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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화 가지 마 (168/182)


168화 가지 마
2023.07.11.



 
처음에는 헛것을 본 건가 싶었다.


‘비슷한 사람이 아닐까?’

하지만 이 대단한 얼굴이 다른 사람일 것 같지는 않았다.


‘거기다 이 모습은 뭐야?’

종종 요한과 재회하는 상상을 해보긴 했다. 어찌 되었든 요한은 아이의 아빠였으니까. 그리고 그 어떤 상상에서도 이런 재회는 떠올린 적 없었다.

그래서 무척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하지?’

운 나쁘게 만나버린 것인지, 나를 찾아오던 그가 상처를 입게 된 것인지. 그가 이곳에 있는 여러 가지 이유를 떠올려봤다.


‘여기는 제국령에도 포함되지 않은 오지야.’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우연히 요한이 여기에 올 일은 없어 보였다.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요한은 나를 잡으러 여기에 온 거다.’

어떻게 내가 여기에 있다는 정보를 얻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눈앞에 있는 요한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게 했다.


‘어떻게 하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으윽…….”

그 순간 요한이 고통에 잠긴 신음을 냈다.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일단 상처부터 살펴보자.’

피가 잔뜩 배어 있는 옷을 슬쩍 들어 올리자, 무언가에 베이고 짓눌린 것처럼 터진 상처가 보였다.


‘세상에.’

아직도 피를 흘리고 있어 급히 깨끗한 손수건으로 지혈했다. 그리고 다른 심각한 상처가 없는지 살폈다.

다행히 복부와 가슴 부근에 있는 상처 외에 큰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다 요한이 이렇게 다친 거지?’

요한은 원작의 흑막이다.

그것도 원작 남주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엄청난 흑마법사. 당장 심각하게 다친 요한을 두고도, 그가 상처 입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치료해서 어떻게 할 셈이지?’

지혈하는 자세 그대로 내 손이 굳었다.


‘요한이 나를 발견하면 안 되는데.’

지금 나는 요한을 배신하고 도망친 상태다. 그리고 요한은 배신자를 결코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다.


‘어쩌면 이건 기회일 수도 있어.’

별거 없는 내가, 흑막인 요한을 없애고 자유로워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요한의 긴 속눈썹이 잠긴 채 파르르 떨렸다. 식은땀이 흐르는 얼굴, 당장 보살핌을 받지 않으면 잘못될지 모르는 상태.


‘내가 다치게 한 것도 아니잖아.’

내가 손을 쓸 필요도 없다.

어차피 요한은 내가 그를 발견한 줄도 모른다. 미래의 나를 위해서, 다친 그를 버리고 가기만 하면 된다.


‘다친 요한을 안전한 곳까지 데려가는 것도 무리잖아.’

솔직히 덩치 큰 성인 남성을 안전하게 데려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요한을 위해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요한.”

의식을 잃은 그가 내 말에 반응하듯 신음했다.

아픈 사람을 두고 간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이 흑막도 내 입장 같은 걸 먼저 생각해 준 적 없었다.


‘우리 사이에 지켜야 할 의리가 어디 있어.’

그가 내 입장을 생각해 줬다면, 나를 복수 대상에 넣지 말았어야지. 내가 리베르탄에게 사랑받는다는 이유로 나한테 복수하려고 한 남자다.

그런 놈이, 뭐가 예쁘다고!


“미안해. 나는…….”

나는 다시 눈을 감은 채 꼼꼼하게 지혈하던 손을 천천히 떼어냈다.

***

우리 집 앞에 서 있던 에나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에스텔!”

“에나,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이 있는 건 너겠지. 지금 영주성에서 돌아오는 길이야?”

에나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내 위아래를 훑었다. 치맛자락에 묻은 흙뭉치를 본 에나가 눈을 매섭게 떴다.


“세상에, 영주성에서 돌아오는 길에 어디 다쳤어?”

“아아.”

나는 어색하게 흙을 털었다.


“그런 거 아니야. 오는 길에 힘들어서 잠시 앉았는데 그러다 묻었나 봐.”

“영주가 이상한 짓 하지는 않았고?”

“진짜 별일 없었어. 친절하게 영주성을 안내해 주고 거하게 식사 대접을 받았을 뿐이야.”

격하게 흥분한 에나를 위해 그 만찬을 거의 먹지 못했다는 건 알아서 생략했다.


