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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화 잃어버린 운명 (147/182)


147화 잃어버린 운명
2023.04.28.



 
요한은 급히 방을 나섰다. 예상보다 에스텔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나 때문이다.’

쾅! 요한이 인상을 찌푸리며 벽을 쳤다.


“저택은 다 수색했나?”

“예. 다 뒤졌지만, 룬 도련님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사라질 수 있는 것인지…….”

“알았다. 계속 찾아보도록. 납치까지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고 빠짐없이 뒤져.”

요한의 차가운 목소리에 사용인들은 바짝 군기가 들어 명령을 이행했다.


‘사라진 상황이 너무 공교로워.’

요한은 눈매를 좁히며 룬이 머물렀던 방을 찾았다. 역시나 납치라고 의심하기에는 너무 흔적이 없었다.


‘마법을 써야 하나?’

최근 그는 악마와의 거래를 끊으며 마법을 줄여가고 있었다. 그래서 전처럼 쉽게 마법을 사용하기가 어려웠다.

욱신-

마력을 일으키자마자 어깨가 아려왔다. 요한은 눈가를 찡그리며 방 안에 혹시 남을 흔적을 찾으려 했다.

그 순간.


-얼굴이 제법 괜찮은데. 아주 망가져 있을 줄 알았더니.

요한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며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 부인 상태는 어때? 네 덕분에 멀쩡한 아기를 잃었는데.

“……너.”

요한이 차가운 얼굴로 악마를 노려봤다. 붉은 눈동자가 악마를 찢어발길 것처럼 살벌했다.


“다 네가 한 짓이지?”

-정확히는 네가 한 짓이지. 네가 대가로 넘겨주기로 한 거잖아.

“웃기지 마. 이런 거라고 제대로 말해주지도 않고서.”

-그런다고 해서 바뀔 마음이었나?

악마가 킬킬 웃었다.


-어차피 복수 외에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었잖아. 그때 네게 그 여자는 복수 대상에 불과했고. 제물이 되든, 대가로 희생되든 신경 쓰지도 않았을 거 아니었어?

“……그 여자는 아무 상관 없어!”

요한이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


“왜 내 대가 때문에 에스텔이 고생해야 하지?”

-그럼 내가 네 사정을 다 봐가면서 대가를 챙겨야 했나?

악마는 요한의 표정이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빙글빙글 돌렸다.


-본래 악마와의 거래가 그런 거다. 지독히 불합리하고, 이기적이지. 그걸 다 알고 한 거 아니었나?

“너 이 X끼.”

요한이 악마의 목을 잡고 벽에 퍽 밀쳤다. 악마의 입을 막았지만, 악마의 목소리는 끊어지지 않았다.


-네 부인은 절대, 앞으로도 임신하지 못할 거야. 만에 하나 기적적으로 아기가 생기더라도 모두 유산하고 말 거야. 그게 바로 네가 바친 미래니까. 네가 미래의 사랑을 만나 아이를 낳고, 행복한 가족을 꾸리는 것 말이야.

악마를 우그러뜨릴 듯 누르던 요한이 분노로 심호흡하며 말했다.


“……그런다고 내가 불행해질 것 같나? 우리 사이는 이딴 것으로 망가지지 않아.”

-호오. 상관없으시다? 진심이야?

“아이는 아이일 뿐이다. 난 에스텔만 있으면 돼. 아기가 없다고 해서 내가 불행해질 일 따위 없어.”

-하지만 그게 네 소원이었잖아?

악마가 조롱 가득한 목소리로 비웃었다.


-리베르탄의 복수가 이뤄진 뒤, 사랑하는 여자와 그녀가 낳은 아이를 기르며 네 부모 같은 가족을 꾸리고 싶어 했으면서. 그 소원이 이뤄지지 않아도 괜찮겠어?

“소원은 소원일 뿐이지. 아이가 당장 에스텔보다 중요한 것도 아니고.”

-뭐, 정 그렇다면야 상관없지. 하지만 네 용기를 높이 사 재밌는 것을 가르쳐 줄게.

악마는 요한의 속내를 다 꿰뚫어 본 것처럼 말했다.


