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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화 진짜 선물 (157/182)


157화 진짜 선물
2023.06.02.



 
공작가 사람들이 큰 혼란에 빠졌다.


“두 분께서 데이트를 하신다고?”

“호수로 가신다던데. 주인님은 모르겠고, 마님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으셨어.”

오랜만의 나들이라면서 예쁘게 꾸민 에스텔이 요한과 함께 바깥으로 외출했다.

어쩐지 두 사람의 사이가 나빠지기 이전의 모습 같았다.

사랑이 넘치는 부부.


“다행이다. 그래도 마님께서 주인님께 기회를 주시려는 모양인가 봐.”

“그래. 이럴 줄 알았어. 난 사실 두 분께서 너무 싸우지 않았다고 생각해.”

“야. 그런 말 하지 마. 그러다 진짜 더 크게 싸우시면 어쩌려고 그래.”

“난 좋은 뜻으로 말한 거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마님께서 주인님을 볼 때 좀 주눅 들어 계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잖아. 상상임신에 정령 도련님도 사라지시면서 얼마나 힘드셨겠어. 주인님께서 마님의 마음을 잘 살펴주시는…….”

그때 떠들던 하녀들이 흠칫 놀랐다.

귀신처럼 서늘한 표정의 페트리샤가 그들의 뒤에 말없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하, 하녀장님. 저희는 그저 좋은 뜻으로…….”

“됐다. 너희의 마음도 이해하니.”

뜻밖에도 주인 내외에 대한 이야기를 뒤에서 한 것만으로도 항상 경을 치던 페트리샤는 그들을 벌하지 않았다.


“다만 주인님과 마님 앞에서 허튼 모습을 보이게 된다면 내 용서치 않을 것이다.”

페트리샤는 하녀들을 벌한 뒤 곧바로 베티를 찾았다. 베티 역시 에스텔이 걱정이 되는지 계속 창가를 보고 있었다.


“베티, 마님은 어떠셨느냐?”

“저도 잘 모르겠어요. 무슨 생각으로 갑자기 주인님과 데이트를 나가고 싶어 하신 것인지.”

“마님께서 주인님을 용서하시려고 그러신 건가?”

기실 페트리샤는 갈라질 것처럼 싸웠다가 서로 화해하는 부부를 많이 봐왔다.


‘결혼은 현실이니까.’

특히 에스텔처럼 이혼하게 되어 처지가 애매해질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마님께서 주인님이 복수하려 했다는 것을 눈치채셨으니…….’

이게 어떻게 흘러갈지 아무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은근한 기대가 묻은 페트리샤의 목소리에 베티가 자신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야 저는 좋겠지만, 자꾸 마님께서 저한테 하셨던 말씀이 신경 쓰여요.”

“무슨 말씀을 하셨길래?”

“이제는 마님의 마음만을 따지며 행동하겠다고 하셨어요. 페트리샤 님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시나요?”

“……난제군.”

모두의 걱정 속에서 에스텔과 요한이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왔다.

걱정과 달리 두 사람의 분위기는 몹시 화기애애했다. 에스텔은 요한의 손을 잡은 채 밝은 목소리로 웃었다.


“호수가 그렇게 꽁꽁 얼어 있을 줄 몰랐어. 그런데도 사람이 엄청 많더라.”

“겨울이라도 볼거리가 없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많이 춥지 않았어?”

“에이, 추울 틈도 없이 요한이 자기 옷을 덮어줬잖아.”

에스텔은 자기 어깨에 둘러져 있는 요한의 옷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이렇게 날이 추운데, 요즘엔 사람들이 뭐 해?”

“보통 실내에서 시간을 보내지. 연말 파티를 많이 한다거나. 부인에게도 초대장 많이 날아왔을 텐데?”

“아아, 요즘 정신이 없어서 확인을 못 하고 있었어. 연말 파티면 뭐가 달라?”

“크게 다를 건 없어. 귀족들끼리 모여서 친목을 다지고, 거래하면서 영지를 늘리려고 하고. 적당히 카드게임이나 그런 걸 하면서 시간을 때우지.”

요한이 에스텔의 어깨에 묻은 눈을 털어주며 물었다.


“내일 같이 가볼래?”

“그럴까, 안 그래도 다음에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고.”

에스텔이 말간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미리 얘기 안 하고 파티에 참석해도 되나? 이번에 열기로 했던 가든 파티도 못 열었는데?”

“다들 신경 안 쓸걸. 워낙 일이 많았잖아.”

에스텔이 공작 부인으로서 계획했던 많은 일이 자연스럽게 연기되었다.


“넌 블란쳇 공작 부인이잖아. 참석해 주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지.”

“블란쳇 공작 부인이면 다 되는 거야?”

