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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화 어색한 동거 (170/182)


170화 어색한 동거
2023.07.18.



 
나도 모르게 반문했다.


“……복수?”

“그래, 복수.”

요한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거기서부터가 문제였어. 리베르탄에 입양되기만 했던 너를 복수 대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었는데.”

“…….”

“왜 리베르탄에서 너를 사랑한다는 말을 그리 철석같이 믿었을까, 친딸도 아닌 입양아를 사랑해 줄 만큼 좋은 사람들이 아닌데.”

“…….”

“내가 치졸하고 끔찍한 사람이었던 거지.”

요한은 담담하게 제 과거를 고백했다. 거기에는 어떤 자기변명도, 연민도 없었다.


‘오히려…….’

자신을 원망하라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야.”

내 입에서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나조차도 인지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그게 다가 아니잖아. 요한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그래도 내가 결정 내린 건 변함없어.”

“어차피 다들 내가 리베르탄에서 사랑받는다고 생각했는걸. 하다못해 내가 학대받는 걸 봤던 리베르탄 공작가의 사람들조차도.”

내가 요한과 이런 대화를 했던가?


‘요한이 내가 학대받았다는 사실을 언제 알고 있었지?’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켰다. 처음 닥치는 상황인데도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외부에 있었을 요한이 어떻게 내가 학대받았다고 생각했겠어.”

“그래도 나는 그래야 했어.”

요한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야 했어. 너한테까지 복수하겠다고 결정한 건 나야.”

“결혼한다는 방식으로?”

“애초에 결혼할 마음도 없었어. 너도 알잖아, 그때 리안드로나 그 황태자가 너한테 했던 말.”

언제였는지 모를 과거가 끌려왔다.


‘블란쳇 공작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가지고 놀다가 버릴 생각입니다. 두 사람은 부부도 아니니까요!’

 
당당하게 둘에게서 고개를 들고 그렇지 않다고 하던 요한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만할 정도로 당당하던 요한이었는데.


“그들의 말이 맞아. 적당히 꾸며내 넘어갔지만, 완벽하게 널 조롱하기 위해 혼인신고할 생각도 없었어.”

“……그렇지만, 결국 혼인신고했잖아.”

“그놈들에게 지적받고서야 했지. 그런 일이 없었다면, 내가 혼인신고를 했을까?”

요한은 스스로가 우습다는 듯 자조했다.


“장담하건대, 내가 그럴 리 없어. 혼인신고까지 해버리면 너한테 복수하는 게 어려워지니까.”

“…….”

“겨우 믿고 있던 부부라는 관계조차 거짓이었다는 걸로 조롱하는 게 더 확실한 복수가 되었을 테니까.”

그의 주먹에 힘이 꽉 들어가는 걸 볼수록 마음이 울렁거렸다.


‘이상하다.’

요한의 입으로 직접 그의 복수에 대해 듣게 되었는데도 정작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원작으로 이미 알고 있어서인가?’

하지만 그렇다 치기엔, 나는 원작에서 있었던 일이 실제로 벌어졌어도 상처받고는 했다. 특히 난 감정적인 편이라 머리랑 다르게 마음으로 원망스러울 게 뻔했다.

무심코 붉은 눈동자와 다시 마주쳤다.

슬픔을 억누른 입가, 태연해 보이지만 무너질 것 같은 눈가, 한없어 고독해 보이는 눈빛.


“언제든 너한테 솔직하게 말할 기회가 있었어. 하지만 말하지 않았어. 비겁하게.”

“나도 요한한테 다 말하지 않았는걸.”

요한의 고백은 요한 스스로를 더 상처입히고 있었다.


“속이고 있던 건 피차 마찬가지잖아. 어차피 난 요한이 나한테 복수하려고 했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다, 요정인 걸 말하지 않고 있었어.”

그래서 나는 그게 속상했다.


“어떻게 보면 우린 똑같은 거지.”

“어떻게 너랑 내가 같아?”

반대로 요한은 내 말에 더 속이 상한 듯 목울대를 꿈틀거렸다. 그가 입술을 짓씹으며 사납게 말했다.


“너는 살아남기 위해서 거짓말했을 뿐이야. 애초에 나처럼 거짓말한 적도 없지. 서로의 입장이 다른데 어떻게 같은 게 되겠어.”

“……그치만.”

“문제는 나야. 나는 너한테 솔직하게 털어놓는다고 해도 크게 문제 될 게 없었는데, 복수에 실패할까 두려워 널 계속 속였어.”

가차 없는 요한의 말에 나도 모르게 억하심정이 삐죽 새어 나왔다.


“아니. 요한도 어쩔 수 없었어.”

“그건 변명이-”

“내 말 안 끝났어.”

눈가가 붉어지며 눈물이 조금씩 고였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꾹 참으며 말했다.


“요한이 솔직하게 말하지 않은 건, 나를 위해서이기도 해. 내가 몰랐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말하지 않은 거잖아.”

“그래도 넌 알고 있었잖아.”

