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7화 요한이 왜 여기에? (167/182)


167화 요한이 왜 여기에?
2023.07.07.



 
처음 성황은 제법 자신이 있었다.


‘저놈이 어떤 수작을 부려도 기회가 날 것이다.’

자고로 인간은 자신의 목표가 코앞까지 이뤄졌을 때, 가장 빈틈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방심해서 이렇게 지고 말았지만, 이제부터는 다를 것이다.

요한은 그런 성황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묵묵히 제 할 일을 했다.

위이잉-

성황이 첨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마법을 발동했다. 적대적인 요한의 마력이 성황의 몸을 따갑게 했다.


“요한 블란쳇.”

성황은 밀려오는 통증을 무시하며 요한에게 말했다.


“날 가둔다고 네가 원하는 대로 마물을 불러내 줄 것 같나?”

“그건 두고 볼 일이지.”

“애초에 마물이 내 소환에 응할까? 너도 알겠지만 초월적인 힘을 가진 존재들은 아주 교활하다. 설령 나를 어떻게 설득한다 해도 마물이 실제로 소환될 확률은 적어.”

요한과 성황의 눈이 마주쳤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네가 진짜 원하는 건 마물을 불러내는 것 따위가 아니지 않나.”

성황은 요한이 가장 바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요한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상대는 백 년도 살지 못한 애송이.’

그간 요정들을 멸종시키면서 겪었던 위기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성황이 교활하게 웃음을 흘렸다.


“네가 바라는 건 그 요정, 에스텔이라는 여자겠지.”

“…….”

“알고 싶지 않나, 그 여자가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요한은 입을 열지 않고 우아하게 팔짱을 낀 채 성황을 바라봤다.

성황은 제 수작이 성공했음을 눈치챘다.


“그러고 보니 가장 중요한 소식을 전해주지 않았군. 그 마지막 요정은 살아 있다.”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확실한가?”

“그래. 너도 대강은 내가 어떤 존재인지 짐작하고 있을 텐데.”

첨탑의 분위기는 성황이 바라는 대로 흐르기 시작했다.


“만약 그 요정이 죽어서 세상에 사라졌다면, 내가 가장 먼저 소멸했을 거다.”

“……틀린 소리는 아니군.”

하지만 요한의 눈동자에 깃든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한테 할 말이 뭐지? 에스텔이 살아 있는 것 정도는 나도 짐작하고 있었어.”

“그런가? 알기 쉽지 않을 텐데 참 대단하군.”

성황이 빈말로 요한을 칭찬하며 그의 반응을 살폈다. 일순 격하게 반응하던 붉은 눈동자의 반응은 진짜였다.


‘이놈은 허세를 부리고 있다.’

당장 요한은 요정의 행방을 알고 싶어 미칠 지경인 게 틀림없다. 요정이 사라진 뒤 블란쳇 공작이 보여주던 모습만 봐도 그랬다.


“그럼 그 요정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있나?”

“에스텔이 있는 곳을 알 수 있다고? 지금 에스텔에겐 어떤 마법도 걸리지 않을 텐데.”

“그렇겠지. 그래도 아는 방법이 있다. 내가 어떻게 요정을 다 찾아냈다 생각하나?”

성황은 요한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 일부러 말을 느릿하게 했다.


“하지만 이 몸은 요정과 영혼이 저주로 묶인 사이다. 어떤 힘으로든 그 연결을 없앨 순 없지. 어렵사리 마물을 불러내 어쩌고 할 것 없이 그 요정을 찾아낼 수 있다.”

“…….”

어두운 첨탑 아래에서 요한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붉은 눈동자만이 사냥을 시작한 맹수처럼 기묘한 광채를 내뿜을 뿐이었다.

성황은 대답 없이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요한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확실히 보통 놈은 아냐.’

기백만으로 자신을 이렇게 누를 수 있는 존재는 요한이 처음이다.


‘하지만 그래 봐야 내 거래에 응할 수밖에 없을 거다. 곧 처리될 놈을 경계해 봐야 우스울 뿐이지.’

성황은 재빨리 요한에게 겁먹었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오랜 세월을 초월자처럼 군림해 온 성황의 고고한 자존심 때문이었다.


“물론 아무 대가 없이 가능한 방법은 아니다. 이렇게 아무런 단서가 없을 때일수록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하지.”

“본론부터 말해.”

“이제 좀 솔깃해지나, 네가 그 대가를 지불해 준다면 마물과 상관없이 그 여자를 찾아갈 수 있게 해주마. 너를 배신하고 도망친 그 여자 말이다.”

성황의 보라색 눈동자에서 마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파직!

그러나 번개 같은 광채가 성황의 마력을 바로 튕겨냈다. 첨탑을 지배한 요한의 마력이 성황의 마력을 없애버린 것이다.


“네가 손해 볼 건 없다. 이 먼 성국까지 와 나를 잡아놓으려고 한 것도, 마물을 찾아내려 했던 것도 다 그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 아닌가?”

