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4화 마지막 데이트 (174/182)


174화 마지막 데이트
2023.08.01.



 
에나는 영주성에 갔다 온 이후 완전히 요한의 편으로 돌아섰다.


“에스텔, 네가 어쩌다 남편과 헤어진 건지 물어봐도 돼?”

“전에 얘기하지 않았어?”

아직 요한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상태라, 나는 에나에게 대충 성격 차이로 인한 갈등이 컸다고 둘러댔다.


“아니. 그때 그런 식으로 얘기한 거 말고, 진짜 큰 문제가 있어서 헤어졌던 것 같아서.”

“아아…….”

“부담스러우면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각자 사정이 있는 거지. 하지만 볼수록 너희 남편 진짜 괜찮은 사람인 거 같아서 그래. 무슨 짓을 했길래, 싶더라고.”

“…….”

“그렇다고 네가 아무 이유 없이 멀어질 사람은 또 아니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건 나도 잘 몰랐다.


‘기억의 차이가 큰가.’

전말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어째서 그렇게까지 했는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나 자신인데.’

에나는 고민에 빠진 내 얼굴을 보고 아차 싶었는지 말을 번복했다.


“미안. 괜한 말을 했나 봐. 말할 수 있는 사정이었으면 진작 얘기해 줬을 텐데.”

그렇게 에나는 사라졌지만, 내 고민은 쉬이 끝나지 않았다.


‘이대로 기억을 되찾지 않아도 되는 걸까?’

좋기는커녕 아주 나쁜 기억이라는 걸 안다. 그리고 가장 큰 관련자인 요한은 내가 그 기억을 되찾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더 크게 상처 입을까 봐.’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내가 겪었던 일이기 때문에 그것을 완전히 없던 일로 부정하는 게 옳은 일인지 고민되기도 했다.


‘그 기억엔 나쁜 기억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요한과 있었던 아름다운 추억이나 설렜던 감정, 소중한 마음까지 전부 있을 텐데.


‘너무 조급해하지 마. 좋은 일은 앞으로도 많이 쌓을 수 있으니까.’

 
요한의 위로가 함께 떠올랐지만, 나는 습관적으로 되새기며 구름나무들에게 말을 걸었다.


“나무님들. 제가 기억을 되찾으면 요정의 힘을 더 완벽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하셨지요?”

-그래. 하지만 지금 힘으로도 충분하다고 하지 않았니?

“그건 그래요. 나무님들이랑 소통도 가능하고, 나무님들께 부탁해서 다른 여러 가지 일도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힘을 찾아야 하는 이유라도 생겼느냐? 묻지도 않던 걸 계속 물어보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냐.

내가 망설이자, 내 앞의 나무가 가지로 머리를 토닥여줬다.


-강한 힘이란 결국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우리는 네가 기억을 되찾아 더 큰 힘을 가져도 좋지만, 이대로여도 충분하다고 생각해.

-그래, 네가 아무 이유 없이 기억을 지웠을 리는 없지 않니.

“역시 그렇겠지요?”

하지만 왜일까.


‘이게 나쁘지 않은 판단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 신경이 쓰여.’

이대로 없던 일로, 완전히 지우고 살았다고 해서 그것이 없던 일이 되지는 않을 텐데.


‘……마치 내 몸에 있는 흉터처럼.’

어쩌면 다른 그 누구보다 내가 내 몸의 흉터에 예민한 것처럼, 내 기억 속 빈자리를 너무 많이 의식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래요, 필요하면 나무님들이 도와주신다고 했으니까. 그쵸?”

-힘을 빼앗긴 상태였다면 모를까. 지금이라면 진실을 보는 눈으로 얼마든지 다시 떠올릴 수 있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근데 그것도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무어를? 우리가 빼먹은 얘기가 있어?

-에스텔 네가 기억을 되찾는 도중에는 굉장히 무방비해진다. 네 스스로 지운 것을 되찾는 것이기 때문이지. 그러니 가장 안전한 상황에서 해야 한다.

구름나무들이 느리게 탄식했다.


-그러고 보니 그랬지. 우리가 왜 또 그 이야기를 잊었을까.

-그래도 아가가 있어서 지금이나 떠올리는 거지. 전에는 요정에 대한 걸 아무리 생각하려고 해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잖아. 어딘가에 ‘봉인’된 것처럼.

-기억난다. 그래서 그 블란쳇 공작저 늙은이들이 협박해도 도무지 생각나는 게 없어서 곤란했지. 그러니 그 애를 좀 여기로 보내달라고 해도 그렇게 안 듣더니…….

왁자지껄 떠들던 구름나무들이 말을 멈추며 내 눈치를 살폈다.


-아가. 괜찮니?

“전 괜찮아요.”

-그래. 그 나무들이 잘못된 건 결코 네 잘못이 아니다. 어차피 다 살 만큼 산 늙은 나무들이었어.

-애당초 우리 나무들은 인간들처럼 생에 그리 집착하는 것도 아니여.

