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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화 나한테 어려운 건 (171/182)


171화 나한테 어려운 건
2023.07.21.



 
나는 평정심을 바로 되찾지 못하는 요한을 보며 피식 웃었다.


“농담이야.”

“응?”

“여기 손대 봐.”

내 배에 요한의 손을 가져다 대었다. 내가 원한 행동인데도 타인의 손이라서일까. 남자치고도 큰 요한의 손이 내 배에 닿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

요한은 돌처럼 굳어 멍하니 배를 바라봤다. 침묵이 어색해 요한에게 물었다.


“느껴져?”

“…….”

“한번 귀도 대볼래?”

요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 배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연신 침을 삼키는 그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귀여워.’

언제나 능수능란한 요한만 봐서일까. 그가 당황하거나 긴장한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아 무척 새롭고 귀여웠다.


“어때?”

두 눈을 꼭 감고 배에 집중하던 요한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심장 소리가 들려.”

“신기하지?”

“그래. 이게 우리 아기의 심장 소리…….”

그가 실감 나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심장 소리가 너무 작아.”

“그래도 의사가 아기의 몸에는 아무 이상도 없대. 요한을 닮아서 아주 튼튼한가 봐.”

“대견하네. 버티기 힘들었을 텐데.”

요한의 큰 손이 섬세하게 내 배를 쓸었다. 다정하고 나긋한 그 손길이 기분 좋았다.


‘에나나 다른 사람들도 몇 번 만져준 적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쓰다듬어줬던 것과는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요한이 무언가를 하는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포근한 물에 감싸인 듯한 안정감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는 나른한 숨을 내뱉으며 내 배에 볼을 비볐다.


“고마워.”

요한이 두서없이 말했다.


“뭐가?”

“무엇이든. 전부 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보는 것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내가 이럴 수 있는 순간을 줘서 고마워.”

“에이, 아니야.”

“……아마 넌 짐작도 못 할 거야. 내가 이런 순간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지.”

감동에 메인 듯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요한이 있어서 가능한 거야.”

“난 한 것도 없는 아빠인걸.”

그가 자조하듯 웃었다.


“가장 있어줘야 하는 순간에 함께 해주지 못했잖아.”

“…….”

“무엇보다 이 아이를 지켜주지 못했지. 나만 아니었다면 아이가 위협받는 일도 없었을 텐데. 내가, 대가에 대해 조금만 더 깊이 생각했어도.”

“…….”

“내가 이렇게 호사스러운 걸 누려도 되는지 모르겠어.”

나는 요한의 두 뺨을 손으로 쥐고 마주 볼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그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맞아, 요한은 나한테 잘못했어.”

아직 나는 기억을 찾지 못했다.

그가 했던 거짓말이, 아기를 잃게 한 절망이 내게 얼마나 큰 상처를 줬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기억을 되찾으면 쉬이 부정할 마음을 느끼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지금 이 순간의 내가 나다.


“요한이 얼마나 잘못했는지 알겠어?”

“……누구보다 진심으로.”

상처 입은 붉은 눈동자가 슬픔으로 일렁였다.


“당장 눈앞에서 내 모든 것을 잃었어. 아기부터, 너까지. 사소한 것을 지키고 싶다고 외면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어.”

눈빛만 봐도 그가 얼마나 자책하고 절망했는지가 절절히 느껴졌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모를 수 있겠어. 그날 내가 어떤 절망을 겪었는데.”

“아니, 요한은 모르는 거 같아.”

“내가, 잘못 아는 게 있어?”

“응.”

나는 긴장한 요한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내가 요한과의 아기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에 상처를 받았던 건 맞을 거야. 하지만 그 무엇보다 실망한 건…….”

“…….”

“아마 끝까지 내게 감추려 했던 요한의 거짓말 때문일 거야.”

“……그건.”

“나도 알아. 그것까지 반성하고 있는 거. 그래서 기억을 잃은 나한테 다 솔직하게 털어놨잖아.”

멍해 보이는 요한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니 이제 됐어. 더 미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럴 순 없어.”

“내가 괜찮다니까. 아니면 앞으로 더 잘해주던가.”

내 삐죽거리는 소리에 요한은 눈물을 삼키고 겨우 심호흡했다.


“용서해 줘서 고마워. 사랑해.”

어쩐지 다시 만난 요한은 너무 울보가 되어 있었다. 이건 그만큼 나한테 감정을 숨길 수 없어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나저나 가질 수 없다던 아기는 어떻게 지킬 수 있던 거지?’

그 부분에 대한 기억이 없으니 우리 아기가 건강하다고 해도 불안감이 솟았다. 하지만 나보다 더 무너진 듯한 요한을 위해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자, 어서 우리 아기한테도 미안하다고 사과해.”

