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위조 신분
(151/182)
151화 위조 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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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화 위조 신분
2023.05.12.
블란쳇 공작저에 짙은 공포가 내려앉았다. 사용인들이 모두 불려 나와 요한 앞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요한이 그들 사이를 천천히 걸어가며 물었다.
“그래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가장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페트리샤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마님께서 저택의 사람들이 잠든 틈을 타 나가신 모양입니다. 주인님의 성국행을 준비하느라 모두 방심했던 탓에…….”
“그래서?”
“더군다나 최근 마님의 상태가 좋지 않아 웬만해서는 마님의 방에 들어가지 않아 확인이 늦었습니다.”
페트리샤가 바짝 긴장한 채로 요한의 얼굴을 바라봤다.
‘……마님!’
최근 요한이 에스텔과 어울리며 한층 풀어진 모습을 보여주었었다. 그래서 페트리샤도 자기도 모르게 방심했던 것 같다.
요한은 모든 감정을 제거한 것처럼 무표정했다.
페트리샤는 저 얼굴이 한창 복수밖에 남지 않던 남자의 얼굴이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이제 다시 볼 일 없을 것이라 여겼던 얼굴.
‘무슨 일이신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돌아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마님.’
그렇지 않다면, 여러모로 아주 큰일이 날 것 같았다.
요한은 페트리샤를 비롯해 여러 사용인의 이야기를 쭉 들었다.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던 그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아무것도 모른다?”
“……예.”
“이 큰 저택에서 연약한 여자 한 명이 도망치는 동안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이 가능한가?”
“…….”
“아니. 그럴 수 있다 치지. 하다못해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눈치챈 사람이 어찌 하나도 없을 수 있지?”
모든 행동에는 흔적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에스텔의 도주에는 어떤 흔적도 없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계획했다는 뜻이다.
“이제 보니 블란쳇 공작가의 경비가 엉망이었군. 내가 저택에 연락하지 않았다면 누구도 부인이 사라진 걸 몰랐을 테니.”
요한이 큰 손으로 제 두 눈을 가리며 냉소했다.
“난 그것도 모르고 어리석게 성국이나 갈 뻔했네. 내 부인이 사라진 줄도 모르고.”
이건 베티의 활약이 컸다.
에스텔의 상태가 안 좋아지면서 베티가 에스텔의 모든 것을 책임졌고, 자연스럽게 체크할 만한 다른 인원이 사라졌던 것이다.
사용인들 모두 책임감을 느끼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레이몬드가 방에 숨어 있던 한 남자를 묶어서 끌고 왔다. 에리히였다.
“주군. 블로뉴 남작을 데려왔습니다.”
레이몬드가 바닥에 에리히를 꿇어 앉히며 상황을 보고했다.
“블로뉴 남작이 마님의 부재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작업하고 있었습니다. 하녀장이 개인적으로 마련한 마도구까지 예상하지는 못해 찾아내는 시간이 빨랐던 것 같고요. 에리히 블로뉴 남작이 모두 자백했습니다.”
에리히는 모든 상황을 예상한 사람처럼 얌전하게 요한의 앞에 있었다. 요한이 구두로 에리히의 무릎을 가볍게 찼다.
“에리히 블로뉴.”
“…….”
“에스텔은 어디에 있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에리히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주인님께는 면목이 없습니다. 가신으로서 주인을 배신한 죄, 죽음으로 치르겠습니다.”
“에스텔이, 어디 있냐고 물었을 텐데.”
“마님께서는 무사하십니다. 부족한 여동생이지만, 베티가 목숨을 바쳐 마님의 안전을 책임지겠다고 했습니다.”
요한이 에리히의 턱을 우악스럽게 쥐고 강제로 시선을 맞췄다. 붉은 눈동자와 마주친 에리히가 몸을 움찔했다.
각오하긴 했으나, 요한의 눈빛이 지나치게 살벌했기 때문에.
요한은 에리히의 목을 그대로 꺾어버릴 것처럼 손아귀에 힘을 주며 말했다.
“난 물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억눌려 있었다.
“에스텔이 어디 있냐고.”
“……주인님. 마님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에리히는 요한의 위압감에 눌린 채로도 겨우 입을 열었다.
“마님을 억지로 찾으셔 봐야 상황은 악화되기만 할 뿐입니다. 지금은 마님께 여유를 주시는 것이- 컥!”
“누가 네 생각을 물었던가?”
요한은 목을 쥔 채 그대로 에리히를 들어 올렸다. 공중에 들어 올려진 에리히는 목이 막혀 버둥거렸다.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말해.”
“죄, 죄송합니다.”
목이 졸린 에리히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생존본능이 앞선 상황에서도 에리히는 에스텔의 위치를 누설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죽으려는 각오가 느껴졌다.
