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잔인한 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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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화 잔인한 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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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화 잔인한 내기
2023.06.09.
어느새 밤이 깊어졌다.
요한은 황실에서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블란쳇 공작저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의 속마저 멀쩡하지 않았다.
‘에스텔, 도대체 뭘 할 생각이지?’
에스텔은 황태자 카를로스를 무척 싫어했다. 눈이 마주치는 것도 소름 끼쳐서 싫다고 했다.
‘가든파티의 성공을 위해서인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에스텔이 무리해서 가든파티를 성공시켜야 할 이유가 없었다.
‘다른 노림수가 있는 게 틀림없어.’
불안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요한은 조바심이 나 마차 창문을 검지로 두드렸다. 습관적으로 마력을 일으켜 저택으로 이동하려다 제한된 마력이 얼얼한 고통을 주었다.
‘확실히, 갑자기 사용할 수 없게 되니 불편하군.’
마력 독의 원료인 구름나무.
구름나무는 제국 바깥에 존재하는 나무였기에, 마력 독에 대한 연구는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마력 독을 섭취한 뒤 멀쩡했던 사람이 많으니, 요한은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다만 마력이 묶인 불편함과 고통이 예상보다 컸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냐.’
저릿한 감각에 요한이 이를 꽉 깨물었다.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에스텔 앞에서 티 낼 순 없다.’
그건 요한이 지키고 있는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동안 아팠던 에스텔에게 고작 독 하나로 유세 부리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이 정도 고통쯤은 별거 아니기도 했다.
그가 호흡을 고르며 표정을 관리했다.
‘성국 일정을 좀 미뤄야 하는 것만 빼면 마력이 필요한 일도 없다.’
다행히 황제와의 조율이 잘 이루어져 마력 독이 빠질 즈음에 맞춰서 성국에 방문할 수 있게 됐다.
멀리 블란쳇 공작저가 보였다.
가든파티로 환한 조명을 채우고 있어서 한눈에 들어왔다. 흥겨운 음악과 사람들 웃는 소리가 들렸다.
페트리샤가 그를 반겼다.
“블란쳇 공작님, 황궁 잘 돌아오셨습니까?”
“그래. 에스텔은?”
“마님께서는 에덴 로즈 정원 쪽에서 손님들과 대화 중이십니다. 제가 안내해 드릴까요?”
“아니, 내가 알아서 가지. 넌 손님 접대에 신경 쓰고 있도록.”
요한은 에덴 로즈 정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든파티 곳곳에 있는 악사가 감미로운 현악기를 연주했다.
와인 잔을 들고 가볍게 대화하던 귀족들이 요한을 발견하고 환대했다.
“어머, 블란쳇 공작님. 오늘 황궁에 가서 바쁘시다더니 벌써 돌아오셨네요.”
“부인이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두 분 사이는 여전하네요. 최근 두 분 사이에 불화가 있단 얘기가 돌았어도, 전 하나도 안 믿었거든요. 그런데 역시나!”
“전 이만 부인에게 인사해야 해서 가보겠습니다.”
요한은 우아하게 의례적으로 인사를 마친 뒤 에스텔을 찾아들어 갔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부인을 찾아 달려가는 그 모습에 요한을 바라보는 귀부인들의 시선이 부러움으로 가득 찼다.
“공작 부인도 참 곱고 아름다운 분이시지만, 여자로서 어쩔 수 없이 부럽네요. 공작님 같은 분의 사랑을 한몸에 독차지하고…….”
“그러니까요, 남편 얼굴만 봐도 참 행복하겠지요? 저희 남편은 낮이나 밤이나 한숨만 나오니.”
“그나마 블란쳇 공작 부인이 괜찮은 분이라 다행이지요. 이번 가든파티도 보면, 얼마나 예쁘게 잘 꾸몄는지 앞으로 블란쳇 공작가는 더 번성할 것 같네요.”
가든파티에 참석한 손님들 모두 에스텔이 분위기에 취해 만족스러워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에스텔의 모습이 쉬이 보이지 않아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
‘가든파티 손님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닌데-’
그러던 순간, 정원 안쪽에서 저택 방향으로 나오고 있는 남녀 한 쌍이 보였다.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다.
하지만 잘못 볼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알아들은 걸로 하죠.”
에스텔이 작은 목소리로 황태자에게 말했다. 황태자는 에스텔을 보며 복잡한 표정으로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해했다. 정말…….”
요한의 심장이 덜컥 무너졌다.
딱히 손을 잡고 있는 것도, 이상한 분위기가 흐르는 것도 아닌데 두 사람이 아무도 없는 정원에서 대화하고 나왔다는 것 자체에 분노가 치밀었다.
‘왜 다른 남자도 아닌 황태자와…….’
