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너는 살아 있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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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화 너는 살아 있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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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화 너는 살아 있어야 해
2023.06.30.
레이몬드는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요한의 얼굴을 살폈다. 요한은 딱히 분노하지도, 슬퍼하지도 않는 얼굴로 침묵했다.
“…….”
“주군.”
“왜.”
“도대체 왜 그렇게 죽은 전 공작 부인에게 집착하시는 겁니까?”
요한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스쳤다.
“너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예? 저도라니요?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제가 모르는 이야기가 있는 겁니까?”
“아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아무리 봐도 중요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레이몬드는 요한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주군은 한번 내린 결정을 결코 뒤집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에스텔 리베르탄에 대한 일도 그랬지.’
요한이 에스텔과 함께 부부로 지내면서 정이 든 게 아닌가 의심한 적도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여자가 죽은 뒤 저렇게 이상해질 리 없는데…….’
문제는 요한이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거다.
요한은 망설임 없이 계획대로 에스텔을 배신했고, 그렇게 성공적으로 복수를 마무리 지었다. 이제 와서 에스텔을 사랑했다거나 하는 건 매우 이상했다.
“여기서 볼일은 끝났으니 성궁으로 들어가지.”
“성궁 수색은 끝내지 않았습니까?”
“가보면 안다. 이제 저번에는 보이지 않던 게 새로 보일 테니까. 거기에 남은 희망을 거는 수밖에.”
레이몬드는 투덜거리면서도 요한의 지시를 따랐다.
“존명.”
그가 첨탑 바깥으로 나가자, 대기 중이었던 블란쳇 기사단이 일제히 경례했다.
요한은 무심히 그들을 이끌고 성궁으로 움직였다.
‘에스텔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본래도 요한은 다른 사람과 터놓고 마음을 교류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에스텔에 대한 것을 모두가 잊어버려도 견딜 수 있다 생각했다.
에스텔을 데려올 수만 있다면 상관없었으므로.
하지만 예상외로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에스텔은 그야말로 철저히 그 존재를 부정당하고 있었다.
요한이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사람들은 제대로 인지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 요한을 더 의문스럽게 여겼을 뿐이다.
‘제가 그 여자의 명에 따른 건 모두 주인님의 명령 아니었습니까?’
‘죄송합니다, 주인님. 주인님의 말이 맞습니다. 저는 그 여자의 곁에 머물며 감히 그 여자를 동정했습니다. 하지만 그뿐이었습니다. 맹세컨대 제 임무를 잊지 않았습니다.’
‘주군,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그 여자와 관련해서 좋지 못한 기억이라도 떠오르신 겁니까? 역시 리베르탄에 자란 여자 아니랄까 봐 또 더러운 수작을-’
새삼 그때를 떠올리자 요한은 헛웃음이 나왔다.
‘에스텔, 너를 이해한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온통 홀로 남겨진 것 같은 기분.
그가 망상으로 지어낸 일이 아닐 텐데, 주위의 태도를 보다 보면 요한 자신이 문제 있는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너는 이런 일을 어릴 때부터 겪었던 거겠지.’
그동안 요한은 에스텔이 자꾸 저자세로 나오는 것이, 그를 쉬이 신뢰하지 못했던 게 화나고 슬펐다.
‘……이런 상황에선 버티는 게 최선이었을 텐데.’
직접 겪고서야 겨우 에스텔의 과거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어떤 마음으로 가족을 꿈꾸었을지 상상이 가 지독히 고통스럽고 외로웠다.
어느새 성궁에 다다랐다.
“브, 블란쳇 기사단이 성궁에는 무슨 일입니까? 수색은 저번에 다 마쳤던 것이-”
“비켜.”
블란쳇 기사단이 알아서 요한의 앞길을 막아서는 자들을 정리했다.
‘첨탑 안에 있던 마물의 도구는 없앴다.’
물론 그것만으로 에스텔에 대한 흔적이나, 찾고 있던 마물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최소한 첨탑에 있는 마물의 흔적을 없앴으니, 성궁에 있던 제단에 변화라도 생기리라.
‘악마만 있었어도…….’
우습게도 악마는 에스텔의 실종과 동시에 완전히 사라졌다. 불러내려 해도 연결이 ‘전부’ 끊겨 부를 수 없었다.
애초에 계약했던 것이 없었던 일인 것처럼.
그 순간 요한은 악마가 노리던 목표가 처음부터 요정인 에스텔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철저히 악마의 도구였던 거다.
‘악마가 없다면, 에스텔을 계속 위협하던 마물이라도 찾아내 에스텔을 찾는다.’
그래서 어떻게든 에스텔을 되찾고 말 것이다. 성궁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얼굴이 지독한 집착으로 물들어 있었다.
***
오늘 날씨가 아주 맑다.
“에스텔! 몸은 좀 어때?”
창가를 보면서 멍 때리고 있는데, 마을에서 가장 친한 에나가 활기차게 나를 데리러 왔다.
