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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화 조금만 버티면 (173/182)


173화 조금만 버티면
2023.07.28.


한눈에 영주의 분위기가 확 가라앉았다는 게 보았다.


‘대단하네.’

새삼 요한이 대단한 권력자라는 게 실감 났다. 나한테 요한이라는 보호막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요한이 잠깐 생각에 잠긴 내 볼을 검지로 쿡 찔렀다.


“에스텔, 이제 갈까?”

어느새 영주는 사색이 된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니던 귀족의 자존심도 없어 보였다.


“영주는…….”

“별거 없는 놈이야.”

요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입단속도 시켜놓을 테니까 걱정 말고 돌아가자.”

다른 건 몰라도, 이런 일에 있어서 요한보다 믿음직스러운 사람은 없다.


“그러고 보니 별채에 에나가 있어.”

“에나는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어. 지금 내려가면 돼.”

요한은 반달처럼 눈을 곱게 접었다.


“어때, 내가 좀 괜찮아 보이나?”

“그 말만 안 했어도 더 좋았을 텐데.”

“그렇지만 앞으로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으니까.”

“……그건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과연 에나는 마차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스텔! 영주한테 아무 일도 안 당한 거 맞지? 정도는 아는 영주라 생각했는데 완전 미친-!”

다행히 아주 멀쩡해 보였다.

***

고요한 영주성이 공포로 얼어붙었다.


“아아아악-!”

“영주님, 진정하시지요.”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대놓고 무시당했는데?”

영주는 말리는 기사를 밀어버리고, 식탁의 음식마저도 엎었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거리며 물러선 기사를 노려봤다.


“그놈 진짜 블란쳇 공작이 맞아?”

“……예. 맞았습니다.”

“진짜 확실해?”

“확실합니다. 설령 블란쳇 공작성에서 거짓말했다 해도 최소한 블란쳇 공작성의 인준을 받은 것은 확실합니다.”

그렇다는 건, 영주가 오랫동안 준비해 온 제국령 편입에 얼마든지 훼방을 놓을 수 있다는 뜻이다.

기사는 영주의 고민을 알아채고 조심스럽게 말을 얹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영주님께서는 공작 부인께 아주 정중히 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반응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영주가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쳤다.


“딱 봐도 나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눈빛이었다고.”

“일단은 상황을 보고…….”

“도대체 왜 그 블란쳇 공작이, 아니지. 공작이 아낀다는 공작 부인이 이 외진 곳에서 평민처럼 지내고 있냐고!”

외모부터 범상치 않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그래도 예상했던 것보다 상대의 정체가 너무 거대했다.


“공작 부인에 대해 달리 들은 거 있나?”

“그것은 저희도 잘…….”

“도대체 아는 게 뭐야! 그 여자에 대해 알아보라고 내가 몇 번이고 얘기했잖아!”

작은 영지에서 왕처럼 군림해 왔던 영주는 인내심이 매우 얕았다.


“무슨 비리라도 있던 거 아냐?”

“예?”

“뭐가 있으니까 이 덜떨어진 곳에 있었겠지. 신분도 감추고, 평민처럼 일도 하면서.”

번뜩이는 영주의 말에 기사가 우려를 남겼다.


“영주님. 블란쳇 공작은 결코 적으로 둬서는 안 되는 분입니다. 아무리 이곳이 영주님 땅이라지만, 제국이 나서면 영지는 하루도 안 돼서 바로 끝장-”

“누가 그걸 몰라서 그래? 답답하니까 머리를 좀 굴려보잔 거지!”

영주는 제국에서 유학하는 동안 귀족들의 습성에 대해 대강 배웠다. 제국 고위 귀족의 자존심은 상상을 초월했다.


“분명 구린 구석이 있지 않고서야 번거롭게 나설 리 없어. 그놈이 제국에 연락하기 전에 샅샅이 뒤져서 약점이라도 캐낼까?”

“어떻게 뒤질 셈이지?”

“공작이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지만 혼자 온 몸이니 영지의 기사 수로 밀어붙이면 당해낼 수 없-”

자신만만하게 중얼거리던 영주의 등골에 차가운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영주는 목 끝까지 치민 불길함에 바로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그가 고장 난 인형처럼 어색하게 뒤를 돌아봤다.

뒤에는 고개 숙인 기사들과 오만하게 팔짱을 낀 블란쳇 공작, 요한이 서 있었다.


 
요한은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기사 수로 어떻게 한다고?”

“아, 하하. 공작님. 언제 또 오셨습니까? 공작님께서 오실 줄 모르고 헛소리를 좀…….”

“헛소리였던 건 아나?”

요한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갔다. 고저 없이 이어지는 목소리에 영주는 압도되어 대답하지 못했다.


