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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화 내가 아플 수 있게 해줘 (158/182)


158화 내가 아플 수 있게 해줘
2023.06.06.



요한은 자기도 모르게 에스텔에게서 마력 독을 빼앗아갔다. 에스텔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 방법은 마음에 안 드나 봐?”

요한은 에스텔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제가 빼앗은 병을 살폈다.

다행히 에스텔에게 튀거나 닿지는 않은 듯했다. 요한이 병을 제 뒤로 치우며 말했다.


“굳이 이런 식으로 경고하지 않아도 됐는데.”

“왜 경고라고 생각해?”

에스텔이 순진무구한 눈으로 물었다.


“난 진심이었어.”

“……뭐라고?”

“어쩔 수 없잖아. 나는 더 이상 요한이 바라는 대로 살 수 없고, 요한은 그런 나를 바라니까. 이게 가장 최선이지 않을까 싶었어.”

요한은 심장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저게 진심이라고?’

에스텔의 남색 눈동자는 평소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어떠한 거짓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정말 에스텔은 진심으로 자기 자신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것인가.

그녀의 얼굴 위로 그가 에스텔에게 떠들었던 말들이 떠올랐다.


‘부인은 가만히 있어도 돼, 내가 해줄 테니까.’


‘뭐가 문제야, 내가 다 해줄 수 있는데.’

 
요한은 모든 것을 들어주겠다고 하면서, 정작 제 자신이 견딜 수 없어 에스텔이 바라는 것을 들어줄 수 없었다.

에스텔이 그를 떠나는 것을, 그의 부인이 아니게 둘 수는 없었으니까.

격렬한 자기모순이 부딪쳐 상흔을 남겼다. 요한이 입술을 깨물며 에스텔을 망연히 바라봤다.


“나는…… 너를 모르겠어.”

에스텔이 싱긋 웃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에스텔의 대답이었다.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네가 다 틀렸던 걸까?”

요한이 손을 뻗어 에스텔의 뺨에 손을 대었다. 창백하게 흰 뺨은 말랑말랑하면서도 차가웠다.

온기가 사라진 인형 같았다.

그 순간 얌전히 그를 바라보던 에스텔이 그를 비웃듯이 아주 예쁘게 웃었다.


“네가 알던 나는 뭔데?”

“내가 알던 너는…….”

요한은 미소 짓는 에스텔의 얼굴 위로 그가 알고 있던 에스텔의 잔상을 덧씌웠다.

사소한 선물에도 금방 기뻐하는 에스텔.

짓궂은 장난에 쉽게 귀여운 반응을 보여주는 에스텔.

마음이 여려 끝까지 냉정해지지 못하면서도 어떨 때는 그 누구보다 차가운 면모를 보여주는 에스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언제나 그의 기대를 부수어주던 에스텔.

사랑스럽고, 나쁜 구석 하나 없이 착하고 예쁜 그의 여자.


“……너는…….”

요한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였다.


“내가 알던 너는 가짜였을까?”

“글쎄.”

“그러면 너를 사랑하던 내 마음도 다 가짜인가?”

요한은 항상 자신만만하게 에스텔에게 말했다. 에스텔이 가짜든 무엇이든, 그의 마음은 진짜라고.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솔직히 그때 그는 에스텔을 위로하는 와중에도 그녀가 왜 그리 힘들어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는 알 것 같다.

함께한 그 모든 시간이 너무 소중한데, 그것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버릴 것 같아서.

하지만 도저히 그렇게 두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서 계속 두렵고 자신 없어졌던 것이다. 포기할 수 없으니까.

에스텔이 애완동물처럼 부드럽게 요한의 손에 제 뺨을 부비었다.

이건 그에게 익숙한 에스텔이다.


“요한 마음대로 생각해.”

들려주는 말은 그가 아는 에스텔이 아니었다.


“어떻게 생각하든 난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왜, 신경 쓰지 않는데?”

