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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화 도주 (150/182)


150화 도주
2023.05.09.


요한은 리베르탄 공작가를 수색했다.

지하실부터 지붕까지 모든 곳을 싸그리 뒤졌다. 하지만 새로운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분명 요정과 관련된 무언가가 있을 텐데.’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에스텔의 담담한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설사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난 그러고 싶지 않아.’


‘너랑 같이 사는 게 힘들어.’


‘너랑 한 공간에서 숨을 쉬고, 이렇게 마주 보면서 산다는 것 자체를 견딜 수 없어.’

 
요한은 에스텔의 말에서 그가 파악하지 못한 단서가 있을까 되새겼다. 그러나 되새길수록 비참한 기분만 들 뿐이었다.

지하실을 수색하고 나온 레이몬드가 팔을 스트레칭했다.


“주군. 아무리 뒤져봐도 나오는 것이 없습니다. 리베르탄 공작가의 사형장에서도, 펠시스 후작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서를 찾고 싶으시다면 새로운 곳을 알아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나.”

“예. 주군.”

레이몬드가 심각한 표정의 요한을 살폈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그다지.”

요한이 까칠하게 답했다. 대답이나 태도는 평소처럼 완벽했다. 하지만 요한의 최측근인 레이몬드는 저 모습이 너무 인위적이라고 느꼈다.


‘주군께서도 무리하시고 계시는군.’

특히 사람들 앞에서 저렇게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쥐는 걸 보면 더 그랬다. 웬만한 일로는 결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분이니까.


‘마님께선 도대체 무슨 이유로 주군께 갈라서자고 하신 걸까?’

레이몬드뿐만 아니라 저택의 그 누구도 에스텔의 속내에 대해 알지 못했다.


‘왜 자꾸 두 분께 이런 일이 생기는지.’

레이몬드는 리베르탄과 전혀 은원이 없는 남자였다. 요한이 신분을 위장하고 돌아다니던 시절 등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과 에스텔, 두 사람을 계속 보다 보면 괜히 마음이 쓰라렸다.

분명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고 있는데, 어딘가 모르게 어긋나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님을 감금하신 건 악수인데.’

그땐 저택의 모두가 경악했다.

요한이라면 조금 더 세련된 방식으로 에스텔을 묶어놓을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주군, 그러시다 마님과 더 사이가 틀어질 수도 있습니다. 감금은 너무 섣부른…….’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예?’


‘떠나겠다는 사람을, 가둬두는 것 외에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나?’

 
모두 그제야 깨달았다.

에스텔이 이혼을 요구한 순간부터, 요한은 세련된 방법 같은 건 떠올리지도 못할 정도로 돌아버렸다는 것을.

불행인지 다행인지 에스텔은 혼인 무효를 요구한 뒤 요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매우 잠잠했다.

감금 때문에 힘들다거나 불평을 토로하며 요한과 싸우는 일도 없었다.


‘폭풍 전의 고요 같다.’

요한은 생각에 잠긴 듯 리베르탄 공작저 너머를 바라봤다.


“이 저택은 전부 태운다.”

“예?”

“어차피 죄인들의 저택, 나올 게 없다면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없애버려야지.”

어차피 리베르탄 공작저는 당장 불태워도 상관없을 정도로 흉흉한 모양새였다. 바닥에 망가진 저택 자재가 굴러다닐 정도였다.


“옙, 알겠습니다. 또 지시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최근 성국의 사절단이 죄다 조용하지? 꼴에 성황이라고 쉽게는 나오지 않겠다, 이건가.”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광기로 번들거렸다.


“신이라는 이름을 들먹이며 쓰레기 같은 짓을 했으니, 머리채라도 직접 잡고 끌고 와야겠다.”

“그러면 성국을……?”

“그래, 짓밟으러 간다.”

요한이 예스텔라를 이용해 상황을 꼬았을 성황을 떠올리며 건물 자재를 짓밟았다.

콰득!

***

며칠 뒤, 저택은 묘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아직 에스텔과 요한이 화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귀족 부부 중에서도 유독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비주얼도 비주얼이지만, 서로 아껴주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흐뭇해지게 하는 부부.

그래서 블란쳇 공작가의 사용인들은 두 사람이 싸우더라도 금세 화해할 것이라고 여겼다. 재판이 다 끝나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냉랭했다.


“그럼, 부인을 부탁해.”

늦은 새벽, 요한은 목적지를 밝히지 않고 기사 몇과 함께 저택을 나섰다.

베티와 페트리샤가 요한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예. 주인님.”

“마님께서도 몸이 괜찮으셨으면 주인님을 배웅하러 오셨을 거예요.”

요한은 에스텔의 빈자리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할 거 없어. 아픈 에스텔이 억지로 내려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러던 때였다.


“지금 내가 나오지 말았어야 했으려나?”

에스텔이 두꺼운 숄을 두른 채 창백한 얼굴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숄 아래의 흰 원피스 자락이 유령처럼 흩날렸다.