‘젠장. 이게 대귀족인가?’

진작 요한이 들어왔다고 알리지 못한 기사들이 원망스러워 노려보았으나, 기사들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요한은 주위의 침묵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자연스럽게 영주가 앉는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주인처럼 익숙한 행동이다.

하지만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제 아래의 것들을 신경 쓸 필요조차 없다는 듯 당연한 무심함, 절로 고개를 숙이게 하는 귀족적인 오만함.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너무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영주가 의자에 등을 기댄 요한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공작님, 방금 전 했던 말은 공작님을 향한 말이 아니라 그저 우연히-”

“이봐. 영주.”

요한은 영주의 이름도 묻지 않고 무성의하게 물었다.


“내 부인에게 재밌는 소리를 했더군. 듣다 보니 재밌어서 한참 웃었어.”

영주는 눈동자를 굴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했더라?’

문제가 될 말이 너무 많아서 아무것도 대비할 수 없었다. 영주는 자진해서 납작 기기로 했다.


“아, 예. 그렇지요. 그땐 제가 귀하신 공작 부인인 줄 알아보지 못하고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뭐, 부인이 말하지 않았으니 모를 수밖에.”

“아닙니다. 그 기품과 아름다움을 당연히 한눈에 알아봤어야 했는데 제가 모자람이 많아 미처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랬나?”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광기로 번뜩였다.


“예, 예?”

“농담이야. 내가 모르고 한 일에 책임을 물을 만큼 속 좁은 사람으로 보였나?”

“아아. 예. 그럴 줄 알았습니다. 블란쳇 공작가라는 위대한 가문답게 넓은 아량을 갖추고 계실 줄 알았습니다.”

“근데 이번만큼은 속 좁은 사람이 되고 싶은데.”

한순간 분위기가 또 바뀌었다.


“웃어.”

요한이 빈정거리며 긴 손가락으로 제 팔을 툭툭 쳤다.


“웃지 않으니 내 기분이 나쁘잖아.”

그쯤 되자, 천적을 만난 먹잇감처럼 엎드리던 영주도 슬슬 기분이 나빠졌다.


‘공작이라도, 이건 너무한 것 아닌가?’

영주가 최대한 정중하게 목소리를 낮춰 항의했다.


“공작님, 아무리 그래도 저는 이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입니다. 최소한의 위신을 챙겨주시면-”

퍼억!

요한 가까이에 고개를 들고 말하던 영주의 고개가 식탁에 처박혔다. 다른 기사들이 말릴 새도 없었다.


“여, 영주님……!”

큰 손이 영주의 안면을 식탁에 뭉갰다. 영주가 엎어버린 음식까지 묻어 더 모욕적으로 변했다.


“으읍-”

“시끄럽네.”

요한은 고개를 들어 반항하려는 영주의 발을 툭 차 무릎을 꿇게 한 뒤 숨도 쉬지 못하게 뒤통수를 눌러 계속 식탁에 박게 했다.

그리고 이 소란과 아무 관련도 없다는 양 우아하고 나른한 목소리로 주위의 기사에게 물었다.


“내가 어떨 때 장갑을 끼는지 아나?”

“예, 예?”

“질문을 들었으면 대답을 해야지. 그게 예의 아닌가?”

공포로 얼어붙은 기사가 벌벌 떨며 대답했다.


“모,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장갑을 끼시는지요?”

“손 닿기도 불결한 것들과 불가피하게 닿아야 할 때.”

쿵! 요한이 영주의 뒤통수를 잡고 다시 한번 책상에 처박게 했다.


“우으으윽! 고, 공작이라 하여도-”

“그럴 때, 나는 어쩔 수 없이 장갑을 껴. 보통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것들이라 검은색은 필수지. 내 마음 이해하나?”

잔혹함이 배어든 눈빛에 기사들은 감히 토 달지 못했다.


“예, 예, 이해합니다.”

“이해한다니 다행이군. 세상엔 이렇게 친절히 읊어줘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거든.”

요한은 헛소리를 다시 지껄이는 영주의 얼굴을 책상에 찧었다. 버둥거리던 팔이 두려움에 떨며 잠잠해졌다.

이런 상대는 그에게 너무 쉬웠다.


“여기 이 쓰레기처럼.”

사실 에스텔만 엮이지 않았다면, 직접 나서지도 않았을 거다. 직접 나서는 시간조차 아까우니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이딴 더러운 몸으로 에스텔에게 수작을 부려?’

너무 소중해서 눈에 담는 것조차도 조심스러웠던 그녀. 매번 다칠까 마음을 졸이게 하는 그 귀한 여자를, 감히.


“그러면 이제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된 것 같으니,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해볼까?”

“…….”

“…….”

