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폭로
(154/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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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화 폭로
2023.05.23.
요한의 눈빛이 광기로 번뜩였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잘생긴 얼굴엔 차분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눈동자에서는 갈무리하지 못한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나를 집어삼킬 것 같은 붉은 눈동자.
‘걱정, 분노, 안도, 불안, 배신감, 집착…….’
붉은 눈동자 속 감정이 불씨처럼 번져서 나를 잠식했다. 마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렸다.
두려운 마음이 들어 시선을 내리깔고 싶다가도, 나는 요한의 경고를 잊지 않았다. 그는 내 반항을 가볍게 넘기지 않을 거다.
‘지금은 본보기라도 보이겠다는 마음으로 가득하겠지.’
그래서 눈동자가 떨리는 와중에도 그의 눈을 계속 마주 봤다.
문득 이상한 것이 궁금해졌다.
‘요한의 눈에 비친 나는 어떨까?’
아마 이유 없이 배웅하고 도망쳤던 부인. 한없이 사랑스러웠다가 갑자기 돌변해 사라져 버린 여자일 것이다.
‘내가 네 마음을 헤아리는 만큼, 내 감정을 눈치챌 수 있을까?’
하지만 난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요한은 절대 모르겠지.’
그는 나보다 더 나를 잘 꿰뚫는 것처럼 위로했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건…….’
요한은 나와 같은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의 변덕스러운 감정에 따라 내 목숨까지 위협당하는 그런 삶을 살아본 적 없으니까.
“역시.”
엄지로 내 턱을 문지르며 훑어보던 요한이 만족스럽게 픽 웃었다.
“부인은 한 번에 내 말을 참 잘 알아들어. 이러니 내가 널 놓칠 수 없지.”
나는 요한에게 물었다.
“요한, 너는 내가 왜 도망쳤는지 궁금하지 않아?”
“궁금해.”
요한이 쉽게 대답했다.
“하지만 이유를 말해주지 않을 거잖아. 그러니 굳이 물어보지 않는 거야.”
“어째서?”
“말할 수 있는 거라면, 네가 도망치지 않고 나한테 말해줬을 테니까.”
그가 내 입술에 입을 맞추며 포옹했다.
“그러니까 이제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그동안 나는 그의 집요한 애정과 집착마저도 사랑했다.
쉽게 나를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아서.
하지만 이제 그 집착은 나를 가두는 족쇄가 되고 말았다.
“이유를 알아내는 것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을 깨달았거든.”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간단해.”
요한은 아무렇지 않게 내 귓가에 나른하게 속삭였다.
“이유가 어떻든 사람의 마음은 참 쉽게 변한다는 거. 짐작도 못 할 순간에, 갑자기 언제든 사라져 버릴 수 있어.”
“…….”
“그러니 네가 갑자기 힘들어진 이유를 알아내는 건 이제 나한테 중요하지 않아. 언제 또 그런 일이 또 벌어질지 모르니까.”
“…….”
“그러니 내가 해야 할 건 다른 거지. 언제든 내 손을 놓아버릴 수 있는 너를, 내 곁에 억지로라도 붙잡아놓기 위해서는.”
요한의 목소리가 내 가슴을 날카롭게 후벼팠다.
‘요한이 충격받을 거라 생각하긴 했어.’
지금 이 모습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이냐 하면 그건 아니다. 최소한 사랑하는 연인이 돌연 사라져 버리면 누구나 충격받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내 생각보다 더 약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좋은 방법이라도 떠올랐어?”
내 몸이 파르르 떨리는 걸 느낀 요한이 제 품에서 나를 떼어내 눈을 마주했다.
붉은 눈동자가 광기로 번들거렸다.
요한은 마치 즐거운 이야기를 들려주듯 나른하게 속삭였다.
“반대로 도저히 떠날 수 없는 이유를 만들어주면 되는 거야. 네 마음이 어떻든, 무슨 일이 벌어지든, 내 곁에서 도망칠 수 없도록.”
길쭉하고 우아한 손가락이 예술품을 정리하듯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줬다.
“감히, 도망칠 엄두도 나지 않게.”
“그게 나한테 통할 것 같아?”
“물론 세상 사람들이 모두 집착하는 재화, 명예, 지위, 이런 것들론 너를 붙잡을 수 없다는 거 잘 알아. 하지만 너는 애정에 약하잖아.”
요한은 더 이상 제 음험한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네가 떠나면, 네가 알고 지내던 사람들을 모두 죽일 거다.”
달콤한 목소리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느껴졌다.
