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죽어줄 수도 있어?
(166/182)
166화 죽어줄 수도 있어?
(166/182)
166화 죽어줄 수도 있어?
2023.07.04.
달빛에 반사된 머리카락이 유독 눈부셨다. 희고 말간 피부, 설탕 인형처럼 예쁘고 오밀조밀한 얼굴, 사랑스러운 남색 눈동자.
요한이 멍하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에스텔?”
그러자 그녀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걸친 채 그에게 답했다.
“요한, 오랜만이야.”
요한은 그런 그녀를 보며 헛웃음 쳤다.
가짜라고 하기엔, 목소리까지 똑같았다.
에스텔이 사라졌던 그 순간이 한낱 꿈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요한이 울컥 치밀어오르는 울음을 삼키고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채 감추지 못한 감정 때문에 목소리가 떨렸다.
“여기에 있었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에스텔이 창가에서 일어났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나비 날개처럼 흩날리게 했다.
“요한은 여기에 어쩐 일이야?”
“……너를 만나고 싶어서.”
“여기에 내가 있을 줄 알았어?”
“아니.”
요한은 씁쓸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여기에 오면 어떻게든 단서라도 얻을 수 있을까 했지.”
에스텔이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잘 지낼 줄 알았는데.”
“…….”
“예상보다 안색이 안 좋네.”
요한은 지금 눈앞의 에스텔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 느리게 숨을 쉬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그가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
“내가 잘 지낼 줄 알았다고?”
“그런데 아니었네.”
에스텔이 긴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많이 힘들어 보여.”
가벼운 말을 남긴 에스텔은 어딘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요한이 그녀를 쫓아갔다.
“에스텔, 에스텔!”
천천히 걸어가던 에스텔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요한은 에스텔을 잡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참 이상했다.
“기다려.”
아무리 달려도 그녀가 잡히지 않는다.
분홍색 백금발이 찰랑이며 닿을 듯 아슬아슬하게 넘실거렸다.
에스텔은 성궁 계단을 계속 올라가 옥상에 도착해서야 멈췄다.
성궁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높은 곳이었다. 하지만 요한은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에스텔이 말없이 그를 바라본다.
싸늘한 공기가 주위를 에워쌌다. 요한이 에스텔을 보며 슬픈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지?”
그러자 에스텔이 대답하는 대신 되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진짜 에스텔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낼 리 없으니까.”
“원래 여기에 있었을 수도 있잖아. 나는 너와 나만 알고 있던 비밀도 알고 있는걸.”
요한은 에스텔의 질문을 무시했다.
“왜 슬퍼하고 있어?”
“…….”
“내 곁을 떠난 네가 진짜 슬픈 거야, 아니면 내가 슬프기를 바라서 슬픈 얼굴인 거야?”
요한은 기왕이면 후자가 아니었으면 했다. 제 행복을 빌어주며 떠난 여자를 상대로 품기엔, 너무 치졸한 속내였으므로.
“나도 모르겠어.”
에스텔이 요한에게 물었다.
“요한. 넌 나를 사랑해?”
“사랑해.”
과거에는 기만으로 가득 찼던 말이, 이제는 절절한 진심으로만 가득 찼다. 처음부터 이랬다면 좋았을 텐데.
“그 누구보다.”
“그러면 나를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어?”
아마도 저건, 환상이 지껄여대는 가짜다.
흐릿해진 에스텔이 물었다.
“죽어줄 수도 있어?”
하지만 그는 에스텔의 말을 들으며 기쁘게 웃었다.
“기꺼이.”
그 순간 에스텔이 성궁의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요한은 그런 에스텔을 붙잡기 위해 쫓아 내렸다.
차디찬 바람이 온몸을 감쌌다.
뻗은 손이 가녀린 여자의 손을 붙잡기 위해 애썼다.
그렇게 막, 닿았다고 생각한 순간이다.
환상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요한은 그녀의 잔상마저 소중하다는 듯 끌어안으며 끝없이 추락했다.
***
에나의 아버지가 일하는 의원실에서는 기분 좋은 약초 냄새가 풍겼다. 에나 아버지께서 진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기에게는 아무 이상이 없구나. 전처럼 못 자는 일도 없지?”
“네. 다 좋아요.”
“그래도 주의하고 또 주의하거라. 조금만 힘들어도 일하는 건 쉬고.”
배려심 가득한 목소리에 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제가 쉬면 약초는 누가 가져오고요.”
“원래 담당인 에나가 하겠지.”
“에나가요?”
“어허. 에스텔 네가 워낙 잘 찾아서 그렇지 우리 에나도 약초 찾는 솜씨는 나쁘지 않아.”
에나 아버지께서 어색하게 헛기침했다. 거짓말할 때마다 하시는 버릇이다.
