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이제 내기는 끝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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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화 이제 내기는 끝났지?
2023.06.13.
제국 사교계는 블란쳇 공작의 결혼식에 크게 흥분했다.
“결혼식을 다시 열겠다니, 블란쳇 공작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실 수 있을까요?”
“부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워낙 지극하니 가능한 일이시겠지요. 거기다 블란쳇 공작 부부는 다른 부부들처럼 결혼식을 하지도 않았었잖아요.”
“그래도 그렇지, 그런 상황이라고 해서 진짜 블란쳇 공작처럼 할 수 있는 남편이 얼마나 있겠어요.”
귀족 사이에서 결혼은 정략적 결합을 상징한다. 그래서 이미 부부 생활을 하면 다시 결혼하는 일 같은 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블란쳇 공작가의 행보가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맞아요. 결혼식 여는 데 한두 푼이 드는 것도 아니고요.”
“제가 의상실에서 들었는데, 드레스 후보만 수십 가지였는데, 그걸 다 구매했다고 하더라고요. 진짜 엄청나지요?”
“저도 그 결혼식 꼭 가고 싶어요. 얼마나 아름다울까.”
꿈을 꾸는 듯 두 손을 모았던 귀족 영애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왜 결혼식에 아무도 초대하지 않는 걸까요? 기왕 여는 거 모두를 초대해서 축하받으면 더 좋잖아요.”
“아마 두 사람만의 추억으로 간직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아무도 없으니까 서로에게 더 집중할 수 있잖아요.”
“그치만 그래도 전 아무도 없는 건 그래요. 듣자 하니 사용인들도 결혼식이 벌어지는 동안에는 주위에 절대 오지 못하게 했다면서요.”
“저는 오히려 두 사람에 대한 사랑만으로 결혼식을 여는 것 같아서 더 좋게 느껴져요. 그 대단하다는 결혼식에 초대될 수 없어서 아쉽기는 하지만.”
워낙 이례적인 행보에 다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의문을 품었다.
“그러고 보니 남성분들의 입장은 조금 다르려나요. 공자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세간의 의견과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영애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늘씬한 남자가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였다.
“비밀스럽게 한다는 건, 어떤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하거든요.”
“어떤 의도 말인가요?”
“흠, 그건 저도 잘 모르겠군요. 여러분은 어떤 비밀이 있을 것 같으신가요?”
남자는 자연스럽게 결혼식에 대해 새로운 화두를 꺼냈다. 사람들은 새 이야깃거리에 열성적인 토론을 거듭하다 남자가 있던 자리를 쳐다봤다.
“-어쩌면 결혼식 자체를 하지 않을 수도 있단 거죠. 이게 아니면 비밀로 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요. 남작님도 그렇게 생각- 어디 가셨지?”
하지만 남자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다시 자기들만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화두를 붙였던 남자는 자연스럽게 파티장에서 빠져나와 마차를 타고 으슥한 곳으로 향했다.
남자가 제 얼굴을 만지작거리자, 녹색으로 변해 있던 눈동자가 다시 평소의 보라색 눈동자로 변했다.
‘얻을 수 있는 이야기는 여기까진가.’
오르테카 재상은 신분을 위장해 블란쳇 공작가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성국에 바로 달려올 거라 생각했던 공작이 계속 뭉그적거렸던 이유가, 고작 결혼식 때문이라니.
‘분명 결혼식에 뭔가가 있을 텐데.’
오르테카 재상은 세간에서 떠드는 비밀 결혼식에 대한 이유를 결코 믿지 않았다.
객관적인 근거가 없기는 하나, 재상은 에스텔과 요한 사이에 이변이 생겼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저주 때문에 사이가 틀어진 거라면, 굳이 결혼식을 열 이유도 없을 거고.’
오르테카 재상이 어느 한 저택에 들어간 순간, 방에 연결되어 있던 그림자가 꿈틀거리며 괴기한 소리를 냈다.
-결혼식에 대한 새로운 정보는 얻었나?
“영양가 있는 얘기는 없었습니다. 블란쳇 공작이 정보를 철저하게 관리했더군요.”
-그럼 수도로 올라가 얻어낸 게 아무것도 없단 건가?
그림자가 짙어지며 성황의 모습이 되었다. 성황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이를 아득 갈았다.
-오르테카 재상, 지금 그게 나한테 할 말인가? 그렇게 여유나 부릴 때란 말이야!
성황의 팔이 불쑥 솟아 오르테카 재상의 목을 콱 움켜쥐었다.
쿵!
-장난치지 마라. 시간이 없다.
머리를 벽에 부딪친 재상이 켁켁 신음했다. 성황이 보라색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서둘러 마지막 요정의 보호를 깨고 내 앞에 대령할 계획이나 짜와. 쓸데없이 결혼식 같은 거나 뒤질 생각하지 말고.
“……명심하겠습니다.”
-좋다. 한 번 더 널 믿어보도록 하지.