“그래도 그렇지! 어디 임산부를 데리고 영주성을 돌게 해! 한창 조심하고 쉬어야 할 때인데!”

“이제 안정기인데 뭐. 그리고 영주의 초대를 마냥 거절할 수도 없잖아.”

“거기서부터가 문제라니까! 뻔히 불편해할 걸 왜 모르냐고! 하여튼 전에 아무 말 없이 우리 마을에 시찰 와서 물정 모르는 소리 할 때부터 알아봤어.”

투덜거리던 에나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이럴 때가 아니지. 많이 힘들었지?”

“나 대접받고 왔다니까? 거기 무슨 요리 나왔는지 알면 너도 부러워할걸?”

“또 또 헛소리한다. 척 봐도 가서 잘 먹지도 못한 게 보이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말했지, 넌 얼굴에서 다 티가 난다고.”

그렇게 티가 나나?


‘나름 표정 관리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에나 앞에서만 계속 들키는 모양이다.


“그래도 한 번쯤 가볼 만했어. 가줬으니 또 부르지 않겠지.”

“그러겠니?”

“역시 그러려나.”

“어휴, 어쩌다 영주 눈에 들어서.”

“누가 영주가 갑자기 이럴 줄 알았냐고.”

“그래. 네가 뭔 잘못을 했겠니. 넌 아무것도 안 했겠지. 영주 혼자 널 보고 반해서 헛짓거리를 하는 거니.”

에나가 팔짱을 끼며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 너무 예뻐도 피곤하구나. 아무튼 영주 놈 상대하느라 고생 많았어. 들어가자. 너 밥 잘 못 먹었을 줄 알고 너 좋아하는 요리 가져왔어.”

에나의 손에 들린 감자 수프를 보자 내 표정이 밝아졌다. 에나의 특제 수프는 감자와 여러 향신료가 들어가 그 맛이 아주 일품이었다.

블란쳇 공작저에서 입맛이 고급이 된 내 입에도 아주 잘 맞을 정도였다.


“또 영주 놈이 부르면 어떻게-”

“아, 에나.”

나는 막 문을 열려는 에나를 붙잡았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면 안 될까?”

“왜?”

“피곤해서 바로 들어가서 자야 할 거 같거든. 수프는 알아서 잘 먹을게.”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던 에나가 심술궂게 인상을 썼다.


“거기서 잠도 잘 못 잤어? 도대체 영주놈은 임산부를 뭘로 아는 거야!”

“하하.”

“어휴. 그래. 쉬어야 하는데 내가 너무 오래 붙잡았다. 그러면 끓이기만 하면 되게 올려주고 갈게.”

“아냐, 괜찮아.”

나는 과하게 친절한 에나를 말렸다.


“지금 머리가 어지러워서 누가 있으면 푹 쉬지 못할 것 같아.”

충분히 서운할 법도 한데, 에나는 내가 임산부라서인지 순순히 내 부탁을 들어줬다.

덕분에 나는 에나의 특제 감자 수프를 들고 혼자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요한……?”

침대 위를 확인하자, 요한은 여전히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다행이다.’

괜히 내가 나간 사이에 의식을 되찾을까 봐 얼마나 긴장했는지 모른다.


‘아직은 아무도 모르는 거지?’

자고로 이런 일은 아는 자가 적을수록 좋다. 나는 물수건으로 깨끗하게 닦고 약까지 바른 요한의 상태를 살폈다.

원체 건강한 체질이라서인지 상태가 벌써 호전되고 있었다.


‘망했어.’

나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난 어쩌자고 데려온 걸까.”

저번에 에나 아버지한테 주려던 약초가 집에 남아 있어서 응급 처치는 어렵지 않았다. 하필 약초까지 있는 바람에 더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래도 요한은 은원 관계가 확실한 사람이니까.’

자기를 치료해 줬다는 걸 알면, 바로 나를 죽이거나 하진 않을 거다.


‘물론 내가 리베르탄이라서 예외일 수도 있지만……!’

믿기지는 않겠지만, 요한의 인성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식은땀이 흐르는 요한의 이마를 물수건으로 닦아주며 한숨을 쉬었다.


“잘도 자네.”

엄청 피곤하게 만들고서!


‘얄밉다.’

환자가 잘 회복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래도 너무 쌔근쌔근 잘 자는 것 같아 괜히 심술이 났다.

검지로 요한의 볼을 쿡 찔렀다.

