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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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화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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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화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야?
2023.05.05.
요한의 입가가 미미하게 굳었다. 요한이 짧게 심호흡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하지만 혼인 무효 서약서를 쥔 손에 힘은 전혀 빠지지 않고 있었다.
“정말, 우리 결혼을 이렇게 끝내자고.”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슬픔과 분노로 일렁였다. 그가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
“넌 진짜 우리 결혼을 없던 걸로 되돌릴 수 있어? 정말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해?”
“불가능할 것도 없다 생각해.”
“제대로 생각해.”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한 일이야. 요한이야말로 내 의지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거 아냐?”
쾅! 요한이 서약서를 책상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최대한 억누르는 듯했지만, 흥분한 기색을 감출 수는 없었다.
“……난 모르겠어.”
집요할 정도로 에스텔을 바라보던 요한이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사이에 아무 문제 없던 거 아니었어? 그동안 잘해왔잖아.”
“그랬지.”
에스텔이 긴 속눈썹을 내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게 없던 일로 되돌리지 못할 이유가 되는 건 아니잖아?”
“그게 무슨…….”
“이제 리베르탄 공작가에 대한 복수도 끝났고, 배후였던 펠시스 후작가를 비롯해 관련자들이 전부 몰락했어. 더 이상 내가 필요할 일도 없을 거고.”
에스텔은 그 모든 게 당연한 순리라도 되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요한한테는 너무 갑작스러운 얘기일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런 일은 질질 끌어서 나쁠 게 없다고 생각해. 시간을 끌수록 관계가 더 복잡해지기만 할 뿐이니까.”
“…….”
“요한도 나쁘게 생각할 거 없어. 블란쳇 공작가가 제국 최고의 가문이 되었으니, 나보다 더 좋은 부인이 있는 게 낫지 않겠어?”
요한은 갑자기 차가운 세상에 던져진 어린아이처럼 에스텔을 바라봤다.
분명 그가 알던 에스텔인데.
지금 눈앞의 에스텔은, 그가 전혀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았다.
“에스텔,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가 아닌 것 같다.”
“충분히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내린 결정이야.”
“지금, 몸과 마음이 아파서 그러는 것 같은데…….”
요한은 침착하게 에스텔의 마음을 이해해 보려 애썼다.
‘상상임신으로 자책하는 걸까?’
에스텔은 모든 문제를 자기 잘못으로 돌리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어쩌면 이번에도 비슷한 문제일지 모른다.
“여태 말했지만, 난 다른 부인 같은 거 들일 생각 없어. 내 인생에 아내는 오직 너 하나뿐이야. 너도 그렇게 약속했고.”
요한의 눈길이 서약서에 닿았다.
‘이딴 걸 가르쳐 준 새끼가 누군지, 찾아내 죽여버려야겠어.’
요한은 겨우 이 상황을 견디고 있었다.
조금만 방심했다간 힘든 에스텔의 앞에서 서약서를 찢으며 윽박지를지도 몰랐다.
‘그럴 순 없지.’
하지만 그 인내심도 굳건한 에스텔을 대할수록 조금씩 닳아가는 게 느껴졌다.
“이번 일 때문에 그래? 나한테 피해를 줄까 봐?”
요한이 에스텔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에스텔, 우리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 네가 무얼 하든 나는 네 편이야. 더군다나 이번 일은 네 잘못이 하나도 없는 일인걸.”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에스텔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요한은 제가 맞는 조각을 찾아냈다고 생각했다.
“물론이지. 본인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일이잖아. 네가 아이를 많이 바랐던 건 알아. 하지만 그걸로 자책하지 마.”
“…….”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 좋겠지. 분명 소중한 존재가 될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 없는 우리 사이가 무의미한 것도 아니잖아?”
“…….”
“그리고 왜 벌써부터 아이를 가지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 아직 시간은 많아. 왜 포기부터 하려고 하는 거야.”