공포스러운 분위기에도 요한은 짜증만 솟구쳤다. 에스텔이 사라졌던 풍경을 떠올리면 사지를 잘라버려도 모자랐다.


‘다시 도망친 줄 알았어.’

그를 안심시키고, 그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영주성에 가게 됐어.]

에스텔이 남겨둔 쪽지가 아니었다면 정말 제대로 오해했을지도 모른다.


‘이딴 걸 상대하기 위해 이름까지 드러낸 건 좀 아쉽지만.’

상대에 비해 요한의 이름값이 너무 높았다. 아무리 조용히 시켜도 다음 주쯤이면 요한이 이 시골에 왔다는 사실이 제국까지 번질 것이다.


“소망대로 이 영지를 제국령에 편입시킨다.”

“저, 정말이십니까?”

기사들은 제 주인의 처참한 꼬락서니에 반색하기도 어려워 어색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단, 블란쳇 공작가의 이름으로.”

여기저기서 당황하는 소리가 들렸다. 몇 번 식탁에 처박아준 영주는 벌써 기절했는지 조용했다. 요한은 미련 없이 혼절한 영주를 바닥에 던지고 손을 털었다.


“반박은 듣지 않겠다. 억울하면 이놈이 정신 차린 뒤 얘기하든지. 하지만 그럴 수 있을진 모르겠군.”

이 영주놈은 아무것도 못 할 거다.

요한이 블란쳇 공작가와 연락되었을 때, 영주의 약점에 대해 빠른 조사를 했기 때문이다.


‘왜 그리 제국령에 편입되고 싶어 하나 했더니만.’

단순히 영지의 부흥이 아니라, 제국에서 친 사고를 제국의 귀족 신분이 되어 무마시키기 위함이었다.

영주는 제국 유학 시절, 신분 낮은 여자 몇을 건드렸다. 그리고 그걸 제대로 감추지도 못해 털렸다.


“그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었는지 기대하고 있겠다.”

요한은 고고하게 영주성을 떠났다.

반나절이 지난 뒤에야 정신을 차린 영주는 요한이 남긴 협박에 길길이 날뛰며 치를 떨었다.

궁지에 몰린 영주에게, 거짓말 같은 구세주가 나타났다.

***

밤하늘이 컴컴해지자마자 추적추적 봄비가 내렸다.


‘에스텔에게 아무 일 없겠지?’

요한은 영주성에서 빌린 말을 타고 마을로 급히 달려갔다.

안전하게 있는 걸 확인하고 왔는데도, 그녀의 곁을 비우고 있으면 만성적인 불안이 치밀었다.


‘이럴 땐 마법을 쓰면…….’

체내에 있는 마력을 움직인 순간, 묵직한 통증이 온몸을 죄었다.

마력이 통제를 벗어나 마구 날뛰었다.

요한이 입술을 깨물었다. 폭주의 잔재가 검은 피로 나왔다.


“무리인가.”

에스텔을 만난 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무리한 이동으로 몸이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그래서 마력을 사용하려고 할 때마다 뒤틀리는 통증과 함께 폭주 증상이 나타났다.

요한은 이 증상의 결말을 알았다.

대부분의 흑마법사가 과도하게 마법을 사용하다 죽게 되는 증상이니까.


‘조금만 더 버티면 돼.’

블란쳇 공작저의 사람들을 이곳으로 호출했다. 에스텔은 안전하게 블란쳇 공작저로 돌아갔다.

설령 지금 오해하고 있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의 명령이라면 목숨처럼 지키는 사람들이니 에스텔을 잘 보살펴 줄 거다.

특히 에스텔에겐 그의 아이가 있으니까.

말을 재촉해서 달리자, 어느새 에스텔이 기다리는 집에 도착했다.


‘아직 안 자고 있었나?’

먼저 자라고 했는데,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집 안의 불이 켜져 있었다.


-힘이 필요하지 않나?

그 순간 뒤에서 이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요한은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상대를 본 요한이 얼굴을 굳혔다.


“넌 뭐지?”

-네가 왜 멀쩡하다 생각하지?

맞은편에는 그와 똑같이 생긴 남자가 있었다. 달빛을 그대로 담은 듯 은색으로 빛나는 머리카락만 다를 뿐이었다.


‘이 목소리, 들은 적 있다.’

무리하게 마법을 사용하여 이동하던 그때, 혼돈의 핏줄 타령을 했던 것과 동일한 목소리였다.


“그때와 같은 이상한 소리를 할 셈인가?”

-너는 내가 필요해질 거다. 죽어가는 목숨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은발의 요한이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요한은 뚫어져라 미지의 상대가 사라진 자리를 노려봤다.


“요한?”

밖에서 에스텔이 그를 부르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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