“그리고 원래 약초 캐오는 게 네 일도 아니었으니 더 푹 쉬도록 해. 뭐 그리 좋다고 계속 일을 해오는지.”
“할 만하니까 해오는 거죠.”
“넌 그게 문제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계속하면 다들 그게 당연한 줄 알아. 펜테 마을이 아니라 다른 마을이었으면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착취당했을 거다.”
저도 다른 마을이 아니라 펜테 마을이라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요.
하지만 에나 아버지께서는 내가 어지간히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내 말 잘 듣고 있는 거냐?”
“물론이죠. 다음부터 약초는 찾지 않을게요.”
솔직히 나무들이 가르쳐 준 위치로 가서 캐기만 하면 되는 거라 힘들 거 하나 없는데.
“그래, 알면 됐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수확된 구름꽃을 확인할 겸 영주가 우리 마을에 온다는 건 알고 있지?”
“네. 그런데 영주는 어떤 분이세요?”
“음……. 아무튼 영주니까 마주쳐 봐야 좋을 건 없다.”
대답을 회피하는 걸 보아하니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닌가 보다.
“네. 영주가 온다고 할 때는 저도 웬만해서는 계속 집에 있어야겠네요.”
“네가 오해할까 봐 덧붙이지만, 영주가 나쁜 사람인 건 아니다. 오히려 다른 곳에서 듣던 영주들에 비하면 좋은 편이다.”
“그러니까 더 나쁘게 들리는데요.”
“진짜야. 구름꽃 수확이 어려울 때는 알아서 수확량을 조절하기도 했다. 다만, 영주는 우리 윗사람이 어렵다는 거지. 거기다 제국에서 유학까지 갔다 온 분이라 뭔가 어렵달까…….”
“제국에서 유학이요?”
에나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너도 제국에서 넘어왔지? 뱃길이 열릴 때를 노려서 제국으로 넘어갈 생각 있느냐? 그러면 내가 또 영주님께 말해서 알아보고.”
“아뇨. 전 이 마을이 좋아요.”
딱 잘라 말한 내가 에나 아버지를 보며 물었다.
“언제는 저 보고 평생 이 마을에 있어달라더니, 이제는 제국에 보내시려고요?”
“아, 아니. 우리야 구름나무를 잘 돌보는 네가 있으면 좋지만 네 사정은 또 다를지도 모르니까 그런 거지. 혹시 내 말에 서운한 거 있으면 풀어라. 이 아저씨가 가끔 말 이상하게 하지 않느냐, 응?”
짓궂은 농담에도 전전긍긍하는 에나 아버지와 웃으며 대화하다 바깥으로 나왔다.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벌써 영주의 마차가 도착한 건가?’
조그마한 마을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마차와 기사들이 보였다.
‘귀찮은 일 생기기 전에 들어가자.’
최대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돌아서 집으로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지나가던 남자가 나를 발견했다.
“음, 여기서 본 적 없는 아가씨인데?”
고동색 머리카락에 유순한 눈매를 가진 키 큰 남자였다. 누가 봐도 자신이 영주라고 광고하고 있을 정도로 화려한 옷차림이었다.
“다른 마을에서 이주해 온 건가?”
“아, 네. 안녕하십니까.”
“내가 누구인지는 알아?”
“이 지역 영주님 아니신가요?”
그 말에 남자가 씩 웃었다.
“오. 맞아. 이 오지를 물려받은 레일리 카슨이라고 한다. 너는 누구지?”
“저는 에스텔이라고 합니다.”
“이 마을엔 어쩌다가 왔고?”
“배가 난파되어 오갈 데 없는 처지인 저를…….”
그때 가까이 다가온 영주가 눈을 찡그렸다.
“설마 임신한 건가?”
“아. 예.”
“이 마을 놈 중 하나랑 결혼한 건 아니지?”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묻는지 모르겠다.
‘귀찮은 일에 얽힌 거 같은데.’
자꾸 나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는 태도가 심상치 않았다.
영주 정도 되는 위치면, 이 시골 마을에선 굉장히 큰 권력자다. 그런 대단한 사람이 나한테 들이댄다고 믿고 싶지는 않지만, 여태 전적이 많았다 보니 괜한 의심이 들었다.
“아, 네. 남편이랑은 헤어졌어요.”
“이혼? 그런 건가?”
“뭐, 비슷해요.”
그러자 영주가 박수 쳤다.
“잘됐네.”
“네?”
“아니. 큼, 나는 혼인 안 한 상태라고.”
갑자기 볼을 붉힌 영주가 헛기침하며 슬쩍 내 얼굴을 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제국에서 왔다 했나? 제국에 있다 이 산골에 있으면 부족한 게 많았을 텐데?”
“아뇨. 그렇지 않아요. 마을분들이 워낙 친절하게 잘 해주셔서 부족함 없이 잘 지내고 있어요.”
“내 앞이라고 좋게 말할 필요 없어. 내가 보기에도 부족한 것투성이인 동네니까.”
