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두 번째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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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화 두 번째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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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화 두 번째 기회
2023.07.14.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요한을 치료하기까지 했지만, 그래도 정신을 차린 요한과 마주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던 모양이다.
두근-
오랜만에 마주한 요한은 내가 도망칠 때 봤던 모습 그대로 아주 근사했다.
멍청하게도 심장이 마구 뛰었다.
‘그때보다 야위었나?’
날렵한 얼굴이 더 서늘해져 훨씬 퇴폐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어쩌면 다쳤다 깨어나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나 때문일까?’
요한에게 내 존재가 그렇게 컸다고 멍청하게 착각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내 생각보다 더 많이 요한을 좋아했나 보다. 이렇게 앞뒤 안 가리고 그리움이 올라오는 걸 보면.
“에스텔.”
그의 목소리가 잠겼다.
“아이를, 가졌어?”
요한이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보면 모르겠어?”
나는 강제로 현실로 끌려온 사람처럼 느리게 대답했다.
“임신한 지 좀 되긴 했어.”
“아니, 내가 묻고 싶은 건.”
요한의 손이 이불보를 꽉 쥐었다. 누가 봐도 무척 혼란스러운 얼굴이다. 그가 저렇게 반응하는 이유는 안 봐도 뻔하다.
‘요한은 내가 임신한 걸 몰랐을 테니까.’
아무리 요한이라 해도 복수 대상이었던 내가 임신하는 것까지 예상하지는 못했을 거다.
나도 이 마을에 도착해서야 진료를 받고 알았으니 얼마나 충격적이겠어.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야.’
요한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지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요한을 상대해야 했다.
“알아, 많이 놀랐을 거라는 거.”
“…….”
“나도 나중에야 알았거든.”
요한의 눈이 커졌다. 최대한 긴장하지 않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자꾸만 움츠러드는 어깨는 어쩔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요한은 멍한 얼굴로 내 배를 보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이상하게 가슴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쿡 찔린 기분이다.
‘조금 상처네.’
요한이 아이의 존재를 반겨줄 거라고는 감히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는 일반적인 아빠의 반응을 기대하는 게 더 우스울 정도로 꼬인 사이니까.
하지만 난 또 바보같이 내심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뭘 기대했던 거야?’
나는 요한에게 복수 대상일 뿐이다. 리베르탄의 수혜를 받은 가증스러운 입양아.
‘요한이 내 흉터 하나 봤다고 달라졌을 리도 없는데.’
방심한 틈을 타 뒤통수치고 도망치기까지 했으니, 얼마나 더 밉겠는가.
다쳤다가 막 치료받고 정신을 차려서 이 정도 반응인 거지, 원래였다면 대화할 틈도 없이 끌려갔을 거다. 그리고 리벡르탄 공작가의 모두처럼 복수당했겠지.
아주 끔찍하게.
연극이 끝나면 인형은 필요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나는 차분한 얼굴로 웃었다. 요한의 눈에 내가 아무렇지 않아 보였으면 좋겠다. 그래야 내 약점이 티 나지 않을 테니.
“요한한테 아이를 빌미로 무언가를 요구할 생각 같은 건 없으니까. 아니다. 내가 반대로 요한에게 뭘 들어줘야 할 처지가 된 건가?”
“잠깐 에스텔.”
요한이 급히 내 얼굴을 바라봤다.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모르는 척하고 싶어?”
“아니. 너와 내가 하려는 이야기가 많이 다른 것 같아서.”
요한의 눈빛이 무척 복잡했다.
“……내가 너를 죽일 거라고?”
“나는 요한을 배신하고 도망쳤으니까.”
“…….”
“솔직히 요한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내 요구사항은 분명해.”
나도 모르게 배를 감싸며 요한을 똑바로 바라봤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아이만큼은 내가 꼭 지키고 싶었다.
“내 아이를 건드리려 한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내 결연한 눈빛에 요한도 제법 놀란 눈치였다. 그가 겨우 호흡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여유를 가장하며 말했다.
“어쨌거나 난 다친 요한의 목숨을 구해주기도 했어. 은인을 해치는 건 블란쳇 공작가의 규율에도 어긋나지 않아?”
하지만 혹시 모른다.
‘공정한 요한에게도 리베르탄은 예외일 수 있어.’
방 곳곳에 예비로 올려두었던 화분들에 내 요정의 힘을 퍼뜨렸다.
최근 구름나무들과 자주 접해서인지 요정의 힘을 다루는 게 훨씬 수월했다. 요한의 공격을 한두 번 정도는 막을 수 있을 거다.
“잠깐, 생각 다 했어.”