“이상하다. 고민하고, 흔들리지 말라던 건 요한이잖아. 그래서 이제 요한이 말했던 대로 하려고.”

곱게 포장된 그 말이, 더 이상 요한의 마음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무관심처럼 들렸다. 요한은 애틋한 손짓으로 에스텔의 얼굴을 만지다 손을 뗐다.


“……그래,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거겠지.”

요한이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그래도 마력 독은 위험해, 너처럼 마력이 잘 통하지 않는 사람에겐 어떻게 작용하는지 몰라서 더더욱.”

“조종하기 어려울 수 있구나?”

“걱정하는 거야. 괜히 독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니까. 아무리 나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더라도, 이런 식은 안 해줬으면 좋겠어.”

“화내는 것도 요한의 마음에 들게 하라는 거네.”

에스텔은 딱히 대답을 바라지 않는 말투로 덧붙였다. 그녀가 칼 하나 없이 그의 심장을 마구잡이로 난도질했다.


“그렇게 생각해도 좋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를 다치게 하는 방법은 쓰지 마. 차라리 나를 다치게 해.”

한순간 품었던 희망이 볼품없이 망가졌다.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진심이야. 내가 잘못한 일이니, 네가 아니라 내가 아플 수 있게 해줘.”

요한의 눈가가 붉어졌다. 절절한 마음이 느껴지는 고백이었다.

물끄러미 요한의 얼굴을 보던 에스텔이 두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감쌌다.


“요한, 가장 큰 문제가 뭔지 알아?”

이마를 마주 댄 그녀가 나긋하게 속삭였다.


“설령 그게 네 진심이라 해도 내가 그걸 믿을 수 없단 거야.”

“…….”

“네 좋을 대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거짓말인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믿겠어?”

“내가 뭘 하면 믿을래?”

절박한 그의 목소리에 에스텔이 피식 웃었다.


“내가 방법까지 생각해 줘야 하는 거야?”

“……맞는 말이군.”

요한은 자조하며 고개를 천천히 내젓다가 에스텔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네 신뢰를 깨뜨린 건 나니까, 그걸 되찾기 위해 애쓰는 건 내 몫이지. 내가 많이 비겁했어.”

요한이 등 뒤에 놓았던 병을 들었다. 그는 에스텔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마력 독을 망설임 없이 들이켰다.


“이게 바로 내 각오야.”

“……각오?”

에스텔의 눈빛에 처음으로 의문이 피어올랐다. 그러자 요한은 눈물이 고인 얼굴로 평온하게 답했다.


“그래. 이 마력 독이 들어간 순간, 이제부터 난 마력을 잘 사용하지 못해. 마력 독을 마신 널 조종하지도 못하고, 기적처럼 대단한 힘을 사용할 수도 없지.”

요한은 빈 약병을 내려놓았다.


“앞으로도 나한테 하고 싶은 것 있으면 편하게 말해. 내게 무엇을 빼앗아가려 하든, 해하려 하든 저항 없이 받아줄게.”

“그게 요한이 결론이야?”

“그래,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이야.”

에스텔이 요한과 빈 약병을 번갈아 봤다. 그리고 슬프게 고개를 저었다.


“틀렸어.”

그 순간 요한은 에스텔이 스스로 정해놓은 어떤 답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면 내가 뭘 어떻게 했어야 했는데?”

“정확히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해야 하나. 어쩐지 요한이 마력 독을 마셔 버릴 것 같았거든.”

붉은 눈과 마주친 에스텔은 어깨를 으쓱였다.


“가끔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요한은 사람들이 다 요한처럼 움직인다고 생각하니까.”

요한은 다시 큰 혼란에 빠졌다.


‘그럼 뭘 바랐던 거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에스텔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따라 그녀의 긴 백금발이 아지랑이처럼 투명하게 반짝였다.


