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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화 진심이야? (148/182)


148화 진심이야?
2023.05.02.


요한은 나를 침실까지 데려다주고 사라졌다. 요한이 끝까지 나를 걱정했지만, 나는 룬 이야기를 하며 그를 내보냈다.

정령 아기, 룬.

꿈에서 본 것을 생각해 보면 그 애가 어디로 갔는지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평소라면 어떻게든 룬과 대화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면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요한도 어쩔 수 없었어.’

나는 나에 대해 전혀 몰랐을 시절의 요한의 사정을 되새겼다.

모든 것을 잃고 도저히 방법이 없었을 어린아이, 복수에 눈이 멀어버린 남자, 뒤늦게 찾아온 대가까지.


‘내가 이해해 줘야지.’

그때 요한은 너무 힘들었고, 지금 요한은 나를 너무 사랑해 주니까.


‘내가 이해해야…….’

멀쩡히 침대에 늘어져 있던 내 몸이 어딘가 갈라지는 것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손과 팔이 아려왔다.

아이러니하게도 고통이 크게 와닿진 않았다.


‘아프긴 하네.’

하지만 호들갑 떨 정도로 힘들거나 하진 않았다. 고통이 치미니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아서 더 나은 것 같기도 했다.


-엄마.

그 순간 주위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봤다.


“내가…… 잘못 들었나?”

-……엄마. 엄마.

작고 웅얼거리는 목소리였지만, 확실히 아기 목소리였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소리의 진원지를 찾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그 뒤로 소리가 더 들리지 않았다.


“……하, 하하.”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실소하던 나는 주위의 나무들에게 연락해 봤지만, 딱히 확인되는 것은 없었다.


‘망상에 빠진 건가?’

상상임신도 모자라 아기 목소리까지 듣는다니.


‘누가 봐도 정신 나간 여자 같겠어.’

그런 내가 우스워서 침대까지 가지 못하고, 주저앉아서 계속 웃다가 바닥에 엎어졌다.


‘이런 나를 사랑하는 요한이 참 신기해.’

무엇 하나 사랑할 구석이 없는 나를 붙잡고 있는 요한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의 아이를 임신할 수도 없는데.’

요한은 우리 둘 사이에 아이가 없어도 상관없다고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귀족 가문에 후계자가 없는 건 매우 큰 문제다.

특히 블란쳇 공작가처럼 다른 방계가 없는 경우에는 더 심했다.

그걸 떠나, 요한은 정말 괜찮을까?


‘진짜 우리 사이에 애가 없어도…….’

그 순간 또 다른 내가 눈앞에 나타나 나를 비웃기 시작했다.


-네 걱정이나 해. 누가 누굴 걱정해?

-요한이 너를 걱정해 줄 것 같아?

“……요한은 항상 나를 걱정해.”

나는 힘겹게 반박했다.


-그런데 왜 너만 항상 요한을 이해해 주는 거지?

“그렇지 않아. 요한이 나를 오해한 건, 그저 몰랐기 때문이잖아.”

-그러니까 그걸 왜 네가 이해해야 하지?

내 빈정거림이 더 강해졌다.


-애초에 요한이 너를 복수 대상으로 삼았을 때를 떠올려 봐. 요한이 너를 복수 대상으로 삼은 이유가 뭐야?

상대가 나였기에, 내 마음을 망설임 없이 꿰뚫어 보는 듯했다.


-네가 모른다는 이유로 그가 널 이해해 줬던가?

“그때 요한과 지금 요한은 달라.”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해? 다 없었던 일로 치면, 정말 다 없었던 일이 된다고 생각해?

“……그건.”

마음속에 아기 신발이 떠올랐다.


-비참하지?

그 순간 물밀듯이 피로가 온몸에 쏟아졌다. 요한을 편들던 것이 무색하게 나는 무기력해졌다.


-어디 한번 거울로 확인해 봐.

-요한의 진실을 알아낸 것처럼 직접 네 진실도 확인해 봐. 진정으로 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

며칠이 지났다.

룬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불안정하던 에스텔은 멀쩡한 얼굴로 말했다.


“더 이상 룬을 찾지 않는 게 좋겠어.”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 룬이 사라진 건, 때가 돼서 사라진 것 같거든.”

에스텔이 주위를 다독였다.


“사실 룬은 인간이 아니라 정령이었잖아. 원래 때가 되면 보내줬어야 했고, 이별해야 하는 순간이 지금 찾아온 것뿐이야.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마 잘 있을 거야.”

요한은 그런 에스텔의 태도가 무척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괜찮겠어?”

“섭섭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에스텔은 태연하게 말했다.


