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4화 그녀가 사라진 세계 (164/182)


164화 그녀가 사라진 세계
2023.06.27.



 
내가 마지막으로 봤던 것은 내 요정의 기운과 함께 완전히 소멸하던 마물들이었다.


‘나도 무사하지 못할 텐데.’

다른 건 몰라도, 철저히 내가 벗어날 수 없도록 설계했으니까.


‘……그래야 성황의 수작도 막을 수 있고.’

온통 캄캄한 어둠이 두려움을 자아냈다. 팔다리를 떨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어났니?]

머릿속에서 울리는 듯한 상냥한 목소리가 들렸다.


[몸은 좀 어떠니? 요정의 힘을 무리하게 사용해서 아플 수도 있어.]

“다행히 아픈 곳은 없어요.”

왜인지 듣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지는 목소리다. 가만히 들어보니 이 목소리를 전에도 들은 적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수도로 돌아올 때, 마법진에서 들었던 목소리야.’

그때 이 목소리가,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지켜주겠다고 했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당신이 저를 구해주신 거 맞죠?”

[그래. 내가 죽을 뻔한 너를 내 힘으로 빼냈단다.]

“어떻게 그걸…….”

[난 항상 너와 함께 있었으니까.]

서글픈 목소리가 고요한 수면에 떨어진 물 한 방울처럼 떨어졌다.

그 순간 주위에 가득하던 어둠이 점점 사그라들었다. 눈앞에 한 여자가 보였다.

여자의 남색 눈과 마주쳤다.

분홍색 머리카락에, 나와 똑같은 남색 눈동자, 무엇보다 겨우 울음을 참고 있는 듯한 서러운 얼굴.

다른 설명 없이도 여자의 정체를 깨달았다.


“당신이 제 어머니신가요?”

[그래. 내가 네 못난 어미란다.]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다, 에스텔.]

“…….”

[언제나 너를 지켜주고 싶었단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겨우 수습밖에 하지 못했지만.]

어머니.

리베르탄 공작 부인을 향해 쉽게 용서를 빌면서 내뱉었던 단어. 정작 그 말이 친어머니에겐 쉽게 나오지 않았다.

나는 멍하니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고생을 많이 한 것처럼 야윈 몸, 아름다운 외모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후줄근하게 낡은 옷차림이 순탄치 않은 생을 보여주는 듯했다.


“언제나 저를 지켜보셨다고요?”

입술을 열어 떠뜸떠듬 물었다.


“그게 정말 사실이에요?”

[그래. 나는 너를 지키기 위해 보호 마법의 형태로 함께하고 있었단다.]

“보호 마법.”

그제야 상황이 대충 이해가 되었다.

성황이 나를 바로 노리지 못한 이유, 나를 보호하고 있다던 그 마법이다.


“그게 바로 어머니였군요. 성황에게서 계속 저를 지켜주고 계셨던 거예요.”

[결국 제대로 지켜내진 못했지.]

어머니가 죄책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변명 같겠지만, 보호 마법에는 한계가 있단다. 내가 널 위해 나설수록 마법이 점점 무너지게 되지.]

“…….”

[그래서 성황 그 괴물이 나설 때까지 내가 직접 나설 수 없었다. 이 보호 마법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서 아껴둬야 하니까.]

“…….”

[나도 알아, 이렇게 얘기해도 결국 네가 리베르탄 공작가에서 학대받을 때 아무것도 못 해준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 너도 내가 많이 원망스럽겠지.]

“그러면요.”

나는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리베르탄 공작가에서 제가 학대받았을 때요, 그때 아무것도 기억 못 한 것도 어머니가 한 것이었나요?”

[그래, 내가 한 거란다.]

어머니는 애틋한 얼굴로 연신 나를 보며 울음을 삼켰다.


[리베르탄 그놈들에게서 널 구해줄 수는 없어도, 그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네가 안고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린 네겐 너무 큰 상처였으니까.]

“역시 그랬군요.”

[미안하다. 너를 그 끔찍한 곳에서 꺼낼 방법을 수없이 고민했지만, 성황 그놈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무능한 어미라서 너를 볼 낯이 없구나.]

나는 자책하는 어머니에게 또 물었다.


“저는 괜찮아요.”

[……괜찮다고? 내가 정녕 원망스럽지 않니?]

“네. 그러니 자책하지 마세요, 어머니.”

그 말에 어머니가 눈시울을 붉히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이해가 안 돼. 나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어미인데.]

“제 곁에서 저를 계속 지켜봐 주셨다고 했잖아요.”

아무래도 어머니는 내가 그녀를 미워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난 진심으로 그녀가 원망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고마웠다.


“그동안, 저는 고아원에서 버려져 늘 혼자라고 생각했어요.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애라고요.”

[아니야! 너는 내가 정말로 사랑한…….]

어머니는 말문이 막힌 듯 말을 멈췄다.