“내 몸이야 늘 그렇듯 멀쩡하지.”
“그래도 조심해. 홑몸도 아닌데.”
에나와는 마을 유일한 의사인 에나 아버지에게 진찰을 받다가 친해진 사이였다.
‘아니다. 의식 잃은 나를 처음 발견한 사람이 에나였지.’
에나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죽었을지도 몰랐다.
“신경 써줘서 고마워. 그렇지만 정말 멀쩡해. 어제도 검사에서 아무 이상 없었는데, 오늘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기겠어?”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러고 보니 아침! 아침 식사는 했지?”
“그럼, 간단히 먹었지.”
“간단히 먹으면 안 되지! 입덧이 없는 축복받은 체질이면 배 속의 아기를 위해서라도 든든하게 잘 챙겨 먹으란 말이야!”
나는 에나와 가볍게 얘기하며 일하러 출발했다.
“오늘은 구름나무들을 간단히 정리하고 관리하기만 하면 되지?”
“응. 어제 마을분들이 가지치기 같은 일은 다 해주셨으니까.”
펜테 마을.
제국에서 바다를 건너야 갈 수 있는 이 조그마한 마을은 아주 놀랍게도 요정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말로만 전해 듣던 구름나무 숲이라는 걸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덕분에 이 마을에 적응하는 게 훨씬 수월했다.
펜테 마을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마을 근처에 있는 구름나무를 돌보고 거기서 나오는 구름꽃을 채취해 수확하는 거였다.
보통 구름나무는 아주 예민하고 까다로워 구름꽃을 잘 피우지도 않고, 인간의 손에 닿자마자 아예 꽃을 시들게 해버리기도 한다고 한다.
특히 내가 도착했을 땐, 무슨 영문인지 구름나무들의 구름꽃이 한 송이도 피지 않은 상태였다. 영주에게 일정 이상의 구름꽃을 바쳐 생계를 유지하는 펜테 마을 사람들에겐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물론 나한텐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었지.’
도망치기 위해 요정의 힘을 무리해 사용해 더는 힘을 쓰지 못할 줄 알았는데, 다행히 나는 나무들과 여전히 대화할 수 있었다. 그런 내게 구름나무에게 구름꽃을 피워내게 부탁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기다렸다는 듯 구름나무들이 내게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이 우리를 보러 오는 날이 맞느냐?
-네. 뭐 필요하신 거 없으시죠?
-그래. 그놈들에게 필요한 구름꽃은 필요할 때 피워줄 테니 너만 오면 된다.
-그 마을 놈들은 할 일도 없는 것들이 왜 자꾸 아가 너한테 귀찮게 구는지 모르겠다. 확 마을 놈들을 갈아엎어 버려야 하는데.
구름나무들이 투덜거렸다.
-언제든 짜증 나게 굴면 말해라. 혼내줄 테니까.
-에이, 왜 그러세요. 다들 저한테 얼마나 친절한데요.
이건 조금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다.
‘오히려 이렇게 마음 편한 환경은 처음이라 어색할 정도인데.’
나는 요한이 리베르탄 공작가에 대한 복수가 끝난 뒤 방심한 틈을 타 죽음을 위장해 도망쳤다. 요한이 절대 찾지 못할 곳을 찾다 보니 바다로 도망칠 수밖에 없어 배를 타고 멀리 떠났다.
‘태풍을 맞아 조난당했지만.’
어떻게 보면 난파당한 게 행운이었다.
아무리 요한이라 해도 우연히 조난당해 도착한 장소를 찾아내지는 못할 테니 말이다.
‘이제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잊지 않았을까?’
당황스러운 부분이 있다면, 내가 요한의 아이를 임신했단 거다.
요한의 유혹에 넘어가 하룻밤을 보낸 그때 생겼던 모양이다.
나를 증오하는 남자의 아기.
아기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부터 나는 배 속의 아이와 사랑에 빠졌다. 이상한 말이지만 이 아기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거부감도 없었다.
펜테 마을은 아기가 귀한 마을이라 임산부인 나를 아주 잘 대해주었고, 덕분에 불편한 것 없이 마을에 어울릴 수 있었다.
구름나무 숲에 들어가자마자 나무들이 나를 반기듯 가지를 살짝 흔들었다.
-어서 와라! 오랜만에 보니까 유독 반갑구나!
-저 어제도 왔는데요?
-인간의 시간을 기준으로 우리를 판단하지 말거라. 나무 시간을 기준으로 하면 아주 아주 오랫동안 못 본 거다.
인간보다 시간에 둔감한 나무들이 할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기분 좋게 그 말을 넘기며 구름나무의 기둥을 끌어안았다.
-그러게 말이에요. 저도 너무 보고 싶었어요.
사그락, 기분 좋은 바람이 흔들렸다.