-그녀가 아이를 갖지 못하는 건 네 아이일 때만이야.

“보자 보자 하니까 이딴 개소리를.”

-너는 다른 여자와 아이를 가질 수 있고, 그 여자도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할 수 있지. 정 아이가 보고 싶다면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는…….

요한이 참지 못하고 악마를 없애버렸다.

쨍그랑-

악마가 가득 채웠던 공간이 완전히 사라졌다. 세게 주먹 쥔 요한의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어디 한번 발악해봐.

하지만 악마의 웃음소리는 잔상처럼 계속 들려왔다. 요한이 이를 꽉 깨물며 중얼거렸다.


“웃기지 마. 내가 그딴 거에 휘둘릴 것 같아?”

에스텔은 누구보다 아이를 바랐다. 그러니 상처받을지도 모른다.


“모르게 하면 돼.”

에스텔은 아무것도 모른다.

원래 그녀가 ‘복수 대상’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사실 그녀는 놀잇감처럼 놀아나다가 죽을 뻔했다는 것을.


“그러면 지금처럼 살 수 있어.”

실제로 그녀가 자고 있는 사이 그가 죽이려 했다는 것도, 요정의 은혜도 모른 채 외면했다는 사실도 다 모르니까 평화로울 수 있다.

그러니 이번도 마찬가지다.

***

공기가 온통 무거웠다.

나는 숨을 멈추고 방 안으로 들어가 아기 물건을 하나하나 살폈다. 아기 딸랑이부터 알록달록 모빌이 눈에 박혔다.

하나같이 다양하게 준비하려는 마음이 느껴졌다.


‘요한은 이 선물을 준비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선물들, 아니, 이 방 전체에 행복한 기대가 가득했다.

장난감을 넘어 색색의 아기 옷을 꺼냈다. 내 손바닥만 한 옷 사이즈가 내 가슴을 찔렀다.

나는 보드라운 옷감을 꽉 쥐었다.


“요한은 참 좋은 아빠가 됐겠다.”

태어나기도 전인데, 벌써 아기에게 이렇게나 많은 마음을 주었으니까.


“나도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었을까?”

가끔 태교를 위해 동화책을 읽어주면서, 그런 고민에 빠지고는 했다.

가족에게 사랑받고 자란 요한과 달리 나는 제대로 된 사랑을 받은 적 없으니까.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주진 않을까 걱정됐다.

물론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내 곁에 요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한이 어떻게든 좋은 가족을 꾸릴 수 있게 도와줬을 테니까.


“아가, 너를 정말 만나고 싶었어.”

돌연 마음이 공허해졌다.


“너도 들었겠지만, 아빠가 너랑 같이하고 싶다고 했던 게 진짜 많았거든.”

요한은 바쁜 와중에도 종종 배에 귀를 대며 심장 소리를 듣겠다고 했다.


‘심장 소리가 들려?’


‘응. 들려. 아주 기운 차. 척 보기에도 아주 튼튼하고 예쁜 아기일 것 같아.’


‘심장 소리로 예쁜 건 어떻게 알아?’


‘나랑 부인의 아기인데 당연히 예쁘겠지. 그건 당연한 거 아냐?’

 
레이몬드는 그런 요한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도 저리 팔불출이신데, 나중엔 어떻게 되실지…….’

 
내가 보기에도 요한은 내가 임신한 이후부터 행복에 잠겨 있었다.


‘우리 부모님이 살아계셨으면 아기 소식에 누구보다 좋아하셨을 텐데.’


‘그래?’


‘응. 특히 우리 아버지가 아기를 좋아하셨거든. 무서운 분이라 생각했을 때도 아기에게는 참 약하다고 생각했거든.’

 
옛날 생각이 많이 나는지 가족 얘기도 편하게 해주었다.


‘요한의 가족들이 나도 좋아했을까?’


‘당연하지. 너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잖아.’

 
그 얘기를 듣다 보면 요한의 가족이 얼마나 좋은 사람들이었는지 실감 났다. 부족함 없이 완벽했던 블란쳇 공작 일가.