“맞아. 하지만 그래도 난 요한의 거짓말 덕분에 행복해질 수 있었어.”

요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복수 때문이라도 해도 나를 행복하게 해준 사람은 요한밖에 없었어.”

“……에스텔.”

“거짓말이면 어때. 내가 행복했는데. 뭐, 내가 불안해서 뒤통수치고 도망치기도 했잖아?”

그렇게 막 말하려는데, 머릿속에 물음표가 막 생겼다.


‘그런데 어떻게 도망쳤더라?’

어쩌다 도망치게 되었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요한은 내 의문을 곧장 눈치챈 모양이었다.


“네 기억이 잘못되어서 그래. 넌 날 배신하고 도망친 적 없어.”

“그러면 어쩌다 내가…….”

“그게 바로 내 죄지. 내 편을 들어주는 건 고맙지만 난 그럴 만큼 좋은 사람이 아냐.”

“아무튼 그건 중요하지 않아. 내가 먼저 도망치지 않았다면, 그만큼 요한이 더 잘해준 거겠지 뭐.”

요한이 또 자책하자 나도 언성을 높였다.


“요한은 잘못한 거 없어.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훨씬 잘해줬어.”

“하지만 난-”

“왜 그렇게 자책해?”

나는 요한의 손을 덥석 잡았다. 오랜만에 맞닿은 요한의 체온. 기분 좋은 감각이 찌르르 어깨까지 올라왔다.


“왜 다른 사람과 달리 요한한테만 그렇게 엄격한 거야?”

“그래야지.”

“원래 요한이 그런 사람이니까?”

“……아니.”

요한은 떨리는 엄지로 눈물이 흐르는 내 눈가를 닦아주었다. 나는 그 손길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요한은 그 순간이 믿기지 않는다는 것처럼 감격스럽게 숨을 들이쉬며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너를 사랑하니까.”

“봐.”

나는 그를 보며 사르르 웃었다.


“이런데 어떻게 널 미워할 수 있겠어?”

그 순간 요한이 무너지듯이 툭 무릎을 꿇으며 눈물을 소나기처럼 흘렸다.


‘……이럴 마음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요한을 더 크게 울려버린 것 같다.

요한은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한 얼굴로 내가 다시 한번 사죄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너는 언제나 이렇게 나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는 용기 하나 내지 못해서…….”

“요한?”

“용서할 주제도 안 되는 거 알아. 그래도 다시 한번 내게 기회를-”

 

 

***

요한은 오열하고서야 진정했다.

그가 얼마나 사죄에 진심이었는지 내가 사죄를 받아주겠다고 할 때 부정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넌 내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모르잖아. 그런 네게 용서받을 순 없어.’

 
하여튼 정말 철두철미한 사람이다.


‘편한 선택지를 골라도 될 텐데.’

어떻게 보면 본인이라서 더 엄격하게 대하는 것 같기도 했다.


‘평생 이런 식으로 살면서 복수에 성공한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요한의 인생 자체가 애틋하게 느껴졌다. 요한은 내 무릎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들었다.

이제 보니 그동안 아예 자거나 쉬지 못해서 피로가 몰려온 듯했다.


‘고생 많았네.’

나는 요한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그나저나 어쩌다 내가 기억을 잊어버리게 된 걸까?’

요한의 얘기를 들었어도, 내 일이 아니라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상처받을 만한 일이기는 했지.’

방금 전 요한이랑 싸울 때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던 말만 생각해 봐도 그랬다.


‘원래 내 기억과 맞지 않은 말도 해버렸지.’

도대체 내 기억이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그 기억을 되찾아야 하나?’

하지만 굳이 잊어버린 기억을 되찾아야 하는지 고민되는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 요한도 내가 기억을 되찾는 것에 반대했다.


‘네가 기억을 잊었다면 이유가 있을 거야. 너한테 상처가 될 일을 떠올려 다시 한번 상처받을 필요가 있을까?’


‘요한은 내가 다 모르고 있어도 괜찮아?’


‘괜찮아. 내가 기억하니까.’

 
심지어 내가 걱정하던 부분까지도 다 약속해 주었다.


‘네가 원하지 않으면 계속 여기에 있어.’


‘진짜…… 그래도 돼?’


‘내가 강제로 끌고 가면 슬퍼할 거잖아. 그럴 수는 없지. 대신 내가 네 곁에 계속 남아 있게만 해줘.’


‘그건-’


‘내 아이잖아.’

 
요한은 말하지 않고도 이미 자신의 아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내가 많이 불편하더라도, 아이를 위해 최소한은 할 수 있게 해줘. 아이가 나올 때까지만이라도 널 지켜주고 싶어.’

결국 나는 요한이 이 집에 머무는 걸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잘 지낼 수 있겠지?’

그렇게 요한과의 어색한 동거가 시작됐다.

***

잠들었던 나는 오후가 되어서야 일어났다.


‘이렇게 늦게 일어나면 안 되는데.’

