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업보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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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화 업보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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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화 업보의 시작
2023.05.26.
“나한테 복수하려고 했잖아!”
에스텔의 남색 눈동자가 조금의 떨림도 없이 요한을 바라봤다.
심해처럼 깊고 아름다웠던 남색 눈동자.
요한은 그 눈동자를 마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언제부터 알았지?’
에스텔이 절대 모를 거라 생각했다.
‘관리는 완벽했어.’
에스텔을 가지고 놀다가 버릴 계획이라는 것 자체가 극소수만 알고 있는 작전이었다.
심지어 요한은 그 복수 계획을 제대로 실행하지도 않고 폐기했기 때문에 중간에 알아차릴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없었다.
‘베티나 에리히, 페트리샤처럼 에스텔의 편으로 돌아선 자들이…….’
하지만 그들 모두 에스텔의 행복을 바랐다. 안 그래도 힘든 에스텔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진실을 알려줬을 리 없다.
속이 바짝 타들어갔다.
“에스텔, 나는…….”
네 존재 자체가 가증스럽고 거슬렸어. 리베르탄에서 사랑받았을 거라 생각했어. 네가 리베르탄에서 학대받는 줄 몰랐어.
구차한 변명이다.
어쩐지 에스텔 네게 자꾸 마음이 가서 복수 계획은 세웠지만, 실제로 이루어진 건 하나도 없었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진 모르겠지만 다 오해야.
변명처럼 둘러댈 수 있는 수많은 이야기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
“…….”
에스텔이 서럽게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결코 달콤한 몇 마디로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에스텔은 속지 않을 거다.
요한이 가리고 있던 거짓된 연극이 모조리 끝이 났다.
요한은 연극이 끝난 뒤 떠나지 못한 관객처럼 허망하게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세게 박혀 피가 흘렀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켰다.
‘최근 갑자기 태도가 바뀐 게 원래 복수하려고 했다는 걸 알아서인가?’
하지만 그런 것치고, 에스텔은 오랫동안 요한을 지켜봐 온 눈치였다.
“의외네.”
에스텔이 요한을 보며 설핏 웃었다.
“요한이 이번에 또 어떤 거짓말을 할지 궁금했는데.”
“처음부터 속일 생각은 아니었어.”
“하지만 속였지.”
에스텔은 무감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동안 내가 계속 물었잖아. 리베르탄의 딸인 나를 원망하지 않았냐고.”
“그건…….”
“그때 요한은 매번 나한테 그랬지. 아무 죄 없는 나를 미워한 적 없다면서, 복수 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은 척했잖아.”
요한이 바짝 마른 입가로 입술을 열었다.
“미안해. 에스텔.”
이미 모든 게 탄로 난 이상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너를 알게 되면서 더 이상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어.”
요한은 제가 생각하기에도 이런 스스로가 한심했다. 무기력하고 멍청한 제 모습에 분노가 치밀었다.
“이제 난 진짜 소중한 게 무엇인지 알아. 그러니까…….”
“너무 늦었어.”
“에스텔. 제발 이야기를 좀 들어봐.”
“그럴 거였다면, 내가 얘기하기 전에 했어야지. 이제 와서 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어.”
에스텔이 무릎 꿇은 요한의 뺨에 보드라운 손을 겹쳤다.
“나도, 세상엔 어쩔 수 없는 일이 존재한다는 걸 알아.”
붉은 눈동자에 미약한 희망을 깃들었다.
“그러면……?”
“하지만 왜 내가 그걸 이해해 줘야 해?”
너무 익숙한 말이다.
‘내가 에스텔에게 자주 했던…….’
요한의 심장이 느리게 뛰었다. 그 자리에서 굳어 석상이 된 것처럼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에스텔이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요한도 내 사정을 이해해 주면서 복수하려고 하진 않았잖아.”
“그땐, 아무것도 몰랐어.”
요한의 목소리에 절박감이 서렸다. 그가 에스텔의 손에 제 볼을 부비며 애틋하게 속삭였다.
“내게 한 번만 기회를 주면 안 될까?”
“요한 넌 항상 내가 무르다고 했지. 다른 사람 사정 따위 알아줄 필요 없고, 중요한 건 결과라고.”
에스텔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이제 네 입장이 되니까 내가 네 사정을 이해해 줘야 한다는 거야?”
타인을 보는 것처럼 무감정한 시선, 요한으로서는 처음 보는 눈빛이다.
심장이 날카로운 칼날에 후벼 파이는 것처럼 아팠다.
“넌 내가 네 곁에 있기만 하면 되니까, 내 뜻대로 안 되는 나를 감금하고 협박했잖아. 그런데 그런 너를, 내가?”
“…….”
