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꼭 도망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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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화 꼭 도망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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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화 꼭 도망쳐요
2023.05.19.
나는 베티의 얼굴이 그려진 수배서를 바라봤다. 항구로 이동할 가능성이 높다 생각해서인지 수배서가 발에 챌 정도로 많았다.
‘요한이 이렇게까지 할 줄이야.’
졸지에 베티를 죄인으로 만든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심지어 어디를 가도 나와 베티 얘기를 하고 있었다.
“아니! 도대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왜 공작 부인을 납치한 거야? 블란쳇 공작가 사람들은 주인마님을 납치하게 놔뒀대?”
“여기 수배서 내용을 좀 보고 말하게. 이 여자는 공작 부인의 최측근 하녀로 일하면서 기회를 노렸다고 하잖아. 공작 부인이 아끼는 사람이라 다들 방심했던 모양이지.”
“허허. 악질도 이보다 더한 악질이 없군. 공작 부인께서는 저 여자가 이런 악독한 여자인지 알지도 못했을 텐데.”
나는 사람들이 욕하는 소리를 들으며 내 옆에 앉은 베티에게 작게 말했다.
“……네가 나를 납치했대.”
“뭐, 주인님 입장에서는 그렇게 느낄 수도 있죠.”
베티는 이미 이 정도 사태를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태연하게 항구 특산물이라는 어묵튀김을 건네주었다.
“일부러 막 튀긴 걸로 사 왔어요. 어제 이거 되게 맛있게 드셨잖아요.”
“응, 밖에서 먹어서 그런가. 유난히 맛있더라고. 이게 아니지.”
베티의 작전에 넘어가 아무 생각 없이 어묵튀김을 먹다 베티에게 물었다.
“이러다 네가 진짜 잡혀가면 어떻게 하지?”
“아무래도 끝까지 도망칠 수는 없겠죠. 그래도 마님이 아니라 저라서 얼마나 다행이에요. 저는 알아보기 쉽지 않거든요.”
요한의 배려인지, 나보다는 베티 위주로 얼굴이 알려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베티를 알아보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베티의 분장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베티가 장난스럽게 제 수배서를 들어 보이며 제 얼굴과 비교했다.
“어때요, 많이 비슷해 보여요?”
나는 깜짝 놀라 베티의 팔을 잡아당겼다.
“뭐, 뭐 해. 누가 보면 어쩌려고.”
“오히려 덜 수상해 보일걸요. 세상에 이런 범인이 어딨겠어요.”
도주와 변장이 특기이기 때문일까.
평소 내가 알던 베티와 전혀 다른 모습을 자주 볼 수 있게 됐다. 베티가 어깨를 으쓱이며 쾌활하게 웃었다.
“보세요, 제 얼굴을 잘 알고 계신 마님도 눈치채기 어렵잖아요.”
“……확실히.”
지금 베티는 구불구불한 긴 적발에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누가 베티를 보고 공작 부인을 납치한 하녀를 떠올릴 수 있을까.
길게 아이라인을 그리고, 입가에 점까지 찍어 순박하고 귀여운 수배서 속 베티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제가 괜히 잠입을 많이 했겠어요. 마님과 달리 얼굴에 비어서 꾸미면 잘 못 알아볼 정도거든요.”
베티가 눈을 찡긋했다.
“물론 일부러 시선을 끌기 위해서 더 사치스러운 느낌으로 변장한 거긴 해요. 사람은 보통 이미지로 판단하니까요.”
“역시 전문가는 다르네.”
“그쵸, 저 데려오길 잘하셨지요?”
베티는 귀엽게 으스대다가 미리 예매한 배표를 내 손에 쥐여주었다.
“이제 이곳을 떠나면 더 자유로워지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왜 배표를 쥐여주는 거야?”
“혹시 모르니까요.”
뿌우우-
서늘한 아침 공기와 함께 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한창 베티에 대해서 떠들던 사람들도 자신들의 일에 몰두하느라 바빠지기 시작했다.
“배 출발하기 전에 잠깐 주변 구경이나 좀 할까요?”
베티가 내 팔짱을 낀 채 발랄하게 말했다.
“그래, 좋아.”
처음 와본 곳이니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베티가 급하게 내 팔을 잡아당겨 비좁은 건물 틈으로 쏙 빠져나갔다.
“베티?”
“마님, 조금만 더 달릴게요.”
생선 대가리를 비롯해 해산물 쓰레기가 마구 버려진 장소를 거쳐 아무도 없는 그늘진 구석에 도착했다.
겨우 도망친 베티가 나를 보며 생긋 웃었다.
“이제 사람들이 보이지 않네요.”
“우리 누구한테 쫓기고 있었어?”
“그렇다기보단 누가 저희를 유심히 보고 있는 것 같아서요.”
“난 눈치도 못 챘는데.”
평범한 선원들과 항구 사람들밖에 안 보였다.
‘전문가의 눈은 다르구나.’
틈틈이 나무들에게 부탁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나무들은 인간에 비해 디테일이 부족했다.
