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약속할 거지?
(175/182)
175화 약속할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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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화 약속할 거지?
2023.08.04.
요한은 옷소매로 피를 닦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였다.
“별거 아니야.”
이 상황을 정확히 반대로 겪어본 적 있어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요한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나는 팔짱을 끼고 요한을 보았다. 내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요한이 무언가를 직감했는지 몸을 흠칫 떨며 자상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하는데, 진짜 별거 아니야. 문제가 될 거였으면, 미리 말하지 않았겠어?”
“요한. 전에 네가 나한테 했던 말 생각 안 나?”
“무슨 말?”
“잘 생각해 봐. 내가 검은 피를 토할 때 멀쩡하다고 했던 그때. 그때 요한이 나한테 뭐라고 했어.”
요한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때랑 이건 다르지.”
“나도 그렇게 말했던 거 같은데. 피를 토하는 거랑 다르게 하나도 안 아프다고.”
“……기억을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잘 기억하고 있네.”
“내가 기억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
“아니. 부인 말이 맞아. 내가 잘못했어. 그렇게 얘기하는 게 아니었는데.”
요한은 못 이긴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두 손을 들었다.
“내 말에 내가 당해버렸네.”
“그래서 이제 어쩌다 피를 토하게 된 건지 설명해 봐.”
“말하자면, 전에 부인이 치료해 줬던 마력 폭주랑 비슷한 거야. 무리한 마법을 사용했을 때 오는 반동 같은 거지.”
“그런 거라면 나한테 진작 말했어야지……!”
저번 요한의 폭주도 내 요정의 힘으로 진정시켰다.
‘그땐 내가 치료했다기보단, 요정의 힘이 알아서 치료해 준 것에 가깝긴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요정의 힘이 폭주를 진정시켜 줄 수 있다는 거다.
‘지금 내 힘은 그때보다 훨씬 강해졌어.’
그러니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게 분명했다.
“빨리 손 내놔. 달라고 협박하기 전에.”
“잠깐, 에스텔-”
“씁, 말이 많다.”
나는 요한이 무슨 변명을 하기 전에 빨리 그의 손을 채갔다.
치직.
얼마나 심상치 않은 폭주인지, 피부 위의 검은 자국에 가까이 손을 대기만 해도 열상을 입을 것처럼 뜨거웠다.
‘이거 봐. 엄청 아파 보이는데.’
요한은 혼자서 모든 일을 다 처리하려 해서 문제다.
‘내 문제는 다 자기를 통해서 해결하지 않는다고 뭐라 하면서.’
이제 보니 요한도 나 못지않게 말을 잘 안 듣는다. 아무래도 이번에 폭주를 치료해 주고 나면 한 소리를 할 것 같다.
나는 뜨거운 요한의 손을 붙잡고 요정의 힘을 끌어올렸다.
“치유해줘.”
이제는 익숙해진 하얀 빛이 요한의 검은 자국 위를 타고 올라갔다.
파직!
‘왜지?’
나는 미미하게 일그러지는 요한의 표정을 보자마자 손을 뗐다.
“……요한. 이래서.”
요정의 힘이 요한의 폭주를 가라앉히기는커녕 더 심화시키고 있던 것이다. 내 참담한 표정에 요한이 어색하게 웃었다.
“걱정시키기 싫었는데.”
“미안해.”
“날 치료하고 싶어서 한 거였잖아. 그리고 나도 요정의 힘이 안 통하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던 것도 아냐.”
요정의 힘에 자극받은 폭주의 기운이 더 광폭하게 꿈틀거린다.
‘아플 텐데.’
아무리 고통을 참는 데 능한 요한이라도 아픈 것 자체가 좋을 리 없었다.
“폭주를 가라앉힐 방법 같은 거 없어? 이대로 있어야 하는 거야?”
“아무래도?”
요한은 보기 흉하다는 것처럼 내 눈앞에서 제 팔을 치웠다. 내가 그의 고통을 보고 슬퍼하는 게 보기 싫은 모양이다.
그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됐기에 난 요한에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왜? 이전의 폭주와는 뭐가 다른데?”
저번 폭주 때는 요한이 이성을 잃은 짐승 같은 모습이 되었었다.
“이전의 폭주는 내 마력이 무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사용한 거라면, 이번엔 내 마력 이상을 사용했거든.”
“……또 다른 게 있지?”
왠지 요한의 표정이 수상해 캐묻자, 요한은 순순히 대답해 줬다.