“요한이 나한테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을 물었지, 어떻게 하면 내가 요한을 믿을 수 있냐고.”

문가까지 걸어간 에스텔은 요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시간을 되돌려봐.”

“…….”

“나를 복수하기 위해서 데려오지 말고, 지금 말한 것처럼 사랑한다는 이유로 데려와서 결혼해 줘. 거짓말이 아니라 그게 진짜가 될 수 있도록.”

“…….”

“이미 깨진 신뢰를 회복한다는 건 그런 거야. 이전까지의 상황과 완전히 달라야 하는 거지.”

쾅.

에스텔이 문을 닫고 나갔다.

요한은 그녀가 남겨둔 선물과 함께 방에 혼자 남겨졌다. 요한이 이를 까득 깨물며 편지를 다시 한번 봤다.

[이번 선물은 지금까지 요한한테 선물을 받으면서 기뻤던 것들을 떠올려 보면서 준비했어. 새삼 요한한테 받은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 너무 고마웠어. -사랑해, 요한.]

편지에 가득한 애정이 지금의 그를 더 비참하게 했다. 잃어버린 상실감이 요한을 지배했다.


“네가 나한테 바랐던 대답이 뭘까.”

씁쓸하게 읊조리는 목소리에서 슬픔이 배어 있었다. 그가 편지를 소중히 접고 두 눈을 꼭 감았다.

지금까지 에스텔이 보인 행동은 어찌 보면 단순했다.


‘이제 만족해?’

 
마치 가지고 놀 듯이 요한에게 사랑을 속삭이다가 비웃듯이 그의 착각을 깨부수었다.


“하…….”

요한이 허탈하게 웃으며 빈 약병을 봤다.


‘그게 요한이 바라던 것 아니었어?’

 
새삼 리베르탄을 조종했을 당시, 에스텔의 반응이 좋지 않았던 게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에스텔의 불안감을 눈치챘어야 했다. 그녀는 제 나름의 방식으로 그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으니까.

그 신호를 무시한 건 요한이었다.


“하하.”

에스텔은 천천히, 요한이 그녀에게 했던 행동을 영리한 방식으로 돌려주고 있었다. 요한이 가장 상처받을 수 있도록.

그렇다면 에스텔이 그에게 하고 싶을 마지막 행동은 정해져 있었다.


“복수하려는 건가.”

이 모든 일의 시작점, 그것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에스텔의 행동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던 에스텔이 왜 갑자기 아무렇지 않게 그를 대하고 움직였는지도.


‘그래, 그게 맞지.’

복수는 충분히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그 증거가 바로 요한 자신이니까.

어쩌면, 그 복수가 피해자인 에스텔에게 복수하려 했던 그에겐 가장 적절한 처분인 것일지도 몰랐다.

***

에스텔은 정원을 산책했다. 옆에 있던 베티가 에스텔에게 물었다.


“가든파티 초대 명단은 이렇게 하면 될까요? 진짜 그렇게 부르실 거예요?”

“응. 이미 설명했잖아.”

초대 명단을 살피던 베티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저번에 제가 준비해 드린 마력 독 있잖아요.”

에스텔이 걸음을 멈췄다.


“응, 마력 독이 왜?”

“주인님이 마신 건가요?”

에스텔은 대답 없이 정원에 시선을 두었다. 베티의 마음이 불안해졌다.


‘마님께서 협박하시지만 않았어도!’

처음 에스텔이 마력 독을 구해달라고 할 때만 해도 격렬하게 반대했다. 독이라는 건 결국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 쓰는 것이니까.


‘맹세할게. 내가 그 마력 독을 마시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러면…… 주인님께 먹이시게요? 아무리 그래도 저는 주인님을 음독하려는 일까지 도울 수는 없어요. 그건.’


‘걱정하지 마. 몰래 음독할 생각 없으니까.’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데요?’


‘요한은 알아서 마력 독을 마실 거야. 알아보니까 요한처럼 마력이 많은 사람은 한 달 정도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될 뿐이던데?’