‘아기가 좀 자라면 별장에 가서 좋은 추억도 많이 남기자. 지나고 나니 그렇게 가족끼리 보낸 시간이 참 중요했던 것 같아.’


‘그리고 또 하고 싶은 거 있어?’


‘많지. 사실 내가 요즘 우리 아버지가 예전에 나한테 시켰던 교육 과정을 되짚어보고 있거든. 좀 과했던 것 같긴 한데, 불필요한 건 하나도 없더라.’


‘벌써 어떻게 교육할지 준비하고 있어?’


‘당연하지.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데. 그땐 우리 아버지가 너무 엄격하다 생각했는데 그때 해둬서 다행이었더라고.’

 
요한이 행복감 어린 목소리로 웃었다.


‘이렇게 아버지 마음을 이해하게 될 날이 올 줄 몰랐어. 가족이 생긴다는 건 정말 예상하지 못한 일의 연속이야.’


‘요한이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니 신기하다.’


‘머리로는 어떻게 될 줄 알긴 했는데, 마음은 좀 다르달까. 이 녀석이 너를 얼마나 고생시킬지 생각하면서도 자꾸 마음이 가서 그런가. 같이 하고 싶은 게 계속 생각나더라고.’


‘레이몬드 경 말대로 벌써부터 너무 유난인 거 아니야? 나중에 애가 다 싫다고 하면 어쩌려고 그래.’


‘이런 아빠를 뒀으니 그 정도 시련은 견뎌야지. 난 우리 애 강하게 키울 거거든?’

 
키득거리며 웃었던 그 시간이 지금의 나를 비웃었다.


‘어차피 존재하지도 않은 아이인데…….’

왜 이렇게 아기를 잃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요한이 준비한 아기 용품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아기 용품이 예쁘고 반짝거릴수록 허망하고 아픈데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에스텔에게.]

요한이 준비한 쪽지가 툭 떨어졌다.

[항상 예쁘고, 늘 고마운 내 부인 에스텔. 내게 기적 같은 순간을 선물해줘서 고마워. 좋은 아빠이자 남편이 되도록 노력할게.

아기가 이 신발을 신고 우리 가족 모두 손 잡고 행복할 수 있는 그 날까지.

사랑해.]

쪽지 아래에는 아기 신발이 있었다.

아기 신발을 보자마자 가슴이 미어졌다. 다른 걸 봤을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다.

나는 아기 신발이 든 상자를 잡은 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순간, 다급한 숨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부인.”

요한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요한을 보자마자 겨우 누르고 있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요한, 나…….”

“쉬고 있으라니까.”

요한은 자상하게 다가와 주저앉은 나를 꽉 끌어안았다. 그의 손이 내 등을 두드렸다. 위로를 받고 있으니 눈물이 쉴 새 없이 더 흘러내렸다.


“미안해, 요한. 나도 진짜 아기가 있는 줄 알았어. 진짜 거짓이라고는…….”

“…….”

“나도 진짜 잘하고 싶었는데. 잘해줄 수 있다고 다짐했는데. 정말 기대 많이 했는데. 왜 내가 하는 일은 이렇게 되는지.”

나는 요한의 품에 얼굴을 묻고 오열했다.


“요한이 이렇게 많이 기대했는데. 요한한테 거짓말한 것 같아서 너무 미안해. 그치만 나도…….”

“아니야, 에스텔.”

잠시 내 말을 들어주며 토닥이던 요한이 내 얼굴을 잡고 눈을 맞춰왔다.

붉은 눈동자는 걱정과 미안함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왜…….’

그 순간 내 등골에 소름이 쫙 끼쳤다.


“너무 자책하지 마.”

요한이 눈물로 얼룩진 내 눈가를 엄지로 닦아주며 달콤하게 말했다.


“헨리 씨가 말한 거 못 들었어, 이번은 누구 잘못도 아니야.”

“그럴까? 하지만 또 아기가…….”

“우리는 젊고, 아기는 또 가지면 돼. 이번은 잠깐 문제가 있었을 뿐이야.”

쿵, 쿵-

심장 소리가 강하게 들렸다.