“……에스텔.”

요한은 헛것이라도 본 것처럼 에스텔을 불렀다.


“여긴 무슨 일이야?”

“요한 배웅하러 왔어.”

에스텔은 천천히 요한의 앞까지 걸어왔다. 그리고 요한의 두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인사는 해주고 싶었어. 잘 다녀와.”

“……기분은 풀렸어?”

“아직은?”

에스텔이 힘없이 웃었다.

하지만 요한은 그 대답이 오히려 감사했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들어주지 않던 에스텔이다.

그렇게 극단적으로 말했던 마음이, 그 응어리가 쉽게 풀릴 리 없다.


‘이렇게 나와줬잖아.’

요한이 에스텔을 품에 꼭 안았다.


 
추운 겨울이라서인지 유독 에스텔의 체온이 차갑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작은 체온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기 위해서 두 눈을 꼭 감았다.


“고마워.”

이번 한 걸음이, 에스텔이 그를 향해 낸 용기처럼 느껴졌다.

이 정도 용기면 된다.

나머지는 요한이 다 할 수 있다.

요한이 에스텔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창백한 얼굴이 추위에 타 볼만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왜 이렇게 춥게 입고 나왔어, 그러다 감기 걸려서 쓰러질라.”

“서두르지 않으면 요한이 가버릴까 봐. 빨리 나오려다 보니, 이렇게 나오고 말았네.”

요한은 에스텔의 숄을 꽁꽁 묶었다.


“어서 들어가. 나 없는 사이 아프지 말고.”

“요한도 몸 잘 챙겨.”

“최대한 빨리 다녀올게.”

요한이 에스텔의 배웅을 받으며 말을 타고 떠났다.

흑마를 탄 그는 위험하게도 몇 번씩 에스텔이 그 자리에 있는지 뒤돌아보면서 달렸다.

에스텔은 요한의 모습이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얌전히 손을 흔들어줬다.

어느새 검은 점처럼 작아진 요한이 완전히 사라졌다. 에스텔이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작게 중얼거렸다.


“……요한, 고마워하지 마.”

미안해.

난 여전히 네 얼굴을 보기가 힘들거든.


“마님, 이 가벼운 차림으로 나오시면 어떻게 해요. 빨리 들어가요.”

베티가 호들갑을 떨며 에스텔을 걱정했다.


“찬바람을 쐬셨으니 몸을 따듯하게 해주는 차를 올려드려야겠어요. 오늘은 하루 종일 침대에서 푹 쉬셔야 할 줄 알아요~”

“나 아직 아프지 않은데.”

“병이 생기기 전에 쉬셔야지요!”

베티는 허리에 두 팔을 올리며 엄숙하게 말했다.


“제가 마님을 붙들고 있는 동안, 페트리샤 씨께서 마님 일을 대신 해주실 거예요. 그쵸, 페트리샤 씨?”

“물론입니다. 마님께는 휴식이 필요합니다. 제게 맡겨주시지요.”

“거봐요, 들으셨지요?”

장난스럽게 으스대던 베티는 에스텔의 귀에 대며 말했다.


“마님 방에 준비를 다 해뒀어요. 서둘러 나가서 준비하죠.”

에스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베티는 믿음직한 첩자다웠다.

***

요한은 에스텔을 놔줄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에스텔 역시 요한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탈출하기로 했다.

애초에, 그에게 그녀를 감금할 권리가 있는 건 아니니까.


‘요한에게서 멀어지면 괜찮아질 거야.’

에스텔은 요한에게 남긴 편지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녀는 도주로를 준비하면서 요한에게 남길 것들까지 다 준비해 놓았다.


‘서프라이즈 선물이었는데.’

마지막 선물이 되게 생겼다.

에스텔은 베티를 따라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방문을 나섰다. 방문 앞에서는 모든 준비를 마친 베티가 서 있었다.

베티가 한숨을 쉬었다.


“마님, 이제 와서 마음을 바꾸실 생각은 없으시지요?”

“응.”

“알았어요, 이렇게 된 거 끝까지 마님을 도울게요.”

베티의 발밑에 방문을 감시하고 있던 기사가 기절해 바닥을 뒹굴었다.

기사들뿐만이 아니다.

저택 전체가 시간이 멈춘 것처럼 잠에 빠져 있었다. 베티가 잠에 빠진 기사를 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마님, 이건 도대체 어떻게 하신 거예요?”

“나무의 향기로 기절시킨 거야.”

요정의 힘을 되찾으면서 에스텔은 더 광범위하게 나무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수면 효과가 있는 향을 주위에 퍼뜨려 잠재우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요한이 있을 땐 쓸 수 없지만.’

몇 번 시험해 봤지만, 요한은 내성이 높아 향으로 잠재울 수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구름나무 정도 되어야 하려나.’

