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이 여자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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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화 이 여자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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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화 이 여자 남편
2023.07.25.
그때는 막 요한이 자리를 비웠을 때였다.
펜테 마을은 워낙 외진 곳이다 보니 가끔씩 흉흉한 짐승이 튀어나오곤 했다. 특히 겨울이 끝나 봄이 오는 지금 시기에는 더욱 그렇다고 한다.
그런 탓에 마을 청년들은 마을의 안전을 위해 자경대를 꾸렸다.
그리고 누가 봐도 무력이 강해 보이는 요한이 자경대에 참여하는 것은 아주 당연했다.
요한은 마을에 적응하기 위한 값이라 생각했는지 아무런 불평 없이 순찰에 나섰다.
“부인이 놀랄 정도로 빨리 갔다가 올게.”
솔직히 엄청 위협적인 마물이라면 모를까, 마을에서 나타나는 동물 정도면 별로 걱정도 되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해결하고 오면 좋겠다.’
온종일 요한과 함께 지내다 보니 없을 때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이제 요한 없이 잘 지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이거 봐.’
막 점심을 먹으려고 하니, 요한이 미리 차려놓은 음식이 보였다.
시골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정성껏 요리한 점심은, 요리에 자부심 있는 에나도 놀라게 할 정도였다.
‘진짜 많은 걸 해봤던 모양이네.’
리베르탄 저택에서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나와는 완전 반대되는 생활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보다는 요한이 더 고생한 것 같은데.’
요한은 먹고 살기 위해 요리를 배워야 했다는 이야기를 해주면서도 별로 힘들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다음엔 나도 해줘야지.’
물론 요한의 솜씨를 넘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점심을 먹은 뒤 요한이 구해준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이것도 친해진 마을 사람에게 받은 거라고 한다.
‘참, 에나에게 그릇 돌려주러 가야 하는데.’
마침 몸이 찌뿌둥하던 차였기에 적당히 산책할 겸 에나의 집으로 그릇을 들고 놀러 갔다. 최근 구름나무 수확이 너무 잘 돼서 집에서 같이 노닥거리고는 했다.
“안녕하십니까, 에스텔 양.”
에나의 집에는 처음 보는 기사 두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영주님께서 에스텔 양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에나의 집에서……?”
“에스텔 양의 집에 갈 때마다 에스텔 양이 우연히 자리를 계속 비우고 계시더군요. 그래서 친구분과 함께 초대하면 어떨까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누가 봐도 협박이다.
“그런데 에나는 어디에 있죠?”
“에나 양은 영주성에서 에스텔 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에스텔 양보다 먼저 초대를 받았거든요.”
나는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며 환하게 웃었다.
“영주님께서 저를 계속 부르셨다니 너무 영광이네요. 에나가 기다리고 있다니 저도 안심하고 갈 수 있겠어요.”
“영주성으로 바로 안내해 드리지요.”
기사들은 기다렸다는 듯 나를 마차까지 에스코트했다.
“에스텔 양이 영주님의 초대에 기쁜 마음으로 응해주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저희 영주님께선 좋은 분이시지만, 호의를 거절당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으신 분이니까요.”
거절했다면 강제로라도 끌고 갔을 것이란 말을 참 예쁘게도 돌려서 말하고 있다.
‘얌전히 따라가 주는 게 좋겠어.’
에나가 영주의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이다. 괜히 반항하거나 도망쳤다가, 마을 사람 전체가 피해를 보거나 에나가 다칠 수 있다. 심지어 나는 홑몸도 아니다.
‘반격할 거라면 가장 효과적으로 해야 해.’
기사가 감시로 붙은 채, 나를 태운 마차가 영주성으로 출발했다. 기사가 나를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설명했다.
“영주님께서 에스텔 양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해두셨습니다. 가서 실망할 일은 없을 겁니다.”
“와, 정말요?”
나는 생긋 웃으며 예쁘게 박수 쳤다.
“영주성도 제국식으로 아주 근사하게 꾸미셨던데, 어떤 걸 준비해 두셨을지 너무 기대되네요.”
“예. 아주 깜짝 놀랄 선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물끄러미 나를 보던 기사가 감탄하듯 말했다.
“에스텔 양, 혹시 귀족가의 영애분이셨습니까?”
“네?”
“아, 실례되는 질문이었다면 죄송합니다. 방금 에스코트를 받는 태도부터 말솜씨며, 분위기까지 아주 아름다우셔서 말입니다.”
리베르탄에서 받았던 레이디 교육이 아주 빛을 발하는구나. 나는 사연 있는 척 슬프게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아…… 그리운 추억이 있긴 하지요.”
이건 예스텔라에게 배운 화법이다.
‘예스텔라가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상상하게 했지?’
그러자 제멋대로 내 과거를 짐작한 기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기품만 봐도 보통 분이 아니실 줄 알았습니다. 영주님께서 괜히 부르시는 게 아니시군요.”
“영주님께서 저를 너무 좋게 봐주시는 거예요.”