임신하면 잠자는 시간이 늘어난다지만, 그래도 한없이 늘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뭐, 몸이 무거워서 어쩔 수 없는 경우도 많았지만.


‘그런데 이 목소리는 뭐지?’

“어이구, 마음고생 많았겠네.”

“이젠 좀 잘해. 에스텔이 혼자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나?”

“예, 그럴 생각입니다.”

소리가 나는 곳을 돌아보니, 요한과 익숙한 사람들이 한창 대화하고 있었다. 에나와 에나 아버지, 그리고 옆집 아주머니 한나 씨였다.


“지금 여기서 뭐 하세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광경이 너무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그러자 요한이 나를 보고 생긋 웃었다.


“에스텔, 일어났어?”

“어…… 응. 그런데 지금 이게 무슨 일이야?”

“아아, 에나한테 얘기를 듣고 나를 보러 찾아오셨어.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했나 보더라고.”

요한은 자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나 아주머니가 유쾌하게 끼어들었다.


“그래. 그동안 말 꺼내기도 힘들어하던 남편이 찾아왔다니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그래도 보니까 사이는 썩 나쁘지 않은 것 같구먼.”

“그건 또 모르지. 남모를 속사정이 있던 거 아니겠어? 괜히 잘생긴 청년이라고 말하는 거 믿어주면 안 돼.”

“예, 맞습니다. 제가 에스텔을 실망시킨 만큼 더 열심히 해야지요.”

어른들을 상대하는 요한의 태도가 몹시 공손했다. 얼굴도 얼굴이지만, 저 바른 태도가 큰 점수를 딴 모양이다.


‘그런데 어색하지도 않나?’

본래 요한은 공작이다.

과거 직위를 되찾지 못했던 시절이면 모를까, 지금은 귀족들조차도 어려워하는 게 요한이다. 그런데 평민한테 존칭까지 써가며 예의를 차리고 있다니.


“큼큼, 그러면 슬슬 의원실로 돌아가겠네. 한나 자네도 일어나.”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그러게 제가 전부터 계속 일어나자고 했잖아요. 왜 굳이 에스텔 일어나는 것까지 보자고 해서는…….”

“어허, 세상일은 또 모르니까 그랬지. 혹시 우리가 많이 불편했나?”

“아닙니다. 에스텔을 그만큼 아껴주셨다는 게 실감 나서 무척 감사했습니다.”

요한은 예의 바르게 마을 사람들을 보내고 돌아왔다.

그때까지도 나는 어벙하게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요한이 능숙하게 사람들을 접대하느라 꺼내놓았던 찻잔과 다과상을 정리했다. 나는 그런 요한에게 물었다.


“요한. 괜찮아?”

“뭐가?”

“아니. 요한에게는 많이 불편했을 수 있으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곧장 파악한 그가 나를 보며 대답했다.


“어려울 거 없었어. 너도 알다시피 내가 평범하게 자란 귀족은 아니었잖아.”

“그래도 너무 무례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괜찮다니까. 이 정도는 다 감안하고 네 곁에 머무르려 한 거야. 내가 공작인 걸 들키면, 네가 전처럼 지낼 수 없잖아.”

어쩐지 나보다 요한이 더 익숙해 보였다.


“네가 괜찮다면 다행인데…….”

요한은 만족스러운 듯 입가에 미소를 띠며 손으로 내 이마를 짚었다.


“머리에 열이 떨어졌네.”

“열이 났었어?”

“잠깐? 어제 좀 많이 힘들어서 몸에 열이 났거든. 그래서 걱정 좀 했어.”

“에이, 걱정할 거 없는데.”

솔직히 자기 전만 해도 요한과 같이 보낼 하루가 무척 걱정됐다. 아무리 요한이 대단하다 해도 불편한 건 불편한 거였으니까.


‘하지만 전혀 안 불편하네.’

오히려 아주 오랫동안 시중을 받았던 것처럼 편안했다. 우리가 떨어졌던 시간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말한 요한이 조심스레 무릎을 꿇으며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에스텔, 한 가지 부탁해도 될까?”

“무슨 부탁인데?”

“그러니까…….”

요한이 머뭇거리며 내 손을 붙잡았다.


“아기한테 인사해도 돼?”

“어?”

“네가 불편하면 하지 않을게. 잠시, 귀를 대고 싶어. 실감이 잘 나지 않아서.”

나는 멍하니 요한을 바라봤다. 내가 잠든 동안 해도 되었는데, 신중하게 허락을 구하는 모습이 묘하게 귀엽기까지 했다.


“안 돼.”

요한이 간식 잃은 대형견처럼 크게 실망했다.

***

영주의 방.

영주는 에스텔을 떠올리며 히죽 웃었다. 이 깡촌에 그 정도 되는 미인이 있을 줄 몰랐다.


‘얼굴값을 하는 게 좀 흠이지만.’

그래도 영주의 권력으로 못할 건 없었다. 이 시골에서 영주의 권력이란, 황제만큼이나 절대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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