능글맞게 웃던 영주는 내게 쓱 말했다.
“이렇게 제국 출신을 보게 된 것도 인연인데 영주성에 한번 들러줄래?”
“저는 내일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무슨 일? 임신한 몸인데 평소에 일도 하나? 이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안 봤는데 아주 몹쓸 사람들이네.”
“아니에요. 제가 일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그럼 상관없지 않나? 나를 보러 오는 것도 일이라고 쳐.”
제멋대로 말하던 영주가 호쾌하게 웃었다.
“마침 이 오지를 제국령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거든. 제국 출신이 와서 영주성을 봐주면 좋은 아이디어가 생길지도 몰라.”
“아, 저는…….”
그때 뒤로 에나와 에나 아버지가 나오다 나를 발견한 게 보였다. 두 사람은 영주와 단둘이 대화하고 있는 나를 보며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영주님. 여기엔 무슨 일이신지?”
“아, 제국 출신을 만나 반가운 마음에 대화 좀 했네. 내일 이 여자를 내 영주성에 데려가도 괜찮겠나?”
에나 아버지께서 강렬한 눈빛으로 물어보는 게 보였다.
‘내가 영주님이랑 마주치지 말라고 했지 않느냐!’
하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다.
‘그치만 저도 마주칠 생각은 없었다고요.’
괜히 귀찮은 일에 휘말린 것 같다.
***
마물이 성황을 보며 킬킬 웃었다.
-이제 처리됐나?
“아직 확인하지 않았으니 끝은 아니다.”
성황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 있었다.
“질긴 목숨답게 멀쩡히 살아 있을 수도 있고.”
-지금 가서 확인해 보려고?
“그래야지. 하여튼 일을 마음에 들게 하는 놈이 없다니까.”
오르테카 재상만 해도 그렇다. 에스텔과 협조해 배신했다는 걸 깨닫고 얼마나 놀랐던가.
‘결국 그놈은 잡아먹었지.’
오르테카 재상을 빚을 때 꽤 큰 힘을 소모했던지라 회복되는 힘도 있었다. 요한을 속인 환상도 오르테카 재상을 먹지 않았다면 사용할 수 없었으리라.
-그래도 마음 편히 웃으라고. 저놈을 치우면, 이제 요정을 없애는 데 방해할 놈은 더 없지 않나.
“그건 그렇지. 어차피 이렇게 될 거 마음 편히 죽어주면…….”
그러던 순간이었다.
막 발을 옮기던 성황이 멈칫 굳었다. 싸늘한 냉기가 목 뒤에서 느껴졌기 때문이다.
“너…….”
“나쁘지 않은 수작이었어.”
성궁 아래에 떨어져 죽었어야 했을 요한이 그들의 눈앞에 있었다. 성황의 목 뒤에 칼을 댄 채로.
“아직 그 정도 힘이 남아 있을 줄 몰랐는데 말이지.”
“환상에 속은 게 아니었나?”
“내가 맨날 보는 게 에스텔 환상이거든.”
요한은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거에 비하면 제법 괜찮은 완성도라, 그리운 기분이 느껴지긴 했어.”
“……그러면 왜 환상을 따라 떨어졌지?”
“그러고 싶었으니까.”
요한의 몸은 부상을 입은 것처럼 피가 묻어 있었다.
“뭐, 죽지는 못했지만.”
요한이 무표정한 얼굴로 비릿하게 웃었다. 성황은 바짝 긴장한 몸으로 여유를 가장했다.
“네놈도 참 질긴 목숨이로군.”
주위의 기운을 탐색했지만 기사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혼자인가?’
“혼자서 날 죽이러 온 건가?”
성황이 황당해서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아무리 약해졌다지만, 너 혼자서 상대할 수 있을 줄 알았나?”
성황은 힘을 끌어올려 요한을 바닥에 눌러버리려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쿠우웅-
아무런 마법도 발동되지 않았다.
요한이 칼로 성황의 목덜미를 툭툭 쳤다.
“왜 그리 당황해, 나 모르게 놀랄 일이라도 있었어?”
“네놈…….”
“아아. 넌 힘을 쓰지 못할 거야. 첨탑에 있던 네 흔적에 함정을 파뒀거든.”
요한은 일그러진 성황의 얼굴을 보며 혀를 찼다.
‘마물 놈은 사라졌나?’
짜증 나게도 저 마물을 잡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성황은 요한의 목표가 자신이 아니라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소리쳤다.
“그래서 뭘 할 셈이지? 여기서 날 죽여 봐야-”
“걱정 마, 넌 죽지 않을 거야.”
그 순간 성황은 미지를 향한 공포를 느꼈다.
“설마…….”
“넌 내가 마물을 불러올 때까지 얌전히 갇혀줘야겠어.”
에스텔을 찾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