“아, 그렇지요. 제가 결례되는 질문을 했군요. 혼자도 아닌 몸으로 외지까지 오셨다면 모름지기 어려운 사정이 있으셨을 터인데…….”
방금 전까지 강압적이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이래서 예스텔라가 이런 방법을 아주 자주 사용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역시 참 찝찝해.’
기사가 내 정체에 대해 관심이 쏠려 이것저것 질문하는 사이, 나는 집 안에 몰래 심어둔 조그마한 나무를 불렀다.
-나무님, 부탁 하나 좀 할게요. 제가 준비해 둔 쪽지 좀 책상 위에 올려놔 주실 수 있으세요?
혹시 모를 위협을 대비해 화분에 쪽지 몇 개를 미리 묻어두었다.
‘요한이 빨리 집으로 돌아와야 할 텐데.’
마차는 막히는 것도 없이 빠르게 영주성에 도착했다.
***
영주는 만찬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스텔, 오랜만이군.”
“오랜만에 뵈어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기사들의 반응을 보고 짐작하고 있었지만, 영주는 내가 의도적으로 그를 피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던 모양이다. 호의적으로 나오는 내 태도에 다소 놀란 듯했다.
“나야 늘 똑같지. 에스텔이야말로 아주 바빴던 것 같은데?”
“구름나무 꽃을 수확할 시기가 되었잖아요.”
“이런, 한창 바쁠 때 내가 귀찮게 했던 모양이군.”
영주의 너스레에 나는 싱긋 웃었다.
‘알면 보내줘, 이 새끼야.’
영주의 잡설에 화기애애하게 대응해 주며 에나의 행방을 물었다.
“그러고 보니 에나가 기다리고 있다고 했는데. 에나는 어디에 있나요?”
“아, 그 친구. 그 친구는 영주성을 구경하고 피곤했는지 별채에서 잠들어 있네. 영주성이 많이 신기했던 모양이야.”
산골 소녀 에나는 체력이 아주 강하다. 누가 봐도 거짓말이지만, 일부러 그 얘기를 꺼내 영주를 자극하진 않았다.
“그러면 식사를 마치고 에나를 봐도 좋을까요?”
“물론이지. 그 친구 덕분에 에스텔과 이리 오붓하게 식사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얼마든지.”
거대한 영주성 식탁에 화려한 요리가 놓였다. 영주는 기가 살아 자랑했다.
“이 요리로 말할 것 같으면-”
블란쳇 공작저에서 이것보다 더 화려한 요리를 경험해 본 나는 진심으로 놀라기 어려웠다.
‘설마 이게 영주가 준비한 놀라운 선물이란 건가?’
사람 수준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아니면 요한의 수준이 너무 높은 건가?’
요한은 이벤트를 자주 열면서도 매번 놀라게 해주었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 요리는 제국식으로 익힌 요리네요.”
“그렇지, 에스텔은 바로 알아봐 줄 줄 알았어. 이 오지의 여자들과는 수준이 다르군.”
윽.
그래도 영주가 신난 틈을 타 영주성 나무들과도 대화했다.
-반갑다, 우리 저번에도 인사했지?
-네, 저번에 잠깐 머물렀을 때 인사했는데 알아봐 주시네요.
-세상에 하나뿐인 우리 요정님이신데 당연하지. 거기 영주가 많이 힘들게 하니?
-조금요? 그래서 나중에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제가 나갈 때 도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나무들이야 언제든 내 편을 들어주지만, 미리 얘기를 해두면 요정의 힘을 훨씬 아낄 수 있다.
-당연하지. 우리가 구름나무들만은 못해도 나름 이 영주성 토박이 나무야.
-그래, 우리도 저놈이 참 별로였다.
혹시 몰라 별채에 있다는 에나의 안전을 확인하고 있던 차였다.
“에스텔.”
영주가 탁, 식기를 내려놓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원래는 여유를 가지고 접근하려 했지만, 자꾸 안 보이게 돼서 조급해지네.”
불길한 마음에 어색하게 웃었다. 영주는 홀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솔직히 고민이 많았어. 아시다시피 나는 이 영지의 영주잖아. 내 아내 자리는 아무나 가져서는 안 되는 자리고.”
“…….”
“하지만 에스텔 네 생각이 나서 안 되겠어. 정식으로 결혼은 나중에 제국에 편입된 뒤 하더라도, 지금부터 내 아내가 되어줄 수 있겠어?”
불길한 예감이 현실이 되었다.
‘미친놈.’
대놓고 싫은 티를 낼 수는 없어 조심스럽게 답했다.
“죄송해요, 영주님.”
“나도 알아. 임신한 아이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서 그런 거지? 나라고 그걸 고민하지 않은 건 아니야.”
영주가 희대의 로맨티시스트처럼 절절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내가 다 받아줄게. 아이는 적당히 사생아로 취급하면 되니까, 이 영주성에서 나와 함께 미래를 나누자.”