요한이 애절하게 말하며 깍지를 낀 에스텔의 손에 애틋하게 입술을 맞추었다.
‘충분히 이해했겠지?’
아무래도 에스텔이 충격으로 충동적인 일을 벌인 모양이다. 놀라긴 했지만, 예상범주의 일이다.
“우린 앞으로 더 잘해나갈 수 있어.”
“아니. 그럴 수 없어.”
그 순간 에스텔이 요한에게 붙잡힌 손을 빼냈다. 방심하고 있던 요한이 그대로 손을 놓쳐버렸다.
요한의 눈이 커졌다.
‘왜 에스텔의 표정이…….’
에스텔은 냉소적으로 웃었다. 그러곤 그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져 차갑게 말했다.
“설사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난 그러고 싶지 않아.”
“……왜?”
요한이 에스텔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와 시선을 맞춘 그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뭐 잘못하기라도 했어? 그렇게 마음먹은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이유라…….”
“그러면 내가 뭘 잘못했는지 말해줘. 내가 최대한 고쳐볼게. 네가 다른 사람이 있던 것도 아니고, 갑자기 이럴 이유가 없잖아.”
에스텔이 요한을 보며 쓰게 웃었다.
남색 눈동자가 오늘따라 유난히 어둡게 빛나고 있었다.
“요한한테는 아무 문제도 없어.”
“그러면? 그러면 이렇게 우리가 갈라설 이유도 없지.”
“왜냐하면, 이건 내 문제거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요한이 버석하게 굳었다.
“무슨 문제?”
그가 차마 표정 관리할 생각도 못 하고 에스텔에게 물었다.
“네가 어떤 문제가 있던 내가 다 괜찮다고 했잖아. 내가 널 사랑한다고. 어떤 너도 다 괜찮다고. 그러면 되는 거 아냐?”
“내가 너랑 사는 게 힘들어.”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말을 쏟아내던 요한의 입술이 떨렸다. 에스텔은 그런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너랑 한 공간에서 숨을 쉬고, 이렇게 마주 보면서 산다는 것 자체를 견딜 수 없어.”
“왜……?”
“나도 모르겠네.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거든.”
요한은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었다.
“미안해. 요한.”
“도대체, 어째서…….”
“그래서 너와 갈라서려는 거야. 최대한 서로 덜 상처받을 수 있을 때, 끝내는 게 맞는 거 같아서.”
에스텔이 요한에게 혼인 무효 서약서를 다시 내밀었다.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허망하게 서약서를 바라봤다.
‘나와 있는 걸 견딜 수 없다고?’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된 거지?’
분명 요한은 에스텔과 자신이 같은 마음으로, 같은 방향을 보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스텔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건 모두 요한의 착각이었다고.
‘사실일 리 없어.’
요한이 억지로 서약서를 잡았다. 그리고 다시 에스텔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의 얼굴에서 차마 말하지 못한 어떤 단서라도 찾아내기 위해서.
‘어려워.’
에스텔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빛으로 반짝이는 듯했던 남색 눈동자는 죽은 것처럼 공허했다.
‘……아무것도 모르겠어.’
요한은 어느 정도 에스텔의 마음을 파악하고 있다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에스텔의 얼굴에서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정말, 그녀는 혼인 무효를 바라고 있었다.
“……안 돼.”
쫘아악-
요한이 혼인 무효 서약서를 갈기갈기 찢었다. 그것도 모자라 마력으로 재도 안 남게 없애버렸다.
“다른 건 다 들어줘도 혼인 무효는 안 돼.”
요한이 에스텔의 양 뺨을 잡았다. 광기가 스민 붉은 눈동자가 에스텔을 노려봤다.
“내가 곁에 있는 게 힘들다면, 잠시 시간을 가지자. 힘든 이유가 따로 있다면, 내가 편해질 수 있도록 만들어줄게.”
“소용없어.”