어떤 남자도 용납하지 않았을 테지만, 요한은 이성이 끊긴 사람처럼 빠르게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뭐 하는 거지?”
요한이 에스텔의 손을 붙잡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에스텔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뭐가?”
“지금 뭐 하고 있던…….”
황태자가 요한과 에스텔을 번갈아 보더니 한마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럼 이야기는 끝날 걸로 하지. 다음에 또 기회가 있기를 바라며.”
말 한 마디마다 거슬리지 않는 구석이 없었다. 요한이 정원 쪽의 어둠으로 에스텔을 잡아끌었다.
“-갑자기 왜 그래?”
“잠깐 둘이서 얘기하자.”
요한은 끓어오르는 흥분을 최대한 억누르며 에스텔의 손목에 힘을 주었다.
어둠이 짙게 가라앉은 에덴 로즈 정원.
파란색 꽃이 검게 보일 정도로 어두워 누가 봐도 얼굴 하나 못 알아볼 것 같은 장소였다.
주위에 사람이 없어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장소, 그것도 상대가 여자를 매일같이 바꿔대던 망나니 카를로스다.
‘황태자랑 그 여자 사이에 뭐가 있다지 않았어요?’
‘황태자 전하께서 그 여자를 가지고 놀다가 버렸던 거죠.’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믿는데도, 들었던 이야기가 다시 떠올라와 화를 부추겼다.
요한은 장미로 꾸며진 벽 앞에 서서 에스텔을 돌아봤다. 어둠에 잠긴 에스텔은 달빛으로 빚은 인형처럼 아름다웠다. 어떤 남자라도 손댈 수밖에 없는 신비로움이 가득한 외모였다.
“에스텔.”
요한이 딱 끊어지는 목소리로 에스텔에게 물었다.
“방금 전까지 뭐 하고 있었어?”
“호스트이자 블란쳇 공작 부인답게 손님을 접대하고 있었지.”
“황태자와 단둘이 정원 안에서 나온 것도 손님을 접대했던 건가?”
“그럼, 아니면 뭐였겠어?”
에스텔이 요한이 잡았던 손목을 털었다.
“네 곁에 있는 것만 빼면 뭐든 해도 된다더니, 실은 아니었나 보네.”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그럼 뭔데, 내가 황태자랑 뭐라도 했을 것 같아?”
요한이 주먹을 꽉 쥐었다. 속이 새카맣게 타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감정을 다스리는 것이 이리도 어려웠던가.
“아니겠지. 하지만 왜 황태자를 초대했는지는 말해줄 수 있잖아.”
“비밀이야.”
에스텔은 쉽게 답했다.
“나중에 요한이 맞춰 봐.”
“…….”
“내가 왜 황태자를 갑자기 초대했는지, 정원에서 단둘이 뭘 하고 있었는지. 요한이 알아서 판단해.”
결국 아무 대답도 들려주지 않겠단 소리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맹렬히 부딪쳤다.
에스텔은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요한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 바라봤다. 요한은 자괴감과 불안이 솟구치는데 도저히 달랠 길이 없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던 요한이 옆에 있는 장미를 콱 쥐었다. 가시가 손에 박혀 피가 흘렀다.
“에스텔.”
요한의 붉은 눈동자는 원망과 미안함이 뒤섞여 새카매졌다.
“내가 미치는 거 보고 싶어?”
그가 에스텔을 당겨 입술을 맞췄다.
보드라운 입술, 달콤한 향기, 감미로운 숨소리, 모든 것이 이전과 같았다. 이 아름다운 것이 제 것이 아니게 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일부러 이래?”
에스텔의 몸을 들어 올려 입을 맞춘 요한이 으르렁거리듯 속삭였다.
“너도 내가 못 참을 거 알았잖아.”
“요한이 원하는 대로 했잖아.”
에스텔은 가팔라진 호흡으로 천천히 대답했다.
“나를 해치지도 않고, 너를 떠나지도 않았어. 그러면 된 거 아닌가?”
그런 의미가 아니란 걸 안다.
에스텔이 부정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란 건 요한이 제일 잘 알았다.
‘이 감정은 어떻게 하지?’
요한이 에스텔을 안아 든 채로 정원에서 저택으로 돌아갔다. 에스텔이 요한에게 무어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요한, 내려줘. 이제 가든파티에서-”
“조용히 해.”
요한은 에스텔의 말을 모두 무시한 채 침실로 들어갔다.
침대에 놓인 에스텔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가 에스텔을 덮치듯 침대와 자신 사이에 그녀를 가두었다. 잡아먹을 듯 에스텔을 바라보던 요한이 에스텔에게 물었다.
“넌 내가 가진 게 아니었어?”
어쩐지 허탈하기까지 한 목소리.