‘에리히는 그런 놈이지.’
요한이 과격한 성미에도 그를 보좌관으로 두었던 것 역시 이런 대쪽같은 충성심 때문이었다.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해 충성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지만.
“네가 대답하지 않고 시간을 끈다고 무언가 달라질 것 같은가? 네가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연대 책임으로 다른 이들을 하나씩 처리해 갈 거다.”
사용인들이 공포에 몸을 떨었다. 에리히 다음 차례가 바로 자신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부인이 네 희생을 알고도 기뻐할 사람으로 보이나?”
요한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태까지 감춰준 걸로도 충분히 고마워할 거다. 쓰잘데기없는 일에 목숨을 바치지 말고 불어.”
에스텔의 이야기에 에리히의 청회색 눈동자에 동요가 스쳤다.
“저, 저는-”
하지만 에리히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완강히 거부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럼 어쩔 수 없군.”
그러던 순간.
“주인님! 편지가 있습니다!”
그때 페트리샤가 요한에게 외쳤다. 요한은 볼일이 끝났다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에리히를 놓았다.
“……편지?”
“예. 마님께서 주인님을 향해 남겨놓으신 듯합니다. 아무래도 에리히 경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모양입니다.”
요한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내놔.”
요한은 사막에서 물을 찾은 사람처럼 조급하게 페트리샤에게서 편지를 가로챘다.
[요한에게.]
에스텔의 글씨체가 맞았다.
[말없이 떠나서 미안해. 나는 너를 더 마주 보기가 힘들어. 이렇게 말하면 너는 이유를 묻겠지. 하지만…….]
뒤의 글씨는 눈물로 뭉개져 있었다.
[미안, 난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해. 나를 찾지 말아줘.]
편지를 쥔 요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에리히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내게 어쩔 수 없이 협력했을 뿐이야. 방심한 것도 요정의 힘 때문이고. 처벌은 요한의 마음이지만, 난 요한이 그러지 않아줬으면 좋겠어.]
“……에스텔.”
요한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했다.
“끝까지 다른 사람 얘기뿐이네.”
심상치 않은 기색에 레이몬드가 파랗게 질린 채 요한에게 말했다.
“주군. 마님께도 사정이 있었을 겁니다. 주군을 가장 많이 생각하실 분 아닙니까?”
“맞습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어도…….”
“그만.”
요한은 차갑게 말을 잘랐다.
“당장 그 여자를 찾아내서 내 앞에 끌고 와.”
“주군. 그건 정말-”
“네 주인이 누구인지 잊었나?”
요한의 핏빛 눈동자가 짐승처럼 번뜩였다.
“당장 움직여. 주인을 모르는 개들의 모가지를 모두 찢어놓겠는 걸 겨우 참는 중이니까.”
“……명을 받듭니다.”
“수도에 있는 모든 기차표와 항로를 모두 수색해. 저번에 발견한 위조 신분증을 사용했는지도 확인하고.”
레이몬드가 긴장감이 서린 얼굴로 경례했다.
“충성.”
이윽고 요한은 에리히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에리히는 지하에 가둬. 배신자에 대한 처벌은 에스텔을 잡아 온 뒤에 하겠다.”
명령을 내리는 요한의 분위기는 한없이 냉혹했다. 사용인들이 공포에 질려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인님!”
에리히가 요한에게 절박하게 외쳤다.
“제 목숨은 상관없습니다. 다만, 마님은 상처가 많은 분입니다. 설사 돌아오게 되셔도 그분의 입장을-”
“이거 웃기는 놈이네.”
심사가 뒤틀린 요한이 에리히의 뺨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 시간이라는 걸 내 곁에서 보내지 못할 이유가 없잖아. 안 그래?”
***
베티가 내 몸을 흔들었다.
“마님, 도착했어요. 일어나세요.”
“아, 벌써 도착했어?”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다니느라 평소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에리히가 시간을 끌어주다 잘못되면 안 될 텐데.’
사실 나는 처음부터 베티가 끼게 된 이상 에리히도 함께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내 의견에 격하게 반대했다.
‘안 돼요, 마님! 주인님께서는 에리히 이딴 것도 남자라고 빈정 상하실 게 뻔해요! 안 그래도 눈이 뒤집히실 텐데 에리히가 끼면 광기가 두 배……!’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저택에 한 사람 정도는 남아 있어야 합니다.’
두 사람의 의견이 합리적이라는 건 이해했지만, 그래도 요한에게 해를 입을까 봐 걱정됐다. 그래서 에리히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보호막으로 내 편지를 맡겼다.
‘절대 목숨을 걸지 마. 걸리면 내가 협박했다고 하고, 이 편지를 보여줘. 그리고 내가 어디로 움직였는지고 그냥 말해.’