재상의 목을 쥔 성황의 팔이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처럼 꿈틀거렸다. 성황은 짜증스럽게 재상을 풀어주었다.
-명심해라. 내가 죽으면 너도 끝이다. 너는 내가 편히 움직이기 위해 만들어낸 인공물에 불과하니.
“그 점은 늘 이해하고 있습니다.”
바닥에 주저앉은 재상이 정중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항상 대답은 잘하지. 별 소득 없이 공작에게 휘둘려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 주제에.
성황은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재상을 노려봤다.
오르테카 재상은 창조주인 성황조차 가끔 그 속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저만큼 독자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놈이 없으니 계속 써야겠지만…….’
마지막 요정의 힘을 얻어 신이 된다면, 저놈도 처리해 버려야 속이 시원할 듯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마지막 요정을 노릴 생각이지?
“두 사람 사이에 생긴 이변을 이용할 생각입니다.”
-이변이 생긴 것은 확실한가?
“최근 블란쳇 공작이 마법을 잘 사용하지 않는 것만 봐도 무슨 일이 생긴 건 확실합니다. 두 사람이 같이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붉은 자국이 남은 제 목을 만지작거리던 오르테카 재상이 순종적으로 대답했다.
“결혼식장에 마물을 사용합시다. 둘밖에 없다는 상황을 이용하는 것이지요.”
-블란쳇 공작이 없애지 않겠나?
“블란쳇 공작 혼자서는 어려울 마물을 동원하면 됩니다.”
오르테카 재상이 녹색 눈을 빛냈다.
“무엇보다 블란쳇 기사단이 제국 밖으로 빠져나간 지금이 기회입니다. 성국 출정을 위해서라는 이유라지만, 무슨 이유든 간에 결혼식에 맞춰 올 수는 없을 겁니다.”
-제법 많은 마물이 필요하겠군. 그것도 제때에 맞춰서.
성황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지금 내 힘은 무너지는 중이다. 그러니 이번에 잘못되면 너도 성치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 정도로 자신 있나?
“확실하게 만들어보겠습니다.”
성황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당장 마물을 시간 맞춰 움직이려면 무리겠지만, 그보다 더 좋은 방법도 없어 보였다.
그래서 미처 살피지 못했다.
고개 숙인 오르테카 재상이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성황의 발을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
에스텔이 하얀 웨딩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빙글 돌았다.
“이 웨딩드레스로 할 건데, 어때?”
“예. 너무 잘 어울려요.”
평소라면 자신이 더 신나서 드레스를 골랐을 베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주인님께 미리 보여드리지 않아도 괜찮으신가요? 주인님도 같이 보시면 좋아하실 텐데.”
“결혼식 당일에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어서 그래. 요한도 보면 마음에 들어 하겠지?”
베티는 이제 에스텔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마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걸까?’
에스텔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그녀의 행보가 더 이상해졌다.
‘마님께서는 주인님께 복수하고 싶으신 걸까?’
마침 주인님도 비슷한 질문을 하긴 했다.
‘에스텔이 날 많이 미워하는 것 같은가?’
‘마님께서 저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얘기해 줘서 고맙다. 돌아가서 일에 전념하도록.’
상황만 보면 에스텔이 요한을 전처럼 사랑하지 않는 듯 보였다.
하지만 베티의 상식으로는,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굳이 화려한 결혼식을 이렇게 설레는 얼굴로 준비할 이유가 없었다.
‘정말 모르겠어.’
결혼식을 준비한답시고 이상한 명령을 계속 내린 것도 마음에 걸렸다.
‘진짜 마님께서는 주인님께 복수하려는, 정말 죽이시기라도 하려는 걸까?’
거울을 보며 장신구를 고르고 있는 에스텔을 바라보는 베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
다음 날이 결혼식이다.
레이몬드는 수도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요한을 찾았다.
“주군, 이대로 괜찮으십니까?”
“뭐가 문제지?”
“……마님, 말씀이십니다.”
레이몬드가 조사한 결과를 요한의 앞에 올려두었다. 서류를 힐끔 본 요한이 망설임 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게 왜?”
“그게 그렇게 가볍게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태연한 요한의 말에 레이몬드가 언성을 높였다.
“마님께서 결혼식장 근처에 기름을 부어두었습니다. 언제든 불만 붙이면 바로 불이 날 수 있도록요.”
“불이 나도 주위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대비도 다 해놨지.”
“주군께서 선물하셨던 마도구 팔찌 기능도 마법사를 통해 확인하셨습니다. 이건 아무리 봐도…….”
에스텔은 마도구 팔찌가 어떤 식으로 상대를 ‘이동’시키는지, 그리고 거기에 어떤 제약이 없는지 다시 확인했다.
요한이 마력이 통하지 않고, 마력을 다룰 줄 모르는 에스텔을 위해 만든 마도구라 누구든 사용할 수 있었다.