구름나무들의 위로에도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나저나 전부터 계속 ‘봉인’ 얘기를 하시던데. 어떤 비밀이라도 있는 걸까요?”

-사실 우리도 최근에 떠올린 거라 아는 게 없다. 나무 체면 다 구겼어.

-그렇게 할 거면 애당초 우리 구름나무들이 다른 나무들에 비해 요정에 대해 많이 아는 것도 조금 이상하지 않아? 뭔가 이유라도 있으니 그런 거겠지.

그때 요한이 예쁘게 포장한 바구니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나무들이랑 대화하고 있었어?”

“응.”

어쩐지 내가 나무들과의 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어색해서 웃었다. 요한은 아무렇지 않게 나무에게 다가가 ‘에스텔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며 내게 눈을 찡긋했다.


“내 목소리도 다 들으려나?”

“지금은 내 옆에 바로 있으니까 다 들으실 거야. 왜, 나무님들한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흠,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바구니를 내려놓은 요한이 팔짱을 끼며 제법 진지하게 고민했다.


“나 좀 예쁘게 봐달라고 할까?”

“응?”

“아니. 나무들이 널 아끼는 건 좋은데, 나를 좀 안 좋아하는 것 같단 말이지.”

과연 요한.


‘나무의 말을 못 들어도 대강 무슨 소리 하는지는 귀신같이 눈치채네.’

생각해 보면 가끔 나무들이 요한 흉을 보고 있을 때도 단번에 알아차렸었다.


“에이. 아니야. 내 걱정이 많은 것뿐이지. 그리고 애초에 나무님들은 인간을 별로 안 좋아해. 그래서 그런 걸지도?”

“그렇다면 다행이고.”

요한은 어깨를 으쓱이며 악수하듯 나뭇가지를 잡았다.


“에스텔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섣부른 판단으로 에스텔에게 상처 입히고, 잘 알아주지 못한 적도 있지만 깊이 반성하고 고치겠습니다. 예쁘게 봐주세요.”

“……지금 뭐 해?”

“아부.”

요한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손을 뗐다.


“구름나무숲 너머에 작고 예쁜 연못이 있다던데. 가봤어?”

“아니. 가본 적 없는데. 구름나무숲 너머에는 엄청 험한 숲밖에 없지 않아?”

펜테 마을을 둘러싼 가장자리의 구름나무들. 그 너머에는 절벽과 높은 나무들로 이루어진 빼곡한 숲밖에 없다.


‘구름나무들도 그 너머 숲엔 뭐가 있는지 잘 모를 정도로 오래된 숲.’

쓸데없는 호기심으로 일 벌이기를 싫어하는 편이라 더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았다.


“절벽으로 가는 쪽 말고, 반대편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예쁜 연못이 있는데 거기가 펜테 영지 데이트 명소라더라고.”

“그런 건 또 어디서 알았어?”

“내가 이 마을 사람들이랑 어울리면서 안 들은 얘기가 뭐가 있겠어?”

진짜 별의별 얘기를 다 들은 모양이다.


“밖에 나가는 게 싫지 않으면 우리 오붓하게 그 연못이나 구경하러 갈래? 가서 내가 준비한 샌드위치도 먹고.”

“내가 거기까지 들어가도 될까? 그러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아무리 의사가 안정기라고 했어도 요새는 밖에 나가는 게 좀 꺼려졌다. 외출했다가 영주로 시끄러운 일을 겪어서 더 불편한 것도 있었다.


“그럴 줄 알고 미리 다 알아봐 뒀지. 중반부쯤이 조금 험하긴 한데, 거기서는 내가 부인을 안고 들어갈 거니 걱정하지 마.”

“그런가?”

“그래. 의사 말이 산모도 가끔씩 바깥 공기를 쐬어줘야 컨디션에 좋대. 요즘 에나 집에도 잘 안 놀러 가고 책만 읽었잖아.”

“그거야 요한이 빌려다 주는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금방 가서 그랬지.”

하지만 요한이 웃으며 반박했다.


“저번에 읽을 책 다 읽고 심심해서 내려놓는 거 다 봤는데.”

“재밌어서 두 번 읽은 거야.”

“그러면 오늘 연못에 나가서 세 번 읽어도 되겠네. 그치?”

웃는 얼굴의 요한은 화난 얼굴의 요한보다 더 거절하기 어려웠다.

어떻게든 연못 구경을 시켜줄 생각인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나갈게.”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지금 이 데이트가 이곳에서의 마지막 데이트가 될 것이라고는.

***

걱정했던 것과 달리 연못은 숲에서도 트인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근처에 빼곡하게 들어선 나무들 사이로 상쾌한 봄바람이 불었다. 푸르른 나무 사이로 청록색 빛깔의 연못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연못 진짜 예쁘다. 왜 데이트 명소라는지 알겠어.”

“부인이 마음에 들어 할 줄 알았어.”

요한과 함께 연못 근처를 산책했다. 근처에는 마을 사람들 없이 우리 둘만 있어서 더 오붓한 분위기가 났다.