“요한이 생각하기에도 그건 좀 우습지?”
요한은 제 선택을 후회한 적 없었다.
리베르탄에 복수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괴물이 되고도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요한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요한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에스텔을 망연히 바라봤다. 절박한 마음으로 감정 한 톨 남지 않은 에스텔의 얼굴에서 그를 향한 일말의 감정이라도 찾으려 했다.
“……내가, 잘못했어.”
그가 행했던 모든 선택에 ‘만약에’라는 가정이 추가되며 한없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게 했던 말과 작전, 요령 좋게 피해갔던 모든 것이 업보가 되어 그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더 이상 거짓말로 모면할 수 없다.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어. 네게 제대로 사과가 되지 않을 거란 걸 알아. 그래도, 그래도.”
서툰 고백에도 에스텔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새삼 요한은 에스텔이 결코 뒤돌아보지 않는 성정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하지만 이제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너를 사랑해.”
“알아.”
에스텔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참 안타깝게 됐어. 이젠 사랑한다는 말로 넘어가 주지 못하게 됐거든.”
***
베티는 아무런 벌도 받지 않고 금세 풀려났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솔직히 베티는 요한이 그녀를 만나자마자 큰 벌을 내릴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에스텔의 부탁이 있었다지만, 베티는 주인인 요한을 배신했다. 그리고 저택 전체를 무방비한 상태로 몰아넣어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했다.
그리고 요한은 배신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에리히 오빠는 무사할까?’
에리히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베티도 감옥에 갇혀 있느라 진짜 멀쩡한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마님도 너무 걱정돼.’
안 그래도 상태가 안 좋은 분이다.
그런 분이 강제로 공작님에게 잡혀 저택에 감금되게 생겼으니, 마음의 병이 더 심해질 것은 자명했다.
“베티 블로뉴, 네 역할은 에스텔의 옆에서 보좌하며 철저하게 그녀의 건강을 챙기는 것이다.”
“예……? 그게 끝입니까?”
뜻밖에도 요한은 베티에게 아무런 벌도 내리지 않았다. 심지어 다시 에스텔의 곁에 붙여주기까지 했다.
‘주인님께서 이러실 리가 없는데.’
요한은 대답할 생각이 없는 듯, 손을 내저어 베티를 내쫓았다.
아무래도 마님의 곁에 다시 머무를 수 있게 된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저렇게 초췌한 모습의 주인님은 처음이야.’
가장 큰 고민이 해결되자, 다른 문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때 사용인의 안내를 받아 복귀한 베티의 방으로 에리히가 찾았다.
“베티, 너 멀쩡하냐?”
“그러는 오빠도…… 괜찮아 보이긴 하네.”
조금 창백해 보이는 것만 제외하면 평상시의 에리히였다. 보좌관 제복을 입고 있는 걸 보니, 에리히도 베티처럼 벌을 받지 않은 것 같다.
베티는 내심 안심하며 에리히에게 물었다.
“저택은 상황은 좀 어때?”
“아주 최악이다.”
성격 꼬인 에리히답게 바로 부정적인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렇게 안 좋아?”
“그래. 주인님뿐만 아니라 마님의 상태가 아주 심각해. 마님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몰라서 어떻게 하질 못하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하는 기분이었다.
“마님께서? 어디 많이 아프신 거야?”
“직접 보면 알게 될 거다.”
에리히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베티를 에스텔의 방으로 안내했다.
똑똑.
“마님, 베티가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베티가 마님을 뵙기를 청합니다.”
문 너머에선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에리히는 미약한 한숨을 내쉬며 성큼 문을 열었다.
베티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지만 이내 에리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님, 저 베티예요.”
에스텔은 힘없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유난히 창백한 피부와 기력이 없는 것처럼 늘어뜨린 팔다리 때문에 그녀는 실 끊어진 인형처럼 보였다.
‘세상에!’
그것만으로도 베티는 이미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방에 갇혀 하루 종일 움직이지도, 제대로 식사를 하지도 않은 거다!
베티는 서둘러 에스텔의 곁에 다가가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제가 그렇게 밥 잘 챙겨 드시라고 했는데, 이게 뭐예요. 왜 이렇게 몸이 안 좋아지셨어요?”
그러자 숨이 멈춘 것처럼 멍하니 있던 에스텔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아, 베티니?”
“네, 마님. 저 베티예요. 몸이 많이 안 좋으세요?”
“그냥 몸에 기운이 좀 없는 거야. 좀 피곤하네. 그것만 빼면 별거 없어.”
“밥은 왜 또 안 드셨어요?”
“먹기는 했어. 속이 좀 안 좋아서 먹어도 잘 안 들어가서 그렇지.”