“내 ‘본질’에 타격을 받았어.”
“본질?”
“흑마법사가 다른 마법과 달리 세상의 질서를 바꿀 수 있는 건 알지?”
요한은 천천히 흑마법사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했다.
“흑마법은 일반 마법과 다른 금기에 손을 대기 때문에 인간의 힘으로는 부족해. 그래서 나는 너도 알다시피 악마와 계약을 해서 내 흑마법을 강화했지. 복잡한 대가 없이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도록.”
“…….”
“하지만 악마와 계약했다고 무한정 힘을 쓸 수 있는 건 아니야. 멋대로 바꾼 운명만큼의 대가가 몸에 돌아오게 되거든.”
“……그렇지만 요한은 대가를 치렀잖아.”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래, 치렀지. 아주 가혹하게.”
“그런데 더 치를 대가가 있다고?”
“원래 세상을 멋대로 바꾼 대가가 그런 거야. 흑마법이란 순리에 어긋난 파멸적인 힘이니까.”
하지만 난 요한이 일부러 숨긴 말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사라진 뒤에 흑마법을 무리하게 사용했기 때문에 그 대가가 지금 오는 거구나.’
또 리베르탄. 흑마법은 리베르탄 때문에 하게 된 거다.
어떻게 보면 리베르탄 공작가는 그의 인생을 망친 것도 모자라 그의 미래까지도 모조리 망친 셈이다.
너무 부당하다.
“그러면 이대로 요한은 어떻게 되는 건데?”
“다행히 폭주가 내 몸을 다 잡아먹은 상태는 아니야. 이거 봐, 이제 슬슬 괜찮아지고 있잖아.”
요한이 자연스럽게 제 목을 검지로 툭툭 두드렸다. 그 말대로 검은 얼룩이 피부에 흡수되듯 사라지고 있었다.
“여기서 더 무리하게 흑마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돼. 이젠 흑마법도 아닌 일반 마법도 조심해서 써야 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치료할 방법은 없어?”
“없어. 그렇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미 나는 치른 대가가 있어서, 앞으로 마법 사용만 조심하면 되니까.”
이제 그의 손에도 폭주의 전조는 모두 사라졌다. 확실히 저번에 치료했던 폭주보다 심각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금방 가라앉은 걸 보니.
‘하지만 왜 이렇게 찝찝할까?’
나는 요한의 두 손을 소중하게 꼭 모아 잡고 붉은 눈동자를 빤히 바라봤다.
“진짜지?”
“진짜야. 거짓말하지 않기로 했잖아.”
요한은 내게 거짓말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 약속을 지키듯 이번에도 원래라면 슬쩍 넘겼을 설명까지 전부 충실히 해주었다.
“내가 너무 걱정되는구나?”
“당연히 걱정되지. 그러면 걱정되지 않겠어?”
“그래, 당연한 거지. 그치만 당연한 거라도 기분 좋다.”
요한은 입꼬리를 실실 들어 올렸다. 나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입술을 삐죽였다.
“남은 걱정하고 있는데 그런 속 편한 말이 나와?”
“그렇지만 정말 마법 사용만 조심하면 되는걸. 이제 복수도 이뤘겠다, 내가 마법을 쓸 일이 뭐가 있겠어.”
“그래도 세상일은 모르는 거잖아.”
“난 마법 없이도 잘난 사람이라서 괜찮아. 못 믿겠으면 요정의 힘으로 확인해 봐.”
“……진짜야?”
“그래. 부인이 더 안심할 수 있게 요정의 힘으로 확인해 보는 게 좋겠어. 진실이니까.”
믿음을 주는 요한을 의심하는 것 같아서 마음에 걸렸는데, 요한은 재차 요정의 힘으로 확인해 보길 권유했다.
‘……진짜네.’
요한의 말에 틀린 건 없었다.
‘그런데 왜 마음이 불편할까?’
요정의 힘으로 본 만큼, 요한이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는데 말이다.
“그래도 조심해. 나도 요한이 엄청 걱정되니까.”
“알았어. 조심할게.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 나는 이게 나쁜 일이라고만 생각하진 않거든.”
요한이 내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제 내가 마법을 사용하는 순간은, 내 힘으로 결코 어찌할 수 없는 순간일 거 아냐?”
“그런 소리가 나와?”
“들어봐. 그런 순간에 마법을 사용해서라도 상황을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어. 목숨을 바쳐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인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무렇지 않게 제 목숨을 걸고 있는 요한의 얼굴이 아주 많이 거슬렸다.