요한은 사막에서 갈증에 시달린 사람처럼 에스텔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온몸으로 그녀의 온기를 느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여자가 제 앞에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없었다.
‘아니, 모르겠어.’
가냘픈 온몸에선 전보다 무게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짐승처럼 입을 맞추는 요한의 호흡에 에스텔의 숨소리도 흐트러졌다. 에스텔이 촉촉한 눈가로 요한을 올려다봤다.
얇은 숨소리가 퍼졌다.
정신없이 에스텔의 향기를 취하던 요한이 그대로 굳은 채 에스텔과 시선을 마주했다. 옷을 벗기려던 그의 손이 멎었다.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던 그가.
“……사랑해.”
눈물처럼 초라한 고백이 떨어뜨렸다.
“너는 날 사랑해?”
요한의 시선이 에스텔의 얼굴을 애타게 바라봤다. 에스텔은 붉어진 눈가로 요한을 보며 말했다.
“나도 사랑해.”
요한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정말?”
“아니. 거짓말이야.”
바보처럼 들떴던 마음이 나락까지 추락했다. 에스텔은 두 팔을 뻗어 요한의 목을 감쌌다.
“사실 거짓말 아니야. 나도 요한을 사랑해.”
“…….”
“요한 생각엔 어느 쪽이 진심 같아?”
욱신-
마음의 고통 때문에 따끔하다 싶었던 심장의 통증이 온몸에 퍼졌다. 순간적으로 한쪽 눈을 찡그렸던 요한이 겨우 침을 삼켰다.
“……진짜, 모르겠네.”
그가 떨리는 손끝으로 여자를 붙잡았다.
“내 부인, 진짜 알기 어려운 사람이다.”
요한은 품속의 에스텔을 보면서 깨달았다. 정확히는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원하는 대로 이 여자를 붙잡아봐야 불행해질 뿐이다.
그가 사랑한 것은 제 품에서 불행하게 죽은 여자가 아닐 테니까.
“에스텔, 네가 이겼어.”
요한이 이를 아득 갈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가 키스할 것처럼 에스텔의 입술을 엄지로 문지르며 달콤하게 웃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어디로 도망가든, 무엇을 하든 간에.”
“진심이야?”
“그래. 진심이야.”
요한은 침대에서 일어나 에스텔에게서 등을 돌렸다. 얼굴을 보고 있으면 말을 번복할 것 같아서였다.
“다 내 어리석은 욕심이었어. 난 이제 네가 살아 있는 것만으로 충분해.”
요한이 이불자락을 꽉 쥐며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흰 눈이 내리고 있다.
쌓인 눈에 떨어진 에덴 로즈가 보였다. 눈에 더럽혀진 에덴 로즈는 제 색깔을 유지하지도, 제대로 된 형체를 남기지도 못했다.
여름철 환하게 빛났던 그 아름다움은 이제 시커멓게 썩은 꽃잎 자국이 되리라.
“…….”
“내가 이 저택을 떠날게. 그사이 네가 먼저 떠나. 그리고 돌아오지 마.”
그 순간 등 뒤에서 에스텔이 가냘픈 두 팔로 요한을 끌어안았다.
요한이 숨을 멈췄다.
“내 말 못 들었어?”
“요한, 우리 내기 하나 할까?”
“뭐……?”
“요한 네가 나와의 내기에서 이기면, 네게 기회를 줄게. 진심으로 너를 용서하기 위해서 나도 노력할게.”
도저히 믿기지 않는 말에 요한은 뒤를 돌아 에스텔을 바라봤다. 에스텔은 요한이 그런 반응을 보일 줄 알았다는 듯 희게 웃었다.
“대신 내가 이기면 내 소원 하나를 들어줘. 어때?”
“……어떤 내기인데?”
“간단해. 네가 내가 한 질문에 답을 맞추면 네가 이기는 거야.”
요한이 피식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질문이 뭐지?”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을까?”
에스텔은 미련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추슬렀다. 그리고 요한을 돌아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대답은 새로 하기로 한 결혼식에서 들려줘. 그때까지 요한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을게.”
***
가든파티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다들 블란쳇 공작 부인의 사교 능력에 새삼 감탄했다.
과거 귀족 신분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는 평가와 달리 아주 세련된 예법과 모습으로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그사이 블란쳇 공작가는 곧 열릴 요한과 에스텔의 결혼식 준비로 바빴다.
혼인이 이루어진 것은 한참 전이라 다른 지인을 부르지 않는다 해도 결혼식은 결혼식이다. 몇 번이고 검토해도 모자란 부분이 계속 나왔다.
결혼식에 입을 정장을 살피던 요한에게, 레이몬드가 찾아왔다.
“주인님. 보고드려야 할 게 있습니다.”
“무엇이지?”
“마님께서 블란쳇 기사단에 다소 수상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