그래서 대놓고 나한테 접근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평범한 사람과 수상한 사람을 구분하지 못했다.
‘요한에 대해서는 전담으로 부탁해서 다행이지.’
요한은 나무들 눈에도 특이한 사람이니까.
기차역에서 허탕 친 요한은 블란쳇 공작가로 돌아가 내 수색을 지시한 듯했다.
베티가 힐끔 주위를 보며 말했다.
“제가 노력하긴 했지만, 아마 배가 출발하기 전에 우리는 들킬 거예요.”
“지금 잘 따돌린 거 아니었어?”
“배 타려고 하면 검열을 할 테니까요.”
내가 두 눈을 크게 뜨자, 베티는 나를 달래듯 두 손을 붙잡았다.
“평소라면 이 정도로도 충분했을 거예요. 하지만 주인님께서 정보 길드 전체에도 수배를 건 모양이에요. 외부인이라면 모두 확인할 거고, 이런 분장으로는 속이기 좀 힘들죠.”
“그러면 다른 곳으로 갈까?”
“어디로요, 지금 항구로 빠져나가지 않으면 더 힘들어질 거예요.”
베티가 나를 안심시키듯 예쁘게 웃었다.
하지만 나는 그 미소가 슬프게 느껴졌다.
불길한 느낌이 든다.
“그러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면 되지. 너도 알잖아, 나한테도 능력이 있다는 거.”
“마님.”
“그때 기차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처럼 또 사람들의 눈을 속이면-”
베티의 손이 내 손을 꼭 쥔다. 나도 모르게 나오던 말이 멈추었다.
이런 말을 할 시간조차 얼마 없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베티가 그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하는 우리 에스텔 마님, 제가 아니면 또 누가 식사를 챙겨줄지 걱정돼요. 제발 식사 꼭 잘 챙기세요. 먹기 싫어도 건강하시려면 꼭 제대로 드셔야 해요.”
“베티가 잘 챙겨주고 있잖아.”
“제가 없으면 어쩌려고요. 언제나 제가 마님의 식사를 챙길 수 있으면 좋겠지만…….”
“베티가 챙겨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베티가 챙겨주지 않으면 싫어.”
“원래 저 없이 도망치려고 하셨잖아요.”
“나도 알아, 하지만 이제 베티 없이 가려고 하니까…….”
이상할 정도로 후회가 들었다.
요즘 내가 오락가락하긴 했지만, 오늘 유독 더 마음이 가라앉았다.
“베티. 그냥 우리 돌아갈까?”
“주인님 곁에 머무시는 게 너무 힘들다면서요.”
“뭐, 다른 기회를 노리면…….”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저는 마님이 도망치는 데 성공했으면 좋겠어요. 같이 다니면서 그게 옳다는 걸 알았고요.”
베티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저택의 마님은 생기가 점점 시들어가는 화초를 보는 것 같았어요. 제가 어떻게 노력해도, 주인님을 만날수록 무너져가는 느낌이었는데. 지금 마님은 그렇지 않아요.”
“베티.”
“마님과 도망쳐서 다행이에요. 보낼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마님이 주인님 곁에 머물렀으면 좋겠다는 욕심으로, 영영 마님이 }불행하게 할 뻔하지 않아서 좋아요.”
베티의 웃음소리에 눈물이 흘렀다.
“왜 그렇게 나만 생각해? 베티 네 인생도 좀 생각해야지. 붙잡히다가 요한이 널 해코지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에이, 저도 생각한 게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가만 보면 마님은 항상 다른 사람만 걱정한다니까요.”
솔직히 요한에게서 탈출하는 길은 내 예상보다 더 힘들었다. 힘든 건 감수할 수 있었는데, 내 체력이 따라주지 않아서였다.
자꾸 잠이 늘고, 쉽게 피곤해졌다.
누가 보면 임신 중이라 착각할 정도다. 그런 내가 무리하지 않도록 계속 도와줬던 게 베티다. 아마 베티가 아니었다면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마님의 인생을 살아요. 마님 행복을 위해서요.”
베티가 품을 뒤져 표 하나를 꺼냈다.
방금 전 내게 준 호사스러운 표와 달리 투박하고 빳빳한 종이에 인쇄된 표였다. 목적지도 우리가 계획한 곳과 달랐다.
“이 배를 타고 가면 쪽배들이 모이는 항로에 도착할 거예요. 제가 아는 선장에게 얘기해 뒀으니, 그 배를 타고 제국을 벗어나 완전 다른 곳으로 건너가는 거예요.”
“그러면 너는?”
“제국을 벗어나면 주인님의 권력도 닿지 않을 거예요. 페실리아 왕국이라고 제가 전에 관광책 보내드렸던 거 기억나시죠?”
문명이 발달한 제국과 달리 숲이 가득한 바다 너머의 왕국이다.
“거기 사람들은 마님과 달리 색이 진해서 걱정되긴 하지만, 그래도 마님은 어디를 가시든 사랑받을 수 있을 거예요.”
“…….”
“원래라면 꼭 붙어 있어야 하는데, 마님이 요정이라 참 다행이에요. 나무들이 마님을 지켜줄 거니까요.”