“그래서 괜찮다는 거예요.”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웃어줬다.


“저는 버림받은 아이가 아니었던 거잖아요. 어머니도 저를 사랑했지만, 어쩔 수 없었던 거니까. 그러니까 전 어머니가 전혀 원망스럽지 않아요.”

[…….]

“고마워요. 언제나 저를 지켜주셔서요. 음, 비록 이번에 처음 보기는 하지만요.”

조심스럽게 소리 없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라?’

어머니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환상을 만진 것처럼 그대로 통과되었다.


[……내가 고마워. 이렇게 해준 것 없는 어미를, 어미 취급해 주는구나. 모두를 원망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는데.]

“저 괜찮다니까요.”

[에스텔. 이제 시간이 없구나.]

어머니가 슬프게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닿지 않는 우리의 손이 비슷한 위치에 머물렀다. 온기 하나 느껴지지 않아도 그녀의 마음이 전해지는 듯했다.


[너를 이곳으로 무사히 이동시키는 데 내 남은 힘을 거의 다 사용했어. 이제 나는 너를 보호해 줄 수 없을 거다.]

“제가 이길 수 있을까요?”

[어렵겠지. 많이 힘들겠지만 그래도 나쁜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네가 그놈의 마물을 죄다 없애버리는 바람에 그놈도 소멸할 위기에 처했으니까. 하지만 너도 힘내야 해.]

어머니가 결연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너도 한 아이의 어머니니까.]

“네?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거 아닌가요? 저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인데요.”

하지만 농담이라고 하기엔 어머니의 목소리는 몹시 진지했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녀를 바라봤다. 내 눈빛을 알아들었는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나마 어미로서 너에게 한 가지 행복을 지켜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렇다는 건…….”

[그래. 악마의 저주가 네 아이에게 닿기 전에, 요정의 힘으로 그 아이의 존재를 숨겨뒀다. 그래서 그 누구도 네 아이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을 거다.]

“아…….”

가끔씩 들리던 아이의 심장 고동, 함께 있다 느꼈던 그 순간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안도감에 주저앉았다.


[부디 네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아니에요, 정말 큰 도움이 되었어요. 감사해요, 어머니.”

[하지만 에스텔, 네가 무리해서 요정의 힘을 사용하는 바람에 너는 더 이상 멀쩡히 블란쳇 공작저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어.]

기뻐하던 어머니의 표정이 흐려졌다.


[네 힘마저 취소시킬 수는 없어서 아마 다들 너를 네가 원했던 대로 기억하고 있을…….]

“저는 괜찮아요. 그게 제가 바란 것이었으니까요.”

생각지 못한 선물을 얻게 되었지만, 그래도 내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요한은 여전히 저주에 물들어 있고, 나와 얽히면 블란쳇 공작가는 계속 위험에 처하게 될 거다.


“어머니 말대로 저도 한 아이의 엄마니까 더 강해지려고 노력할게요. 사랑해요.”

“나도, 사랑한다. 에스텔.”

어머니가 슬픈 얼굴로 웃었다.

어머니와 함께 있던 공간이 점점 무너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다가 힘겨운 숨을 내뱉었다.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 너한테 한 가지 제안할 게 있다. 성황에게서 너와 네 아이를 지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도대체 무엇이길래요?”

[힘을 다 잃어버린 그놈은 블란쳇 공작가를 비롯해 네가 머물렀던 흔적을 쫓아 너를 다시 찾아내려 할 거다. 다시 말해, 네가 제국에 돌아가게 되면 성황에게 덜미를 접힐 가능성이 너무 높아.]

“…….”

[이 어미가 너를 현실로 돌려보낼 때, 제국에서 떨어진 적당한 장소에 보내주마. 여자 혼자 지내기 힘들지 않은 곳으로.]

“그러면 좋은 거 아닌가요? 왜 슬픈 표정을 짓고 계세요?”

[내 힘이 완전하지 않아 완벽히 너를 감추려다, 네 기억마저도 잘못해서 지워질 수 있기 때문이야.]

기억이 지워질지 모른다.


[에스텔, 잘못해서 요한 블란쳇에 대한 기억이 사라져 버려도 괜찮겠니?]

“……그거 진짜 고민되긴 하네요.”

요한에 대한 기억은 나한테 정말 소중했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어요. 그게 이 아이를 지킬 수 있는 최선이라면.”

[……에스텔.]

“어차피 요한도 저를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요. 어쩌면 저도 요한에 대한 걸 다 잊어버리는 게 맞는 것 같네요.”

별빛처럼 찬란한 빛이 내 몸 전체를 감싸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제대로 안을 수 없는 팔로 나를 끌어안았다.


[제대로 품에 안아주지 못했지만, 내 마음만큼은 널 언제나 안고 있었어.]

“……어머니.”