“작별 인사는 하고 갔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룬도 룬의 사정이 있을 테니까.”

에리히가 정령에 대해 조사했다. 에스텔이 말한 것과 비슷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령은 때가 되면 성장을 마치고 자연 속으로 사라진다. 그때 보살펴준 인간에게 선물을 남기기도 한다.]



‘에스텔은 요정이라서 알고 있는 걸까?’

하지만 요한은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요정이라는 이야기를 꺼낸 순간, 요한 역시 어떻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에 대한 일을 밝혀야 했기 때문이다.


‘에스텔은…….’

에스텔은 매우 멀쩡했다.

평소의 그녀와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전보다 훨씬 더 기분 좋고 행복해 보였다.

그동안 미뤄두었던 일을 모두 해치우고, 정원사에게 꽃꽂이를 배워가며 정원을 예쁘게 가꾸었다.

요한은 에스텔의 주변 사람을 불러모았다.


“페트리샤, 네가 보기엔 에스텔의 상태는 어떠한가?”

“……좋으십니다.”

페트리샤가 어색하게 답했다.


“어떻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 보이십니다. 그래서 걱정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어디가 꼭 그렇게 아프시거나 힘든 모습을 보이시는 건 아닌데…….”

“맞아요. 마님께선 더 자신을 신경 써줄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전 마님을 볼 때마다 이상하게 불안해요. 주인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요한이 마른 얼굴을 쓸었다.


“나 역시 너희의 의견과 똑같다. 에스텔은…….”

그를 향해 배시시 웃어주는 얼굴은 전과 똑같았으나, 너무 자연스러웠기에 더 부자연스러웠다.


“에스텔은 아마 우리를 위해 괜찮은 척 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한 것인지…….”

“에스텔 나름대로 애쓰고 있는 거겠지.”

그 말은, 그들이 에스텔이 편하게 아픔을 드러낼 정도로 믿음을 주지 못했다는 의미기도 했다.


“혹시 모르니 룬에 대한 수색은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요정과 정령에 대한 건 가리지 않고 계속 조사해.”

창밖으로 에스텔이 정원에서 평화롭게 꽃을 다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잠깐 시선을 두었을 뿐인데, 그와 눈이 마주친 에스텔이 요한을 향해 손을 흔들어줬다.


“요한!”

에스텔은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요한에게 웃었다.


“지금 거기서 뭐 해?”

요한은 창가에 팔을 걸치며 씩 웃었다.


“잠시 얘기하고 있었지. 에스텔은 뭐 하고 있었어?”

“나야 늘 그렇듯이 정원을 보고 있었지.”

한겨울인데도 에스텔의 정원은 모든 계절을 잊은 듯 아름다웠다.

정원사도 이름 모를 각종 아름다운 꽃들이 블란쳇 공작저에 싱그러운 봄을 드리워서일까. 에스텔의 정원은 벌써 온 귀족들의 선망이 되었다.


“요한이 보기에 지금 이 정원은 어때? 마음에 들어?”

요한은 꽃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지만, 꽃 사이에 파묻힌 에스텔이 무척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가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며 답했다.


“응. 마음에 들어.”

“다행이다.”

“에스텔.”

요한이 아래를 슬쩍 내려다보며 에스텔에게 말했다.


“나 지금 내려갈 거니까 거기서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응! 빨리 와!”

에스텔이 환하게 웃었다.

요한은 에스텔을 보며 제 속을 추슬렀다.


‘……뭔가가 있다면 물어보면 돼.’

여태 그래왔듯 아무 일이 아닌 것처럼 넘기고 싶지만, 왜인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가만히 내버려 두기엔, 지금 그와 함께 하는 에스텔이 너무 지독할 정도로 사랑스러워서. 과할 정도로 마음에 걸렸다.


‘에스텔과 대화해 보면 다 해결할 수 있어.’

항상 그녀는 요한을 이해해 주었고, 모든 일이 그렇게 잘 해결되었으니까.

그들은 늘 그렇게 사랑해 왔다.

***

요한이 정원에 도착했다. 에스텔은 의자에 앉아 우아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아무래도 정원에 나올 때부터 미리 준비한 모양이다.


“왔어?”

에스텔이 요한에게도 차를 따라주었다.


“이번에 페트리샤 씨가 추천해 준 차야. 요즘 마시고 있는데 속이 편해져서 좋더라.”

“그러게, 향이 나쁘지 않네.”

에스텔을 살펴본 요한이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에스텔도 나한테 할 말이 있었던 건가?’

어쩌면 서로 대화할 시간을 노리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요한이 에스텔의 팔에 걸린 팔찌 얘기부터 꺼냈다.