베티는 내게서 몸을 떼고 멀어졌다
“어서 가요, 저도 제 나름대로 최대한 먼 곳으로 도망칠게요. 제 실력 아시죠?”
베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혼자가 되었다.
눈물이 찔끔 났지만, 나는 아직 베티의 온기가 남은 배표를 꾹 쥐었다.
‘이렇게 도망쳤는데 잘 살아야지.’
잘 감췄다고 생각했는데, 옆에서 매일 보는 베티한테만큼은 숨기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내가 자꾸 부정적인 생각에 잠식되어, 무너지고 있다는 걸.
‘어떻게든 더 살 생각만 해야 해.’
나는 베티가 해준 변장이 지워지지 않았는지 꼼꼼히 확인하고, 검은색 드레스에 묻은 먼지를 탈탈 털었다.
“나무님들, 요한은 지금 뭐 하고 있어요?”
-그놈 방에 커튼을 다 친 탓에 뭘 하고 있는지 보이진 않아. 하지만 외부로 나오진 않은 것 같다.
-그래, 다른 장소나 이 근처에서도 아직 비슷한 사람을 못 봤거든.
‘에스텔 리베르탄, 에스텔 블란쳇이 아니라…….’
그냥 나 자신으로.
행복하게.
***
베티가 구해준 배는 점심에 출발했다.
근처에서 적당히 시간을 보내던 나는 선착장에 들어가 배로 쏙 들어갔다. 워낙 작은 배라서인지 신분 검사를 하지 않았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의지할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더 긴장돼.’
괜히 주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최대한 태연하게 행동하며 자리를 잡았다.
근처엔 나 말고도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나는 신문을 보는 척 나무들과 떠들었다.
-바다로 가면 우리 눈에서 멀어지겠구나. 거기 나무들은 또 어떤 소리를 할지. 우리가 다시 볼 수 있으려나?
-그래도 말은 다 전달되잖아요.
최근 나는 특정 나무와 따로 대화하지 않고, 여러 나무와 교류했다. 그런데도 나무들은 나를 계속 봐왔다면서 엄청 아껴줬다.
미안할 정도다.
“표 확인 다 마쳤습니다. 배 출발하겠습니다.”
이제 출발한다. 진짜 제국에서 벗어나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되는 거다.
묘한 기대와 두려움이 밀려왔다.
-아니. 웬 놈들이 항구로 몰려가고 있다.
-네가 말한 그 블란쳇 기사들이라는 것 같은데?
항구 근처에 나무가 없어서 혹시라도 붙잡힐까 봐 걱정됐다.
-기사들이 어디까지 왔어요?
-일단 우리 시선이 닿는 곳에서는 계속 달려가고 있다.
-걱정되는구나. 너무 속도가 빨라서…….
닻을 끌어 올리는 속도가 너무 느리게 느껴졌다. 힐끔 주위를 둘러봤다.
뿌우우우-
뱃고동 소리와 함께 배가 출발했다. 그것과 동시에 말을 탄 기사들이 선착장 근처로 도달했다.
그 앞에 눈에 띄는 붉은 머리가 보였다.
‘레이몬드 기사단장이잖아?’
하마터면 배에서 그대로 붙잡힐 뻔했다. 아직도 긴장이 풀리지 않아 심장이 요동쳤다. 나는 한 손을 가슴께 올리며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런데 레이몬드 기사단장의 표정이 뭔가 이상했다.
‘왜 당황한 것 같지 않지?’
코앞에서 배를 놓친 것이나 다름없는데.
“자리 좀 비켜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네.”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움직였다. 그리고 늘씬한 남자가 내 옆에 앉았다.
귀에 익은 목소리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자 내 옆자리에 앉은 남자, 요한이 입꼬리를 비뚤게 올렸다.
“오랜만이야.”
“…….”
“너무 오래 산책해서 얼굴 잊어버릴 뻔했어. 그래도 이렇게 얼굴 보니, 내가 잘 기억하고 있었네. 그치?”
검은 정장을 입은 요한이 내 손에 제 손을 올렸다. 그리고 억센 손길로 손에 깍지를 꼭 붙들었다.
“표정이 왜 그래. 내가 안 반가워?”
“요한은 저택에 있다고 했는데…….”
“그럴 줄 알고 대역을 고용했지. 어떤 능력인진 모르겠지만 사람을 그리 잘 관찰하는 것 같진 않았거든.”
요한은 다른 손으로 내 턱을 쥐고 볼에 입을 맞췄다. 내가 흠칫 어깨를 떨며 고개를 돌리려 하자, 그가 손아귀에 힘을 줬다.
“내 시선 피하지 마.”
붉은 눈동자가 광기로 일렁였다.
“왜? 어차피 요한한테 붙잡혀 있는데.”
“네가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게 너무 질투 나서 미칠 것 같거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내 귀를 긁었다.
“질투로 머리가 돌아서 다 죽여버리면 어떻게 해. 그건 또 너무 슬픈 일이잖아.”
마치, 협박처럼 느껴지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