요한은 어색해하면서도 내 말에 따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아가. 아빠가 너무 많이 늦었다.”

“더 진심으로!”

“……앞으로는 우리 아기가 더 힘들지 않게,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너를 꼭 지킬게.”

요한이 내 배에 대고 다시 한번 아기한테 인사했다. 조심스레 아기의 심장 소리에 귀 기울이던 그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방금, 들었어?”

“응?”

“아기가 내 목소리에 대답하는 것처럼 심장이 뛰었어.”

붉은 눈동자에 물씬 감동이 피어올랐다. 평소 냉정한 흑막의 표정 따위는 어디 버려뒀는지 모르겠다.


“착각이겠지.”

“아니야. 진짜 내 말에 대답하듯이 뛰었다니까. 다시 한번 해볼게.”

요한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다시 한번 아기에게 말을 걸었다.


“아가, 아빠 말이 맞지?”

그리고 정말, 요한의 말에 반응하듯 아기가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이렇게까지 반응하진 않았는데.


“……진짜네. 처음인데도 바로 요한 목소리를 알아들었나 봐.”

“나를 닮아서 벌써 똑똑하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럴 시기가 아닌데.”

“아니야. 평범한 아기가 처음 만난 아빠 말에 바로 대답할 수 있겠어?”

요한이 아기에 대해 얘기하는 걸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계속 웃음이 새어 나왔다. 요한도 그런 나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실없는 미소를 지었다.


‘진짜 너무 꿈을 꾸는 것 같다.’

새삼 그런 생각을 하며, 요한에게 핀잔을 주었다.


“아기 귀찮게 계속 물어보지 말고 물이나 떠와. 아침부터 얘기했더니 목이 아프네.”

요한과의 하루는 순조롭게 시작했다. 그리고 내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요한은 마을에 아주 완벽하게 적응했다.

***

요한의 능력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에스텔, 남편이 에스텔을 찾아왔다면서. 남편하고 재결합한 거 축하해.”

“아, 들으셨어요?”

“그래. 아주 잘생기고 근사한 청년이던데. 왜 에스텔이 결혼했는지 알겠어.”

사소하게는 요한을 칭찬하는 사람부터.


“오늘 아침에 우리 집 지붕을 수리해 줬다니까.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슬쩍 용서해 줘. 저렇게 성실하게 잘 보이려고 하잖아.”

“저희 이미 다 잘 풀었어요.”

“큼큼, 그러면 다행이고. 어떤 쓰레기 같은 놈이길래 임신한 아내를 혼자 뒀나 했더니 또 직접 만나보니 무슨 아픈 사정이 있었을까 싶더라고. 참 착하고 좋은 청년인 것 같던데.”

“그래, 요즘 그런 청년이 어딨어. 외모부터 능력까지 빠지는 구석이 없더구만. 에스텔이 남편을 아주 잘 만났어.”

“능력은 또 언제 봤대요?”

“우리 집에서 골머리 썩던 문제를 단번에 다 해결해 주고 갔어. 그만하면 처자식 건사하기엔 차고도 넘치지.”

온갖 어르신에게 최고의 신랑감 소리를 들었다.


‘진짜 신기하네.’

며칠도 되지 않았는데 요한에 대한 여론이 완전히 뒤집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처자식 버린 놈이랑 다시 만나는 거 아니라며, 마을 청년 중 좋은 남자를 골라보라던 사람이 태반이었는데.

요한은 마을 산파한테 배운 임산부에게 좋은 마사지를 내게 해주며 다정하게 물었다.


“에스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요한이 도대체 이 마을에 무슨 짓을 했을까 하는 생각?”

내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뭘 어떻게 했길래 마을 사람들이 다 요한을 칭찬하는 거야?”

“그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지.”

요한이 씩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워낙 잘난 부분이 많잖아.”

“그게 그렇게 간단하게 되는 일이 아닐 텐데?”

내가 임산부라서 그렇지, 보통 이런 외딴 마을은 외부인에게 매우 배타적이다. 내 경우도 이례적인 일이라고 했을 정도였다.


“나한테 어려운 건 너밖에 없어.”

“…….”

“나머지는 다 쉽지. 별거 안 해도 다 날 좋아하던데?”

“어이구, 아주 잘나셨어요.”

“그럼, 남편 자리 잘 유지하려면 더 잘해야지.”

요한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주물러주던 내 발목에 입을 쪽 맞췄다.


“몇 마디 더 하자면, 마을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는 게 처음이 아니라 그래. 처음이 어렵지 다음부턴 어렵지 않거든. 다들 비슷한 사람들이라.”

