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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화 안녕 (162/182)


162화 안녕
2023.06.20.



 
요정의 결계에 진입하지 못하던 마물 중 하나의 붉은 눈동자가 보라색으로 변했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 거지?’

마물의 정신에 들어간 성황의 시야에 에스텔과 요한의 모습이 들어왔다.

에스텔이 마물의 앞에 섰다.

두려움에 떨어야 마땅하건만, 마물을 올려다보는 에스텔의 표정은 고요하기만 했다. 성황이 에스텔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 나약한 요정의 힘을 믿는 건가?

솔직히 에스텔이 이 정도까지 요정의 힘을 사용하는 것은 예상외의 상황이긴 했다. 누군가 요정의 힘에 대해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텐데.

하지만 그래 봐야 요정 하나가 가진 힘이다. 다른 모든 요정을 잡아먹은 성황의 힘을 이길 수는 없다.


-네가 뭘 꾸미는진 모르겠지만, 모조리 헛수고다.

성황이 교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에스텔이 다시 절망에 빠지기를, 잡아먹기 쉽도록 자포자기하기를 바랐다.


-네가 행복해질 일 따위 없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영원히 너를 쫓아가 불행에 빠뜨린 뒤 없애버릴 테니까.

“음, 그래?”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건가, 아니면 아직 어리석은 희망을 품고 있는 건가?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뒤에 있는 요한은 마력이 묶인 채 쓰러져 있었다.

요한도 없는 이상, 성황을 힘으로 견줄 수 있는 자도 없다.

성황이 에스텔의 남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웃어?

“네 협박이 별로 안 무서워서.”

-무어라?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여태 모든 요정을 없애버린 나다. 너보다 지혜로운 요정도, 강인한 요정도 모두 죽었지.

“아주 열심히 살았네.”

-별것도 없는 너 같은 게 내게 대항할 수 있을 것 같나?

“그러면 어서 빨리 없애지그래?”

에스텔은 성황을 보며 싱긋 웃었다.


“없어 보이게 입만 열지 말고.”

성황이 보라색 눈을 부릅떴다. 마물의 몸이 꿈틀거리며 에스텔을 향해 날아갔다.

쾅! 치잉-

요정의 보호막이 마물의 몸을 튕겨냈다.


-이딴 별 볼 일 없는 보호막! 고작 몇 분도 버티지 못할 보호막이 널 지켜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아니, 딱히.”

마물의 몸에서 퍼져나온 마기가 요정의 보호막을 감싸고 압박하기 시작했다. 보호막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에스텔은 차분했다.


“네가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가지고 나를 노려왔는진 나도 알아. 하지만 그런다고 네가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뭔 개소리를…….

“네가 날 행복하지 못하게 만들어도 상관없어. 난 행복해질 생각 같은 거 없거든.”

성황이 코웃음을 쳤다.


-우습다. 그딴 허세가 통할 듯싶으냐!

“진짠데, 나도 네가 이렇게 나올 줄 알고, 내 목숨 정도는 포기해 놨어.”

에스텔이 들고 있던 화로를 성황에게 보여주듯 살짝 흔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너도 곤란하다며?”

여유롭게 보호막을 옥죄던 성황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디서 그딴 헛소리를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그래서 그동안 리베르탄 공작가에서 죽지 못한 채 적당히 살아가도록 내버려 뒀다던데.”

모든 것을 다 아는 눈동자다.


-…….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한가 보네?”

-……그럴 리 없다.

“그렇게 믿고 싶은 거겠지.”

-도대체 어떻게 알았지?

에스텔이 성황의 속내를 다 꿰뚫어 보듯 피식 웃었다.


“별거 없어. 나는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모든 진실을 알아낼 수 있거든.”

보라색 눈동자를 바라보는 에스텔의 남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네가 가장 감추고 싶어 하는 모든 걸 다 알아낼 수 있지. 안 믿기면 다른 거라도 얘기해 줄까? 성황 네 이름이…….”

-웃기지 마라!

일순 성황은 그의 치부가 낱낱이 까발려져 전시당하는 듯한 수치심에 격분했다.


-너 하나 죽는다고 무너질 내가 아니다!

성황은 길길이 날뛰며 보호막에 온 힘을 집중했다. 겨우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던 보호막이 찌그러졌다가 겨우 복구되었다.


-이딴 것쯤……!

에스텔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 진짜.”

그녀는 속 모를 눈빛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성황이라 해서 대단한 줄 알았더니. 이거 너무 쉽네.”

물론 이 말은 성황 들으라고 일부러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소리였다.


‘이렇게 무시당한 적이 없어서 그런가?’

성황이 점차 이성을 잃어가는 게 보였다.


‘어차피 보이는 것도 없는데.’

 

***

쨍그랑!

성황의 손에 박살 났던 보호막이 얄밉게 다시 복구되었다.


‘한두 번 정도만 남았나?’

이제 성황은 당장 보호막을 부수는 데 집중하느라 다른 걸 눈치채지 못할 거다.