“그럼, 그게 보통 자리도 아니고.”

요한이 은근히 ‘공작 부인’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대단한지 덧붙였다.


“네가 원하는 건 다 이룰 수 있어. 이제 제국에 블란쳇 공작가에 견줄 수 있는 가문도 없잖아?”

에스텔은 그 의도를 알아들었는지, 알아듣지 못했는지 가벼운 웃음소리를 내며 방으로 들어갔다.

요한은 에스텔을 방까지 데려다주고 가만히 문 앞에 서 있었다. 페트리샤가 요한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주인님, 마님과의 데이트는 어떠셨습니까?”

“큰일이야.”

혼자 남은 요한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으셨는지…….”

“아무 일도 없었어.”

요한이 낭패라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에스텔이 도망친 일도, 내가 복수하려 했다고 싸웠던 일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게 가능합니까?”

“내가 일부러 그때 일에 대해서 얘기해 봐도 에스텔은 모르는 척 일관했어.”

솔직히 요한은 에스텔의 데이트 제안에 나름대로 그녀를 이해해 보려고 애썼다. 그녀 나름대로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이라고도 생각해 봤다.

그래서 마음고생할 각오도 해뒀다.

하지만 데이트에 나가 요한이 만난 것은 다시 못 볼 것이라 생각했던, 사랑스럽게 환히 웃고 있는 에스텔의 얼굴이었다.


‘요한이랑 이렇게 밖에 나오니까 좋다. 다른 문제 같은 건 다 잊을 수 있을 것 같아.’

 
어쩐지 의미심장한 말.


‘그러면, 날 용서해 주는 거야?’


‘용서라니?’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복수하려고…….’


‘다음에는 우리 유람선도 타볼까? 그때는 바다를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던 것 같아.’

 
에스텔은 자연스럽게 그때 일이 ‘없었던’ 것처럼 넘겼다.

가만히 요한의 얘기를 들어주던 페트리샤가 물었다.


“없었던 일이라…… 어쩌면 마님께서 없었던 일로 만드시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없던 일로 하고 싶다?”

“예. 두 분 사이에 있었던 갈등을 다 털어놓고 나니 마음이 불편해져서 없던 일로 감추고 싶었던 것이지요.”

요한이 다리를 꼰 채 창밖을 바라봤다.


“그저 넘겼다라…….”

“귀족들 사이에선 제법 있는 일이긴 합니다. 서로 감정을 다 털어놓고 없던 일처럼 넘기고 화해하는 것이지요.”

너무 희망찬 예측이다.

하지만 요한은 그 말을 믿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방금 전 호수에서 있었던 달콤한 일을 새로 해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한, 잠깐 여기 봐봐.’

 
귀엽게 안겨든 채, 발뒤꿈치를 들어 수줍게 웃고는 입술을 쪽 맞춰준 에스텔.


‘왜 보고 있어, 부끄럽게.’

 

 
방금 전에 벌어진 일인데도 꿈을 꾼 것처럼 느껴지던 순간이다.

데이트가 끝나고 돌아온 뒤, 요한의 의문은 더욱 커져만 갔다.


‘에스텔의 마음에 대해선 언제나 잘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는 에스텔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행동을 할지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이쯤 되니 그동안 요한이 알던 에스텔이 마치 허상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럴 리 없어. 잠깐 착각한 것뿐이다.’

요한이 페트리샤에게 물었다.


“그러면 나는 무엇을 하면 되지? 다들 어떻게 하나?”

“그럴 경우 부인에게 선물을 준다거나, 기쁘게 해줄 이벤트를 해준다거나.”

“선물이라…….”

“주인님의 마음을 더 간절하게 전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보면 어떨까요? 어쩌면 마님께서도 주인님을 용서할 상황을 바라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페트리샤는 진심으로 두 사람이 화해할 수 있기를 바랐다.

에스텔과 요한은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부부였으니까. 이렇게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엇갈리는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팠다.


‘두 분께서 이 위기를 잘 극복하셔야 할 텐데.’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베티를 불러 어떻게 하면 에스텔이-”

“주인님.”

그때 베티가 요한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베티는 어쩐지 망설임이 가득한 목소리로 요한에게 말했다.


“마님께서 주인님을 만나 뵙고자 하십니다. 긴히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고요.”

 

***

에스텔은 그새 옷을 갈아입었는지 가벼운 실내 드레스를 입은 채였다.

선물 상자 사이에 있던 에스텔이 방 안으로 들어온 요한을 보고 방긋 웃었다.


“요한, 왔어?”

“날 불렀다고?”

“응. 요한한테 줄 게 있어서.”

에스텔이 주위에 있던 선물 상자 하나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 선물들 다 열어볼래?”

“이게 뭔데?”

“내가 요한한테 주려고 준비했던 선물이야.”