‘주인님께서 마시는 것도 저는……!’


‘베티 네가 거절하면 나는 다른 쪽으로 마력 독을 구하려고 할 거야. 그러다 괜히 일이 꼬이고 힘들어지게 되면 어떻게 될까?’

 
다시 생각해 봐도 정말 무서운 상황이었다.


‘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데요?’


‘글쎄, 솔직히 요즘 나도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궁금하거든.’

 
그렇게 되고 나니 베티도 더 반대할 수 없었다. 에스텔이 자기가 모르는 사이 자살 시도를 하거나 하면 걷잡을 수 없으니까.


‘주인님께서도 말이야, 도대체 왜 마력 독을 스스로 마신 거냐구!’

빈 통을 보고 이미 상황이 다 끝났음을 짐작한 베티는 이제 슬슬 에스텔이 무서워졌다.


‘마님께서 바라시는 게 뭘까?’

불안한 생각을 반복하던 베티가 에스텔에게 물었다.


“마님, 주인님과 화해하실 생각이 아예 없으신가요?”

“베티, 네가 보기엔 어때. 내가 어떻게 하고 싶은 것 같니? 내가 요한과 화해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에스텔이 싱긋 웃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서글퍼지는 묘한 미소였다. 베티가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 셨으면 좋겠지만 불가능할 거 같아요.”

이미 두 사람은 너무 먼 길을 돌아갔다. 어쩌면 에스텔의 말대로, 서로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찾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래도 서로가 아니면 어떻게 하지?’

고민하던 베티는 가든파티를 준비하러 가는 에스텔을 급히 뒤쫓아갔다.


“마님! 기다리세요! 아직 가든파티 준비로 여쭤볼 게 더 남아 있어요!”

 

***

황제의 개인 서재.

황제는 창밖을 바라보며 요한을 맞이했다.


“오르테카 재상의 흔적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나?”

“예, 폐하.”

“혹여 성국으로 도망쳤을 가능성은?”

요한이 예의를 차려 대답했다.


“그럴 가능성이 높아 기사단을 파견하여 성국을 수색할 예정입니다.”

“성국에서 반기지 않을 터인데?”

“제국에 저지른 실수가 많아 거절할 수 없을 겁니다.”

황제가 고개를 돌려 요한을 바라봤다. 총애하던 오르테카 재상의 배신에, 리베르탄 공작가와 펠시스 후작가의 처형까지.

단시간에 너무 많이 일을 겪은 황제는 십 년은 더 늙은 것처럼 피로해 보였다.


“공작이 직접 성국에 다시 갈 마음은 없나?”

“죄송합니다, 폐하. 현재 더 중요한 일이 있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부인의 몸이 안 좋으니…….”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황제가 요한에게 물었다.


“그런데 공작 생각에는, 공작 부인이 가든파티에 열어도 괜찮겠나? 아직 더 쉬어야 할 때 아닌가?”

“오래 준비한 일이라 꼭 열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이해하기 어렵군.”

요한은 황제의 의미심장한 반응이 의아했다.


‘아무리 블란쳇 공작가밖에 안 남았다지만, 황제 폐하께서 일개 귀족의 가든파티를 신경 쓰시는 성정은 아니신데.’

특히 지금처럼 할 일이 많을 때는 더욱 그러했다.


“폐하, 어떤 부분이 신경 쓰이는 겁니까?”

“논란으로 근신 중인 황태자가 진짜 공작 부인의 가든파티에 가도 되는지 신경 쓰여서 말일세.”

“……예?”

“공작 부인이 직접, 황태자를 초대했네. 공작도 알고 있던 사실 아닌가?”

요한의 손끝이 떨렸다. 하지만 요한은 황제의 앞이기에, 티 내지 않고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어쩌면 이것도, 그에게 복수하기 위한 계획의 일부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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