“그래서 지금 내 앞에서 마법을 써서 잘못되겠다는 거야?”
“이거 또 부인 마음을 불편하게 했네.”
요한이 여우처럼 살살 웃으며 나를 꽉 끌어안았다. 기분 좋은 온기와 나른한 숨이 내 목덜미를 간질였다.
“걱정 마. 나도 너와 함께 있는 순간이 그 무엇보다 소중하니까.”
“…….”
“절대 잃어버리지 않게 노력할 거야.”
나도 요한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어리광부리듯 얼굴을 문질렀다.
“약속할 거지?”
“당연히 약속할 수 있지. 내가 어디 약속 지키지 않는 거 봤어?”
그의 목소리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요한은 나와 함께하는 이 순간을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고 있다. 나는 요한에게 웅얼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나 혼자 두고 떠나면 안 돼. 이제 요한이 없으면 싫어.”
“……에스텔.”
“우리 사이에 아기도 있잖아. 아기가 아빠 얼굴도 보고, 아빠 사랑도 받게 해야 하는 거잖아.”
투정에 가까운 내 말. 일순 요한이 숨을 멈추었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는 게 싫었다. 표정을 볼 수 없어서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가 조심스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요한?”
“그래, 우리 아기.”
요한은 그윽하게 깔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아기를 위해서라도 꼭 노력할게. 이제 내 소원은 우리 가족이 모두 행복하게 사는 거니까.”
그날 우리는 연못에서 다정한 시간을 보내며 노닥거리다가 해가 지는 걸 보고 돌아왔다.
영원히 반복되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하루였다.
돌아오는 길, 요한은 나를 공주님 안기로 안아 들며 말했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이렇게 데이트하자.”
“진짜?”
“떨어져 있던 시간이 길었잖아. 그러니 그만큼 더 붙어 있으려고 노력해야지. 우리 가지고 갔던 아름다운 괴물 이야기로 토론하던 것도 못 끝냈잖아. 그거 마저 해야지.”
“맞아, 그거 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작가는 동화라는 걸 생각하지 않고 쓴 게 확실하다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이상한 결말을-”
하지만 우리의 다음 데이트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다음 날부터 엄청난 마수 떼가 영지로 몰려왔기 때문이다.
***
다행히 마수들이 곧장 펜테 마을로 쳐들어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수의 속도가 워낙 빨라 어떤 곳도 안전하지 않았다.
평화로웠던 마을이 쑥대밭이 되었다.
“도대체 마수 떼가 왜 나타난 거지?”
“한 마을이 마수 떼에 모조리 먹혀서 몰살당했대. 우리도 당장 도망쳐야 하는 거 아냐?”
“그런데 어디로 도망쳐요? 마수 떼를 피해서 도망칠 곳이 없잖아요.”
“그래도 도망은 쳐봐야지. 얌전히 앉아서 먹히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을 거 아니야……!”
나는 묘한 죄책감에 빠졌다.
‘이거, 나 때문인 거 같은데.’
블란쳇 영지에 내려갔을 때도 갑작스러운 마수 떼가 영지를 습격하는 일이 있었다.
한 번도 마수를 만나본 적 없는 마을에 마수들이 나타났다면 이유는 하나뿐이다.
‘나를 노리는 게 분명해.’
다행인지 불행인지 마을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외부인인 내가 그 원흉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임산부인 나를 걱정해 주었다.
“마을 사람들이 마수를 피해 숨을 수 있는 장소를 찾고 있어.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숨을 수 있는 장소가 있어?”
“확실하진 않아. 하지만 우리 마을은 신성한 구름나무숲을 옆에 두고 있잖아. 뭐가 됐든 해보는 거지.”
늦은 밤, 마수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난 요한을 붙잡고 물었다.
“……요한. 저 마수 나 때문이지?”
“쓸데없는 걱정 한다.”
요한은 내게 핀잔을 주며, 씩 웃었다.
“저 마수들이 이 마을을 해치지 못하게 해놓을 테니 걱정 마.”
“무리해서 마법을 쓰려고?”
“아니. 블란쳇 기사단이 저번에 내 호출을 받고 여기로 오고 있어. 저번 영지에 출몰했던 마수도 다 처리했던 거 알지?”
블란쳇 기사단이라면 믿을 만하다.
“기사단이 도착할 때까지만 여기를 지키면 돼. 마을 사람들과도 얘기 끝냈으니 너는 안전한 곳에서 숨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