요한이 제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렸다. 메마른 표정이 두드러졌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네. 에스텔, 나는 너에게 더 이상 복수할 마음이-”
벌컥! 갑자기 문이 열렸다.
“에스텔! 미안한데 여기 놓고 간 게 있어서 잠깐만 들어갈-”
불쑥 들어온 에나는 문 근처에 있던 요한을 보고 깜짝 놀랐다.
“도, 도둑?”
에나가 막 소리를 지르려던 순간, 내가 먼저 에나를 불렀다.
“에나. 내가 아는 사람이야.”
“에스텔 네가 아는 사람이라고?”
“그래. 우연히 만나서 집에 초대하게 됐어.”
에나는 느리게 눈을 끔뻑이며 요한과 나를 번갈아 봤다. 에나도 요한 같은 미남은 처음 보는지 새삼 자세히 그의 외모를 보다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미치게 잘생겼, 아니, 이게 아니지.”
에나가 고개를 마구 저으며 사납게 요한을 노려보았다.
“그래서 에스텔. 저 남자는 누구인데? 진짜 아는 사람 맞아? 그런 것치고 너무 수상한데.”
“음, 그러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에스텔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요한이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가 에나에게 걸어가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에나 씨죠? 에스텔이 적응하는 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고요.”
에나는 요한의 미소에 홀린 듯 자기도 모르게 악수하고 번뜩 놀라 손을 뗐다.
“……에스텔이 제 얘기를 많이 했다고요? 그건 또 언제 들으셨어요?”
“방금 오시기 전까지 마을 얘기를 잠깐 들었거든요. 확실히 에나 씨가 아니었다면, 에스텔이 이 낯선 곳에서 이리 잘 지내기 어려웠을 겁니다. 에스텔을 아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 참, 아니에요. 에스텔이 얼마나 예쁘고 착한데요. 제가 아니었어도 에스텔을 잘 지냈을 거예요.”
경계심 가득했던 에나의 자세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저게 바로 흑막의 능력인가?’
어쩐지 이제야 요한의 사교성을 제대로 보게 된 기분이다.
“그래도 에나 씨가 잘해주셨단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지요. 외지인에게 감자 수프까지 끓여주며 신경 써주는 사람이 어디 흔합니까.”
훤칠한 미남이 작정하고 사교적인 태도를 취하자, 경계심 높기로 유명한 에나도 긴장을 풀었다.
“어머, 에스텔이 감자 수프 얘기까지 했어요? 진짜 반갑게 얘기했나 보네요.”
물론 거기엔 아주 자연스럽게 내가 해준 적 없는 얘기를 들은 양 구는 것도 한몫했다.
‘저것도 다 눈치로 하는 말이겠지?’
내가 부른 이름과 방금 전 들어온 모습, 집의 광경을 보며 유추해 낸 걸 거다.
‘다행히 에나를 해치거나 하려는 것 같지는 않아.’
나 때문에 선량한 사람이 피해를 보는 건 무척 싫었기에 솔직히 안심이 됐다. 요한과 웃으며 대화하던 에나가 나를 돌아봤다.
“에스텔, 그러고 보니 이분은 누구셔? 내가 그 이야기 듣는 걸 잊었네.”
“아, 제가 인사드리겠습니다. 제 이름은 요한입니다.”
요한이 헝클어진 앞머리를 가볍게 쓸어넘기며 부드럽게 웃었다.
“에스텔의 남편이고요.”
***
요한은 에나와 대화하고 있는 에스텔의 분위기를 살폈다.
“-남편이랑 이혼했다고 했잖아!”
“거기에는 사정이 좀 있어.”
“그건 그럴 수 있지만, 그래도 남편이 여기에 와도 되는 거였어? 도대체 무슨 사연이길래?”
에스텔은 에나와 대화하면서도 요한을 향한 경계를 풀지 않은 상태였다.
“말하자면 진짜 복잡한데.”
“그건 딱 봐도 알겠으니까 빨리 얘기해. 며칠이 걸려도 다 들어줄 테니까.”
요한은 한결 차분해진 머리로 생각을 가다듬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이제 확실해.’
에스텔은 블란쳇 공작가의 다른 사람들처럼 어느 정도 기억을 잃은 상태다. 그것도 막 도망쳤을 때의 기억은 아예 지워진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아이로 상처받았던 일도 완전히 잊어버린 건가?’
솔직히 에스텔이 임신했을 때 충격받지 않았냐고 하면 거짓말이다.
시간상 다른 남자의 아이일 리는 없으니, 에스텔은 분명 그때 임신한 그 아이를 여전히 품고 있는 게 틀림없다.
두 사람의 아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두 사람을 연결해 주던 행복의 시작.