날카로운 인상과 달리 볼은 말랑했다. 언제나 성숙한 남자 같았던 그에게서 상처 입은 소년 같은 분위기가 흘렀다.


“일어나서 꼭 내가 고생한 거 알아줘야 해.”

그렇게 막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덥석! 요한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가지 마.”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완전히 의식을 되찾은 것 같지는 않았다. 붉은 눈동자가 잠기운에 젖어 있었다.


 


“꿈에서라도 여기 있어.”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애절해지는 목소리였다.


‘누굴 그렇게 찾는 거지?’

그 순간 요한의 이마가 다시 뜨거워지며 식은땀이 흘렀다. 날카로운 눈매가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내가 다 잘못했어. 꿈에서라도 내 곁에 있기 싫은 거 나도 알아.”

“…….”

“그래도 곁에 있어줘. 꿈에서는 그래도 되잖아. 이건 내 꿈이니까.”

아무래도 요한은 지금 이 상황이 꿈인 줄 아는 모양이다.


“나 어디 안 가요.”

어디 가고 싶어도 여기가 내 집이라 갈 수 없어!


“거짓말.”

그의 억센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좀 아픈데.’

환상이라 단단히 착각해서인지, 힘조절도 안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상황이 짜증 나기는커녕 이상하게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말하고 날 떠났잖아.”

“……그건.”

“그러니까 여기 있어. 난 너밖에 필요 없으니까.”

그것이 상처 입은 그의 아픔을 보여주는 것만 같아서.


“제발, 에스텔.”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나였어.’

요한의 말을 들을 때부터 나일 것 같긴 했지만, 내 이름을 듣고 나니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그런 내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안심하지?’

솔직히 당황했어야 마땅했다. 애초에 난 요한과 그렇게 애틋한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키이잉-

그 순간 머릿속이 따끔거리며 아팠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그 틈을 타 요한이 나를 확 잡아당겼다.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문지른 그가 나른한 숨을 내뱉었다. 뜨거운 숨결에 솜털까지 곤두설 정도로 예민해졌다.


“미안해.”

요한이 내 등을 쓰다듬었다.


“내가 잘못했어.”

“알았어요. 저 아무 데도 안 갈게요.”

그러자 아주 신기할 정도로 힘이 바짝 들어가 있던 그의 몸이 풀렸다. 나는 겨우 몸을 일으키며 착잡한 눈으로 요한을 내려다봤다.


‘도대체 요한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

맛있는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요한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죽을 각오를 하긴 했지만, 이렇게 큰 위기가 닥칠 줄은 몰랐다.


‘혼돈의 핏줄이여.’

 
괴상한 말을 듣기는 했지만, 살아남았으니 됐다.


‘여기는 도대체 어디지?’

그 순간 그의 눈에 긴 백금발이 보였다. 뒷모습뿐이지만 한눈에 알아봤다. 어떻게 착각하겠는가. 그토록 찾아 헤맸는데.


‘에스텔.’

수십 번 부르짖었던 이름이 목구멍에서 차마 나오지 않았다.

요한이 이불보를 꽉 잡았다. 심장이 빨리 뛰고 눈가가 촉촉하게 젖기 시작했다.


‘또 환상을 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

혹여 마법이 잘못되어 죽은 것이라면. 그래서 죽어 제멋대로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이라면.


‘그래도 상관없어.’

그렇게 보고 싶었던 에스텔이다.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상관없어졌다. 머리가 새하얘진 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감자 수프를 끓이던 에스텔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요한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언제 일어났…….”

진짜다.

생동감 넘치는 저 표정과 목소리. 환상으로는 채워지지 않던 갈증이 겨우 채워지는 것 같았다.


“……에스텔.”

그가 겨우 에스텔의 이름을 불렀다.


“…….”

“…….”

에스텔도, 요한도 누구라 할 것 없이 먼저 말을 하지 못했다.

요한은 둘 사이에 존재하는 어색한 거리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살아 있으니까.

살아서, 그의 앞에 있으니까.

요한이 시선으로 에스텔의 구석구석을 탐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떠나기 전 봤던 것처럼 여전히 윤기가 흐르는 백금발, 살짝 야윈 볼, 무슨 일을 했는지 트게 된 손가락, 임신한 것처럼 부푼…….


‘배가 나와 있다고?’

누가 봐도 에스텔은 임신한 상태였다.

요한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굳었다.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린 요한이 에스텔에게 물었다.


“아이가 있어?”

그러자 에스텔이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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