“저번에 내가 준 팔찌 잘하고 다니네.”

“요한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항상 하고 다니라고 했잖아.”

마물의 습격으로 에스텔에게 주었던 마법 팔찌가 망가졌다. 그래서 요한은 에스텔에게 비상 마법이 걸린 팔찌를 선물해 줬다.

어떤 상황에서든 신호를 보낼 수 있는 것은 물론, 급히 상대를 안전한 장소로 보낼 수 있는 마법까지 걸려 있었다.

마력이 통하지 않는 에스텔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을 거느라 제법 무리했던 기억이 났다.

요한이 만족스럽게 입매를 들어 올렸다.


“그래, 잘하고 다녀. 사실 그 팔찌로도 불안한데, 다른 것까지 더 하고 다니라고 하면 불편할까 봐 거기서 멈춘 거니까.”

“요한은 날 너무 과보호해. 내가 애인가.”

“차라리 애면 더 편하겠지. 최소한 내 말을 더 잘 들을 테니까.”

“예, 잘 알았습니다. 언제든 빼놓지 않고 열심히 하고 다니겠습니다.”

에스텔이 장난스럽게 팔찌를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요한도 반지 잘하고 있네.”

“아, 이 반지?”

요한이 사파이어가 박힌 반지를 보여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안 빼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래서 부인도 맨날 반지하고 다니잖아.”

“아, 그랬지 참.”

에스텔은 무언가 그리운 듯한 표정으로 제 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보다가 피식 웃었다.


“우리도 참 많은 걸 약속했었네, 그치?”

“부부끼리 이 정도는 다 약속하고 살아.”

“아니야. 우리가 과할 정도로 서로에게 많은 걸 바라고 살았던 것 같아. 다른 부부들 봐봐. 우리처럼 사는 사람이 있나.”

요한은 에스텔의 반응을 살폈다. 에스텔은 요한의 말에 싱긋 웃었다.


“요한 말이 맞네, 다른 사람처럼 살 필요 있나. 각자 자기 삶이 있는 거지.”

에스텔의 반응에 특별한 건 없었다.


“그나저나 요한, 나한테 할 말 있어?”

“응?”

“그래서 기다리라고 한 건 아닐까 싶어서. 내가 잘못 짚었나?”

“아니, 맞아. 에스텔에게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불렀던 거야.”

요한의 붉은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부인,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있어?”

“요한한테?”

요한이 에스텔의 한 손을 가져가 두 손으로 잡았다.


“그래. 최근 힘든 일이 있었잖아. 그래서 요즘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닌가 싶었어.”

“무리라…….”

에스텔이 눈동자를 살짝 굴렸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역시.”

“그런데 반대로 요한은 괜찮아?”

에스텔의 대답을 들어줄 생각이던 요한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힘든 일을 겪은 게 나 혼자인 건 아니잖아. 요한은 나한테 따로 하고 싶은 말 없어?”

그러자 요한이 나른하게 웃었다.


“내가 힘든 거야 부인이 힘들었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그래도 요한도 겪은 게 많잖아. 뭐, 이번에 있었던 일 말고도 리베르탄에 대한 복수도 끝마쳤고.”

복수라는 말이 묘하게 느껴졌다.


“별거 없었어.”

요한이 에스텔의 손과 깍지를 끼며 웃었다.


“복수에 큰 의미를 두었던 것 같긴 한데, 지금은 해야 할 일을 끝낸 기분일 뿐이야. 이제 나한테 중요한 건 따로 있으니까.”

“…….”

“과거를 잘 마무리 지었으니, 이제 앞으로 부인하고의 미래를 잘 생각해야지.”

“이제 슬슬 미래를 생각해 볼 때니까.”

그 순간 에스텔이 요한에게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 하지만 그녀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여전했다.


“요한. 안 그래도 나도 계속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어. 이걸 언제 얘기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차라리 지금 얘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에스텔은 막 준비해 둔 것처럼 조용히 문서 하나를 꺼냈다.

[혼인 무효 서약서.]

에스텔은 이미 자신의 서명을 끝내놓은 상태였다.


“우리 이혼하자.”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혼인 무효 서약서에 꽂혔다.


“……..”

“사실 굳이 따지면 이혼은 아니야. 우리 사이에 있던 결혼이 공증이 있긴 한데,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더라고. 그래서 우리의 결혼을 아예 없던 일로 돌릴 수도 있었고.”

요한은 천천히 혼인 무효 서약서를 가져갔다. 요한이 서약서만 바라보며 물었다.


“진심이야?”

“장난이겠어.”

주위에 살벌한 공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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