“그래서 네가 바라는 건 뭐지?”

요한의 목소리에서 미약한 초조함이 느껴졌다. 성황은 쾌재를 부르며 자비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바라는 건 이 첨탑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거다. 어차피 그 여자를 찾아내려면 내 마력을 풀어줘야 한다.”

“그게 네 노림수였군.”

요한이 눈매를 찌푸렸다.


“네 뭘 믿고 너를 풀어주지?”

“내 영혼을 걸고 맹세하면 어떤가?”

영혼의 맹세는 성황처럼 마력을 많이 가진 존재일수록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

물론 빈틈이 없는 것도 아니다. 요한이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어지간히 풀려나고 싶은가 보군.”

“지리멸렬한 시간 낭비를 피하고 싶을 뿐이다. 똑똑한 사람끼리 원하는 것을 얻고 헤어지는 게 더 이득이지 않나.”

“교활한 놈. 하지만 네놈 수작에 당할 수밖에 없군.”

요한은 고개를 저으며 손을 크게 내저었다.


“약속 지켜라. 네 마력을 담아 말한 만큼 지키지 않을 시 너는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다.”

성황의 팔다리가 허공에 번쩍 떠오르며 마력이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걸려들 줄 알았다!’

성황이 보라색 눈을 번뜩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계약 성립이다. 너를 그 요정의 곁으로 보내주지.”

 

[이카루스는 저주의 힘으로 요한을 요정의 곁에 보내준다. 요한은 이카루스가 그 마법을 시행해 주는 대가로 첨탑에서 해방시켜 준다.]

자유로움과 동시에 찌릿한 제약이 영혼을 얽매었다. 요한이 까칠하게 물었다.


“그래서 그 마법의 대가는 뭐지?”

“평범한 대가다. 아주 거대한 마력. 제물이 있으면 더 좋지만, 네 몸에 있는 마력 정도면 충분하다.”

여기에는 교묘한 속임수가 있다.


‘내가 아닌 존재가 요정을 찾으러 갈 경우 십중팔구 죽는다.’

그건 바로 요한이 저주의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계약대로 네게 마법을 사용해 주지.”

쿠르르릉…….

성황의 몸에서 마력이 흘러나오자 땅바닥이 진동했다. 온통 새카맣게 변한 땅바닥 아래로 흐릿하게 한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차분히 일어나 식사를 하고 있는 에스텔.


“……에스텔.”

요한이 에스텔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것이 네가 바라는 요정이 맞겠지?”

성황은 감정에 휘둘려 목숨까지 잃을 요한을 비웃으며 마법을 마저 발동시켰다.

피잉!

그 순간이었다.

마법진의 가장자리가 기묘한 소음을 내며 흐트러졌다. 그림자가 꿈틀거리며 발동이 자꾸 지연되었다.


‘마력이 부족했던가?’

하지만 요한에게서 흘러들어오는 마력은 충분했다. 마력을 통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마력의 반발이 점점 심해졌다.


“너 무슨…….”

“왜 그러지?”

요한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도대체 마법진은 언제 사용할 수 있나? 계속 이렇게 시간 끌면 손해 보는 건 너일 텐데.”

“허튼 소리하지 마라! 방해하는 건 네놈이다!”

“내가 방해하고 있다고?”

“그래! 네 마력을 사용해 마법진의 마력을 일부러 망치고 있지 않나. 이러면 어떤 대가를 지불해도 그 요정을 만날 수 없……!”

그 순간 성황이 멈칫 굳었다.


“만날 마음이 없었나?”

요한이 성황을 보며 매끈하게 웃었다.


“설마.”

“그렇다면 도대체 왜-!”

“나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는데. 영혼까지 걸며 자신만만했던 건 네놈이지 않나?”

하지만 요한의 웃음은 결코 무지한 자의 웃음이 아니었다.

끼이익- 끼긱.

바닥에 깔린 마법진이 일으키는 불협화음이 점점 심해졌다. 조바심이 난 성황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농담할 시간 없다. 이러다 마법이 실패하면 너도 그 여자를 못 찾는 거야!”

“이런. 그거 안타까워서 어쩌나.”

그제야 성황은 요한이 제 마법으로 이동할 마음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성황이 몸을 떨며 요한을 노려봤다.


“……애초부터 찾을 마음이 없었다고? 그럴 리 없다. 네놈은 그 여자를 사랑하지 않았나? 그 여자를 데려올 수 있다면 뭐든 하려 하지 않았나?”

“그래. 난 뭐든 할 수 있어.”

요한은 힘이 빠져 주저앉은 성황을 고고하게 내려다봤다.


“에스텔을 찾기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든 치를 수 있지.”

마법진이 완전히 무너졌다. 실패한 마법의 잔해가 고스란히 성황의 그림자에 달라붙었다.


“으윽, 그렇다면 왜!”

“내 부인을 평생 고생시킨 놈을 쉽게 놓아줄 만큼 자비로운 성정이 아니라서.”