물론 에스텔도 제대로 시험해 본 건 아니었다. 잘못해서 요한한테 요정의 능력을 죄다 들킬지도 몰랐으니까.


“이제 가자. 항구로 가는 거지?”

“예. 뒷문에 마차를 준비해 뒀어요. 마차를 타고 항구 쪽으로 이동한 다음, 연합 왕국으로 가시면 주인님도 쉽게 찾지 못하실 거예요. 무엇보다 뒷배가 뒷배니까요.”

몇 번이고 확인한 계획이다 보니 일을 쉽게 진행되었다.

애초에 다들 에스텔이 도망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해 방심했던 탓도 있었다.

베티가 마부석에 앉아 마차를 이끌었다. 후드를 뒤집어쓴 에스텔이 빈 손가락을 보았다.


‘있다 없으니까 허전하네.’

요한이 선물해 준 반지, 귀걸이, 목걸이, 전부 다 공작 부인의 방에 그대로 놓고 왔다.

마법이 걸려 있을지도 몰라서였다.


“정말 떠나는구나.”

마차가 출발했다. 블란쳇 공작저가 점점 멀어져갔다.


‘요한은 언제쯤 내 소식을 들으려나.’

방문지를 밝히지 않았지만, 에스텔은 사용인들을 통해 행선지를 미리 확인한 상태였다.


‘성국이면 만만한 상대가 아니지.’

지금 요한은 성국에 황제를 대변해서 보상을 요구하러 가야 하기 때문에 더욱 자리를 비우기 어려우리라.


‘요한이 많이 화내겠지?’

에스텔은 괜히 마음이 저릿했다.

블란쳇 공작저에 많은 추억을 두고 와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상하게 또 눈물이 나왔다.

마부석에 앉은 베티가 물었다.


“마님, 괜찮으세요?”

“응. 나 괜찮아. 요새 감정 기복이 심해서 그런 거 같아.”

원래도 눈물이 잘 나는 체질이었지만, 최근 들어 매일 감정이 널뛰듯이 계속 바뀌고 아무 이유 없이 눈물이 나버리고는 했다.

그러니 이 감정도, 금세 바뀔 거다.


‘그렇지, 아가?’

에스텔은 다정하게 제 배를 쓰다듬었다.


‘내가 미쳐서인지 네 심장 소리가 아직도 들리거든.’

 

***

요한은 성국으로 움직이는 내내 기분이 이상했다. 불길한 예감이 목덜미를 싸하게 만들었다.


“주군.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별거 아니다. 아니. 아니야.”

요한이 급히 말을 바꾸며 고개를 저었다.


“당장 공작저에 연락해 봐.”

“예? 저희 지금 출발한 지 반나절도 안 됐습니다만?”

레이몬드가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되묻자, 요한이 단호하게 말했다.


“반나절이면 오래됐지. 부인 목소리가 그리워져서 그러니 빨리 연락해.”

“예, 예, 알겠습니다. 이제 보니 두 분은 절대 헤어지시면 안 되겠네요…….”

“그걸 말이라고.”

요한이 눈을 매섭게 뜨자, 레이몬드가 재빠르게 통신용 마도구로 연락을 취했다.

삐이익-

마도구에 신호가 들어오지 않고 버벅거리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뻘쭘하게 마도구를 흔들었다.


“어하, 허허, 이놈이 가끔씩 오래 쓰면 작동 안 할 때가 있더라고요. 잠시만 기다려 보십시오.”

삐이익-


“좀 때려야 정신 차리려나. 얌마, 네가 지금 이렇게 작동 안 할 때가 아니야. 너 박살 나게 생겼어.”

레이몬드가 장난스럽게 마도구를 톡톡 두드렸다.


‘심각하다.’

요한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살벌해지고 있었다. 레아몬드는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기 전에 다른 통신용 마도구를 찾았다.


“이럴 줄 알고 제가 다른 마도구도 준비했지요. 이건 진짜 새로 준비한 거니까 바로 연결이…….”

삐이익-


“……되어야 하는데.”

“…….”

“이상하다. 공작저 사람들이 단체로 약 먹고 잠들지 않은 이상 이럴 리가 없는데.”

레이몬드가 어색하게 웃었다. 요한이 통신용 마도구를 레이몬드의 손에서 빼앗아 강하게 마력을 불어넣었다.

검은색 마력이 마도구 안에서 휘몰아쳤다.

찌직, 찌지직-

마도구가 강제로 작동하며 강한 소리가 났다. 뒤이어 페트리샤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님?

“나다. 통신용 마도구가 연결이 안 되더군. 무슨 일 있나?”

-죄송합니다. 최근 무리해서인지 깜빡 졸았던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다른 아이들에게…… 음?

페트리샤가 당황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합니다.

“무슨 일이지?”

-저택의 아이들 모두 잠들어 있습니다. 당장 마님을, 마님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요한이 이를 꽉 깨물며 마도구를 쥐었다.


-주인님! 마님이 사라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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