‘에스텔이 아이를 잃지 않았어.’
조금만 더 찾는 게 늦었더라면, 그는 에스텔이 그의 아이를 낳은 것도 모른 채 절망에 빠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대로 행복할 수 있었는데.’
어떻게 에스텔이 여전히 아이를 가질 수 있었는지를 파악하는 건 둘째 문제다.
‘에스텔은 지금 나에 대한 다른 추억도 잊어버린 것 같다.’
마음이 쓰라리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장 크게 상처받았던 시절만큼은 다 잊어버린 게 나을지도 모른다.
‘미안해, 요한. 너무 늦었어.’
최소한 지금의 에스텔은, 잘하면 그와의 미래를 다시 꿈꿀 수 있으니까.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대강 대화를 마친 건지, 어느새 에스텔이 에나를 돌려보내고 있었다. 에나는 힐끔 요한을 훔쳐보며 에스텔에게 말했다.
“진짜 다음에는 꼭 다 들을 거야. 지금은 둘끼리 시간 보내야 하는 게 맞는 거 같아서 얌전히 떠나주는 건데, 다음엔 어림도 없어. 너도 나 고집 센 거 알지?”
“알지, 알아. 꼭 얘기해 줄게.”
“정 없이 인사도 하지 않고 갑자기 제국으로 떠나도 안 돼.”
그렇게 에나가 집 밖으로 사라졌다. 에스텔은 한숨을 돌리며 바짝 긴장한 얼굴로 요한을 돌아봤다.
“이상한 소리 안 하고 넘겨줘서 고마워.”
사랑스러운 에스텔이 그를 보고 있다. 이 상황을, 이렇게 대화 한 번만 할 수 있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그는 지금 이 순간조차도 그녀가 살아 있다는 게 제대로 실감 나지 않아 집요하게 그녀를 시야에 담아두었다.
‘네가 없는 매일이 끔찍했어.’
어떻게 한 사람이 그토록 큰 부분을 차지할 수 있을까.
‘아니. 난 네가 사라진 그날에 갇혀 있었지.’
요한조차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에스텔의 존재는 엄청났다. 평생 오지 못할 봄을 그리워하는 겨울처럼, 그녀가 사라진 순간 그의 인생 전체가 황폐해졌으니까.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녀의 죽음을 곱씹고, 미쳐 버릴 정도로 되새기다가 자기도 모르게 원망하다 사죄하는 것뿐이었다.
아무도 없는 빈자리를 향해서.
‘아마 너는 짐작도 못 할 거다.’
남들이 다 느낀다는 봄날의 햇살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화사한 봄꽃조차 모두 시들어 영원한 겨울에 갇혀버렸다.
그녀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한 그녀가 살아 있다는 희망을 놓지 못했다. 모두가 에스텔을 오해하고 있던 상황이라 더더욱 생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차마 죽을 수도 없는 광인이 되었다.
‘나는 네가 없으면 안 돼.’
그때의 절망과 공허함이 영혼에 아로새겨진 듯 생생했다.
‘다시 완벽하게 시작해야 해.’
요한은 제 안에서 시커먼 욕망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어차피 에스텔 역시 상처받은 기억을 힘들게 떠올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번엔 아예 에스텔이 상처받을 수 없도록 꾸며…….’
그 순간이었다.
‘한 번 실패한 거, 두 번째는 더 잘할 수 있을 거 아냐.’
고요했던 머릿속으로 에스텔의 애달픈 목소리가 떠올랐다.
‘요한은 끝까지 모르는 척하는구나.’
숨통이 가득 죄었다.
멀쩡히 그를 보고 있는 에스텔의 아름다운 얼굴 위로 슬프게 흐느껴 울던 그녀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런데 진짜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어? 끝까지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요한은 느리게 호흡했다. 목구멍에 울음이 배고,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
나는 요한을 보고 무척 당황했다.
“……요한?”
요한이 울고 있다! 그것도 아주 슬프고 애틋한 얼굴로.
“왜 갑자기…….”
“하, 한 번 한 실수를 반복하는 건 내가 진짜 싫어하는 짓인데. 내가 그 짓을 또 하고 있었네.”
요한은 냉소적으로 자조하며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에스텔, 네게 사죄할 게 있어.”
“응?”
“아마 너는 이해하지 못할지도 몰라. 현재 그때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그래, 아마 나한테 상처 입은 게 너무 커 스스로 기억을 지웠나 봐. 어쩌면 떠올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내가 미웠을 수도 있고. 그래서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지, 이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더 이상 거짓말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
“…….”
잠시간의 침묵 후, 요한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나는 네게 복수하기 위해 결혼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