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상실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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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화 상실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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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화 상실감
2023.05.30.
어슴푸레한 새벽의 빛이 에스텔을 비췄다. 바닥엔 푸른빛을 반사하는 깨진 유리 조각들이 퍼져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볼까 해.”
바람에 꺼질 듯 일렁이는 촛불,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음률을 띤 목소리.
유리 조각 사이에 떨어진 에덴 로즈 꽃잎들은 어째서인지 말라붙어 있었다.
“어떻게 하실 건데요?”
“음, 글쎄.”
“괜찮으신 거죠?”
솔직히 베티는 에스텔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에스텔의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기운 없이 누워 있을 때보다 더 위태로워 보였다.
“차라리, 차라리…….”
베티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제가 에리히랑 함께 마님을 다시 탈출시켜 드릴게요. 이번에는 더 완벽하게 도망칠 수 있도록.”
“맞습니다. 그대로 복귀했으니 전처럼 마님을 도울 수 있을 겁니다.”
에리히까지 합세해서 에스텔에게 말했다. 하지만 에스텔은 두 사람을 보고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
“저희는 괜찮아요. 이미 마님을 위해 쓰겠다고 생각한 목숨이에요.”
“그러니까,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야.”
에스텔이 에덴 로즈를 쥔 자세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에 나를 도와준 것만으로도 과할 정도로 도움을 받았어. 이제는 두 사람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해줘.”
“저희는…….”
“나도 이제 나를 위해서 살 테니까.”
방금 전에 했던 말과 반복되는 말이었다.
‘마님의 분위기도 달라지셨어.’
어딘가 콕 짚어서 말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어쩐지 베티는 에스텔이 무언가 큰 결단을 내린 것처럼 보였다.
“마님을 위해서 산다고요?”
“응. 지금까진 그런 선택을 하기에는 더 중요한 게 많았거든. 그래서 이젠 단순하게 딱 하나만 보려고 해.”
“그게 무엇인데요?”
“내 마음.”
에스텔이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내 마음 하나만 생각할 거야.”
남색 눈동자엔 묘한 확신이 서 있었다.
‘모르겠어.’
어쩐지 베티는, 그녀가 알던 에스텔을 잃어버린 것 같은 기묘한 상실감을 느꼈다. 지금 에스텔이 예전처럼 그대로 그녀를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
성황의 팔뚝에 새겨진 검은 자국이 커졌다. 마물이 성황의 팔뚝을 보며 킬킬 웃었다.
-예스텔라도 죽어서 이를 어쩌나.
마물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이러다 요정 전체를 잡아먹어 신이 되겠다는 네 계획은 이루어지기 어렵겠군.
“……역시 예스텔라를 쓰는 게 아니었어. 모자라서 이용하기 쉽다고 생각했는데.”
예스텔라는 멍청하게 제 비밀을 다 들키고 폭주하다가 죽어버렸다. 예스텔라를 수습해 줄 줄 알았던 리안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끝났다.
한마디로, 성황이 준비했던 체스 말이 모두 망가졌다.
-이대로 있다간 마지막 요정을 죽이기는커녕, 그 마지막 보호도 없애지 못하겠어.
“시끄럽다.”
본래 성황은 제 손으로 마지막 요정을 잡아 먹어버릴 계획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요정 에스텔에겐 예상하지 못한 보호 마법이 걸려 있었다.
‘빌어먹을 요정의 보호 마법.’
보호 마법은 성황을 무능력하게 만들었다.
성황이 에스텔을 해치우려 할수록, 그가 삼킨 요정의 힘이 돌변해 그를 없애려 했다.
그동안 요정을 모두 처리한 성황이라 해도 그 보호 마법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그 보호 마법은, 요정들이 마지막 요정을 지키기 위해 남긴 발악이었기 때문이다. 성황이 미처 소화하지 못한 요정의 힘을 사용한 함정이었기에 별다른 수가 없었다.
문제는 마지막 요정인 에스텔을 다른 사람이 죽여도, 성황의 계획엔 큰 지장이 생긴다는 점이었다.
에스텔이 다른 자의 손에 죽으면, 성황은 모든 요정의 힘을 흡수하지 못하고 파멸하게 되니까.
결국 성황은 마물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방법을 구했다.
‘보호 마법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있나?’
‘그 보호 마법이 계속 힘을 소모하게 해서 저절로 닳게 하는 거지. 참고로 그 보호 마법은 마지막 요정이 불행해질수록 취약해지니, 그 점을 이용하는 걸 추천한다.’