‘역시 성황의 진실까지 꿰뚫어 보지는 못하는구나.’

솔직히 미리 준비해 놓기는 했어도 성황의 진실을 알아보려 했다.

그런데 다른 요정 전부를 잡아먹었다는 대단한 괴물답게, 내 힘으로는 성황의 진실을 파악해 낼 수는 없었다.


‘뭐, 상관없긴 해.’

내가 보지 못하는 진실은 성황 본인의 진실일 뿐이다. 다시 말해, 성황이 만든 피조물인 오르테카 재상의 진실 정도는 확인할 수 있단 거다.


‘그런 게 아니라면 내가 왜 황태자를 만났겠어.’

오르테카 재상은 황실에 언제든 연락할 수 있는 자신의 끈을 두었고, 나는 황태자에게 부탁해 그 끈에 연락할 말을 전했다.

현재 궁지에 몰린 황태자는 황후까지 움직일 수 있는 내 부탁을 거역하지 못했다.


‘대단하군요. 어찌 아셨습니까? 제가 성황의 끄나풀이라는 건…….’


‘지금 이 순간?’

 
그 뒤는 어렵지 그렇게 오르테카 재상을 마주한 순간, 상황은 내가 원하는 대로 굴러갈 수밖에 없었다.


‘오르테카 후작, 아니, 이제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하나?’


‘뭐가 됐든 편하게 불러주십시오. 특별히 정해진 것도 없으니.’


‘하긴. 그렇겠네요. 성황이 당신한테 제대로 된 이름을 지어줬을 리는 없으니까요. 그쵸?’

 
인간이라면, 아니, 생명체라면 누구나 가장 숨기고 싶어 하는 비밀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니까.


‘그걸 어떻게…….’


‘성황은 마지막 요정인 나를 다 흡수해야 하나 보네. 어쩐지, 어린 시절 내내 뒤에서 수작만 부린다 싶더니. 그동안 나한테 계속 말만 하고 제대로 죽이려 들진 못했구나.’

 
오르테카 재상의 비밀은 내게 큰 도움이 되어주었다. 덕분에 성황의 목적과 행동을 파악해 낼 수 있었다.


‘그런데 오르테카 후작, 창조자란 이유로 무조건 성황의 말에 복종하면서 사는 삶이 마음에 들어요?’

 
무엇보다 성황을 끌어들일 수 있는 카드가 되어주었지.


‘내가 당신을 구해줄 순 없지만, 한 번쯤 삶에 보람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데. 내 제안 한번 들어볼래요?’

 
일부러 성황을 끌어들여서 함정을 팠다.

내 힘을 흡수하지 못해 무너지도록, 그리고 혹여 내 계획이 통하지 않아도 요한에게 해를 가할 수 없게 잔뜩 무리하도록.

쿠웅!

마지막 결계가 깨졌다. 나는 주위에 골고루 기름을 붓고 뒤에 눕혀놓은 요한을 바라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절박하게 애원했다.


“……에스텔. 하지 마.”

애틋하다 못해 갈라지는 목소리에 나도 심장이 저릿했다. 요한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자꾸 흔들렸다.


‘요한도 거짓말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겠구나.’

요한을 많이 원망했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기만하는 것도 제법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태연하게 물었다.


“내가 뭘 할 줄 알고?”

“뭐가 됐든, 하지 마. 제발.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마!”

과연 요한은 눈치가 참 빠르다.


‘이래서 복수한다고 믿게 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도 이제 다 끝났다.

그동안 차근차근 준비해 온 내 목표.

모든 문제의 근원이 되었던 나를 없애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나를 지운다.

모두가 자연스럽게 요한이 나를 포함한 리베르탄에게 복수를 마쳤다고 기억하도록.

마물을 끌어들인 피해가 남지 않게 주위에 기사들을 비롯한 사람들을 다 초대하지 않고, 마물과 함께 사라질 준비도 다 끝냈다.

블란쳇 공작의 저택으로 돌아가도 내가 살았다는 흔적 하나 남아 있지 않을 거다. 기억에 혼선이 생기지 않도록 다 없애버렸으니까.


‘요한도 나 때문에 자책하는 일도 없겠지.’

요한의 모습이 흐릿하게 변했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내가 팔목에 채워놓은 마도구 팔찌가 불길한 빛으로 번뜩였다.


“혹시 지금 요한이 이동하지 않게 막아놓고 있는 거야?”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방해하지도 않을게. 대신 내가 곁에 계속 남아 있게 해줘.”

“……요한.”

“나 보내지마. 도대체 뭘 하려-”

소리치던 요한의 목울대가 울컥거리더니 짙은 피를 토해냈다. 마력 독으로 정지된 마력을 강제로 움직이려 했던 부작용이다.


“봐. 이렇게 아파하면서. 무리하지 마.”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

내가 요한한테 다가가자 요한이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외쳤다.


“지금 네가 나 대신 죽으려 한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아?”

“음, 미안한데 그런 건 아니야.”