그의 손에 감싸인 에스텔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아무런 기력도 없어 보였다.
그래서일까.
생생한 온기가 느껴지는데도, 그녀가 금세 그의 손에서 빠져나갈 허상 같았다.
에스텔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요한도 알잖아. 서약서를 찢는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거.”
“에스텔!”
“잘 생각해 봐. 요한이 늘 그랬듯이, 아주 이성적이고 이득이 되는 선택을 해.”
요한은 가슴이 답답하게 죄였다.
“……난 너랑 이혼 같은 거 못해.”
자기도 모르게 에스텔의 뺨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우리는 영원히 부부일 거야. 무효로 돌릴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없어. 내가 그렇게 정했으니까.”
요한은 당장에라도 에스텔을 잡아먹을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지금 그렇게 생각하는 건 당장 몸이 아파서 그런 거야. 몸이 낫고, 좋은 시간을 보내다 보면 힘든 건 다 잊혀져.”
“요한은 그랬어?”
에스텔이 요한에게 무심하게 웃었다.
“시간이 지나니까 복수에 대한 상처가 다 사라졌어?”
“그 이야기는…….”
“시간이 지난다고 다 괜찮아진다는 건 착각이야. 요한도 그러지 못했잖아. 그래서 복수에 매달리고, 성공도 했잖아.”
에스텔은 제 뺨을 감싼 요한의 손에 제 손을 얹었다.
“당장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건 네 착각이야.”
“에스텔. 네 말을 듣기가 좀 힘든데.”
“지금 네 몸과 마음이 너무 편하고 좋아서 그래. 하지만 사람이 기분 좋을 때는 모든 게 다 괜찮다고 착각할 수 있어.”
에스텔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당장은 좀 힘들 수 있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다 보면 다 잊혀져. 좋은 시간을 보내면 더 빨리 잊혀지겠지.”
에스텔이 요한에게 똑같은 말을 돌려줬다. 잠시 침묵하던 요한이 전혀 상관없는 한 마디를 던졌다.
“……요정.”
그 순간, 에스텔이 잠시 숨을 멈췄다. 요한은 그 순간 그제야 맞는 조각을 찾았다는 걸 깨달았다.
“네가 요정이라서 그래?”
“내가 요정이야?”
“그동안 너에 대해서 잊어서 미안해. 저주에 걸려서 요정에 대한 기억을 다 잊었거든. 지금, 그 문제랑 관련된 거지?”
하지만 에스텔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날 밀어내는 이유가 뭐야. 어째서 요정인 네가, 아니다.”
입술을 짓씹던 요한이 에스텔을 와락 껴안았다. 여자의 체취가 그의 온몸을 파고든다. 이 작은 체구가, 그녀의 여린 숨소리가 그를 숨 쉬게 한다.
‘그런데 어떻게 널 놓쳐.’
요한은 에스텔을 껴안은 손에 힘을 주며 귓가에 속삭였다.
“지금은 좀 쉬고, 다시 얘기하자. 네가 이유를 말하기 싫다면, 내가 알아낼게.”
그렇게 요한은 에스텔의 뺨에 키스한 뒤 자리를 떠났다.
“부인을 방에 모셔다 놔. 많이 힘든 상태인 것 같으니, 계속 살피고.”
에스텔은 방에 갇히게 되었다.
***
베티가 우는 얼굴로 에스텔에게 달려왔다.
“마님,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거예요. 저 너무 놀랐잖아요.”
요한이 나가면서 베티에게 상황을 전달했던 모양이다. 베티가 발을 동동 굴렀다.
“괜찮아요, 마님. 다 괜찮아지실 거예요. 마님의 기분이 나아지실 수 있게 제가 최선을 다할게요. 그러고 보니 마님께서 좋아하는 식사를 따로 준비했는데, 따로 드시고 싶으신 게 있는지-”
“베티.”
에스텔이 베티의 손을 잡았다. 베티의 갈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마님?”