요한은 팔짱을 끼며 답했다.
“내 선물을 사용하려나 보지.”
“기사단이 도우러 올 수 없도록 성국 근처까지 파견하시게 하고 말입니까? 그게 결혼식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건 오히려 주군이 위험하게…….”
“그만.”
요한이 입꼬리를 픽 들어 올렸다.
“더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애초에 부인도 나한테 딱히 숨길 마음이 없던 것 같던걸?”
“예?”
“자신을 막고 싶으면 얼마든지 막으라는 거지. 하지만 그걸 막는 순간, 에스텔이 나한테 준 기회도 끝나는 걸 거고.”
태연한 요한의 대답에 레이몬드가 답답해서 가슴을 크게 두드렸다.
“그러면 어쩌자는 겁니까. 정녕 마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뭐, 주군께서 목숨이라도 바치시겠단 말입니까?”
“그래, 맞아.”
요한은 레이몬드가 오기 전, 마력 독 전문가를 불러 확인해 보았다.
‘예상외로 마력 독이 치명적이었어.’
마력 독에 있던 어떤 성분 때문인지는 몰라도 흑마력을 지닌 요한과는 상극이었다. 그래서인지 단순히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게 아니라 몸에 주기적으로 타격을 주기도 했다.
‘에스텔은 더 좋아하려나?’
그녀는 그에게 고통을 주고 싶어 했을 테니까.
“날 죽이고 싶어 한다면 죽어줘야지.”
“주군!”
“그보다 이걸 보지 않겠나?”
요한은 황당해하는 레이몬드에게 문서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또 뭡니까? 유언장?”
레이몬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죽고 난 뒤 아무 문제 없이 그녀가 살 수 있도록 마련해 둔 거야.”
아마도 에스텔은, 결혼식장에서 무기력해진 그를 죽이고 마도구 팔찌를 이용해 혼자 결혼식장에 빠져나갈 계획인 것 같았다.
‘내 죽음에 에스텔이 개입되어 있다면, 재산을 다른 사람한테 빼앗길 수도 있어.’
딱히 상관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요한은 그가 죽은 뒤에도 에스텔이 여유롭게 살 수 있기를 바랐다.
그게 그가 바라는 마지막이었다.
“어차피 복수 끝에 살 마음도 없었어.”
“…….”
“돌아온 뒤 에스텔의 곁을 잘 보좌해줘. 내 빈자리가 힘들지 않도록.”
레이몬드는 황망한 눈으로 요한의 유언장을 받아들었다.
몇 번의 설전이 이어졌지만, 큰 소득은 없었다. 그렇게 레이몬드는 최소 경비 인원만 남겨둔 채 블란쳇 공작저를 떠났다.
다음 날, 결혼식 날 아침이 밝았다.
***
아침부터 저택은 기묘한 활기로 가득했다.
[결혼식 안내문.]
요한은 결혼식 안내문을 따라 식장에 들어섰다.
푸른 에덴 로즈가 우아하게 채워진 결혼식장, 유리로 이루어진 천장에선 적당히 따스한 겨울 햇볕이 그대로 내리쬐었다.
붉은 양탄자의 끝에 에스텔이 있었다.
등 뒤로 늘어진 하얀 면사포가 요한의 눈에 들어왔다.
하객 하나 없고, 주례도 준비되지 않은 결혼식.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하는 결혼식이다.
“요한, 왔구나.”
정면을 보고 있던 에스텔이 요한이 옆에 도착하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요한이 단상 앞에 서서 에스텔의 흰 면사포를 들어 올렸다. 결혼식을 위해 곱게 꾸민 에스텔의 얼굴이 보였다.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너무 예쁘네.”
“요한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다.”
에스텔이 그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혹시나 안 예뻐 보일까 봐 걱정했거든.”
“그런 걱정은 하지 마. 넌 뭘 해도 예쁘니까.”
“요한은 여전히 참 칭찬을 잘하네.”
그녀가 요한에게 물었다.
“요한의 대답은 어때?”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을까?’
잔인할 정도로 핵심을 찌르는 질문.
지금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이보다 더 어려운 질문이 있을까.
‘참 훌륭한 함정이야.’
질끈, 마력 독의 통증이 올라왔다. 요한이 뻐근한 통증에 숨을 들이쉬며 답했다.
“에스텔.”
그가 남색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네가 나를 지금 사랑한다는 쪽에 걸게.”
“……어째서?”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고 싶지 않으니까.”
요한을 바라보는 에스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에스텔이 속눈썹을 내리깔며 물었다.
“내가 너한테 기회를 준다고 했잖아. 그런데도 그렇게 대답하고 싶어?”
“상황을 위한 거짓말이라도,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고 싶지 않아.”
요한이 에스텔에게 입 맞출 듯 고개를 숙였다.
“이제 이 내기는 끝났지? 어서 나를 죽이고 끝내자.”
에스텔이 이상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 대답은 안 물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