“내가 그 말을 믿을 거라 생각해?”

“진짜야. 그러니까 내 걱정 안 해도 돼.”

나는 흥분한 요한의 두 손을 잡았다. 그러자 반항하듯 움직이던 요한이 한층 잠잠해진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그거 말고 다른 것도 할 생각이구나?”

“그런가?”

“그러고 보니 아까 했던 말도 이상했어. 내가 더 상처받지 않는다니.”

요한의 보석 같은 붉은 눈동자가 눈물에 젖어 슬픔으로 일렁였다. 나는 요한이 더 무리하지 않게 그가 잡아 뜯으려는 마도구를 고정시켰다.

마도구에 돌아오는 빛이 더 선명해졌다.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네가 그런 걸 믿을 리도 없고. 도대체 무슨 이상한 수를-”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장난치지 마.”

저 붉은 눈동자.

처음 저 눈동자를 봤을 때, 나는 그가 몹시 두려웠다. 피처럼 진하고 태양처럼 빛나고 있어서 당장에라도 내 모든 것을 꿰뚫어 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새 저 눈동자는 내게 유일한 태양이 되었다. 그의 다정함은 비록 한때 거짓이었을지라도 내가 가진 유일한 사랑이었으니까.


‘이제 다시 이렇게 눈이 마주치는 일도 없겠지.’

나는 요한의 입술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천천히 그를 바라보며 일어섰다.

쨍그랑!

성황이 기어코 마지막 보호막을 깨뜨렸다.

이제 더 시간이 없다.

성황의 힘이 닿기 전, 나는 꼼꼼하게 퍼뜨려놨던 기름에 불을 붙였다.

화르륵, 거대한 불이 일시에 일어나 모든 것을 태워버릴 것처럼 타올랐다. 이제 이 불길은 아래에 숨겨둔 마법 폭발물과 만나 모든 것을 없애버릴 거다.

다행히 마도구가 정상적으로 작동해 요한의 몸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에스텔-!”

나는 애타게 바라보는 요한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줬다.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예쁜 얼굴로.


“안녕, 요한.”

 

 
요한이 나를 모두 잊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저릿했다. 다잡은 마음이 자꾸 흐트러질 것 같다.


“네 복수는 이루어졌어. 이제 네가 살고 싶었던 인생을 살고…….”

눈가에 고이는 눈물을 애써 참았다.


“꼭 행복해.”

그렇게 불길 속에서, 마지막으로 아껴놨던 내 요정의 힘이 동시에 폭발했다.

쿠와아아앙!

새카만 암흑이 이 세상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

하늘에서 떨어지던 눈이 어느새 비가 되어 녹기 시작했다.

식장에서 떨어져 블란쳇 공작저에서 사람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던 베티가 왠지 모를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왜 자꾸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지?’

떠나기 전, 에스텔은 베티와 약속했다.


‘마님. 주인님을 해치지 않겠다고, 더 이상 마님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는다고 약속해 주실 수 있으세요? 그게 아니면 전-’


‘그래, 약속할게.’

 
뜻밖에도 에스텔은 그 약속에 응했다.


‘왜 그래, 나 여태 베티한테는 거짓말한 적 없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요…….’


‘너무 걱정하지 마. 둘이서 잘 해결하고 올게.’

 
어쩐지 베티는 아름다운 신부 드레스를 입은 에스텔을, 그대로 두고 오는 것이 내내 불길하기만 했다.

쿠와아앙!

거대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식장이 있는 곳이었다. 거대한 불길이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넘실거렸다.


“이거 도대체 무슨-”

“부, 불이! 어서 저 불을 끄러 가야 합니다! 저 안에 주인님과 마님이!”

그 순간 블란쳇 공작저 앞에서 마력이 모이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결혼식 예복을 입은 요한이었다.


“주, 주인님?”

피로 얼룩진 요한이 숨을 헐떡였다. 기절할 것 같은 정신을 억지로 붙잡은 얼굴이었다.


“어서, 에스텔을…….”

“마님께서 설마 저 안에?”

급한 모두의 눈이 막 식장에 닿은 찰나, 떨어지는 비가 모두를 감쌌다.

어느새 기절한 요한을 앞에 둔 모두가 갑자기 고요해졌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정적이 잠시 흘렀다.

베티가 눈을 끔뻑였다.


‘내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었지?’

옆에 있던 사용인들이 말했다.


“헨리 씨를 불러. 아무래도 주인님께서 폭발에서 살아 돌아오신 모양이야.”

“딱히 구해야 할 사람 같은 건 없지?”

“주인님 외엔 마님이…….”

그 순간 사용인들이 어색하게 웃었다.


“음, 급할 거 없이 천천히 움직입시다. 어차피 저 식장이 다 타도 다른 곳으로 불이 안 붙게 조치도 다 취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겠지. 그 여자가 이제 죽은 건가?”

“예. 제 부모들처럼 죽었겠네요.”

베티도 그들에게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정말 리베르탄 공작가가 다 죽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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