“저번에 내가 맡긴 위조 신분증 버렸니?”
“그, 그건 왜 물어보시는 거예요?”
베티가 침을 꿀꺽 삼켰다. 에스텔은 더 말을 붙이지 않고, 베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자 베티는 두 눈을 꼭 감았다.
“아, 안 돼요. 마님께서 지금 힘드셔서 나쁜 생각을 하고 계신 거예요. 무슨 고민인지 저한테 말씀해 주시면-”
“제발 도와줘.”
에스텔의 목소리에 슬픔이 어렸다.
“난, 요한을 마주치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어.”
“어쩌다가-”
“이대로 있다간 난 정말 잘못될지도 몰라. 요한은 날 여기에 가둬두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하는 거 같지만…….”
“마님. 주인님께서도 나쁜 의도는 아닐 거예요. 마님이 걱정돼서 그러시는 거라고요.”
“네 생각에 내가 괜찮아질 것 같니?”
베티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에스텔과 눈을 마주친 베티는 털썩 주저앉았다. 베티는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으앙, 전 몰라요.”
“부탁할게.”
“……마님께서 그때 부탁하신 건 다 보관해 두고 있었어요. 아무렇게나 처리했다가 문제가 생길까 봐요.”
“고마워.”
“대, 대신! 저와 함께 도망가시는 거예요! 꼭이에요! 제가 마님의 곁에 계속 머무르고 돕는 조건이어야 해요. 아시겠어요?”
에스텔이 매서운 베티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러던 에스텔이 힐끔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 속 여자가 시체처럼 메말라 있었다.
***
감금된 지 일주일 째.
에스텔은 여전히 혼인 무효에 대한 의지를 전혀 버리지 않았다.
요한이 겨우 끼니만 채우는 에스텔의 마른 몸을 걱정하며 물었다.
“답답하면 언제든 말해. 항상 원하던 정원으로 산책 가도 괜찮고.”
“감시자를 붙인 채로?”
“부인이 혼인 무효를 취소하겠다는 소리만 하면 돼.”
“미안, 그럴 생각 없는데.”
요한이 눈매를 좁혔다.
그가 아는 에스텔은 아무 이유 없이 이럴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이유를 찾아야 한다.
“나와 갈라선 뒤 해야 할 일이라도 있어?”
“요한이랑 결혼한 상태에서 하지 못할 일이란 게 있었나?”
“그래. 그런 게 없잖아. 그런데 도대체 왜…….”
요한은 걱정스럽게 에스텔의 손을 쥐었다. 오늘따라 손이 차갑다.
“이건 부인을 위해서도 하는 말이야. 내가 원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 부인한테도 혼인 무효는 큰 실수야.”
“왜?”
“그거야…….”
“요한이 없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진 않았어.”
요한의 붉은 눈동자에 조급함이 서렸다. 이유를 찾으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딱히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변덕이라고?’
요한이 은근한 목소리로 에스텔을 압박했다.
“하지만 나라는 보호가 없을 때 에스텔이 더 힘들어지긴 하지. 혼인 무효로는 위자료 같은 걸 전혀 챙기지 못하고, 딱히 머물 곳도 없고, 도와줄 사람도 없잖아.”
“…….”
“잘 생각해. 순간의 고집으로 어리석은 선택하지 마. 설령 부인이 날 안 좋아한다 해도, 부인한테는 나밖에 없잖아.”
감정적으로 설득할 수 없다면, 당장 현실적인 수단을 쓰는 수밖에 없다.
요한이 에스텔에게 느긋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속은 초조하게 문드러져갔다.
당장 에스텔의 마음을 바꿀 수단이 없었기에.
“나랑 싸우고 고집부려서 좋을 거 없어. 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혼인 무효는 불가능하고, 나는 널 놓아줄 마음이 없거든.”
“그래서, 원래대로 돌아가라?”
“내가 큰 걸 바란 건가?”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눈동자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