-왜 오늘은 저놈이야? 저놈은 일주일 전에도 아가가 안아줬잖아!
-어허. 그러게 뿌리를 내릴 때부터 위치 선정을 잘했어야지. 네놈이 이상한 데 뿌리 내린 걸 우리 아가 탓하지 마라.
-뭣이?! 나는 네놈을 탓하는 거다!
나무들의 유치한 싸움을 들으며 웃자, 에나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다시 봐도 구름나무들이 너를 알아보고 좋아하는 것 같단 말이지.”
“그런가?”
“그래. 네가 있을 때 유난히 움직임이 더 많아.”
에나는 팔짱을 끼며 예리하게 구름나무를 둘러봤다. 구름나무들은 모르는 척 흔들던 가지를 멈추었다.
“흐음. 아무튼 구름나무들이 너를 좋아해서 구름꽃을 피워줘서 다행이야. 네가 없었다면 목표치를 다 못 채울 뻔했어.”
“다섯 상자라고 했지?”
“응. 사실 네가 저번에 수확한 걸로 다 채우기는 했어. 더 채우면 마을 어른들만 더 좋겠지만.”
에나는 신랄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 보니 일주일 뒤 열리는 마을 축제에 너도 참석할 거지?”
“아…… 내가 가도 되는 걸까?”
“당연하지! 다들 너를 얼마나 기다리는데. 너 안 오면 엄청 실망할걸?”
“에이, 그건 좀 과장이다.”
“과장이라니. 진짜야. 너한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마을 남자들이 축제만 노리고 있다고.”
구름나무의 가지를 쓰다듬던 내가 눈을 크게 떴다.
“나를 노리고 있다고? 임신도 했는데?”
배가 많이 나와 있지는 않아도, 임신한 티가 났다.
“그래도 남편은 없잖아.”
에나는 혀를 끌끌 찼다.
“네가 얼마나 예쁜데 애가 있는 게 대수겠어.”
솔직히 에나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임산부란 게 되게 크지 않나?’
하지만 이곳에서는 다른 모양이었다. 에나는 고민에 잠긴 나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언제나 느끼지만 넌 네가 얼마나 예쁜지 잘 모르는 거 같아.”
“나도 나 예쁜 거 아는데?”
“아니, 잘 모르는 거 같은데…….”
에나가 고개를 젓다가 깨달았다는 듯 박수를 쳤다.
“아버지 심부름으로 약초 따야 하는 거 잊고 있었다! 구름나무 좀 살피고 있어. 나 약초 따고 올게!”
에나는 부리나케 숲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진짜 평화롭다.’
따듯한 햇살이 내려왔다. 나는 기분 좋은 나른함에 잠겨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댔다.
‘이게 내가 바랐던 인생이지.’
그런데 왜 마음이 공허한지 모르겠다. 나는 습관적으로 배를 쓰다듬었다.
“아기야, 넌 아빠가 보고 싶니?”
자꾸 요한의 얼굴이 생각난다. 실제로 요한과 나 사이에는 그렇게 절절하고 아름다운 추억 같은 게 없었는데.
***
쿠르릉-
성궁 지하에 있던 제단이 무너졌다. 마물의 흔적이 닿아 있던 모든 걸 없애고 나니 제단도 버티지 못한 거다.
요한의 뒤에는 강제로 끌고 온 가짜 성황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평생 본인이 성황인 줄 알고 살아온 어리석은 남자였다.
“지, 진정 성궁 지하에 이런 부정한 제단이 있을 줄이야. 어찌 이런…….”
“이제야 알겠나?”
“……예. 공작께서 명하신 대로 제국 전체에 성국이 숨겨왔던 부정을 고백하고 자정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요한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황 그놈이 무엇을 할지는 몰라도, 성국 자체에 대한 영향력을 모조리 엎어버리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리라.
뒤에 있던 블란쳇 기사들이 감탄했다.
“대단합니다, 주군. 어찌 저런 게 있는지 아셨는지.”
“이게 바로 우리의 주군이다. 이제 알겠냐?”
레이몬드가 뻐기는 소리를 들으며 요한은 다시 한번 성궁을 살폈다. 아쉽게도 더 찾을 수 있는 게 없었다.
‘에스텔, 살아 있는 건 맞지?’
조금 방심한 틈을 타 불안이 심장을 파고들었다.
‘그럴 리 없어.’
하지만 살아 있다는 증거가 나오지 않으니 두려움이 엄습했다. 에스텔이 죽었다면 이 모든 행동이 무의미해지니까.
“너는 살아 있어야 해.”
그가 조용히 읊조렸다.
주변을 다 물러서인지 온통 고요했다. 캄캄한 밤하늘 아래로 은은한 달빛이 창가를 비췄다.
“그게 아니면 나는-”
그 순간 요한은 창가에 앉은 한 여자의 인영을 발견했다.
그토록 찾았던 에스텔.
에스텔이 창가에 위태롭게 앉아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