이상하게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다. 요한의 붉은 눈동자에서 전과 다른 묘한 기류가 느껴졌다.


‘나는…….’

이전에도 한 번, 나는 요한에게 요정의 힘을 사용한 적 있다. 그리고 굳이 알 필요 없는 진실을 알고 말았다.


‘어차피 지난 일일 뿐이야.’

하지만 기이한 충동이 내 몸을 지배했다.


“……요한.”

내 안에서 요정의 힘이 요동친다. 무의식적으로 빠져나간 요정의 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앞이 하얗게 점멸하며, 이상한 장면을 보여주었다.

그곳은 어두컴컴한 감옥이었다.

요한은 예스텔라의 앞에 서 있었다. 예스텔라가 요한한테 말했다.


‘네 아이를 가질 수도 없는 그 가짜랑 어디 한번 노력해 봐! 네게 돌아올 건 배신밖에 없을 테니까!’


‘그 여자는 당신 아이를 임신하지 못해요. 그러고 보니 임신한 척 당신을 속였지요?’

 
요한이 그런 예스텔라를 죽였다.

장면이 빠르게 바뀌어 갔다. 요한이 악마와 대화하는 장면이 보였다.


‘내가 요구하는 대가는 네 미래다.’

 
악마가 요한을 보며 웃었다.


‘어차피 네가 바라지 않을 미래일 뿐이다. 그것으로 복수를 완성할 수 있다면, 아주 성공적인 거래 아닌가?’


‘……어차피 내겐 복수 외에 원하는 미래 같은 건 없으니.’

 
마지막으로 악마가 요한을 찾아왔다.


‘네 부인은 절대, 앞으로도 임신하지 못할 거야. 만에 하나 기적적으로 아기가 생기더라도 모두 유산하고 말 거야. 그게 바로 네가 바친 미래니까.’

 
악마의 목소리가 지독하게 잔인하게 울렸다.


‘듣고 싶지 않아.’

하지만 이미 시작한 말들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그 말을 다 들은 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냉정해졌다.

나는 요한을 끌어안던 팔에 힘을 주었다.

***

요한은 이상하게 품에 안고 있는 에스텔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악마에게 이상한 얘기를 들어서인가.’

오열하던 에스텔이 눈물을 멈췄다.

요한이 에스텔을 위로해 주다가 다시 한번 그녀의 얼굴을 들어 표정을 살폈다.

백조처럼 희고 우아한 속눈썹이 눈물에 젖어 촉촉했다. 영롱한 남색 눈동자가 기이한 어둠에 젖어 있었다.

요한이 에스텔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너무 상심하지 마. 아기는 다시 가질 수 있어. 진짜 아기가 사라진 것도 아니잖아.”

그러자 에스텔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다시, 가질 수 있을까?”

그 목소리에는 한없는 우울함이 담겨 있었다. 요한은 왜인지 심장이 철렁 주저앉는 것만 같았다.


“요한은 그렇게 생각해?”

그 눈을 마주 보고 있으니, 그녀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럼, 당연하지.”

요한이 평소처럼 자상하게 웃었다.


“지금 넌 막 힘든 일을 겪어서 부정적인 생각만 하고 있는 것뿐이야.”

“…….”

“아기는 얼마든지 생길 수 있어.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날이 얼마나 많은데.”

에스텔의 시선이 묘하게 빗겨 가 바닥에 놓여져 있는 아기 신발을 향했다.


“그래, 요한 말이 맞아.”

에스텔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

아기 신발.

아기가 아장아장 걷고 다녔을 신발.


‘이상해.’

이제 앞으로 평생 누군가가 신을 일 없는 그 신발.


‘나는 왜 살고 싶었을까?’

그 어떤 고난도, 비난도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진 않았다. 그런데 에스텔은 갑자기 실 끊긴 인형처럼 머리가 온통 멍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뭐지?’

사실 그렇게까지 살아야 할 이유 같은 건 없었다.

에스텔은 요한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아기는 다시 가질 수 있겠지.”

우습게도, 행복은 그녀를 가장 끔찍한 지옥에 몰아넣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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