“너와 마주치고 대화했다는 이유로 죽일 거고, 너를 도와줬을지 모른다는 의혹만으로도 처리할 거야.”
“…….”
“걱정 마. 그래도 넌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멀쩡할 테니까. 내가 사랑하는 부인을 아프게 할 리 없잖아.”
어쩐지 요한과 행복하게 떠들고 미래를 꿈꾸었던 순간이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 좀 겁이 나?”
눈가에 눈물이 맺혀서 떨어졌다.
“너무 나쁘게 생각할 건 없어. 너는 전처럼 계속 지내기만 하면 돼. 내 옆에서, 아주 행복하게. 그러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거야.”
“진짜 그럴 수 있겠어?”
나는 그를 보며 물었다.
“그건 리베르탄 공작가가 요한한테 했던 짓이랑 똑같은 짓이잖아. 그런데도, 나한테 그럴 수 있겠어?”
목적은 다르지만, 자신만 멀쩡한 채 주위만 끔찍한 꼴을 겪게 한다는 행동 자체는 동일했다.
“왜 못해?”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못 할 짓 같은 건 없어. 너도 아는 거 아니었어?”
“진짜로, 요한 너는 나한테 미움받는 게 무섭지 않니?”
하고 싶은 말이 우르르 떠올랐다. 잠깐 충격에 입을 벌렸던 나는 겨우 숨을 들이쉬고 울먹이며 물었다.
“그렇게 한다고 내가 전처럼 너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 우리가 정말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
“아니.”
요한은 담담하게 답했다.
“하지만 최소한 넌 내 곁에 있잖아.”
“내가 네 곁에 있기만 하면 끝이야?”
“……나는 네가 없는 순간을 살 수 없어. 그러니 미움을 받더라도 널 내 곁에 두는 수밖에.”
“도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나한테는 아주 중요해. 그러니까 네가 이해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요한, 넌 진짜 미쳤구나.”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어디에 갔는지, 갑자기 내 눈앞에 있는 남자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것까지 알고 날 사랑했던 거 아니었나?”
요한이 큰 손으로 내 두 눈을 덮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집에 가서 하자.”
그 순간 돌연 내 몸에서 맥이 빠진 것처럼 힘이 탁 풀렸다. 점점 의식이 흐려졌다.
“잘 자. 다시 일어나면 모든 게 돌아와 있을 거야.”
요한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나는 다시 잠들었다. 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땐, 난 블란쳇 공작저에 도착해 있었다.
그래. 다시 블란쳇 공작저다.
***
베티는 무사했다.
“마님, 괜찮으신 거예요?”
에리히도 그렇고,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희는 멀쩡합니다. 주인님께서 마님을 위해서라고 아무런 처벌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랬겠지, 요한은 똑똑하니까.”
굳이 따지자면, 이들은 요한의 귀중한 인질이다. 그러니 신변을 안전하게 보장해 줘야 했을 거다.
“아주 감동적인 재회인데?”
어느새 나타난 요한이 문가에서 가볍게 박수 쳤다. 나는 요한을 쏘아보며 말했다.
“비꼬지 마.”
“난 언제나 진심이야. 너무 애틋해서 질투 날 정도라니까.”
요한이 베티와 에리히에게 눈짓하자, 두 사람은 요한에게 인사하며 방에서 떠났다.
요한과 나.
두 사람만 방에 남았다.
나는 일부러 요한에게 시선을 돌린 채 벽을 바라봤다.
“이제 만족하니?”
“글쎄. 부인이 보기엔 어떤 것 같은데?”
“아주 만족스러울 것 같아. 원하는 대로 날 네 곁에 뒀잖아.”
자꾸 실소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눈가가 뜨거워졌다.
요한이 내 앞에 앉는 게 느껴졌다.
고집스럽게 요한을 보지 않으며 냉소적으로 웃었다.
“네 협박은 잘 알아들었어. 이제야 요한에 대해 잘 알게 된 것 같아 참 기뻐.”
“아까도 얘기했지만, 너무 나쁘게 생각할 건 없어.”
요한이 내 손에 제 손을 겹쳤다.
“모든 게 전이랑 똑같을 거야. 감금당했다고 생각할 것도 없어. 전처럼 얼마든지 사교계에 나가도 되니까.”
“어차피 난 도망치지 못할 테니까?”
“그런 말이 아니잖아. 의사 말대로 요즘 몸이 안 좋아서 더 힘들어하는 것 같고.”
걱정스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버겁게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홱 돌려 요한을 바라봤다.
“그런 말이 아니면 뭔데? 네가 원하는 대로 해달라는 거 아냐?”
“난 부인과 싸우고 싶지 않아.”