나는 무척 놀랐다.
‘저걸 진심으로 말한다고?’
리안드로부터 비정상적인 인간들에게 많이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만날 때마다 놀랄 구석이 또 남아 있었다.
‘아니다, 그래도 예스텔라나 리안드로까지는 아니지.’
자아도취하는 점만 빼면 그래도 익숙하게 볼 수 있는 인간군상이다.
“죄송합니다, 영주님. 저는 영주님의 청혼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어째서지?”
영주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설마 돌아왔다던 그 남편 때문인가?”
알고도 그런 소리를 했다고?
“표정 보니 내가 모를 줄 알았던 모양이군. 그렇게 요란한 소식을 내가 왜 몰랐겠나. 다 들었지.”
영주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그 남편한테 미련이 있나?”
너무 기상천외한 태도라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흔한 사람인 거 취소. 예스텔라와 리안드로 아래 정도는 되는 미친놈인 거 같아.’
어쩌다 또 이런 미친놈을 만나게 되었는지 신기하기까지 했다.
“대답해 봐, 그 남편을 아직도 사랑해?”
“네, 사랑해요.”
영주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 남편은 영주인 나에 비해 별 볼 일 없는 놈인데도?”
“네, 그래도요.”
아마 상상도 못 하겠지만, 요한이 영주에 비해 수백 배는 잘났다.
“그러니 영주님, 오늘 이야기는 듣지 못한 거로 할게요. 한순간의 흥미에 너무 휘둘리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금세 식으실 거예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영주의 분위기를 살폈다.
그 순간 돌연 영주의 눈이 번뜩였다.
“하, 이거 더 탐이 나는데.”
“영주님……?”
“이 시골에서, 영주라는 권력과 재산에도 휘둘리지 않는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전 그런 사람이 아닌데요.”
“아니긴. 네가 날 거절하니까 더 애가 타는걸.”
영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친놈의 사고는 정말 따라갈 수 없네.’
영주는 흥분한 눈빛으로 나를 쭉 훑어보며 점점 내게 가까워졌다.
“그 남편이 없어지면 내게 올 텐가?”
“……네?”
“그놈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놈인지 알게 되면 네 마음도 바뀌겠지. 그러니-”
그 순간 만찬장 앞을 지키던 기사가 급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 영주님!”
한창 몰입을 방해받은 영주가 날카로운 눈빛을 던졌다.
“내가 손님과 단둘이 식사하고 있을 땐, 방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중요한 손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중요한 손님?”
장갑을 낀 손이 문 앞을 막아선 기사를 아무렇지 않게 쓱 밀쳤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말하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품위로 둘러싸인 조각 미남. 적당한 옷을 입었음에도 최고급 옷을 걸친 것처럼 보이게 하는 남자.
자신만만했던 영주는 요한을 마주 본 것만으로도 잠시 움찔했다.
“누구신지……?”
“요한 블란쳇.”
블란쳇 공작가의 이름은 아주 대단했다.
처음에는 존재를 의심하던 영주도 기사가 조용히 ‘공작저와 연락해 확인했습니다’라고 말하자, 사시나무 떨듯 떨기 시작했다.
“브, 블란쳇 공작님께서 이 오지에는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영광스럽게도 제국령 편입을 위해 저희 영지를 둘러보러 오신……?”
“네가 먼저 부르지 않았나?”
요한이 오만하게 턱 끝을 살짝 들었다.
“먼저 초대해 놓고 모르는 걸 보아하니, 기본도 안 되어 있겠군.”
“예? 제가 공작님을 부르셨단 말입니까? 감히 그런 기억이 없어 그런데 어떤 착오가 있으신 게 아닐-”
영주의 공손한 대답을 무시한 요한이 내게 우아하게 다가왔다.
“에스텔. 영주성 식사는 괜찮았어?”
“아, 요한.”
“갑자기 사라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우리 둘을 지켜보던 영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 그, 에스텔 양과는 어떤 관계이신지……?”
“이 여자 남편.”
“예?!”
요한은 영주가 놀라거나 말거나 내 얼굴을 살폈다.
“왜 여기까지 번거롭게 왔어. 내 이름을 대지.”
“아, 요한 이름을 말해도 되나 싶어서. 증명할 것도 없고.”
“그래도 앞으로는 해. 그렇게 해둘 테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요한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가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요리를 쭉 살폈다.
“그나저나 손님 대접하는 솜씨가 아주 형편없었던 모양이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솔직히 좀 별로였어.”
“이거 큰일이네. 부인이 어떤 사람인 줄 알고 홀대해?”
“그, 그렇지 않습니다! 블란쳇 공작님의 아내분께서 오실 줄 알았다면…….”
“이봐.”
요한은 서늘하게 영주를 힐끔 봤다.
“내가 네게 질문했나?”
“저는 그저 오해를 풀어드리고자…….”
“방금 내가 너한테 질문했나?”
영주의 침묵이 길어졌다. 영주가 자존심을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
“……질문하지 않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