요한은 푸른색 리본을 보며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갑자기 선물은 왜?”

“그냥 주고 싶어서 준비한 거지. 요한도 나한테 자주 그랬잖아. 이번엔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래?”

요한이 에스텔의 옆에 앉으며 선물 상자를 들었다. 에스텔은 그런 요한의 모습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재밌었어. 어떤 선물을 줘야 요한이 기뻐할지 고민하느라 머리가 좀 아팠지만.”

“부인이 준 거면 무엇이든 상관없는데.”

“그치만 요한은 매번 귀한 걸 주는데 나만 별로인 걸 줄 수는 없잖아.”

에스텔이 귀엽게 투덜거리며 요한을 재촉했다. 요한 역시 에스텔의 대답에 호응하며 포장을 뜯었다.

요한 자신의 초상화다.

요한은 잠시 멍하니, 제 얼굴을 바라봤다. 거울로 보던 것과 달리 초상화 속 자신은 무척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네.”

“열심히 연습해서 그린 건데, 어때?”

“네가 보는 내 모습인 거지?”

요한이 초상화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잘 그렸네, 마음에 들어.”

왜인지 초상화 속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에스텔의 모습까지도 저절로 상상이 됐다.


“다른 선물들도 다 그림이야?”

“그건 직접 확인해 봐.”

“말해주면 안 되나?”

“비밀이야. 요한도 맨날 그랬잖아. 본인이 당해보니까 어때, 너무 궁금하지 않아?”

요한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심장이 주체하지 못하고 크게 뛰었다.


“그러게, 서프라이즈는 좀 줄여야겠어.”

이 순간이 너무 거짓말 같다.

이번 선물 상자는 파랑새와 푸른 장미가 새겨진 손수건이었다.


‘과거 블란쳇 공작가의 문양이다.’

현재 블란쳇 공작가는 맹금을 상징으로 삼고 있다. 요한이 새로 블란쳇 공작가를 세우며 상징을 바꾼 것이다.


“부인이 직접 수놓은 거야?”

“다른 사람을 시켜서 받아올 만한 솜씨는 아니지 않아?”

에스텔이 쑥스럽게 말했다.


“계속 보지 말고 다른 거 봐봐. 내가 수를 잘 놓는 편은 아니라 그렇게 계속 보고 있으니까 이상하잖아.”

“알았어, 어디 한번 다음 선물도 볼까?”

다음에는 에스텔이 준비한 다른 그림이었다. 정령 아기를 다정하게 끌어안고 있는 요한, 집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요한이었다.

에스텔이 자신을 생각하며 그렸을 모습을 떠올리니, 요한은 너무 기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짜릿한 흥분이 자꾸 희망 쪽으로 제 머리를 몰아갔다.


‘정말 나한테 기회를 주려는 걸까?’

요한이 에스텔의 눈치를 보며 다른 선물을 풀었다.

이번에는 에스텔의 편지였다.

[이번 선물은 지금까지 요한한테 선물을 받으면서 기뻤던 것들을 떠올려보면서 준비했어. 새삼 요한한테 받은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 너무 고마웠어.]

순수한 애정이 묻어나는 아기자기한 글씨.

[사랑해, 요한.]

더없이 달콤한 고백.

영영 사라져 버릴 뻔했던 사랑 고백이기에 요한은 이 편지가 너무 소중해졌다.


“……에스텔, 내가…….”

“마지막 선물을 안 뜯었잖아. 다 뜯어봐야지.”

조그마한 상자처럼 된 선물이었다.

요한이 조심스럽게 선물을 뜯자, 그 안에서는 녹색 액체가 든 병이 있었다.


“……이건 뭐야?”

“마력 독.”

에스텔이 요한의 손에서 병을 가져갔다.


“요한이 리베르탄 공작 부부를 조종하려고 할 때 썼던 독이야.”

“지금 무슨…….”

“오늘 즐거웠어?”

에스텔의 남색 눈동자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것처럼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이게 네가 바라는 거 맞지?”

쿵쿵-

요한의 심장 뛰는 소리가 커졌다.

요한은 마른침을 삼키며 에스텔에게 물었다.


“……그래, 즐거웠어.”

그가 참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일부러 나한테 맞춰줬던 거였어?”

“그래, 그리고 이게 내가 요한을 위해 준비한 ‘진짜’ 선물이야. 일부러 딱 준비하려고 힘들었어.”

에스텔이 싱긋 웃으며 마력 독을 흔들었다.


“지금 나한테 이걸 먹이면, 오늘처럼 날 조종할 수 있어.”

“…….”

“요한이 나한테 바랐던 거지?”

요한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에스텔을 바라봤다.

에스텔이 아무렇지 않게 병뚜껑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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