‘알겠습니다, 마님.’
그렇게 신신당부했어도, 에리히가 사서 목숨을 걸 것 같아서 너무 걱정됐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도망치지 말 걸 그랬나.’
내가 요한 몰래 움직였다는 것 자체가 블란쳇 공작저 모두에게 민폐라는 건 알고 있다. 진정 내가 에리히를 배려했다면, 나는 요한과 화해하고 평소처럼 지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어서 문제다.
블란쳇 공작저에서 조금 벗어났다고 숨쉬기가 한결 편해졌다. 정신을 놓을 때마다 들려오던 아기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님, 몸이 많이 안 좋으세요?”
“아. 아니야.”
“척 보기에도 안색이 파리하게 질려 계신데요. 바로 쓰러지실 것 같아요.”
“갑자기 움직여서 그런가 봐. 그래도 걱정하지 마. 나 저택에 있을 때보다는 훨씬 기분이 좋아.”
베티는 나를 걱정하면서도, 내가 기분 좋다는 말에 한결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저 그러면 표를 바꿔올게요. 마님은 여기서 쉬고 계세요.”
나무들의 말로 주변 상황을 체크한 나는 심호흡을 하며 위조 신분증을 꼭 쥐었다.
[로렐린 이 자리아.]
갈색 단발에 갈색 눈동자의 여성.
다행히 베티가 숙련된 솜씨로 변장시켜 준 탓에 바로 검사해도 넘어갈 정도로 이 위조 신분증과 얼굴이 똑같았다.
‘진짜 신기하다.’
이래서 경력을 무시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베티를 기다리는 동안 난 모자를 쓰며 주위를 둘러봤다.
처음 보는 기차역은 온갖 사람의 생기로 흘러넘쳤다.
“간식 사세요! 기차에서 먹을 때 두 배로 맛있다는 계란!”
“올해 제국 최고의 가십들을 총망라해 두었습니다! 이것만 읽으면 당신도 최신 유행 마스터~!”
재미 삼아 가십지 하나를 구매했다. 신문 파는 소년이 헤벌쭉 웃으며 넘겼다.
“감사합니다. 얼굴만큼이나 현명하게 소비하시는 분이시네요.”
“잘 읽을게요.”
“옙, 결코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저희 신문사가 소식은 좀 느려도 정리 하나만큼은 기깔 나게 합니다!”
소년은 유쾌하게 웃으며 엄지를 추켜올렸다. 그때 소년의 동료처럼 보이는 사람이 달려왔다.
“야, 빨리 신문 팔던 거 접어. 오늘 장사는 텄다!”
“왜? 나 지금 장사 시작한 거 안 보여?”
“범죄자 하나가 이 기차역으로 도망쳤다나 봐. 기차 운행도 중단한다는데?”
어쩐지 등골이 싸했다.
나는 가십지를 읽는 척 얼굴을 가리고 구석에 앉아 있었다. 표를 바꾸러 갔던 베티가 굳은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마님, 주인님께서 움직이신 모양이에요. 빨리 다음 계획으로 움직여야 할 것 같아요.”
기차역 근처를 수색하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벌써?’
예상은 했지만, 요한의 움직임이 너무 빠르다. 기차역에서 벗어나기 위해 베티의 손을 잡고 움직였지만, 어디로 움직여도 블란쳇 기사들이 먼저 보였다.
베티가 표정을 찌푸렸다.
“지금 다른 데로 도망가려고 해봐야 소용없겠어요. 근처에 잡아놓은 곳이 있어요. 거기에 숨어 있어야겠어요.”
“그래, 그러자.”
내가 흑막을 너무 우습게 본 모양이다.
***
요한은 페를린 남작을 앞에 둔 채 다리를 꼬았다. 실질적 기차 소유주인 페를린 남작이 침을 꿀꺽 삼켰다.
“마, 말씀하신 대로 기차 운행은 중단했습니다. 기사들이 수색하고 있으니, 금방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다행이군.”
“예. 특히 로렐린 이 자리아라는 여성이 들어오면 바로 붙잡아두라고 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요한이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에스텔에게 위조 신분증을 발급해 줄 때만 해도 이렇게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역시 대비를 해놓으니 빛을 발하게 됐다.
‘다른 신분으로도 이동하지 못하게 전부 봉쇄했다.’
그러니 에스텔의 이동수단은 모두 막힌 거나 다름없다.
‘변수가 있다면 요정의 힘인데…….’
갑자기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건 아닌 듯하니, 그의 손에 들어오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때 레이몬드가 관리실에 들어왔다.
“주군. 로렐린 이자리아의 신분으로 표를 끊으려던 흔적을 찾았습니다. 주위를 수색하다 보면 금세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체크메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