“이, 이 미친놈……!”

요한은 성황의 모욕에 기분 좋은 듯 눈을 반달처럼 접으며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오싹한 광기가 성황을 압도했다.


“네, 네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아나?”

“다행히 난 그 정도는 아는 미친놈이라서.”

“내가 아니면 너는 절대 그 요정을 만날 수 없다!”

성황의 그림자가 꿈틀거리며 그의 육체에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성황의 온몸이 그림자에 잠식됐다.

성황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검은 피를 토해냈다.


‘너무 조급하게 영혼을 걸었어.’

요한이 방해할 거란 생각을 못 한 바람에, 그의 영혼이 무너지고 있었다.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다시 한번 저주를 걸어줄 테니-”

“이미 늦었어.”

절망에 찬 성황이 두 손을 들어 올리는 것과 동시에 손이 사라졌다. 텅 빈 옷자락이 팔락거렸다.


“으아아아악!”

이어서 다리가 소멸했다.


“내가, 내가 어떻게 버텨온 인생인데. 이렇게 끝날 수는-”

몸통만 남은 성황이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콰득!

성황의 그림자가 불쑥 튀어 올라 성황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짐승의 머리처럼 흉흉한 기세를 풍기던 그림자 위로 불길한 두 눈이 생겼다.

마물이다.


“이제야 만나는군.”

요한이 마물을 보며 냉소했다.


“우리 꽤 구면이지?”

-네 수작은 흥미롭게 보았다.

마물이 킬킬 웃으며 물었다.


-하지만 성황이 이대로 끝났다고 생각하나?

“그러면 다시 살아나기라도 할 것 같나?”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아무리 준엄한 영혼의 계약이라 할지라도 요정의 힘은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다. 요정의 힘을 모조리 삼킨 놈이 어떤 기적을 일으킬지는 모르지.

상대의 불길함을 조성하는 말투다.


-그에 비해 너는 이제 그 여자를 찾아낼 방도를 잃었군. 어찌할 생각이지?

“누가 그러지?”

요한의 그림자가 검은 마법진을 그렸다.


-호오?

“이 첨탑에 미리 내 피로 마법진을 그려뒀지. 그놈이 발동한 걸 바로 복사할 수 있도록.”

물론 그런다고 해서 성공률이 100%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희망도 없던 때에 비하면 성공률이 비약적으로 높아진 것이나 다름없다.


“더 이상 네놈들에게 휘둘릴 마음 없다. 에스텔은 내 힘으로 찾아낼 거야.”

-크하하하하!

마물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어디 한번 발버둥 쳐라. 나도 기대해 보마.

마법진이 찬란하게 뿜어져 나온 빛이 요한의 온몸을 집어삼켰다.

***

영주는 기어코 나를 영주성으로 데려가 구경시켰다.


“자랑은 아니지만, 이 근방에 우리 성보다 더 근사한 성은 없을 걸세.”

“그러게요. 공들여 만드신 게 보여요.”

“역시 제국에서 자란 사람은 다르군. 한눈에 알아보는군.”

별말 안 했는데요.

고개 좀 끄덕이면서 감탄한 게 전부인데 영주는 내 식견을 요란스럽게 칭찬했다.


‘느껴진다.’

영주와 대화할수록 불길한 예감이 더욱 강해졌다.


‘개수작을 부리는 놈의 기운이.’

정원을 쭉 보여준 영주가 큼큼거리며 어색하게 제 콧잔등을 문질렀다.


“난 앞으로 이 아름다운 영주성을 나 대신 뛰어난 식견과 감각으로 꾸며줄 사람이 있기를 바라네.”

“응원할게요.”

“……기왕이면, 그대 같은 사람이면 좋겠는데.”

영주의 두 볼이 붉어졌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내 배를 일부러 쓰다듬었다.


“죄송해요, 영주님.”

“아이 때문에 그런가? 그런 거라면 난 전혀 신경 쓰지 않아.”

“그런 것만은 아니에요. 남편과 이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재혼은 좀 더 신중히 하기로 했거든요.”

그러자 영주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그렇군. 전남편에게 얻었을 상처는 생각하지 못했어.”

다행히 전남편 핑계를 대자, 영주는 쉽게 물러났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한동안 이 마을에 머물 예정이니 내 제안을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게.”

영주는 친근하게 내 어깨를 두드리고 떠났다.


‘도대체 내 뭘 보고 벌써 청혼한 거지?’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됐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는 아닌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영주성에서 하룻밤을 묶고 아침이 되자마자 바로 떠났다.

그렇게 막 마을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으으윽…….

숲 어귀에서 사람이 다친 듯한 신음이 들렸다.


“거기 누구 있어요?”

나는 조심스레 신음이 들리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는 흑발의 남자가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저기, 괜찮아요?”

일단 사람을 구해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 막 얼굴을 확인한 순간.

나도 모르게 굳었다.


‘요한?’

요한이 왜 여기에 있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