[내 영혼을 바쳐 네가 행복할 수 있기를 빌어주마. 너는 꼭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빛이 완전히 사그라들면서 익숙한 어둠이 찾아왔다.

나는 낯선 마을에서 다시 눈을 떴다.


“에스텔!”

 

***

끼이익- 쿠웅!

신관들의 신성력으로 둘러져 있던 성국의 성벽의 문이 활짝 열렸다.

군마를 이끌고 나타난 블란쳇 기사단을 바라보는 성국 사람들은 모두 비탄에 잠겨 있었다.

아직 성국이 모시는 아테아 신을 향한 기도를 놓지 못한 신자가 슬프게 말했다.


“우리 성국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현재의 성국이 리베르탄 공작가와 펠시스 후작가의 더러운 음모에 얽히며 신의를 많이 잃어버렸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성국은 성국이었다.

제국이 탄생했던 순간부터 그 고결한 위치를 지켜왔던 신성한 왕국. 아무리 생각해도 성국이 채 한 달도 안 되는 시간에 완전히 무너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쉿, 조용히 하게. 블란쳇 공작의 귀에 들어갈지도 모르니.”

“블란쳇 공작에 대한 험담을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자네 아직도 블란쳇 공작에 대한 새로운 소문 못 들었나? 리베르탄에 대한 복수를 마친 뒤 완전히 미쳐서 관련자들을 싸그리 끔찍하게 죽여버렸다고.”

“그건 더러운 일에 관련된 자들이나…….”

“당장 아무 관련 없어 보이던 마을 전체가 끌려가 죄다 하루 만에 죽어버렸네. 공작이 마음에 안 드는 자들만 데려간단 보장이 어디 있나?”

불만을 토로하던 신자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 고개를 숙였다.

공포에 짓눌린 상황은 비단 성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드높은 권세에 자부심이 높기는 하나, 블란쳇 기사단 역시 강한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장님.”

블란쳇 기사 하나가 기사단장 레이몬드를 찾아 물었다.


“폐하의 부름대로 성국까지 무너뜨렸으니 저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블란쳇 공작저로 복귀해 전에 했던 일을 그대로 하겠지.”

“정말 그럴 수 있는 겁니까?”

“그럼 뭘 더 하겠어?”

레이몬드의 태평한 말에 기사가 침을 꿀꺽 삼키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지금 주군께서 리베르탄에 복수하다가 미쳐버렸다는 소문이 엄청 돌고 있습니다. 진짜 소문대로 반역까지 해버리는 건 아니겠지요?

“헛소문에 휘둘리다니. 네가 그러고도 블란쳇 기사냐?”

“오죽하면 이러겠습니까. 거기다 요즘 주군께서 확실히 좀…….”

기사는 두려운 눈길로 요한이 움직인 방향을 바라봤다.

먼저 할 일이 있다며 기사들까지 모두 물리고 성국의 첨탑으로 들어간 요한.

최근 실성한 듯 이상한 소리를 하거나, 자던 중에 뛰쳐나오며 죽어 사라진 전 공작 부인을 찾으며 광소를 터뜨리는 등 기이한 행동을 일삼기 시작한 요한이라 그 행동이 더욱 수상해 보였다.


“이놈아, 그럴 일 없으니 안심하고 얌전히 이 앞이나 지키고 있어.”

“옙, 전 단장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레이몬드는 후다닥 달려가는 기사들을 보며 시름에 잠겼다. 최근 저런 식으로 두려움을 호소하는 기사들이 늘어서 걱정이다.


‘주군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느냐마는…….’

확실히 레이몬드의 눈에도 현재의 요한은 불안해 보이는 구석이 많았다.

똑똑.

첨탑 문을 두드린 레이몬드가 일방적으로 통보하며 문을 열었다.


“주군. 무사히 안에 계시지요, 이제 시간이 좀 많이 지났으니 저도 슬슬 들어가 보겠습니다.”

첨탑 안은 온통 망가진 것투성이였다.


‘성국의 성황이 간혹 기도하러 머무르는 곳이라 잘 관리되어 있다니…….’

레이몬드는 당장 발에 걸리적거리는 나무 파편을 쓱 옆으로 치우며 벽에 무기력하게 늘어진 요한을 발견했다.


“주군, 이 첨탑에 방문한 목적은 충족하셨습니까?”

“그래 보이나?”

“전혀요.”

“그래. 아무것도 없었다.”

요한이 짜증스럽게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냉소했다.


“그 더러운 놈이 도망친 흔적밖에 없더군. 이런 식으로 그 성황 놈을 잡긴 어렵겠어.”

“도대체 왜 따로 성황이 있다 그러십니까? 성황은 저기 성궁에 멀쩡히 있지 않습니까?”

“아니, 따로 있다. 그놈을 잡아야 찾을 수 있어.”

 

 
집착 어린 요한의 목소리에 레이몬드의 눈빛이 흐려졌다.


“또 전 공작 부인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