그러던 에스텔의 시선이 자기도 모르게 다시 방구석 어딘가로 향했다. 베티를 보며 희미하게 웃고 있던 에스텔이 쓰러지듯이 다시 침대에 온몸을 묻었다.
베티는 단번에 그 상자의 정체를 눈치채고 억장이 무너질 것 같았다.
아기 신발이 든 상자였다.
***
나는 이 상황이 지긋지긋했다.
‘다음에 또 얘기하자.’
요한은 뾰족한 수가 없다고 여겼는지 낭패감이 서린 얼굴로 물러섰다.
복수에 대해서 폭로할 때만 해도, 묘한 해방감이 내 몸을 집어삼키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요한이 상처받은 걸 확인하는 순간, 지독한 무기력감이 온몸을 집어삼켰다.
이토록 태만해도 되는 걸까.
하다못해 눈을 깜빡이고, 숨 쉬는 것까지 피곤해졌다. 하지만 딱히 하고 싶은 게 없어서 멍하니 계속 누워 있었다.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 이대로 누워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요한은 내가 곁에 있으니 만족하려나?’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샜다.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어.’
베티와 에리히가 모두 멀쩡한 걸 확인하고 나니 더 고민되는 부분도 없었다.
‘아니,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애초에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베티가 내 건강을 신경 써서 억지로 죽을 먹였다. 나도 베티의 마음을 생각해서 몇 입 먹었지만 결국 토해냈다.
-으아아앙, 엄마, 엄마.
내가 제대로 미친 건지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기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요한과 꿈에 젖어 준비했던 과거를 되새기며 나를 비웃었다.
과거가 찬란할수록 더욱 비참해졌다.
나는 힘 없이 늘어져 있다가 아기 울음소리를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서서 나를 바라봤다.
거울 속에선 초췌하게 아름다운 내 모습이 보였다. 거울 옆에 장식으로 뒀던 부부 인형 중 신부 인형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사라졌나 보지.’
피식 웃던 내가 거울 속 나를 보며 물었다.
“에스텔. 네가 살고 싶었던 이유가 뭐였을까?”
어떻게 그렇게 희망을 품을 수 있었는지 이젠 신기할 정도였다.
“굳이 살아야 하는 이유가 뭘까?”
고작 며칠밖에 되지 않는데, 나는 나 자체가 완전히 망가져 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즐거워도, 어차피 힘든 일이 또 생겨나는데. 그럴 거면 애초에…….”
거울 속 남색 눈동자가 기묘한 빛을 발했다. 무기력한 팔다리에서 내 요정의 힘이 새어 나왔다.
“내가 숨기는 내 진실은 뭘까?”
나는 거울 속 내 권유에도 내가 감추던 진실을 확인하지 못했다.
지금도 이렇게 힘든데, 더 상처받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요한에게서 도망쳤듯이 내 스스로에게서도 도망쳤다.
“이제 와서 중요한 건 없네. 나도 진짜 나를 모르겠으니까.”
요정의 힘이 거울 속 나를 감쌌다.
거울이 내가 외면하고 싶었던 내 진실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
에리히가 베티를 앞에 둔 채 걱정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네가 오면 많이 나아지실 줄 알았는데…….”
“헨리 씨는 뭐래요?”
“마음의 병이라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고 하셨다.”
베티는 에스텔 걱정에 괜히 발을 동동 굴리다 말했다.
“에리히 오빠, 오빠는 두 분이 화해하실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펠시스 공자 때도 느꼈지만, 마님은 한번 결정한 걸 잘 바꾸지 않으시거든? 물론 주인님도 마찬가지기는 해서 별생각이 없었는데.”
베티의 목소리가 한층 더 걱정스러움에 잠겼다.
“어쩌면 이번만큼은 전과 다를 것 같아.”
“어떤 식으로?”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마님도 주인님만큼이나 똑똑하신 분이라서…….”
에스텔은 스스로를 낮게 평가하곤 했으나, 베티가 볼 때 에스텔은 요한만큼이나 영리한 사람이었다.
“마님이 선을 넘은 순간, 주인님보다 더 무서워지실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어.”
“무슨 소리야. 마님의 행복을 빌어도 모자랄 판국에, 저주하냐?”
“아니, 이게 무슨 저주야.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건데!”
쨍그랑!
방에서 거울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베티와 에리히가 급하게 에스텔을 찾았다.
“세상에, 마님! 무슨 일 있으세요?”
에스텔은 깨진 거울을 보며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녀가 화분과 함께 바닥에 엎어진 에덴 로즈 한 송이를 주워 들었다.
“잠깐 고민을 좀 했어.”
에스텔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여태까지 난 한 번도 진짜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행동한 적이 없는 것 같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