그렇게 성황은 리베르탄을 이용하기로 했다.
어린 예스텔라에게 접근해 제 손으로 불행을 자초하게 하고,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에스텔을 입양해 끔찍한 고통을 줄 수밖에 없도록.
솔직히 고된 인내가 따르는 작업이었다.
어린 에스텔은 쉬이 무너지지 않았고, 보호 마법은 지금까지도 그 효과를 유지하고 있었다.
억지로 무리해가며 에스텔에게 접근했지만, 크게 효과가 있지는 않았다.
“예스텔라를 이용해 보호 마법을 완전히 끝낸다는 것이 패착이었다. 아직 다 끝난 게 아니다.”
-그래서 뭘 하겠다는 거지? 이제 와서 새로운 체스 말을 준비할 수도 없을 텐데.
여전히 성황은 에스텔에게 직접 접근할 수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예스텔라의 몰락으로 성국의 권력에도 문제가 생겼다.
신도들의 믿음에 금이 간 것이다.
주먹을 쥐고 있던 성황이 그림자를 향해 물었다.
“블란쳇 공작이 성국에 협박하러 온다 했던가?”
그러자 그림자 속에서 한 남자가 또박또박 걸어 나왔다. 갑자기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오르테카 후작이었다.
“예. 지금 일정을 미루기는 했으나, 블란쳇 공작이라면 필시 이 성국을 짓밟기 위해 달려올 것입니다.”
오르테카 후작은 성황이 제국을 조종하기 위해 뿌려놓은 씨앗 중 하나였다.
“그러니 그때를 대비해 함정을 파놓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자는 내 힘으로도 상대하기 쉽지 않다.”
“그자를 노리자는 게 아닙니다.”
두 사람이 서 있던 알현실의 바닥이 투명해지며 우아한 블란쳇 공작저를 비쳤다.
“그자가 자리를 비운 틈을 노리자는 것입니다. 마침 딱 좋은 구실이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오르테카 후작이 성황에게 블란쳇 공작부인 납치에 대한 기사를 보여주었다.
“마지막 요정과 공작의 사이가 틀어진 것 같으니까요.”
“…….”
“꼭 지금을 노리셔야 합니다.”
오르테카 후작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성황에게 제법 재밌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
서러움에 가득 찬 에스텔의 목소리가 저주처럼 요한의 뇌리에 박혔다.
‘요한은 끝까지 모르는 척하는구나. 그런데, 진짜 내가 끝까지 모를 거라 생각했어? 끝까지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이제 와서 날 죽이는 게 힘들어?’
살기 위해서 자존심도 버리고 애원까지 하던 에스텔. 그런 에스텔이 미련 없이 제 죽음을 종용했다.
‘어차피 복수하기 위해 나랑 결혼한 거잖아. 가지고 놀다가 죽이려고.’
‘나한테 복수하려고 했잖아!’
원망과 서러움이 사무친 얼굴 위로 제가 죽이려 했던 에스텔의 얼굴이 겹쳐졌다.
분명 에스텔은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고, 그때 일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가장 몰랐으면 했던 에스텔이, 그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에스텔은 어떻게 내가 복수하려던 걸 알게 되었을까.’
요한은 도망치듯 에스텔에게서 나와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그러나 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에스텔이 그 사실을 알게 된 방법 같은 건 확인되지 않았다.
애초에 복수 자체가 기밀이었고, 그 관련자 중 복수에 대해서 입을 놀린 자도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했지만, 도리어 에스텔이 복수에 대해 알아냈다는 사실에 본인들이 더 충격받은 반응을 보여줄 뿐이었다.
‘그러면 설마, 마님께서 이상 행동을 보이고 계신 것이…….’
‘도대체 마님께서 어찌 알게 되신 겁니까? 저로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나마 베티의 추측이 가장 가능성이 있었다.
‘요정의 능력으로 알게 되신 걸까요?’
‘요정의 능력에 그런 게 있었나?’
‘사실 저와 함께하셨을 때 그런 능력을 사용하진 않으셨어요. 하지만 그것 외에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요.’
처음부터 모든 게 꼬였다는 느낌이 떠나질 않았다.
‘악마와 계약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악마에게서 요정에 대한 기억을 빼앗기지 않았더라면…….’