“언제 이런 적이 있어?”

“리베르탄의 눈을 피하느라 이런 소규모 마을에 적응해야 했던 적이 제법 많거든.”

요한이 아무렇지 않게 어린 시절에 대해 얘기했다.


‘복수를 준비하던 시절 얘기구나.’

그가 먼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처음엔 나도 요령이 없어서 헤맸지. 거지새끼라며 돌팔매를 당하기도 했고, 신분이 확실하지 않다며 노예로 팔려 감금당한 적도 있어.”

“……요한.”

“뭐, 다 지난 일이야. 그때 그렇게 고생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부인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 노력하지도 못했을 테니까.”

요한이 내게 가볍게 눈을 찡긋했다.


“정 안타까우면 키스해 주든가.”

“그 소리 들으니까 안타까웠던 마음이 싹 사라지는데?”

“더 불쌍하게 생각해 줘. 저마다 고생한다지만, 그땐 정말 많이 힘들었거든.”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요한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충분히 알 것 같았다. 나는 추억에 잠긴 요한의 입술에 입을 쪽 맞췄다.


“자, 선물.”

얌전히 내 입술을 받은 요한이 내 어깨를 붙잡고 다시 깊숙이 입을 맞쳐왔다. 그의 온기가 입안으로 들어와 마구 휘저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오랜만에 느끼는 열감에 솜털까지 바짝 긴장했다. 뜨거운 숨결은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멋대로 헤집었다.

발끝이 곱아들었다.

일순 숨까지 전부 요한에게 빼앗겨 버리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힘을 주어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하지만 요한은 제가 만족할 때까지 멈추지 않고 내 입술을 탐하고서야 떨어졌다. 내가 헐떡거리며 그를 삐죽 노려보자, 그가 부은 내 입술을 엄지로 훑으며 웃었다.


 


“이 정도는 해야 선물이지.”

“다음엔 아무것도 없어.”

“그러면 선물을 줄 수밖에 없게 해야겠네.”

요한이 내 볼에 입술을 가볍게 맞추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요한의 수작에 놀아난 듯해, 괜히 손해 본 것 같기도 했다.


‘저번에 말 한마디만 해도 울먹거리던 요한은 어디 갔지?’

벌써 예전의 요한으로 돌아와 버렸다.


‘이거 이대로 둬도 괜찮은 거 맞겠지?’

 

***

이제 마을 사람들이 나보다 요한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뭐만 하면 요한을 찾아서 요한이 가만히 있을 틈이 없다.


‘그 와중에 나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신기하지만.’

그래도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놈이 그렇게 대단한 건지는 모르겠다. 마을 놈들 너무 변절이 빠른 거 아니냐?

“변절이라뇨.”

-변절이지! 그새 그놈한테 다 넘어갔지 않느냐! 그렇게 안 봤는데 은근히 여우처럼 약은 놈이었어.

-그래. 우리가 인간 본 게 한두 번인 줄 아느냐, 딱 보면 어떤 놈인지 알지.

여전히 요한에 대한 평가가 박한 건 구름나무들밖에 없었다.


‘가만 보면 나무들은 꾸준히 요한을 별로 안 좋아했던 것 같기도 하고?’

이런 게 상성이 안 맞는다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좋게 봐주세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잖아요.”

-에잉, 그래서 더 그놈이 마음에 안 드는 거다.

“네?”

-쯔쯔, 왜 우리가 그렇게 그놈을 싫어하겠어.

-그래. 고생이란 고생은 다 시켜놓고서 너처럼 예쁜 애를 홀랑 차지하니까 짜증 나서 그렇지.

-너도 그렇다. 사과 좀 했다고 바로 용서해 버리는 게 어디 있느냐? 좋다고 얼굴 편 모습하고는…….

“제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요!”

-아니긴. 그놈만 보면 좋아서 아주 활짝 웃더만.

내가 그렇게 티가 났나?


‘에나도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그렇게 유난스럽게 요한을 좋아한다고 생각은 안 했는데, 주변 반응을 보면 나도 요한만큼이나 극성일지도 모르겠다.

나무들 근처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구, 영주놈이 이 숲 근방에서 널 찾는 것 같구나. 계속 두리번거리는데?

안 그래도 나는 영주가 계속 관심을 보이는 게 불편해서 나무들에게 부탁해 여러 차례 피하던 차였다.


“그러면 여기 더 있으면 안 되겠네요.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그래. 간간이 산책 또 나오거라.

‘그래도 계속 피하다 보면 관심도 식겠지.’

전이랑 달리 나한테는 요한이라는 방패막이도 있으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영주는 내가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훨씬 쓰레기였다.

에나를 가지고 협박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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