 갑자기 사라진 게 무척 짜증 났다.


‘자기 혼자 할 일만 하면 다냐고.’

그래도 유일한 혈육이라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자꾸 걱정이 됐다.


‘이러다 또 별일 아닌 걸로 갑자기 나타나는 거 아냐?’

베티는 안주인의 방 침실을 정돈하고 창가를 벅벅 닦다가 확 짜증이 솟았다.


“만나기만 하면 확-”

“베티.”

그때 문 뒤에서 에리히 목소리가 들렸다.


“……에리히?”

“베티. 블란쳇 기사단이 어디로 이동했는지 아느냐? 당장 가야 해.”

베티는 반가움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만나자마자 여동생한테 할 말이 그거밖에 없냐!”

들고 있던 걸레를 얼굴에 명중시켰지만, 에리히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베티가 타박하는 걸 멈추었다.


“기사단은 주인님의 명령을 받아 코르센 항구로 출발했어. 텔레포트까지 써가며 갔으니 따라잡기 어려울 텐데.”

“젠장.”

에리히가 인상을 쓰며 걸레를 떼어냈다.


“지금 당장 코르센 항구로 가야겠군.”

“잠깐, 기다려 봐. 기사단이 어디로 갔는지 위치를 아니까 작은 배를 수소문해서 먼저 도착할 수도 있어.”

“그럴 수 있나?”

“이거 봐, 여동생이 항구마다 소식통이 있는 건 또 까먹었네.”

에리히는 그제야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급히 책상 위에 있던 편지지에 암호와 지시사항을 적던 베티가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길래 그래? 아무리 오빠라지만 내가 납득가지 않으면 함부로 도와주긴 어려운 거 알지?”

“말하자면 길다. 기사단만큼이나 급하게 주인님께 마님에 대한 소식을 전해- 아, 너는 아직 잊고 있은 채군.”

에리히의 청회색 눈동자가 복잡함에 젖었다. 베티는 그의 반응에 어리둥절했다.


“주인님도 그렇고 왜 자꾸 도망친 마님 얘기가 나오지?”

“그런 게 있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써준다? 답답하니까 속 시원하게-”

그 순간, 베티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어라?”

에스텔을 생각하자마자 몸에 나타난 이상한 변화였다. 베티는 울컥 올라오는 눈물을 닦으며 의문에 잠겼다.


“내가 왜 갑자기 눈물을 흘리지?”

잊어뒀던 물건을 찾은 것처럼 불쑥 생생한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상냥하고 다정한 에스텔의 목소리, 간간이 지어주던 말갛고 고운 미소.


‘베티! 내 시녀가 되어주겠어?’


‘울지 마. 베티 네가 먼저 울어버리면 내가 할 말이 없잖아.’

 
왜 그걸 다 잊었을까.


“아아…….”

왜 그런 잘못된 기억을 가졌을까.

주륵 눈물을 흘리던 베티를 보며, 에리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도 기억이 났나?”

“……지금 좀 혼란스럽기는 해.”

베티는 머리를 붙잡으며 눈물을 닦았다.


“오빠는 처음부터 마님에 대한 기억이 있었어? 나 도대체 어떻게 이걸 잊었지?”

“다들 그랬다. 나도 깨달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고. 아마 주인님을 제외하곤 모두 마님에 대해 잘못된 기억을 가지고 있던 것 같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아니지. 지금 급하다고 했지?”

베티가 갈색 눈동자를 빛냈다.


“기사단보다 더 빨리 주인님께 갈 방법이 있어, 오빠.”

에리히는 의지를 불태우는 여동생을 보며 새삼 감탄했다. 첩자 일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도 잘 믿기지 않았던 여동생이다.


‘너무 여린 아이니까.’

하지만 그를 끌고 가는 베티는 참으로 든든했다. 눈물을 흘리는 와중에도 꿋꿋했다.


‘마님을 모시면서 일어난 변화일까?’

 

***

새벽쯤, 마수 떼가 목전까지 닥쳤다.

요한은 무장한 자들과 함께 마을을 나섰다. 나는 더 자라는 요한의 권유를 무시하고 그를 배웅했다.


“요한. 안전하게 잘 다녀와. 그래야 같이 블란쳇 공작저로 돌아가지.”

“……블란쳇 공작저로 돌아가도 되겠어?”

“응, 많이 고민해 봤어. 그래도 요한을 따라 블란쳇 공작저로 가고 싶어. 요한 옆에 있고 싶으니까.”

요한의 눈가가 살짝 붉어졌다. 그가 침을 꿀꺽 삼키며 씩 웃었다.


“용기 내줘서 고마워. 이렇게 응원받았으니 꼭 안전하게 와야겠네.”

“사지 멀쩡히 와야 해. 그래야 우리 아기 태명도 지어주지.”

“태명?”

요한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지어도 되는 거야?”

“사실 태명 지을 시기는 한참 지났긴 해. 하지만 그래도 좋은 태명이 생각나지 않더라고. 그러니 요한이 지어줘야 해.”

나는 요한을 보며 싱긋 웃었다.


“우리 아기 태명도 없이 태어나게 할 건 아니지?”

“……꼭, 그럴게.”

요한은 제게 그런 기회가 온 것이 실감 나지 않는지 제 볼을 꼬집기도 했다.


‘요한도 아기만 관련되면 어설퍼지네.’

그가 보여주는 초보 아빠스러운 표정 때문일까.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자꾸 웃음이 났다.

심각하게 고민하던 요한이 물었다.


“에스텔이 바라는 태명 느낌이 따로 있어? 위대하다든가, 아름답다든가, 아니면 오래 살라든가? 지금 개인적으로 35개 정도 생각이 나거든.”

“……요한. 거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없던 일로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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