“나무들도 나무들이지만, 부인은 원래 바깥에서 햇살을 쐬는 걸 가장 좋아하잖아.”

“그건 그래.”

연하게 반짝이는 돌들을 보던 내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요한. 저 돌들에 무슨 글씨가 적혀 있는 거 같은데?”

“아. 아마 고대어일 거야.”

“고대어?”

“이 연못은 펜테 마을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있던 연못이래. 그래서 연못 바닥을 보면 알 수 없는 고대어가 새겨진 돌들이 자주 나온다더라.”

“요한이 봐도 알 수 없는 고대어였어?”

흑마법사인 요한은 고대어에 대해 아주 잘 알았다.


“세상에 밝혀진 고대어는 아닌 것 같았어.”

“그거 진짜 신기하네.”

내가 관심을 보이자마자 요한이 돌 몇 가지를 주워 내 손에 쥐여주었다. 반질반질한 조약돌의 촉감이 기분 좋았다.

연못가에 나란히 앉아 아무 생각 없이 돌을 바라보던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 고대어, 신화에 대한 내용이네.”

“내용을 읽을 수 있겠어?”

“응. 확실하게 아는 건 아닌데 대충 무슨 내용인진 알 수 있겠어.”

사실 내가 제대로 아는 단어는 아니었지만, 그 고대어가 ‘아테아 신’을 의미하는 단어라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진실을 보는 눈이 이렇게도 사용되네.’

돌을 집중해서 살필수록 요정의 힘이 조금씩 소모되었다.


“아테아 신과 혼돈이 주로 나온다. 옛날에 만들어진 연못이라더니, 정말 성서에나 나올 법한 내용이야.”

“……혼돈?”

요한이 한 박자 느리게 답했다. 돌에 집중하고 있던 나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가 평소에 알던 신화의 내용보다 조금 더 디테일해.”

“어떻게 다른데?”

“일단, 저기 다른 조약돌도 함께 보니까 알겠는데…….”

 

[신은 한 인간을 사랑했고, 그래서 둘 사이에 신의 핏줄인 요정이 태어났다.]

[하지만 인간을 사랑하게 된 신은 약해졌고, 혼돈이 신을 없애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로 인해 신을 사랑하던 모든 존재가 절망에 빠졌다.]

[악마의 세상이 도래했다.]

 


“왜 생뚱맞게 악마가 등장한 걸까? 혼돈이 나오다가 악마는 어디서 나온 거지? 원래 악마랑 혼돈이랑 같은 존재 아니었어?”

이상하게 요한의 표정이 너무 굳어 있었다.


“요한, 뭔가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어?”

“그건…….”

그 순간 요한의 멀쩡했던 팔 위로 검은 자국이 생기기 시작했다. 요한조차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폭주?’

하지만 전에 겪었던 폭주와는 전혀 달랐다. 그때는 요한이 무리하게 흑마법을 사용한 직후였으니까.


‘오히려 지금은 마법을 거의 쓰지 않은-’

마침내 발자국을 남기듯 깊은 목울대를 타고 올라온 그림자가 눈가까지 올라왔다.

미간을 찌푸린 요한의 입가 사이로 한 줄기의 피가 흘렀다. 나는 멍하게 요한의 피를 바라보았다.


‘요한이, 피를……?’

 

 

***

기사들이 영주의 명에 따라 문 앞에 도열해 있었다.


‘도대체 무슨 명령을 내리시려는 거지?’

그때 한창 두문불출하던 영주가 기이할 정도로 윤기가 흐르는 얼굴로 명했다.


“블란쳇 공작의 명령에 따라 우리 영지는 모두 블란쳇 공작가에 귀속되기로 했다. 모두 수고 많았다.”

“예? 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되는…….”

“그건 블란쳇 공작에게 물어보도록.”

영주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제 방에 들어갔다. 방에 들어간 영주가 가슴께를 움켜쥐며 바닥에 쓰러졌다.


-이래서 평범한 인간은 잘 못 쓰겠다니까.

영주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며 울퉁불퉁한 마물의 형상을 빚었다.


-그 성황 놈은 아무리 사용해도 흠 하나 나지 않아서 참 편리하긴 했는데.

가볍게 불평하던 마물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쿠우웅-

인간이라면 결코 눈치채지 못할 가벼운 진동이 땅을 울리기 시작했다. 흡족하게 바깥을 보던 마물은 이윽고 영주의 의자로 향했다.

의자에 막 도착한 순간, 진흙처럼 마구 뒤섞여 있던 마물이 뭉개지며 길쭉하고 늘씬한 남자의 형상을 빚었다.


-아. 여기 요한 그놈도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마물, 아니, 악마가 된 마물은 익숙한 듯 매끈한 제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녹색 눈을 번뜩였다.


-익숙한 얼굴을 보고 얼마나 기뻐할지 기대되는데.

마물, 동시에 악마였던 존재가 제게 휘둘리며 놀아났던 꼭두각시들을 떠올리며 킬킬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