“그렇겠지. 내가 너랑 싸울 처지나 되나?”
“왜 갑자기 이래, 나는 네가 원하는 걸 다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니까.”
“그래, 그러면 네가 원하는 대로 도망치지 않을게. 대신 우리 이혼하자.”
요한의 눈썹이 까딱 올라갔다.
“지금 날 자극해서 좋을 게 없을 텐데?”
“봐. 도대체 뭘 들어준다는 거야. 아, 네가 허락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어서 그런가?”
나는 요한에게 밀리지 않고 냉소하며 쏘아붙였다. 요한은 내가 사납게 노려보자 살짝 당황한 듯했다.
“자꾸 왜 이래?”
“너야말로 못 알아들은 척하지 마. 내가 너한테 한 말이 어려웠니? 그러면 다시 얘기해 줄게.”
우습다.
“네가 뭘 바라든 상관없어. 나는 네 곁에 있는 게 싫어.”
나는 싸울 용기가 없었다.
요한과 내가 싸웠다가,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는 건 나뿐이었으니까. 괜히 요한의 미움을 받는 게 무서웠고, 분란을 만들어 좋은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럴 이유가 있었을까?
가짜로 아슬아슬하게 가려놓고 행복해했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가 나를 할퀴었다.
요한이 억누른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로 이럴 거야?”
“그러면, 그렇게 날 데려오고도 내가 속없이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 생각했어? 내 이유 같은 건 무의미하다며, 곁에 있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었어?”
“먼저 아무 이유도 말해주지 않은 건 너야. 내가 뭘 할 기회도 주지 않은 건 너라고.”
요한의 붉은 눈동자에 서러움이 묻어났다.
“넌 내가 그딴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어?”
“그러게, 그러면 너도 내가 이럴 걸 예상했어야지.”
“지금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좋아, 내 행동이 서운했다면 미안해. 이유를 말해주면 나도 주의 깊게 들을게.”
요한은 화해의 제스처처럼 말했다.
“서로 상처 주는 멍청한 짓은 하지 말자.”
“이유라…….”
요한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는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그게 난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지금 이 모든 게 너무 우스꽝스럽고 지루한 연극처럼 느껴졌다.
내가 지키려고 했던 건 뭐였을까?
이토록 부질없고, 쉽게 무너져 버릴 거였는데.
그 순간 나를 지탱하는 실 같은 게 툭, 끊어졌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난 너랑 있는 게 끔찍해. 이렇게 끔찍한 수법을 사용하는 네가 무서워.”
“그래, 끔찍할 만해. 그런데 내가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지. 내가 묻는 건, 네가 갑자기 변한 이유야.”
요한이 이를 아득 갈며 내 양어깨를 붙잡았다. 그가 내 얼굴을 사납게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그 이유, 그 이유를 말하라고!”
“말했잖아, 이유 같은 건 없다고.”
“너 진짜…….”
“왜 그게 이해가 안 돼? 그치만 어쩌겠어. 네 말대로 어쩔 수 없는데.”
당혹스러워하는 요한의 뺨에 내 손을 얹었다. 잘생긴 얼굴이 살짝 움찔했다.
“그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날 죽여보든가.”
“……뭐?”
요한이 눈을 크게 떴다.
“왜, 늘 하던 거 아니었어? 방금도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 다 죽인다고 했잖아. 날 죽이는 게 그렇게 어려운가?”
“어떻게 내가 너를-”
“쉬울 텐데.”
마주 본 붉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내 어깨를 붙잡은 그의 큰 손을 풀어 내 목에 가져다 대었다.
“한 번 실패한 거, 두 번째는 더 잘할 수 있을 거 아냐.”
목을 조르는 것처럼.
요한이 마른침을 삼키며 애써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요한이 목에 감싸인 제 손을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나는 힘을 주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요한은 끝까지 모른 척하는구나.”
“그러면…….”
“그런데 진짜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어? 끝까지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웃음이 나오는데 눈가로 눈물이 새어 나왔다. 눈가에 눈물이 맺혀 조금씩 떨어졌다.
“……부인.”
요한의 얼굴이 점점 무너졌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도대체 언제부터…….”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흐느끼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와서 날 죽이는 게 힘들어?”
요한은 내 손을 뿌리치고 목에서 얼굴을 떼어냈다. 그가 얼굴을 쓸며 변명했다.
“에스텔, 그건 다 사정이-”
“어차피 복수하기 위해 나랑 결혼한 거잖아. 가지고 놀다가 죽이려고.”
“…….”
“나한테 복수하려고 했잖아!”
요한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