에스텔에 대해 생각할수록 요한은 그가 저지른 죄악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수없이 가정을 되풀이하던 요한이 최악의 경우를 떠올렸다.
‘만약 에스텔이, 내가 처음부터 복수하려던 걸 알았던 거라면?’
물론 그가 만난 에스텔은, 복수자를 만난 것치고 너무 순수한 마음으로 요한을 좋아해 주었다.
그래서 요한은, 차마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그때도 이미 에스텔은 요정의 힘으로 어린 시절의 그를 구원했으니까. 에스텔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요한이 리베르탄에서 탈출해 복수할 수도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외면하고 싶을수록 요한은 어쩐지 그 추측이 사실처럼 느껴졌다.
“……많이 괴로웠겠지.”
자기를 증오한다고 생각하는 남자.
자기를 가지고 놀다가 죽이려던 남자와의 결혼이라.
심지어 그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려 했을 에스텔을 생각하면 요한은 가슴이 자꾸 저릿해졌다.
그녀야말로 가장 결백한 피해자였는데.
쾅쾅쾅!
그때 베티가 집무실의 문을 거칠게 두드리며 나타났다.
“주인님, 마님 좀 말려주세요!”
“무슨 일이지?”
“마님, 마님께서……!”
요한은 에스텔 얘기를 듣자마자 급하게 바깥으로 튀어나갔다.
“……에스텔?”
에스텔이 편한 드레스 차림으로 지붕 위에 올라가 있었다.
도대체 언제, 어떻게.
블란쳇 저택은 5층 높이의 대저택이다.
“에스텔, 왜 거기에-!”
에스텔이 요한을 발견하곤 웃었다.
“아, 요한.”
그리고 천천히 지붕 위에서 일어났다.
발 하나 정도 되는 넓이의 좁은 틈 위에 서 있는 에스텔. 발 한번 삐끗했다간 그대로 떨어질지도 모른다.
요한이 애타는 목소리로 외쳤다.
“움직이지 마, 에스텔. 내가, 내가 지금 올라갈게.”
어떻게 지붕에 올라갔는지, 왜 저곳에 서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 에스텔을 지붕에서 내리는 게 중요했다.
“난 괜찮은데.”
“아니야. 위험해.”
“그런가?”
에스텔이 어깨를 으쓱였다.
겨울철의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사납게 휘날리게 했다. 그녀가 잠시 비틀거렸다.
“음, 요한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겨우 중심을 다시 잡은 에스텔이 요한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제야 요한은 에스텔이 제 부탁을 제대로 들어줄 마음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알았어, 내가 올라갈게.”
요한이 마법으로 빠르게 저택 위로 이동했다. 이 마법으로 당장 에스텔을 이동시킬 수 있으면 좋으련만.
‘에스텔에겐 마법이 잘 통하지 않아.’
아마 그녀가 요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붕 위는 아래에서 본 것보다 더 위험천만한 곳이었다. 바닥에 서리가 끼어 미끌미끌했다.
에스텔이 요한을 보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요한.”
항상 같은 침대에서 일어나 함께 시간을 보냈던 만큼 서로가 떨어졌던 시간이 더 길게 느껴졌다.
“그동안 잘 지냈어?”
“나쁘지 않았어. 그래서 지붕엔 왜 올라온 거야?”
요한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한테 말하고 싶은 게 있어서 아닌가?”
“뭐, 그렇지.”
에스텔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요한을 향해 걸어오려는 듯 한 발자국 걸었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요한이 들어주지 않을 것 같더라고.”
괜히 그대로 미끄러질까 요한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움직이지 말고 말해.”
“에이, 이 정도론 안 떨어져.”
“그래도 떨어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
“알았어, 그러지 뭐.”
에스텔은 뒤로 두 손을 잡은 채 싱긋 웃었다.
“우리 오랜만에 데이트할래?”
“……데이트?”
“데이트 못한 지 한참 됐잖아. 오랜만에 호수에 가도 좋을 것 같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요한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노림수가 있을 거야.’
문제는, 당장 요한이 에스텔이 이 위험한 곳에 계속 서 있는 걸 두고 볼 수 없다는 거였다.
잘 돌아가던 머리가 백지처럼 새하얘졌다. 그가 빠르게 승낙했다.
“……그래, 좋아. 어디 가고 싶은 데라도 있어?”
“아무 데나 상관없어. 그치만 기왕이면 오늘 데이트하고 싶어.”
요한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본래 사랑은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게 되어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